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찬 "낙랑군 연구"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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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빠들이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마치 금과옥조처럼 인용하는 책이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인지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며칠 읽어보았는데 역시나 낙랑군이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것이라는 잘못된 대전제를 미리부터 깔고 거기에 맞춰서 그 전제를 합리화하고자 관련 유물과 사료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평양 지역의 고고학 발굴을 직접 담당하는 북한 역사학계는 해방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무려 3,000여 기를 발굴 조사하여 이 무덤들이 소위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당 지역에서는 이른바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에 나무곽 무덤이 등장하여 약간의 과도적 형태를 거치면서 3세기 전반까지 귀틀 무덤, 벽돌 무덤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어느 순간 외래 세력에 점령되어 갑자기 이질적인 무덤 양식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도 전형적인 고조선식 유물인 세형 동검(좁은 놋단검) 등이 압도적으로 계속 출토되고 있다.
그 외 무덤의 구조 형식 등도 한나라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이 시기 평양 지역의 무덤의 성격은 한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유적, 유물의 연구를 통해 명백히 밝히고 있다.(자세한 것은 중심 출판사 간, 북한 사회 과학원의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를 참조하시거나 다음의 포스트들을 참조)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2(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1(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구조형식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이 결론은 너무도 명백하여 오영찬도 해당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목곽묘는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있었고 세형 동검 문화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해당 책 p82, 243)
`귀틀묘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중원의 한대 분묘와 분명히 차이를 보인다, 중원 어느 지역에서도 낙랑 고분과 같은 속성을 갖춘 귀틀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시기에도 세형 동검 문화는 그대로 존속한다.(해당 책 p142, 143, 145)
`중원의 전실묘의 특징인 터널형 천장이 평양 일대에서는 그나마 불확실한 사례 한 개를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는다.(해당 책 p194)
`중원에서 2만 기 이상의 한대 고분이 발굴 조사됨에 따라 낙랑 문화가 한대 문화의 전형이라는 이해의 틀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해당 책 p24)
이렇게 무덤 형식 변천, 구조 형식도 소위 중원 지역과 전혀 다르고 나오는 유물도 대부분이 세형 동검 등의 고조선식 유물이라면 당연히 그 시기 평양 일대 무덤, 유물들은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것인데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고자 이런 이유를 목곽묘 시기에는 한나라 지배는 받지만 그 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세력(이것을 "재지 세력"이라고 표현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귀틀묘 시기에는 아예 지배층인 한족과 피지배층인 위만 조선 유민들이 종족적 융합을 해서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아주 기발한 논리를 펼친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나라의 영향력이 완전히 미치지도 못했는데 소위 본국에서 동떨어져서 적진 깊숙히 있는 평양 지역에서 소수의 짱개 세력이 우리 민족의 각종 열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대다수 우리 민족을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재지 세력을 만들고 심지어는 종족 융합까지 해가면서 하여간 400 여년 간이나 낙랑군을 유지시켰다는 논리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도대체가 말이나 되는가?
그 외에도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리한 논리의 유물, 사료 해석을 많이 하고 있다.
너무 글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히 몇 가지만 소개하면
평양 지역 토성들을 평지에 있고 장방형이란 이유로 낙랑 군치, 현치 토성들로 일방적으로 비정하면서도, 해당 책에서도 토성 내부에서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어 일찌감치 낙랑 토성과는 별개로 다른 세력이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있고, 스스로도 토성 내부의 내부 구조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검출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한대 문헌 자료를 토대로 낙랑 토성을 일방적으로 낙랑 군치인 것인 양 내부 구조 등을 설명하고 있다.(해당 책 p96, 98, 106)
또한 사료를 보면 번연히 만주 지역의 낙랑군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는 왕조의 기사나(해당 포스트 참조(클릭)), 왕중이 발해를 건너 요서 지역의 낙랑군으로 달아난 기사를 가지고 마치 평양에 일찌감치 짱개 세력이 존재했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공손씨 세력이 황해도까지 세력을 펼쳐서 대방군을 설치했고 그래서 그 지역에는 무덤 변천 양식이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 지역이 우리 민족 열국들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므로 여러 세력이 끊임없이 교차하여 어느 세력의 특정적인 문화 양식이 정착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요서 지역과, 요동 일부가 주 근거지이던 공손씨 세력이 고구려를 통과해서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백제의 영역까지 다다르면서 황해도까지 점령했다는 것이 도대체가 말이 되는가?
이는 한마디로 얼토당토않은 소리이다.
이 문제는 해당 포스트의 주된 핵심 논제도 아니고 자세히 논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기회가 나면 따로 포스트를 올려서 설명하겠다.
하여간 결론적으로 이 책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낙랑군이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것이라는 잘못된 대전제를 미리부터 깔고 거기에 맞춰서 그 전제를 합리화하고자 관련 유물과 사료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그럴듯하여 그 주장에 동조하거나 내심 그럴 것이라 생각해 버리는 사고가 전파될까봐 심히 우려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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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by 마광팔
2010/10/0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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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1평양 지역의 고고학 발굴을 직접 담당하는 북한 역사학계는 해방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무려 3,000여 기를 발굴 조사하여 이 무덤들이 소위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당 지역에서는 이른바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에 나무곽 무덤이 등장하여 약간의 과도적 형태를 거치면서 3세기 전반까지 귀틀 무덤, 벽돌 무덤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어느 순간 외래 세력에 점령되어 갑자기 이질적인 무덤 양식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도 전형적인 고조선식 유물인 세형 동검(좁은 놋단검) 등이 압도적으로 계속 출토되고 있다.
그 외 무덤의 구조 형식 등도 한나라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이 시기 평양 지역의 무덤의 성격은 한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유적, 유물의 연구를 통해 명백히 밝히고 있다.(자세한 것은 중심 출판사 간, 북한 사회 과학원의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를 참조하시거나 다음의 포스트들을 참조)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2(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1(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구조형식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이 결론은 너무도 명백하여 오영찬도 해당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목곽묘는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있었고 세형 동검 문화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해당 책 p82, 243)
`귀틀묘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중원의 한대 분묘와 분명히 차이를 보인다, 중원 어느 지역에서도 낙랑 고분과 같은 속성을 갖춘 귀틀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시기에도 세형 동검 문화는 그대로 존속한다.(해당 책 p142, 143, 145)
`중원의 전실묘의 특징인 터널형 천장이 평양 일대에서는 그나마 불확실한 사례 한 개를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는다.(해당 책 p194)
`중원에서 2만 기 이상의 한대 고분이 발굴 조사됨에 따라 낙랑 문화가 한대 문화의 전형이라는 이해의 틀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해당 책 p24)
이렇게 무덤 형식 변천, 구조 형식도 소위 중원 지역과 전혀 다르고 나오는 유물도 대부분이 세형 동검 등의 고조선식 유물이라면 당연히 그 시기 평양 일대 무덤, 유물들은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것인데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고자 이런 이유를 목곽묘 시기에는 한나라 지배는 받지만 그 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세력(이것을 "재지 세력"이라고 표현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귀틀묘 시기에는 아예 지배층인 한족과 피지배층인 위만 조선 유민들이 종족적 융합을 해서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아주 기발한 논리를 펼친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나라의 영향력이 완전히 미치지도 못했는데 소위 본국에서 동떨어져서 적진 깊숙히 있는 평양 지역에서 소수의 짱개 세력이 우리 민족의 각종 열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대다수 우리 민족을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재지 세력을 만들고 심지어는 종족 융합까지 해가면서 하여간 400 여년 간이나 낙랑군을 유지시켰다는 논리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도대체가 말이나 되는가?
그 외에도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리한 논리의 유물, 사료 해석을 많이 하고 있다.
너무 글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히 몇 가지만 소개하면
평양 지역 토성들을 평지에 있고 장방형이란 이유로 낙랑 군치, 현치 토성들로 일방적으로 비정하면서도, 해당 책에서도 토성 내부에서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어 일찌감치 낙랑 토성과는 별개로 다른 세력이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있고, 스스로도 토성 내부의 내부 구조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검출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한대 문헌 자료를 토대로 낙랑 토성을 일방적으로 낙랑 군치인 것인 양 내부 구조 등을 설명하고 있다.(해당 책 p96, 98, 106)
또한 사료를 보면 번연히 만주 지역의 낙랑군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는 왕조의 기사나(해당 포스트 참조(클릭)), 왕중이 발해를 건너 요서 지역의 낙랑군으로 달아난 기사를 가지고 마치 평양에 일찌감치 짱개 세력이 존재했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공손씨 세력이 황해도까지 세력을 펼쳐서 대방군을 설치했고 그래서 그 지역에는 무덤 변천 양식이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 지역이 우리 민족 열국들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므로 여러 세력이 끊임없이 교차하여 어느 세력의 특정적인 문화 양식이 정착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요서 지역과, 요동 일부가 주 근거지이던 공손씨 세력이 고구려를 통과해서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백제의 영역까지 다다르면서 황해도까지 점령했다는 것이 도대체가 말이 되는가?
이는 한마디로 얼토당토않은 소리이다.
이 문제는 해당 포스트의 주된 핵심 논제도 아니고 자세히 논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기회가 나면 따로 포스트를 올려서 설명하겠다.
하여간 결론적으로 이 책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낙랑군이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것이라는 잘못된 대전제를 미리부터 깔고 거기에 맞춰서 그 전제를 합리화하고자 관련 유물과 사료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그럴듯하여 그 주장에 동조하거나 내심 그럴 것이라 생각해 버리는 사고가 전파될까봐 심히 우려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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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by 마광팔
2010/10/0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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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2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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