최근 낙랑유물과 관련하여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학술적인 자료나 근거들은 드물고
약속이나 한듯 거의 대부분이 낙랑유물을 일제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낸 거짓, 내지는 가짜라는 얘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소스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김없이 북한 리순진이 쓴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하여"에서 요약 발췌한 것들인데
주로 환빠, 대륙빠 누리꾼들이 퍼나르는 것 같다.
심각한 것은 아무 생각없이 집과 학교를 오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역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무리한 민족 미화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이른바, 주체사관의 일종인 우리 민족제일주의라는 북한 놈들의 놀음에
놀아나기 딱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낙랑유물에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고 나온 것은
1990년 초반 단군릉 발견(?)사건 이후라고 보여진다.
리순진을 비롯하여 고대사학, 고고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소위 고조선력사개관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고조선은 노예국가이며 단군은 실존하지도 않는 허구의 신화라 폄하했던 사람들이
93년 김일성 교시 한마디에 기존 시각을 180도 바꿔서 단군 예찬론자로 변모한다.
윗대가리들이 정해준 포맷에 맞춰 이론을 다시 뽀샵질하는 사람들은
더이상 학자라 부를 수도 없으리만치 사꾸라 냄새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윤내현같은 별종이 스타대우 받는 이 대한민국은 행복한 국가이다.
과거 북한에서 고조선 요동중심설이 지배적인 학설일때
학자적 지론에 의해 평양중심설을 주장하다 실각당한 사람 여럿 있었다.
단지 학설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자를 아오지로 보낼 수 있는 북한에서
낙랑 유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란 애시당초 어렵다고 봐야한다.
북한은 최근 단군릉 발굴을 비롯 고조선 역사 재편을 시도하면서
그동안 산발적으로 논의되었던 낙랑유물을 본격적으로 "조작"과 "날조"로 규정하는데
한민족 대동강기원설 내지는 평양중심설을 주장하는데 써먹고 있다.
(더 나아가 리순진 같은 이는 황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나일강과
더불어 대동강은 세계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ㅋㅋㅋㅋ..)
이런 주체사관은 90년대 북한에 불어닥친 경제적 위기, 외교적 고립책을 타개하고
체제의 우월성 및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인터넷 환빠, 대륙빠들이 줄차게 퍼나르고 있는 리순진의 글들이
이와같이 얼마나 이념적 색칠로 뒤범벅 된 글들인지 생각이나 해 보았겠는가.
해방이후 낙랑일대의 고분발굴은 60~70년대에 북한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1993년 단군릉 발견 사건이 발발한 직후
갑자기 낙랑 주변에서 무려 2600기가 "정리"되고(註:발굴이 아니다.)
15,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서는 발간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습되었다고 하는 15,000점의 유물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였겠는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쓸만한 유물들은 이미 일제시대때 다 파가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60~70년대 일본 학자들이 와서 다 파갔다.
그때 일본 애들이 같이 본 게 있고 또 그것이 高久健二 같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어느정도 규명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칠 수가 없다.
리순진의 낙랑유물 보고서는 어떤 학문적 성과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낙랑 유물 부정하기에서 출발한 구닥다리 레고블럭이거나
정인보, 신채호 류의 재탕, 삼탕일 뿐이다.
그의 픽션이 주장하는 바는 핵심이 대단히 명료하다.
그래서 환빠, 대륙빠 친구들이 무뇌적인 열광을 하는지도 모른다.
① 한사군의 낙랑은 요동에 있지 한반도에 없다.
② 평양 등지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고조선 유민이 세운 소위 낙랑국의 것이다.
이런 미친 개뼉다구 같은 소리는 처음부터 논리가 성립이 안되는 바,
그들의 고조선 평양중심설에 의하면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라면서
멸망한 유민이 버젓이 멸망한 국가의 수도에 또다른 국가를 세웠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말이되냐?
멸망한 국가의 유민이라는게 베트남 보트 피플처럼
거의 죽을동 말동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후 이웃국가나 중립지역을 오가며
동가식 서가숙하는게 통상 역사적 사례라고 했을때
북한 놈들의 주장은 최소한의 논리성마저 포기한 뽀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들 스스로도 이게 좀 말이 안되지 싶으니까
한나라는 고조선 위만왕조를 무너뜨리기는 하였으나
한반도까지는 진출하지 못하고 겨우 요동지방만 차지했다고 하며
漢四郡의 낙랑도 그래서 요동에 있는 것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수도인 평양이 멀쩡히 남아 있는데 부수도의 멸망만 가지고
고조선 국가의 멸망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여지껏 못하고 있다.
이에, 북한의 리순진이 펼치고 있는 낙랑유물 부정하기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모순점을 사료와 문헌고찰 등을 통해
비판해 보기로 하고, 나아가 환빠 및 대륙빠 뇌티즌들의
무뇌적인 지랄을 신속히 잠재우고자 한다.
낙랑 유물 중 종류도 많고 편년대도 다양하지만 한사군 설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몇몇 유물에 대해서는 당연히 가짜 시비가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지금 말하고자 하는 봉니인데..
봉니의 경우 한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의 속현명이 그대로 찍혀나오므로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는 까닭에
환빠들의 집중 공격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연도 구구절절하시다.
봉니에 관한 시비 중 대부분은 리순진의 주장이다.
윤내현 設도 보이기는 하나 리순진의 주장을 다시 확대 재생산 한 것에 불과하다.
시비 1. 봉니의 수가 그렇게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실이 없다.
- 이런 시비는 출토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간단히 무력화 시킬 수 있기에
바이러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짱깨들의 뉴스 사이트를 검색한 결과
리순진이 구라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 1994년 중국 시안 섬서성 북쪽 相家巷村에서 秦나라 시대의 봉니(封泥)가 600여개 이상이
발견된 것을 비롯하여 역시 인근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한양릉(註: 漢陽陵, 전한 景帝의 무덤)
에서는 2001년도에 600여개, 2003년도에 300여개가 발굴되는 등 도합 900여개의 전한시대의
봉니가 대거 수집되었음. (신화통신사 2004년 1월 24일자 기사 참조)
- 필자의 중국어 실력이 짧아서 그렇지 제대로 조사하면 어디 이것만 나올까..
아마 1920년에서 40년대까지 일본놈들이 중국 시안지역에서 도굴해 간 봉니가
2000개가 넘는다고 하던데, 중국 고고사학에 정통한 리순진이 이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는데도 순진한 남한 학자들과 청년들을 데리구 의도적으로 사기친 게 아닌가 싶다.
시비 2. 관인의 관직명에 대한 시비
① 낙랑대윤장이 나올 수 없다는 시비
- 왕망은 태수를 대윤으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낙랑도 낙선이라 고쳤으므로
낙선대윤장이 되어야지 낙랑대윤장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혹 개념이 잡힌 일부 환빠에 한해서 친절히 한서 지리지의 원문을 인용하기도 한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
- 그런데 역시 같은 책 왕망전을 보면 왕망이 관직명과 지명을 동시에 바꾼 게 아니고
시건국 원년(9)에 관직명을 바꾼 후 그 후로부터 5년이나 뒤인 천봉 원년(14)에
전국의 지명을 바꿨다는 기사가 있다. 즉, 이 5년 동안은 낙랑이라는 이름이
낙선(樂鮮)으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였으므로 낙랑대윤장이라는 관인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 즉, 한서 왕망전에 왕망이 정권을 잡은 직후 오위장 왕기 등을 파견하여
왕후 이하 관직명을 고친 사람들과 흉노, 서역, 오랑캐의 나라들까지 돌아다니며
新왕조의 인새와 인수를 새로 내려주고, 구) 한나라의 새(璽)와 인수를 회수하였다.
여기에는 현토, 낙랑, 고구려, 부여가 포함되어 있는바,
새 관직명인 대윤을 부여하여 인수를 내려줄 당시 낙랑은 낙선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始建國元年) 秋,遣五威將王奇等十二人班《符命》四十二篇於天下。..(중략)..五威將奉《符命》,
繼印綬,王侯以下及吏官名更者,外及匈奴、西域,徼外蠻夷,皆即授新室印綬,因收故漢印綬。
賜吏爵人二級,民爵人一級,女子百戶羊、酒、蠻夷幣、帛各有差。...(중략)...莽策命曰:
「普天之下,迄於四表,靡所不至。」其東出者,至玄菟、樂浪、高句驪、夫餘..(하략)
② 낙랑군 속현의 봉니만 보이고 인근지역의 다른 군이나 상부인 유주자사에게 받은 봉니도
있어야 하는데 한 점도 안보인다.
- 리순진이 몰라서 하는 소리임. 유주자사 봉니도 있고 현토태수 봉니도 2개나 있다.
③ 한나라 무제때 도장의 크기가 1.5cm로 규정했는데 봉니에 찍힌 도장 크기는 2~2.2cm이므로
봉니를 진품으로 보기 힘들다.
- 한서의 徐璆傳에 의하면 인장의 크기는 1寸四方으로 한변의 길이가 최대 3cm까지
잡을 수 있다고 되어 있음. 도장의 크기가 다르다고 무조건 위조품으로 보는 건 무리.
봉니의 연대를 측정해보면 일제시대때 만든 것인지 2000년전에 만든 것인지
판단이 금방 설텐데 30cm 줄자들고 뭐하는 닭짓이삼?
④ 해방 전에 일제 골동상들과 봉니 위조자들이 많은 봉니를 위조해서 팔았다고 한다.
- 현재 200여개의 봉니 중 일본 정부가 개인에게서 매입한 것은 별도로 국립박물관이
조사를 하여 진품임을 확인하였음. 천제황신인봉니(天帝黃神印封泥)같은 경우
가짜로 판명나 위조한 사람들을 처벌했다는 기사도 있음.
- 지금도 세종로 중앙박물관에 가면 수십개의 봉니가 전시되어 있으니 어디 조사해 보든가.
효문묘(孝文廟)란 효문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뜻한다.
여기서 묘(廟)는 사당이지 무덤을 뜻하는 묘(墓)가 아님을 주의하자.
별 거 아닌 것 같아보여도 매우 중요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동종(銅鍾)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소리 내는 종(鐘)이 아니라
술을 따르는 일종의 제기(祭器)로서 "술병 종"(鍾)이다.
따라서 효문묘 동종이라 함은 효문제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쓸 때
사용했던 제기(祭器)쯤으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그러면 이 동종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어떠한 고고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볼 차례다.
이 동종이 평양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부근 어딘가에 중국 황실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다는 얘기고
그 사당의 이름은 동종의 외곽에 표시된 대로 효문묘라는 얘기가 된다.
황제가 직접 친제(親祭)하지 않고 각 군국의 제후왕이나 태수가 종묘권을 행사해
황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을 우리는 역사서에 보듯 군국묘라 했을 때
군국묘에서 군국(郡國)의 의미는 전한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통치제도를 상징한다.
(간혹 군국(君國)이라 쓰는 상식이하의 똘추들이 나타나는데 상종을 말도록 하자.)
즉, 한반도에 효문묘가 있었다면 이 효문묘는 군국묘의 성질을 가지는 까닭에
중국의 한반도 지배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환빠 쉑히들의 주장은
주로 북한 리순진의 노가리를 듣고와 멋도 모르고 리바이블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이론적 소스는 상당히 빈약하다.
효문묘 동종에는 영광3년(B.C.41년)이라는 제작기년명이 분명하게 표시되어있으므로
봉니와는 달리 가짜 시비를 걸고 넘어갈 수 없기에,
이 쉑히들은 이렇다할 근거도 없이 이 효문묘 동종을 수집품 내지는
유입경로를 알 수 없는 골동품쯤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시비 1. 북한의 리순진은 효문제가 행차한 일이 있는 군국(郡國)에만 효문묘를 세웠다는
"漢書" 위현전의 기사를 들어 효문묘와 평양 관련성을 부정한다.
시기적으로 한사군 설치(B.C. 108)보다 훨씬 이전의 황제인 문제(文帝)가
평양 부근에 행차한 일이란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 이는 리순진이 중국 고대의 종묘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라고 보여진다.
효문묘라고 하니까 그 사당에 효문제 위패만 있었을 것이라 단정해 버린 성급함은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케하는 대목이다.
앞에서 필자가 묘는 사당 묘(廟)이지 무덤 묘(墓)가 아니라고 강조한 이유도 바로 여기서 연유된다.
전한시대의 황실 종묘제도는 7묘제라 해서 동일한 사당안에 7개의 묘가 따로 존재했으며
각각의 묘는 대문, 마당(廷), 당(堂), 침(寢)으로 구성된 독립된 공간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에 대해 노가리를 다 읊을 수는 없거니와 그때 당시의 사당은
여러 개의 묘가 각각 담장 하나를 경계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만을 알아두자.
(첨언하면 이것을 동당동실제라고 한다.)
따라서 효문묘는 같은 사당 안에서 다른 후대의 황제묘와 함께 모셔진 7묘 중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므로 단순히 효문제가 재위했던 시기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될 것이다.
- 군국묘는 선임 황제가 행차했던 곳에만 세웠다는 漢書 韋賢傳(한서 위현전)의 기사도
다른 기사와 비교할 때 모순이 있다. 같은 책 漢書의 五行志(上)의 기사를 보면
한무제 건원 6년 여름에 요동군에 있는 고조묘(즉, 한고조 유방의 사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武帝建元六年六月丁酉,遼東高廟災 )
요동군은 한나라 초대 황제인 고조 유방이 한번도 행차한 사실이 없는 지역임을 고려할 때
위현전의 기사만을 근거로 군국묘의 설치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비 2. 종묘에서 쓰이는 귀한 물건이 어째서 초라한 나무곽 무덤에서 나왔나?
- 이 역시 리순진이 석암리 9호 고분에서 출토된 또 다른 동종과 착각한 것이다.
나무곽 무덤에서 나왔다고 하는 그 동종은 효문묘 동종과 완전히 다른 동종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크기 및 손잡이 문양도 다르고 받침의 유실여부도 다르다.
효문묘 동종은 나무곽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평양 선교리 철도 공사장에서
중국인 인부가 출토시킨 것을 공사 감독이었던 하시모토라는 사람이 취득한 것이다.
<평양 선교리에서 발견된 효문묘 동종> <리순진, 윤내현이 착각하고 있는 석암리 9호 동종>
- 리순진의 견해를 그대로 차용한 윤내현도 같은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한 원제 영광 3년(기원전 41년)에 제조된 효문묘(태종묘) 동종으로 이해하나,
영광 4년 겨울 10월에 또한 조서가 내려 "조종의 사당이 군국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라"라
하였으므로, 효문묘 동종이 제조된지 2년만에 군국의 사당들이 철거된 것이다.
이미 그러한데, 효문묘 동종이 9호묘로부터 발견되었으며, 같은 고묘에서 발견된
동종 중에는 전한 이후에 제조된 것이 있으므로, 이 고묘의 건조 연대는 후한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효문묘 동종은 전한 때 제조된 것이나,
후한대의 묘에 묻힌 것에 불과할 따름이며, 그 원본은 평양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전국에서 군국의 사당이 폐지된 이후에 유전되어 오늘날의 평양지구 9호묘의 주인의
수중에 들어간 뒤, 나중에 수장품이 되어 묘 안에 묻힌 것이라고 본다."
윤내현의 글을 읽어보면 ① 효문묘 동종이 석암리 9호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착각한 점은
리순진과 같고 ② "군국의 사당을 파하라"는 漢書의 기사를 "철거하라"로 오해하였다는 점은
중국사 전문 선생의 견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한심한 분석이다.
군국의 사당을 파(罷)한다는 뜻은 종묘로서의 기능을 중단하고 제사를 중지한다의 뜻이지
사당을 완전히 부숴버린다는 얘기가 아니다.
윤내현이 참고했다는 한서의 위현전 43권을 보면 소령후(高祖의 母) 등 침원(寢園)을 파(罷)하고
제사를 중지하였으며(因罷昭靈后..皆不奉祠), 다만 吏卒을 두어 침원을 지키게 하였다(裁置吏卒守焉)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내현은 한서 위현전의 기사에서 지가 필요한 부분만 칼질해서 갖다 썼던 것 같다.
또한 우리의 숙종실록 제30권 26년에도 나오는데 "漢의 위현성도 군국의 사당들을
수리하지 말기를 청하자 원제가 그 주청을 허가하였으니..."라고 되어있다.
(韋玄成又請勿修諸廟之在郡國者, 元帝可其奏)
부숴버릴 사당이라면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있겠소? 안그러오?
동종은 오로지 황실의 종묘제사권을 부여받은 자만이 소지 할 수 있는 특수한 용품으로서
일반 잡놈들간의 매매와 유통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윤내현의 주장처럼 시중에서 이 넘 저 넘의 손 때를 타다가
우연히 한반도에 들어와 묻혔을 것이라는 무식한 소리는 이제 그만 닥치라고 해두자.
환빠들이 효문묘 동종에 미친 작두춤을 추게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이른바 민족풍의 인민가요가 들려주는 철지난 국수주의.
고대사 만능이 불러일으키는 집단적 향수가 페로몬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사료를 배배 꼬아 무슨 청국장 찌개에 까나리 액젓 2큰술을 추가로 믹스해 놓은듯한
지들만의 독특한 해석은 정말이지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한다.
이런 파란만장한 짝퉁이론의 가장 큰 취약점은
사서와 물증을 뒤트는데 초점을 맞추다보니 결국 지들이 했던 말끼리도
엉키고 섥혀 앞뒤가 안맞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족이라는 이름을 팔아 매문행위를 일삼는 자들의 본질이 아닐까?
다른 낙랑유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낙랑 무덤과 관련된 인터넷 소스는
북한 리순진의 주장을 그대로 카피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고구려 적석총 무덤이 분명한데 단군릉이라 박박 우겨대는 이 어용학자의 주장을
뭐 어떤 비판이나 분석도 없이 일반 네티즌 허접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전공학자들까지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이는 이른바 "주체사관"이라는 것이 껍데기만 바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비이성적 반병신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리순진은 평양일대 낙랑무덤 연구라는 별도의 저술을 가지고 있는 바
내용의 질로 따지자면 우리나라 학부생들이 열심히 쓴 학기말 리포트 수준은 된다.
오히려 호암 미술관 연구원인 신용민의 "한대 목곽묘 연구"가
연구범위와 방법론에 있어 더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리순진의 요지는 한마디로 평양 일대에서 발견되는 낙랑 무덤양식들이
중국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한민족 대동강 기원설에 입각한 낙랑유산 부정하기에
그 의도가 있었으니 출발부터 학문적인 성과는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잘못된 확신의 논리는 거꾸로 낙랑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무덤들이
중국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거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리순진의 주장이 사이다에 밥말아 먹은 한낱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밝혀낼 수가 있게 된다.
리순진 연구의 가장 치명적 약점은 비교대상을 잘못 선정하고 분석했다는 데 있다.
모든 오류는 여기서 비롯된다고 보면 된다.
리순진은 낙랑지역의 무덤양식과 특징을 중국의 것과 비교하면서
낙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장안, 낙양등 관중지방의 무덤들과 비교했다.
중국의 경우 오랜 봉건시대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무덤의 발전양식이 지역마다
다를 뿐만아니라 내부 구조 및 특징에 있어서도 지방색이 강하다.
특히 장강(長江) 유역의 강소성과 산동성에서 발견되는 나무곽 무덤 양식은
중국 황하및 내륙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되는데 그 내부구조와 특징뿐만 아니라
무덤 양식의 발전과 유행시기에 있어 평양 낙랑지역의 무덤들과 거의 유사하거나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동성은 다들 알다시피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한의 武帝(무제)가
한반도의 봉래산이 바라보인다 믿었던 태산(太山)에서 봉선의식을 행했던 곳임과 동시에
또한 한의 장군 누선이 왕검성을 침략할 때 배를 띄웠던 곳이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제북왕(濟北王) 흥거(興居)의 반란때 낙랑으로 줄행랑쳤던
왕중(王仲)도 산동성 사람이었으니 낙랑 지역에서 발견되는 상당수의 왕씨(王氏)들은
이 사건과 매우 연관이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산동은 지리적으로 낙랑과 가장 가까운 지역임과 동시에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지역이다.
무엇보다 낙랑지역의 목곽묘에서 출토되는 칠기의 경우 그 제작지명을 분석해보면
장강(長江) 유역의 사천성에 위치한 촉군(蜀郡)과 광한군(廣漢郡)의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낙랑지역 무덤들의 특징과 양식발전을 중국의 것과 비교고찰하고자 한다면
리순진처럼 관중지역의 무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산동성이나 강소성 등지의 무덤들과
비교하는 것이 더 객관적이며 합리적이라 보여진다.
리순진의 대표적인 헛소리가 나무곽 무덤은 한사군 설치 이전인 전한 중기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무덤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평양의 나무곽 무덤은 한사군 설치 이전의 것들이며 한반도의 독자적인 양식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귀족과 상류층들이 몰려살았던 수도 장안과 낙양 일대 등
중심지 얘기일 뿐이고, 산동성, 강소성 등 長江(장강) 유역, 일부 화북지역과 같은
변두리 지역에서는 후한말인 기원후 1세기까지 여전히 나무곽무덤이 지속적으로
유행한 사실을 간과한 구라에 불과하다.
리순진의 두번째 헛소리는 중국의 고대무덤들이 나무곽 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 가기 전 "공심전 무덤"이라는 단계를 거친데 반해, 낙랑은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더 진보적(?)인 "귀틀무덤"의 단계를 거친 후 벽돌무덤으로 갔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 |
판자때기 몇 개 더 대 놓고 진보적(?)인 무덤 어쩌고 하는 것이 우습거니와
리순진의 주장은 역시 관중지방과 일부 관북지역에 국한된 주장일 뿐
장강(長江) 하류지역인 남경(南京), 상해(上海), 양주(揚州), 강릉(江陵), 해주(海州),
임절(臨浙) 등지에서 발견된 고분군을 보면 나무곽 무덤과 귀틀무덤이 수두룩한 반면에
공심전 무덤은 보이지도 아니하다.
정오동 1호묘나 채협총, 석암리 고분들은 강소성의 의정현(儀征縣) 연대산(烟袋山) 일대의
한묘(漢墓) 고분군을 거의 카피해 놓은 듯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번째 헛소리를 보자.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는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무덤길(墓道)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중국의 나무곽 무덤에서 규모가 큰 것은 모두 무덤길이 있다는 것이다. |
낙랑지역의 무덤이라 해서 무조건 묘도(墓道)가 없고 중국 무덤이라서 무조건 묘도(墓道)가
있다고 보는 것은 둘 다 틀린 얘기다.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발견되는 강소성 지방의
나무곽 무덤들은 규모에 관계없이 묘도(墓道)가 없다.
또 반면에 북한에는 정오동 10호, 11호, 석암리 일부 고분군, 남정리 116호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묘도(墓道)가 발견되는 무덤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리순진은 평양에서 대체 뭘 보고 온 것인가?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까발기는게 좌익 아저씨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던가?
네번째 헛소리를 보자.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 중 합장무덤인 경우에는 례외없이 무덤무지 밑에 2개의 나무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여있다. 그러나 중국의 나무곽무덤에는 그런 형식의 무덤이 없다. 물론 전국시기의 나무곽 무덤 가운데는 2개의 나무곽이 있는 것이 일부 있기는 하나 1개는 주검이 있는 주곽으로서 크고 나머지 하나는 유물만 들어있는 부곽으로서 크기는 매우 작은데 놓여있는 위치도 나란하지 않다." |
그런데 중국에는 정말 그런 무덤이 없는가? 평양에만 있고?
설명만 들어서는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으므로 그림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 그림들은 중국의 고고학보와 고서에 나온 이미지를 캡쳐한 것이다.
이외에도 많지만 짜증나고 귀찮아서 4개만 옮겨본다.

<그림 1. > 上海市 儀征縣 烟袋山 漢墓 <그림 2. > 揚州市 養殖場 漢墓1호, 3호

<그림 3. > 蓮雲港市 海州 漢墓 <그림 4. > 儀征縣 胥浦 101호 漢墓
위 무덤들은 리순진이 얘기한 단장 + 단장 이혈합장묘의 사례에 해당되는데
蓮雲港市 海州 漢墓의 경우 남녀의 주곽이 각각 있고 그 옆에 리순진이 얘기한
유물을 담는 부곽이 각각 있다.
즉, 주곽+부곽 셋트 두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구조로서 중국의 합장묘는
주곽 + 부곽만 존재한다고 본 리순진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 학계가 지랄 옆차기 하는데
일조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째 리순진은 평양 낙랑 유적지에 기원전 2~3세기부터 존재한 토광묘(움무덤)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이유를 들어 나무곽 무덤이 이 토광묘를 주체적으로 계승. 발전한 양식이며 중국의 것과는 완전히 별개임을 강조한다. |
토광묘(움무덤)이라는 것은 주검을 보호하기 위해 목재나 석재의 관을 만들지 않고
시신을 바로 파묻은 무덤을 말한다.
만약 나무를 사용했거나 어떤 재료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토광묘가 아니다.
북한측이 토광묘라고 주장하는 태성리의 상당수 무덤은 내부에 목재 구조물의 흔적이
확인되어 순수한 토광묘라 볼 수 없으며, 한대의 칠기와 동경들이 함께 출토됨에 따라
단순히 한국식 세형동검이 부장되었다 해서 그 무덤을 기원전 2~3세기 것으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동혈 합장묘인 4호, 7호, 12호, 13호는 목곽묘에 포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한반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조선의 토광묘는 단장묘의 형태를 띄어야
시기상으로 맞으며 토광묘에는 합장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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