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우리는 낙랑유물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위선과 위증사례를 역으로 살펴보았다.
그들의 논리라는게 크게 3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 제작지가 불명한 것은 다 한국 것이라 우긴다.
둘째, 시기적으로 불명한 것은 다 왕망, 후한시대 이후의 것으로 내려잡는다.
셋째, 제작지와 제작시기가 분명하게 표기된 유물인 경우 수입품이나 위조품으로 둔갑시킨다.
다양한 유물조사나 문헌연구를 통해 귀납적으로 낙랑이 한반도와 관련없음을 입증하는 게
첫째, 제작지가 불명한 것은 다 한국 것이라 우긴다.
둘째, 시기적으로 불명한 것은 다 왕망, 후한시대 이후의 것으로 내려잡는다.
셋째, 제작지와 제작시기가 분명하게 표기된 유물인 경우 수입품이나 위조품으로 둔갑시킨다.
다양한 유물조사나 문헌연구를 통해 귀납적으로 낙랑이 한반도와 관련없음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결론부터 미리 "한반도 낙랑설은 개솔이"라고 내려놓고 연역적으로 논리를 꿰어맞추다
보니 논리적으로 엉성하고 빈약할 수밖에 없겠다.
소스들이 주로 북한측에서 나오고 우리쪽 재야학자들에 의해 살을 붙인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소스들이 주로 북한측에서 나오고 우리쪽 재야학자들에 의해 살을 붙인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기초적인 사실관계는 물론이고 사서의 기록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엉터리 주장들이 많았다.
북한 학자들은 한민족 대동강 기원설과 평양중심설을 주장하면서 기존의 입장을 바꿔
위만조선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과 대동강 유역이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멸망한 위만조선의 수도에 점령군사령부(낙랑군)가 들어서야 한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멸망한 수도에서 2000여리 떨어진 변경에다가 낙랑군을 설치할 이유가 없다.
북한놈들도 스스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고조선의 부수도라는 개념을 끼워넣은 모양인데
북한놈들도 스스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고조선의 부수도라는 개념을 끼워넣은 모양인데
부수도가 점령당했다고 멸망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을까?
그러다 보니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이 세웠다는 평양 최리의 낙랑국도 이해가 어렵다.
멸망한 국가의 수도에 유민들이 세로운 왕조를 세웠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반란군이지 유민 나부랭이 집단이 아니다.
이를 여기서 다시 재론하지는 않겠지만, 일제가 B.C. 1세기 ~ A.D.4세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이를 여기서 다시 재론하지는 않겠지만, 일제가 B.C. 1세기 ~ A.D.4세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편년대의 유물을 집단적, 체계적으로 단시간 안에 조작할 수 있다고 보는 가설 자체가
태생적으로 비논리성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역사의 시대를 고증하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는 유물이다. 그 두번째가 문헌상의 기록이다.
역사의 시대를 고증하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는 유물이다. 그 두번째가 문헌상의 기록이다.
이 두가지가 일치하면 그 고증은 객관적인 지지를 받는게 당연하다.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이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킨다.
앞에서 우리는 낙랑유물에 대한 조작, 위조시비가 근거없음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사서의
기록을 검토하여 통해 낙랑의 위치를 비정해보자 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
① 지명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
① 지명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는 것이다.
(동일한 지명이 여러군데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
② 낙랑군 등 한 4군은 중국의 정세에 따라 위치와 강역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② 낙랑군 등 한 4군은 중국의 정세에 따라 위치와 강역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을 단순히 편면적으로 고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③ 환단고기나 단기고사와 같은 위서의 가능성이 높은 사서는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④ 같은 사서의 기사끼리 모순되는 경우는 인용을 보류한다.
⑤ 다른 사서의 기사끼리 모순되는 경우는 먼저 편찬된 사서의 기사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⑥ 논의의 범위를 한정하기 위해 대륙백제설, 대륙삼한설, 북경고구려설 등은 개솔이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③ 환단고기나 단기고사와 같은 위서의 가능성이 높은 사서는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④ 같은 사서의 기사끼리 모순되는 경우는 인용을 보류한다.
⑤ 다른 사서의 기사끼리 모순되는 경우는 먼저 편찬된 사서의 기사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⑥ 논의의 범위를 한정하기 위해 대륙백제설, 대륙삼한설, 북경고구려설 등은 개솔이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고증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는데 숫자만 들어간다고 다 수학이 아니다.
왜 그러겠는가? 거리 측정만큼은 발로 직접 걸어가 봐야 안다. 책상에 앉아서 펜대나 굴려가지고
설렁설렁 맞춰보기엔 여러가지 변수가 많이 발생한다.
김종서는 1리는 당대(唐代) 이후 0.393km로 고정된 것으로 보고 구당서의 기록에 등장하는 낙양 및
장안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거리를 비교해 한대(漢代)의 1리가 현재 거리의 75% 미만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당시의 거리 개념을 현대의 단위로 환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김종서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굴곡지수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漢代의 A에서 B구간으로 가는 코스가
唐代에서도 똑같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두 지역을 비교하였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漢代 1里 개념은 唐代의 75% ~ 78%라는 것이다. 唐代 이후의 里에 대한 개념은 현대의
0.393km와 대동소이하므로 구당서의 기록을 가져와서 km로 변환한듯 보인다.
漢代 1里 개념은 唐代의 75% ~ 78%라는 것이다. 唐代 이후의 里에 대한 개념은 현대의
0.393km와 대동소이하므로 구당서의 기록을 가져와서 km로 변환한듯 보인다.
다시 말하면 漢代의 里(75%) = 唐代의 里 = 현대의 里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고대 중국의 도량형 제도 변천사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唐代 이후에도 里에 대한
개념은 계속해서 변했고 현대 중국에서 쓰는 里는 0.50km로서 唐代의 0.56km보다 작고 한국의
0.39km 보다 훨씬 크다. 아마도 김종서는 중국의 里와 한국의 里를 같은 것으로 혼동한 것 같다.
그런데 필자가 고대 중국의 도량형 제도 변천사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唐代 이후에도 里에 대한
개념은 계속해서 변했고 현대 중국에서 쓰는 里는 0.50km로서 唐代의 0.56km보다 작고 한국의
0.39km 보다 훨씬 크다. 아마도 김종서는 중국의 里와 한국의 里를 같은 것으로 혼동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 때의 낙양과 溫州(온주)까지 의 거리가 현대 중국 국도보다 더 짧은 이유에
대해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국형 도량형인 0.393을 대입해 굴곡지수를 계산했으니 당연한
착오이다.)
대해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국형 도량형인 0.393을 대입해 굴곡지수를 계산했으니 당연한
착오이다.)
따라서 후한서의 5000리라는 개념은 현대의 개념으로 얼마라고 단순대입할 것이 아니라
비교대상인 측정 구간을 다른 역사서에서는 몇 리로 계산하였는지 살피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가장 좋은 사례가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안에서 평양성까지의 거리이다. 신
당서에서는 막연히 경사(京師, 즉 장안)에서 5000리가 넘는다고 하고 있으나 구당서에서는
장안에서 동쪽으로 5100리라고 하였다.
비교대상인 측정 구간을 다른 역사서에서는 몇 리로 계산하였는지 살피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가장 좋은 사례가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안에서 평양성까지의 거리이다. 신
당서에서는 막연히 경사(京師, 즉 장안)에서 5000리가 넘는다고 하고 있으나 구당서에서는
장안에서 동쪽으로 5100리라고 하였다.
<新唐書/列傳/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高麗>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
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
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고구려는,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땅은 동쪽으로 해를 넘어서 신라에 이르고,남쪽 역시 해를 넘
어 백제에 다다른다. 서북쪽은 요수를 넘어 영주와 접하고,북쪽에는 말갈이 있다.임금은 평양성
에 사는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때 낙랑군이었다. 거리는 경사(당나라 장안성)로 부터 5
천리가 넘는다. 산을 따라 굽고 둘러서 외성이 되고, 남쪽 끝은 패수가 있으며, 왕은 그 왼쪽에 궁
을 쌓았다. 또 국내성, 한성이 있는 별도라고 불렀다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京師>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
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
다. 경사(즉,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
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
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
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
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고구려는,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땅은 동쪽으로 해를 넘어서 신라에 이르고,남쪽 역시 해를 넘
어 백제에 다다른다. 서북쪽은 요수를 넘어 영주와 접하고,북쪽에는 말갈이 있다.임금은 평양성
에 사는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때 낙랑군이었다. 거리는 경사(당나라 장안성)로 부터 5
천리가 넘는다. 산을 따라 굽고 둘러서 외성이 되고, 남쪽 끝은 패수가 있으며, 왕은 그 왼쪽에 궁
을 쌓았다. 또 국내성, 한성이 있는 별도라고 불렀다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京師>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
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
다. 경사(즉,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
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
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이 양당서의 기록을 보면 논란이 있는 "평양은 한나라 낙랑군의 옛땅이다." 라는 부분은 논외로
치고 순수하게 거리만 보자면 지금의 장안(長安, Xian)에서 한반도의 평양까지는 5100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치고 순수하게 거리만 보자면 지금의 장안(長安, Xian)에서 한반도의 평양까지는 5100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후한서 군국지(上)에 낙랑군은 낙양 동북쪽으로 5000리라는 구절을
보자. 양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평양까지의 거리와 후한서의 낙랑군까지의 거리는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수학적 고증이고 나발이고가 뭔 필요가 있는가. 양당서는 기준점을
지금의 장안(長安, Xian)에서 잡았고 후한서에서는 기준점을 지금으로 낙양(洛陽, Luoyang)에서
잡았다.
보자. 양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평양까지의 거리와 후한서의 낙랑군까지의 거리는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수학적 고증이고 나발이고가 뭔 필요가 있는가. 양당서는 기준점을
지금의 장안(長安, Xian)에서 잡았고 후한서에서는 기준점을 지금으로 낙양(洛陽, Luoyang)에서
잡았다.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장안과 낙양까지의 거리는 950리다. 낙양 + 평양 = 5000리라고 하였으므
로 장안 + 낙양 + 평양 = 5950리다. 즉, 양당서는 장안에서 평양까지 5100리라고 하였고
후한서 군국지는 5950리라고 한 것이다. 이 거리는 한대(漢代)와 당대(唐代)의 도량형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보다 한참 한반도 밑으로 내려와 전라도 어디쯤 되어야 한다.
이러한 오차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종서의 주장처럼 적어도 요서지역 근방의 버뮤다
삼각지 세계는 분명히 아니다.
로 장안 + 낙양 + 평양 = 5950리다. 즉, 양당서는 장안에서 평양까지 5100리라고 하였고
후한서 군국지는 5950리라고 한 것이다. 이 거리는 한대(漢代)와 당대(唐代)의 도량형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보다 한참 한반도 밑으로 내려와 전라도 어디쯤 되어야 한다.
이러한 오차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종서의 주장처럼 적어도 요서지역 근방의 버뮤다
삼각지 세계는 분명히 아니다.

김종서의 주장에 따르면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난하유역에다 낙랑군을 비정하였으므로 그 양반의
산식에 따르면 평양은 대체 어디가 되어야 한다는 얘긴가? 적어도 뻬이징? ㅋㅋㅋㅋ
아니나 다를까, 김종서는 고구려 후기에 해당되는 6~7세기때 평양성이 중국 하북성 근방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신라는 대륙까지 진출해서 삼국통일을 했다는 것이다. ㅋㅋㅋㅋ
김종서의 주장은 사기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진(秦)의 통일하기 전, 전국 7웅의 하나였던 연(燕)
이 한참 끝발을 날리고 있을 때, 진개는 연의 동북방에 있던 동호(東湖)를 쳐서 1천리, 그냥 오른쪽에
있던 조선 땅 2천리를 경략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 참조)
당시 연의 수도는 계(薊)라는 곳으로 한서 지리지에 계(薊)는 남쪽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와 통하며,
발석지간에 있다고 했으니(薊,南通齊﹑趙,勃﹑碣之間一都會也) 안사고(安師古)의 주석에 따르
면 발석은 발해와 갈석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갈석산과 발해의 사이는 이미 연나라의 수도였
다는 얘기고 단순히 여기를 기점으로 삼아도 진개가 취한 동쪽 2000리를 더하면 낙랑은 끽해야 요
동반도에서 압록강 사이가 된다.
이 한참 끝발을 날리고 있을 때, 진개는 연의 동북방에 있던 동호(東湖)를 쳐서 1천리, 그냥 오른쪽에
있던 조선 땅 2천리를 경략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 참조)
당시 연의 수도는 계(薊)라는 곳으로 한서 지리지에 계(薊)는 남쪽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와 통하며,
발석지간에 있다고 했으니(薊,南通齊﹑趙,勃﹑碣之間一都會也) 안사고(安師古)의 주석에 따르
면 발석은 발해와 갈석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갈석산과 발해의 사이는 이미 연나라의 수도였
다는 얘기고 단순히 여기를 기점으로 삼아도 진개가 취한 동쪽 2000리를 더하면 낙랑은 끽해야 요
동반도에서 압록강 사이가 된다.
윤내현의 주장처럼 도저히 난하가 만번한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김종서처럼 그 옆에다가 낙랑군
을 그려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김종서의 주장처럼 낙랑군을 거기다 그려놓았을 때 요동군
은 북경근처까지 내려온다.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등 연나라 영토는 들어갈 자리도 없어지게
되고 연나라의 수도는 저쪽 내몽고쪽까지 올라가게 된다.
을 그려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김종서의 주장처럼 낙랑군을 거기다 그려놓았을 때 요동군
은 북경근처까지 내려온다.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등 연나라 영토는 들어갈 자리도 없어지게
되고 연나라의 수도는 저쪽 내몽고쪽까지 올라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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