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4일 목요일

"낙랑군 연구" 비판

오영찬 "낙랑군 연구"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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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빠들이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마치 금과옥조처럼 인용하는 책이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인지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며칠 읽어보았는데 역시나 낙랑군이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것이라는 잘못된 대전제를 미리부터 깔고 거기에 맞춰서 그 전제를 합리화하고자 관련 유물과 사료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평양 지역의 고고학 발굴을 직접 담당하는 북한 역사학계는 해방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무려 3,000여 기를 발굴 조사하여 이 무덤들이 소위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당 지역에서는 이른바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에 나무곽 무덤이 등장하여 약간의 과도적 형태를 거치면서 3세기 전반까지 귀틀 무덤, 벽돌 무덤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어느 순간 외래 세력에 점령되어 갑자기 이질적인 무덤 양식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도 전형적인 고조선식 유물인 세형 동검(좁은 놋단검) 등이 압도적으로 계속 출토되고 있다.
그 외 무덤의 구조 형식 등도 한나라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이 시기 평양 지역의 무덤의 성격은 한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유적, 유물의 연구를 통해 명백히 밝히고 있다.(자세한 것은 중심 출판사 간, 북한 사회 과학원의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를 참조하시거나 다음의 포스트들을 참조)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2(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1(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구조형식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이 결론은 너무도 명백하여 오영찬도 해당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목곽묘는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있었고 세형 동검 문화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해당 책 p82, 243)
`귀틀묘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중원의 한대 분묘와 분명히 차이를 보인다, 중원 어느 지역에서도 낙랑 고분과 같은 속성을 갖춘 귀틀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시기에도 세형 동검 문화는 그대로 존속한다.(해당 책 p142, 143, 145)
`중원의 전실묘의 특징인 터널형 천장이 평양 일대에서는 그나마 불확실한 사례 한 개를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는다.(해당 책 p194)
`중원에서 2만 기 이상의 한대 고분이 발굴 조사됨에 따라 낙랑 문화가 한대 문화의 전형이라는 이해의 틀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해당 책 p24)

이렇게 무덤 형식 변천, 구조 형식도 소위 중원 지역과 전혀 다르고 나오는 유물도 대부분이 세형 동검 등의 고조선식 유물이라면 당연히 그 시기 평양 일대 무덤, 유물들은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것인데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고자 이런 이유를 목곽묘 시기에는 한나라 지배는 받지만 그 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세력(이것을 "재지 세력"이라고 표현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귀틀묘 시기에는 아예 지배층인 한족과 피지배층인 위만 조선 유민들이 종족적 융합을 해서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아주 기발한 논리를 펼친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나라의 영향력이 완전히 미치지도 못했는데 소위 본국에서 동떨어져서 적진 깊숙히 있는 평양 지역에서 소수의 짱개 세력이 우리 민족의 각종 열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대다수 우리 민족을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재지 세력을 만들고 심지어는 종족 융합까지 해가면서 하여간 400 여년 간이나 낙랑군을 유지시켰다는 논리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도대체가 말이나 되는가?

그 외에도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리한 논리의 유물, 사료 해석을 많이 하고 있다.
너무 글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히 몇 가지만 소개하면

평양 지역 토성들을 평지에 있고 장방형이란 이유로 낙랑 군치, 현치 토성들로 일방적으로 비정하면서도, 해당 책에서도 토성 내부에서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어 일찌감치 낙랑 토성과는 별개로 다른 세력이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있고, 스스로도 토성 내부의 내부 구조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검출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한대 문헌 자료를 토대로 낙랑 토성을 일방적으로 낙랑 군치인 것인 양 내부 구조 등을 설명하고 있다.(해당 책 p96, 98, 106)

또한 사료를 보면 번연히 만주 지역의 낙랑군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는 왕조의 기사나(해당 포스트 참조(클릭)), 왕중이 발해를 건너 요서 지역의 낙랑군으로 달아난 기사를 가지고 마치 평양에 일찌감치 짱개 세력이 존재했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공손씨 세력이 황해도까지 세력을 펼쳐서 대방군을 설치했고 그래서 그 지역에는 무덤 변천 양식이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 지역이 우리 민족 열국들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므로 여러 세력이 끊임없이 교차하여 어느 세력의 특정적인 문화 양식이 정착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요서 지역과, 요동 일부가 주 근거지이던 공손씨 세력이 고구려를 통과해서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백제의 영역까지 다다르면서 황해도까지 점령했다는 것이 도대체가 말이 되는가?
이는 한마디로 얼토당토않은 소리이다.
이 문제는 해당 포스트의 주된 핵심 논제도 아니고 자세히 논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기회가 나면 따로 포스트를 올려서 설명하겠다.

하여간 결론적으로 이 책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낙랑군이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것이라는 잘못된 대전제를 미리부터 깔고 거기에 맞춰서 그 전제를 합리화하고자 관련 유물과 사료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그럴듯하여 그 주장에 동조하거나 내심 그럴 것이라 생각해 버리는 사고가 전파될까봐 심히 우려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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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by 마광팔
2010/10/03 12:42
totosoro.egloos.com/3458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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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1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2


(요약)

결론 부분중 일부를 보면

300여기의 추가 발굴을 종합한 결과

"평양일대의 무덤 양식은 중국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형태를 띄고 있으며
고조선 후예들이 남긴 것이다" 라는 주장을 엿볼 수 있다



(원문중 일부)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의 특성은
이 고장의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이
중국의 한 나라 락랑군 설치와 직접 관련되였거나 그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련면히 살아온 고대 조선사람들이 남긴 무덤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변천 뿐 아니라 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제4장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에 관한 문제,
다시 말하여 평양일대에 락랑무덤을 남긴 정치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사람들에게 혁명의 수도 평양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에 대한 옳은 인식을 주며
우리 민족사의 유구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지난 시기 평양일대의 락랑문제가 봉건사가들과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해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게 외곡되여 왔고
그 후과로 하여 오늘까지도 국제적으로 첨예한 론쟁을 벌리면서
올바른 해명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봉건사가들속에서 평양일대를 한 나라 락랑군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
 
5세기 중엽~6세기 초 북위의 력도원은
자기의 저서 “수경주”에서
북위에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평양성(오늘의 평양성)이
한 나라의 락랑군이였다고 주장하였으며

11세기 중엽에
구양수 등이 평찬한 “신당서”에서도
“평양성은 한 나라의 락랑군이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중국 봉건사가들 속에서 “정설”로 인정되여 왔었다.


그 후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더욱 보충되여 매우 심각하고 첨예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일제의 조선 강점시기 조선 고고학을 독점하였던 일제어용사가들은
평양일대에서 락랑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거기에서 드러난 자료를 가지고
마치도 한 나라의 락랑군이 평양에 있은 듯이 꾸며놓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해 놓았다.


그들은 평양일대의 소위 “락랑무덤”은
그 구조와 형식변천이 중국의 한 대무덤의 것과 꼭 같고
거기에서 나온 유물도 중국 한 대무덤의 유물과 꼭 같으며
그 대부분은 중국에서 만든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가장 기초적인 근거로, 대전제로 삼고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을 더욱 외곡 보강해 놓았다.
 

지난 시기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기정사실인 듯이 꾸며진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오늘 일본 당국자들에 의하여 일본 력사교과서들에 그대로 옮겨지고 있다.
 

이처럼 평양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이
대국주의 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오래동안 이지러지고 외곡되여 왔으나
력사적 사실은 과학적인 자료로 하여 정확히 밝혀지기 마련이다.




제1절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는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가지 류형의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은 나무곽무덤이다.

이 나무곽무덤은
앞서 존재한 이 고장의 좁은 놋단검관계 유적들인
움무덤과 돌곽무덤을 바탕으로 하여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여
기원전 1세기 말까지 계속 존재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 이르러
보다 발전된 귀틀무덤에로 계승발전되였다.

나무곽무덤의 계승 발전으로 이루어진 귀틀무덤은
1세기 전기간 평양일대에서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다가
1세기 말 ~2세기 초에 귀틀벽돌무덤과 벽돌귀틀무덤과 같은 과도적인 무덤형식을 거쳐서
전형적인 벽돌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으며


벽돌무덤은
3세기 전반기까지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다가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에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나무곽무덤으로부터 벽돌무덤까지의 련면한 계승 발전은
무덤의 구조형식과 유물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한편
중국의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정을 보면
그것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과 뚜렷이 구별된다.


중국의 한 나라 시기에도 나무곽무덤을 쓰긴 하였으나
그것은 전국시대의 나무곽무덤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서 그 변천과정은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다.


전한시기에 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지방에서는
전한 전기(기원전 206년~기원전 135년)에 나무곽무덤은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였거나
새로 나타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다가
전한 중기(기원전 134년~기원전 49년)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나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였으며
전한 후기(기원전 48년~기원후 24년)에는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되었다.

※ 공심전 무덤은
땅을 곧추 파내려 가다가 옆으로 수평되게 굴을 파고
거기에 구멍이 뚫려있는 큰 벽돌로 무덤곽을 만들고 그 안에 주검을 안치한 무덤이다.


그리고
후한시기 나라의 수도였던 락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 나무곽무덤은
이미 전한 전기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공심전 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되어 있었으며
공심전 무덤은 전한 중기 말인 선제시기(기원전 73년~기원전 49년)를 전후하여
벽돌무덤과 교체되기 시작하였다.


전한시기에 나무곽무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은 곳은 장사지방이다.
이 지방의 나무곽무덤은 무제 집권시기를 전후로 하여
전한 전기와 전한 후기의 것으로 나누어보는데

전한 전기에는 나무곽무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다가
전한 후기에는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나고
그것이 나무곽무덤과 병존하다가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는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전한전기에 나라의 중심지역에서는 나무곽무덤이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였거나 새로 나타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였으며

전한 중기에는
나무곽무덤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그 대신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났다.

특히 락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는
전한 전기에 이미 나무곽무덤은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여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장사지방과 같은 남방의 변방지역에서만 나무곽무덤이 계속 존속되였을 뿐인데
그것도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으며
그 대신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평양일대에서는 나무곽무덤은
한 나라의 출현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여
기원전 1세기 말까지 계속 존재하였으며
그것은 중국의 한대 무덤처럼 공심전 무덤을 거쳐서 벽돌무덤에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귀틀무덤을 거쳐서 벽돌무덤에로 넘어갔다.


다시 말하여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였던 나무곽무덤은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 귀틀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고
귀틀무덤은 귀틀벽돌무덤과 벽돌귀틀무덤 단계를 거쳐서
2세기 초에 벽돌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다.


그리고
평양일대에서는 전한시기에 중국의 중심지역에 성행하였던
공심전 무덤과 같은 무덤은 지금까지 단 한 기도 드러난 례가 없다.
 

이처럼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과정은
중국 경내의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정과 뚜렷이 다른 로정을 거치였다.



만약 일제어용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원전 108년에 한 나라의 락랑군이 평양일대에 설치되여 수백년동안 존재하였다면
그처럼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이
중국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 뚜렷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의 특성은
이 고장의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이
중국의 한 나라 락랑군 설치와 직접 관련되였거나 그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련면히 살아온 고대 조선사람들이 남긴 무덤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변천 뿐 아니라 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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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구조형식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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