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충격] 미조구치 유조 - (소명출판, 2009) 29쪽 - 42쪽 (발췌)
중국과 “자유”, “민주”
(전략)
중국에 대해서도 환상은 있었다. 중국의 사회주의를 유럽 자본주의 근대를 넘어선 초근대, 후근대의 세계로 간주하거나 혹은 봉건 왕조의 전통을 잿더미로 하여 태어난 불사조의 회생으로 보는 환상. 그 사회주의 혁명을 현실의 역사과정이 아니라, 유럽식 역사이론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환상.
그러나 그 사회주의에 균열이 생기자 환상은 단숨에 ‘사회주의 환멸’로 변하였고, 그 균열은 바로 중국 독자적인 왕조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왕조시대의 갖가지 아시아적, 후진적 요소가 혁명에 혼입되어 그 모순이 문화대혁명의 혼란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도 균열은 실제 역사과정 속에서 검증되지 않고, 유럽식 역사이론에 따라 이해되었다. 즉 중국의 후진성 이론이다. 그래서 일시에 중국의 지식인, 학생, 청년들은 하나같이 유럽의 ‘민주’에서 해답을 구하였다. 바로 그때 천안문 사건이 갑자기 발생했다. 그들이 보기에 중국은 여전히 과거의 중국이었다. 일찍이 1919년 중국 혁명의 기점으로 간주되는 5.4운동의 ‘과학’과 ‘민주’는 실은 사회주의 ‘전체’ 혁명을 위해 보류되었고, 중국에서 개인의 ‘민주’와 ‘자유’는 ‘전체 이익’을 위해 억압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을 5.4 운동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반성과 ‘환멸’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 환상’과 ‘사회주의 환멸’ 사이에 단절은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도 서구 자본주의와의 우열 속에서 발생했고, ‘환멸’도 서구 자본주의와의 우열 속에서 생겨났다. 즉 그것들은 모두 유럽을 기축으로 하여 구성된 세계였다. ‘환상’에서 ‘환멸’으로의 180도 전환도 같은 축 위에 나열된 우월자와 열등자의 딱지를 위치만 바꾸어 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인식의 축 자체, 다시 말해 인식주체인 자기 자신의 좌표를 다시 문제시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환상이든 환멸이든 그들이 대상으로 삼아왔던 ‘사회주의’가 서양이 낳은 역사이론에 근거한 관념적인 지식에 불과했으며, 실제 현실 중국에 있어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중국에 있어 ‘근대’란 어떤 것인가, 중국에 있어 ‘중국이란 무엇인가’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뿐, 중국의 16-17세기 이래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았다. ‘근대’도 아편전쟁의 ‘서양의 충격’을 통해서 이해되었을 뿐, 중국의 16-17세기 이래의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이해된 적은 없었다. 요컨대 중국을 원래 유럽과는 축을 달리하는 세계로 바라보는 관점이 극히 희박했다.
사람들은 천안문 사건 이래 유행이 바뀌면 입는 옷도 바꾼다는 식으로 일제히 ‘사회주의’ 옷을 ‘민주’, ‘자유’로 바꿔입었다. 중국에 대한 판단기준은 ‘민주’ ‘자유’가 되었고, 그것은 서구의 우등생에 비교되는 중국의 열등생이라는 상하 우열에 따르게 되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우열에 있어서 일본은 서구의 하위에 위치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상위에 있다고 인식하는 점이다. 이제까지 중국의 사회주의 우위를 제창했던 소위 혁신적인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민주’ ‘자유’를 중국에 적용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한다. 중국은 ‘민주’의 후진국이며, 우리들은 중국의 국내외 ‘민주’투쟁, 예를 들어 망명지식인의 반정부활동, 티벳족과 위구르족 또는 타이완의 독립운동 등을 지지한다라고 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타이완’과 ‘자유도 민주도 없이, 안전보장에 위협이 되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냉전시대의 구도 속에 스스로 갇혀버린다. 일찍이 동서 관계 속에서 중국을 논해왔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자문은 필요없었다. 왜냐하면 ‘중국이란’이라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동방, 평화세력, 사회주의 세력이라는 내용이 미리 상정되어 있었고,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연대해야 할 대상으로서 자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은 ‘사회주의’로서 기호화되고, 그 기호는 ‘보다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유럽 근대를 초월한 새로운 차원의 근대’를 자명한 내용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환상이 깨지고 180도 바뀌어 ‘후진국’으로 기호화되고, “유럽 근대를 쫓아가는 ‘민주’ 도상국”이라는 내용을 갖게 되자, 일본 지식인들은 새롭게 중국의 ‘민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제까지는 중국의 ‘사회주의’ 내용이 외래의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측면에서만 파악되었지, 중국의 역사에 따라 형성된 중국의 역사적 산물로서 파악하는 형태는 없었다.
(중략)
일찍이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이름에 현혹되어 중국에 反근대, 超근대, 後근대 등의 모자를 씌우고자 했지만, 그것은 유럽기준의 ‘근대’에 근거한 것으로 중국의 실상을 반영하지 못했다. 실상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유럽 근대에 대한 反도 超도 後도 아닌 그것과는 다른 형태의 역사과정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자유’, ‘민주’는 바로 중국의 역사과정 속에 존재하고 그 속에서 성숙될 수 밖에 없었다.
(중략)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 결국 세계를 어떤 시좌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것이 ‘중국을 문제로 삼는 것의 의미’이다.
(중략)
일본인은 메이지 이래 줄곧 유럽 ‘근대’라는 시좌에 의거하여 중국을 멸시해왔다. 일본의 서구화 정도를 중국을 멸시하는 정도와 비례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일본인은 자신의 서구화 정도를 서구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가늠해왔다. 그래서 심지어 일본 아이덴티티는 중국 멸시를 하나의 불가결한 요소로 삼고 있다고 얘기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 중국의 유용성은 여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많은 점에서 서구화와는 역사적 문맥을 달리하는 중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우리 내부의 유럽 시좌를 상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사고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눈에 보이지않는 어떤 힘 – 예를 들어 ‘민주’에 특정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는 어떤 힘 – 의 움직임을 자각하는 매개로 삼을 수 있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 3백년 이래 세계를 뒤덮어 왔던 유럽의 ‘근대문명’을 배경으로 한 知의 차별구조이다.
(중략)
그리고 知의 상황이 이러한 차별적인 것을 계속 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차별적 구조와 싸울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중국을 문제로 삼는 것의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누가 어떻게 중국을 문제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중지식공동체’ 운동을 진행하면서 가졌던 생각은 일본에 있어서 知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학문영역을 좁은 개인 참호 속에 가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知의 세계를 제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게 되었고, 그래서 중국 문제는 대체로 중국연구자의 영역으로 한정되었으며, 중국 연구자 또한 자신만의 연구영역에 갇혀 중국문제를 더욱 세분화하고 그 속에 자신을 구속시켰다. (중략) 하지만 문제 자체가 세분화되다보니 그로 인해 문제의식은 얕아지고 대신에 세밀한 지식만이 표면화될 따름이다. 이때의 지식은 그 근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그 지식 내부의 긴장을 잃게 되어, 그저 지식을 위한 지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러한 지식은 일단 완성되고 나면, 유동하는 현실의 상황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적으로 권위를 행사하게된다. 상황이 다소 변하더라도 그 상황의 변화는 이미 완성된 지식에 충격을 가하지 못하게 되며, 역으로 이미 완성된 지식의 세분화된 패턴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이러한 세분화와 고정화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경계를 넘어서 知의 세계를 광역화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근저의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예를 들어 민주라든가 인권이라든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광역적이지만, 그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없다면 결국 그 역사도 知의 세계의 그것으로 머물게 될 뿐이다. 결국 현상적으로는 그것을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또는 좋든 싫든 간에, 근저에 대한 물음이 없는 지식은 개별적이든 광역적이든 결국은 知의 차별 구조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차별구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이다.
선의에서 출발한 중국의 ‘민주’화에 대한 강제가 어느새 차별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천안문 사건을 전후하여 3개월 정도 타이완의 칭화대학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칭화대학의 교직원 조합은 사건 당시 타이완 정부의 ‘동포’ ‘반공’ ‘민주’ 캠페인에 대항하는 집회를 열어 대륙의 민주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가 아니라, 타이완의 ‘민주’화를 과제로 삼아 한층 더 진전시키는 것이야말로 결과적으로 대륙의 민주화에 대한 지원이 된다고 하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나도 요청을 받아 대륙과 타이완 각각에 민주 과제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도 일본의 민주과제가 있고 민주과제에 선진과 후진이 없다고 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당시 세계의 키워드는 ‘민주화’였고, ‘민주화’가 동서냉전구조의 벽을 허물었다고 하는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민주’는 타이완 정부의 이른바 민주처럼 국제적인 정치적 차별용어로서 기능했다. 그 본래의 기능으로써 ‘민주’에 내포된 차별구도를 타파했던 것은 칭화대학 교직원 조합과 같은 투쟁방식이었다.
그들은 거기에 ‘민주’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닌, 여기에 어떠한 ‘우리의 민주’의 투쟁이 있는가의 관점에 서 있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찍이 “자신 속에 문제를 지니지 않은 자는 중국에 가더라도 아무런 문제를 찾아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중국에 어떠한 ‘민주’ 투쟁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자는 스스로 ‘민주’의 과제를 짊어진 사람이다. 즉 ‘민주’는 ‘거기’의 문제가 아닌, 본래 늘 자신이 속한 장소인 ‘여기’의 과제이다.
그 과제를 맡은 주체야말로 ‘중국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짊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그때 그 문제는 결국 우리의 시좌 혹은 우리의 아이덴티티의 존재방식을 자문하는 것으로 된다. 오오에의 이른바 ‘사고하는 말’로서의 자유와 민주는 그야말로 이러한 자문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