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上>
(지해범의 ‘중국 벗기기’)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上> 한때 唐을 호령하다

<위구르 소녀.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수가 놓인 스카프를 둘렀다. 이 해맑은 웃음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당(唐)나라 시인 왕지환(王之渙)은 그의 시‘양주사(凉州詞)’에서 지금의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하는 서역(西域)의 삭막함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黃河遠上白雲間(황하는 멀리 흰 구름사이를 오르고)
一片孤城萬仞山(만길 높은 산에 한조각 외로운 성곽)
羌笛何須怨楊流(강족의 피리는 어찌 절양류곡을 연주하며 원망하는가)
春風不度玉門關(봄바람이 옥문관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을…)
一片孤城萬仞山(만길 높은 산에 한조각 외로운 성곽)
羌笛何須怨楊流(강족의 피리는 어찌 절양류곡을 연주하며 원망하는가)
春風不度玉門關(봄바람이 옥문관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을…)
옥문관은 양관(陽關)과 함께 만리장성이 끝나는 변방의 요새이다. 지금의 돈황(敦煌) 서북쪽 98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옥문관을 벗어나면 더욱 황량하고 넓은 사막이 기다린다. 이 시는 당나라 때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이 현지 강족(羌族)의 피리를 불며 외로움과 고난을 견디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시의 ‘春風’은 당의 풍요함을 상징한다. 이 시를 통해 당시 중국 사람들이 옥문관 밖의 지역을 얼마나 삭막한 땅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같은 당대의 시인 왕유(王維)도 ‘원이를 안서 땅으로 보내며(送元二使安西)’란 시에서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벗이 없으리니)’라고 읊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먼 길을 떠나는 벗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옥문관의 유적. 흙과 갈대 등으로 쌓아올린 이요새는 1000년 이상의 풍우를 견뎌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만큼 신강위구르지역은 그 옛날부터 중국인들이 두려움의 눈길로 바라보던 땅이다. 이곳의 중심지인 우루무치 공항에 내리면, 맨 처음 드는 인상은 ‘이곳은 한족의 땅이 아니다’는 것이다. 1996년 여름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도로의 간판, 식당에서 풍기는 음식냄새는 북경이나 남경에서 접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중국 국토의 17%를 차지하는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위구르·카자흐·타지크 등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종족들이다. 이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실크로드의 한 가운데서 동서교역의 중계자 역할을 하면서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일구어왔다. 너무나 이질적인 이 지역을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7월3일자에서 ‘차이나스탄(Chinastan)’이라고 이름붙였다. 중국의 ‘차이나’와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명에 공통적으로 붙는 땅이란 뜻의 ‘스탄’을 합친 이름이다.

<돕바를 쓴 위구르족어른들>
이 지역 소수민족 중에 인구가 가장 많은 위구르족(965만명)은 외모부터 중국인과 판이하다. 이들은 피부색이 흰 편이며 눈썹이 짙다. 남자들은 수염을 잘 기르며 ‘돕바’라는 사각 모자를 하루종일 쓰고 다닌다. 여자들은 빨강 노랑 파랑 등 원색옷을 즐겨 입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지만,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처럼 부르카로 온몸을 감싸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도시의 젊은 위구르족 여성들은 술을 마시기도 하고 몸에 달라붙는 패션을 즐기기도 한다. 같은 이슬람권이면서도 경직된 종교규범을 따르는 중동과 달리 이들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롭다. 위구르족은 고유의 언어는 물론, 종교와 일상이 결합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위구르식 볶음밥과 양고기>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지않는 대신 양고기를 즐겨먹는다. 볶음밥에 구운 양고기를 얹어 먹거나 양꼬치로 만들어 먹는다. 이 양꼬치는 이들의 특색음식으로 자리잡아,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중국 대도시의 골목길에 밤이 오면 돕바를 쓰고 가로로 길쭉한 직사각형 철제 화덕에 숯을 넣고 그 위에 양고기 꼬치를 구우며 이들 특유의 향료를 뿌리는 냄새가 진동한다. 이 양꼬치에 맥주 한잔이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
위구르족들은 식사가 끝나거나 손님이 찾아오면 차에 양우유를 탄 ‘밀크티(女乃 茶)’를 즐겨 마신다. 양우유의 구수함과 차의 씁쓸함이 섞여 독특한 맛을 낸다. 쓴 맛을 줄이기 위해 굵은 각설탕 덩어리를 넣어준다. 사막의 찬바람을 맞은 뒤 뜨거운 양우유차를 마시면 온 몸이 사르르 녹는다.
http://blogs.chosun.com/hbjee/2009/07/16/%ED%99%94%EB%A0%A4%ED%96%88%EB%8D%98-%EC%9C%84%EA%B5%AC%EB%A5%B4%EC%9D%98-%EC%97%AD%EC%82%AC%EB%8A%94-%EA%B0%80%EA%B3%A0-2/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下>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下>독립기회를 놓친 위구르족
지해범 조선일보 전문기자

<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보이는 위구르 톡립전사>
지금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변방에서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위구르족들에게도 화려했던 역사는 있었다. 이 땅은 넓은 사막에 드문드문 오아시스가 있어 오래 전부터 유목민족들이 이동하며 살던 곳이다. 오아시스는 천산(天山)산맥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사막의 땅 속을 흐르다 낮은 지대에서 모래를 비집고 나와 습지대를 형성한 것이다. 천산 자락에는 백두산 천지(天池)와 같은 이름의천지가 있지만,계곡을 막아 만든 호수이다.
이 넓은 지역을 이동하며 살던 위구르족들은 오랫동안 훈족 돌궐족 티벳족의 통치를 번갈아 받았다. 그러던 위구르족이 처음으로 독립국가를 세운 것은 서기 744년이다. 중국에는 당(唐)이 있던 때이다. 몽골 오르콘강 기슭에서 일어난 위구르왕국은 북으로는 바이칼호수에서부터 남으로는 인도, 동으로는 중국 감숙(甘肅)에 이를만큼 그 영역이 광대했다.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보다 넓은 땅이다. 위구르왕국은 국력도 강성하여 당이 거란의 공격을 받았을 때 당을 지원해주고 매년 비단 2만필의 조공을 받았다고 한다. 또 당 황제는 위구르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했다.

<위구르족들의예배모습>
840년 이 거대한 왕국은 3개로 쪼개졌다. 지금의 감숙성을 중심으로 한 ‘감숙위구르 왕국’, 투루판 지역을 근거지로 한 카라코야 왕국(불교국가),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한 카파카니드 왕국(이슬람국가)이 그것이다. 카라코야 왕국과 카파카니드 왕국은 1397년 통합했다. 이 왕국들은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다. 당시 이 왕국은 ‘흉노’ ‘돌궐’ 등으로 불렸다.
1759년 만주족 정권인 청(淸)이 위구르를 침략, 두 왕국을 무너뜨리고 1826년까지 지배했다. 나라를 빼앗긴 위구르족들은 이 시기 무려 42차례나 독립운동을 펼치지만 실패했다. 그러다가 1863년 위구르족의 새로운 지도자 ‘야쿱벡’이 중심이 되어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청군이 위구르군에 패퇴한 것은 북경의 청조가 아편전쟁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세에 시달리느라 변방 수비에 신경쓸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야쿱벡의 독립왕국은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노리던 영국과 러시아, 오토만제국 등에 의해 국가로 인정받았다.

<위구르의 지도자 야쿱벡>
그러나 1876년 야쿱벡 군대는 좌종당(左宗棠)이 이끄는 청 군대에 무너졌다. 당시 야쿱벡은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 주변국들은 청나라에 패배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야쿱벡은 협상을 하자는 좌종당의 작전에 말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청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위구르족 입장에서는 독립을 쟁취할절호의 기회를 놓쳐, 천추의 한이 되고 만 것이다. 청은 다시 정복한 이 땅을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로 ‘신강(新疆)’이라고 명명했다. 중국인들 스스로 ‘새로운 영토’라고 이름붙였으니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가 그리 길지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좌종당은 이 때 왕지환(王之渙)의 시 ‘양주사(凉州詞)’ 뒷부분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羌笛無須怨楊流(강족의 피리는 슬픈 절양류곡을 연주하며 원망할 필요 없느니)
春風已度玉門關(봄바람은 이미 옥문관을 넘었도다)
羌笛無須怨楊流(강족의 피리는 슬픈 절양류곡을 연주하며 원망할 필요 없느니)
春風已度玉門關(봄바람은 이미 옥문관을 넘었도다)

청의 군대가 옥문관을 넘어 신강이 중국 땅이 되었다는 얘기다.(※‘봄바람이 옥문관을 넘었다’는 마지막 구절은 훗날 청춘남녀가 ‘선’을 넘었음을 상징하는 구절로 애용된다. 가령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다가, 자식이 “春風已度玉門關”이라고 얘기하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 시에 등장하는 강족은 옛날 감숙성 부근에 살던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인구는 겨우 30여만명에 불과하며, 지금은 사천성 서북쪽 민강(岷江)부근에 집거한다고 한다.

<전통의상을 입은 강족 처녀>
청의 지배는 70여년 이어지다가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뒤 변방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4년, 위구르족들은 일리(중국명 伊犁)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동투르키스탄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제대로 국가모습도 갖추지 못한 임시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자는 주석파와 중국과 타협하여 생존을 도모하자는 부주석파로 양분돼 내분을 겪고 있었다. 1949년 중국땅에 국공내전이 끝나고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임시정부 주석은 해외로 망명하고, 부주석 세력은 중국에 투항하고 말았다.
위구르 자치구의 3대 소수 민족 가운데 카자흐족과 타지크족은 중국 영토 바깥에 각기 ‘카자흐스탄’과 ‘타지키스탄’ 등 독립국가를 세웠으나, 위구르족만은 나라없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위구르인들은 13억 중국인 속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7월5일의 폭동은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핍박의 설움’이 터져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이슬람)생활에 대한 중국정부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고, 이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경제권마저 빼앗기자 생존의 위기를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충돌로 많은 한족이 목숨을 잃었고, 경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적지않은 위구르족들도 총에 맞아 숨졌다. 중국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는 197명이지만, 세계위구르회의는 최대 8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해외에서 벌어지는 위구르 내몽골 등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 플래카드에 "중국은 모든 민족정치범을 석방하라"는 글이 쓰여있다.>
주목할 현상은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 순식간에 집결한 시위대가 중국 경찰이 대응할 틈도 주지않고 길거리에서 한족(漢族)을 무차별 공격했다는 점이다. 또 위구르족 독립투쟁 세력의 일부는 아프가니스탄 산악지역에 은거한 알카에다와 연계하여 테러리스트 양성과 무기지원 등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카에다는 이미 중국정부에 대한 ‘보복’을 선언했다. 앞으로 북경 상해 등 대도시에서 알카에다식 자살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앞으로 중국 당국의 ‘비상경계일’이 늘어나게 됐다. 3월14일 티벳사태 발발일(2008년3월14일)과 6월4일 천안문(天安門)사태 기념일(1989년6월4일), 그리고 7월5잃 위구르 사태 발발일(2009년7월5일). 중국 정치가 시험에 드는 날도 많아졌다./조선일보 지해범 전문기자 hbj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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