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 구/신 제도주의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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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1편 - 구/신 제도주의 학파 by 트윈드릴

다른 생각 by 아빠A에서 트랙백

우선 식근론 논쟁에서 이야기하는 "제도"에 대한 설명부터 할게요. 언제나 그렇듯이 전부 읽기 귀찮으신 분은 굵은 글씨만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I. 구제도학파란 무엇인가?

1.
구제도학파는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에 걸쳐 당시 '시간성'을 배제한 채 일반화에 몰두한 신고전학파 -- 오스트리안 경제학파의 창시자인 칼 멩거 선생이 신고전학파의 주도자인 알프레드 마셜와 갈라진 여러가지 이유중 하나 ㄳ -- 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경제행위도 다른 인간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형성되어진 사회적 맥락에 입각하여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학파입니다. (이요섭, 2007, p. 89)

고전경제학의 공리주의적이고 초역사적인 법칙을 거부한 베블렌은 새로운 경제학, 즉 '역사적'이고 '진화적'이며 적극적인 인간개념에 기초한 경제학을 주장했다. (베블렌)은 경제행위의 역사적 과정을 뒤케임이나 스펜서처런 '진화론' 적으로 파악했으며 사회진화란 본질적으로 기존에 형성된 습관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환경의 압박에 대한 개인들의 정신적 순응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다.

베블렌은 진화현상에 관하여 물질적 생산수단을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의 변화가 누직적인 변동과정을 통해 진화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관계와 문화가 기술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항상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 본능에 의해 야기된 습관은 물질적 환경이 제공하는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출처: 이요섭, 편저. (2007). "진화경제학의 이해." 서울: 연암사. p. 89]


윗 글을 읽어보면 베블렌의 관점은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사용한 논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어요. 지금이야 베블렌은 "유한계급론"으로 사회학에서나 논의대상에 오르고 있지만 19세기 후반, 마크 트웨인이 "금도금 시대"라고 빈정대었던 당시의 미국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요. 그리고 유한계급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약탈"을 통해 잉여자본을 쟁취하고 그것을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투자하는 것뿐 아니라 하층계급에게 과시하기 위한 "소비"에도 지출한다는 현시적 소비이론은 훗날 진화심리학에 의해 입증되었고, 약간 곁다리이긴 한데 지금은 실증적 연구로 무너진 근면혁명 가설의 기반이기도 해요.

2.
베블렌은 "제도란 사람들이 총체에 공통적인 것으로 정착한 사고의 습관"(베블렌, 현대문명에 있어서 사회의 지위, 1919년) -- 다시 말해, 사람들의 행위와 선호를 결정하는 사회적인 짜임새 -- 라고 정의했어요. (이요섭, 2007, p. 92)
1930년대 이후의 구제도학파는 '규칙과 규범'에 가까운 초기의 정의에서 이미 벗어나, 경제학이라기보다 정치학에 가깝게 변질되어 정부와 국가의 공식적인 제도 -- a.k.a. 관료조직과 법률 및 정책 -- 에 더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래서 설명할게요.

3.
구제도학파는 제도적 변화(혹은 진화)는 사회적/정치적 의지 -- 주로 계급 투쟁을 계기로 한 (민주적 절차나 폭력을 동반한) 사회적 합의 -- 의 결과물로 봤어요.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과 맞물려 구제도학파의 과반수는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고, 사회주의에 경도되기 일쑤였기에 이렇게 진화한 제도가 시장을 일부 혹은 완전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기도 했지요. 더 급진적인 일부는 형식적인 제도 -- 명시적인 규칙과 조직 -- 이식을 통해 실질적인 제도 -- 암묵적인 규범과 인식 --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관료주의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환상 아닌가요? -_-;;; )

베블렌의 관점:
기존의 제도(=규칙 + 규범) 및 조직 -> 기술(문물 및 지식)진보 -> 물질적 환경 변화 -> 본성으로 야기된 습관(=규범) 변화 -> 계급간의 투쟁 -> 기존의 형식적인 제도(=규칙) 및 조직 변화

급진적인 관점:
기존의 형식적인 제도(=규칙) 및 조직 변화 -> 물질적 환경 변화 -> 본성으로 야기된 습관(=규범) 변화

4.
이제 구제도학파를 정리하자면:

제도경제학은 통일된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 학자의 이론적 배경은 다소 상이하지만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쾌락과 고통은 비교계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 개인심리학에 기초를 둔 전통적경제학의 기계적 세계관을 타파하고, 집단심리학 혹은 행동심리학을 기초로 하는 유기적 세계관을 취한다.
(2) 경제생활에 있어서 제도의 역할을 강조하며, 제도의 합리적 진화과정의 연구를 중요시한다. 이 경우 제도란 인간 본래의 성향과 외적 환경과의 상호제약에 의해서 형성된다. 
(3) 연역적 분석방법을 배제하고 귀납적, 역사적 분석방법을 취하며, 동시에 실천과학 즉, 역사, 문화인류학, 정치학, 사회학, 철학 및 심리학 등의 성과를 받아들인다.
(4) 여러 이해의 대립투쟁을 인정하고 동시에 사회개량주의적 해결(주: social engineering)의 가능성을 믿는다. 베블렌의 기술주의적 사회개혁사상 및 커먼즈의 합리적 자본주의의 평화적, 집단주의적 이행설 등은 이를 나타내고 있다.

[출처: 전도일. (1999). "경제이론발달사." 서울: 교우사. p. 354. - 이요섭, 2007, p. 98-99에서 재인용]



5.
아마 진화심리학을 전공하시는 분들 -- 특히 집단가설 분야 -- 은 자신이 제도적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구제도학파와 공통점이 많다는 점을 발견하셨을 것 같아요. 원래 구제도학파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많이 차용해 경제학으로 옮겨간 것이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II. 신제도학파란 무엇인가?

1.
신제도학파가 구제도학파와 결정적으로 다르게 된 이론적 기반은 '거래비용이론'과 '공공선택이론'입니다. 물론 '거래비용이론' >>(넘사벽)>> '공공선택이론'이란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지만요.

'거래비용이론'은 간단히 말해 모든 거래(재화와 용역과 특히 정보의 교환)에 비용이 든다는 이야기이지요. 이건 꼭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네요.

코스는 1937년 「기업의 본질(The Nature of the Firm)」에서 시장에서 기업 -- 개인이 모인 집단 -- 이 생겨나는 이유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설명하죠.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매번 무언가를 할 때마다 시장을 통해 타인과 거래를 한다면, 그때 들어가는 거래비용 -- 단지 금전적 비용뿐 아니라 시간 및 신뢰성 담보 포함 -- 이 타인을 장기적인 계약관계로 묶은 다음 명령으로 시킬 때와 비교해 많다면, 그런 경우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본가에게 있어 비용 대 효과면에서 낫다고요.

예를 들어, 자본가가 매일 금사과 10개를 100만원을 주고 사야 하는데, 교환당 거래비용(transaction cost per exchange)가 10만원 -- 시장에서 예산에 맞게 금사과를 탐색하고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 -- 이라고 치면 구매비용의 1%가 거래비용으로 소모됩니다. 한달에 300만원이죠.

대신 자본가가 대리인을 한달 100만원의 월급으로 고용해 매일 100만원을 주고 금사과 10개를 사오라고 시킨다면, 300만원이었던 거래비용은 100만원으로 줄어드는 것이죠. 아니면 아예 자본가가 이 업무를 금사과를 전문적으로 구매하는 기업에게 아웃소싱해 매월 3050만원을 주고 금사과 10개를 매일 공급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1.1.
그리고 이러한 발견을 외부효과와 이해관계의 마찰 문제까지 확장시키면서 정교한 이론으로 완성시킨 논문이 「사회비용의 문제(The Problem of Social Cost)」이지요. 코스의 이론에 의하면 만약 거래비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제도이든지 이해집단의 대립과 외부효과를 제도 안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어요. 
'거래비용이론'이 획기적인 발견인 이유는 거래비용이 없는 이상적인 제도를 '영점'으로 잡아 현실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제도를 거래비용이란 기준 하에 한줄로 나열해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예요. 이것은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물론 코스는 거래비용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선 안되고 "주류경제학의 도구만 갖고 규범적 차원의 논의, 정치철학적인 논의를 수행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후생경제학은 규범적인 차원도 감안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장의 생각은 다들 비슷한듯 ^^)

X. 접근방식의 변화
나는 해로운 효과(역주: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 경제학자들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가 단지 분석 중에 저지른 몇몇 실수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후생경제학 문제를 다루는 기존의 접근방식에 있는 기초적인 결함으로부터 유래한다.
민간 부문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private and social products - 역주: 시장과 공공재라고 표현할까 했는데 이쪽이 의미에 더 맞을 것 같음 ㄳ) 사이의 차이에 관한 분석은 그 시스템의 특정한 결함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 결함을 제거하는 정책이라면 뭐든지 당연히 바람직할 것이란 신념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조정책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시스템의 다른 변화들 -- 기존의 결함보다 더 많은 해로움을 낳을지도 모르는 변화 -- 로부터 관심을 거둔다. 이 논문의 앞 부분에서 우리는 위와 같은 예시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문제를 꼭 이런 식을 접근할 필요는 없다. 기업에 관해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습관적으로 기회비용을 갖고 접근하고, 생산수단의 특정한 조합으로부터 얻은 영수증들(역주: 총비용)을 대안적 사업방식과 비교한다. 경제정책에 대한 문제들을 다를 때 비슷한 방법을 써서, 여러 사회적 합의(social arrangements - 역주: 제도나 정책을 가리킴)로 인해 도출되는 총생산량과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 논문에서 분석은 해당 경제학 분야에서 자주 그러듯이 시장가격 기준 총생산량의 가치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제도나 정책들 사이의 선택은 (이 논문이 다룬 총생산량)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며, 각 제도나 정책이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모든 효과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프랭크 나이트(Frank. H. Knight)가 자주 강조했듯이, 후생경제학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서심리학(aesthetics - 역주: 직역은 미학)과 윤리학의 연구로 귀착되어야 한다. (밑에서 이어짐.)

[출처: Coase, Ronald. (1960). "The Problem of Social Cost." p. 439 - Journal of Law and Economics (October 1960)에서 재판 - 링크]



"의도적이지 못한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를 간과하는 非오스트리아경제학파 계열 시장원리주의자들와 관료주의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ㄳ

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장을 포함해 모든 제도에는 거래비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시장에 거래비용이 드니까 다른 제도가 더 나을 경우도 있겠구나 라는 발상은 지극히 온당해요. 그러면 "시장 원리를 일부 적용시켜야 할지 안할지는 구체적인 경제학적 조사로 정해질 문제"가 되니까요. 하지만 전통적으로 공공재처럼 정부의 역할로 여겨진 영역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시장에 바탕을 두지 않은(except for market-based policies)" 정부의 개입이 성공보다 실패사례가 훨씬 더 많고 막상 성공한들 비용대 효과면에서 적자일 때가 대부분이라고 무수한 경험적 연구(Winston, 2006)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시장에 거래비용이 드니까 시장 외의 방법으로 조정하는 게 효율적인 경우가 예상보다 훨씬 크겠네라는 생각'은 조잡한 시장원리주의와 비슷한 수준의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위에서 이어짐.)
이 논문에서 논의한 문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의 두번째 특징은 일종의 이상적인 세계와 자유방임적 상태(a state of laissez faire - 역주: 정부의 역할이 최소화한 상태)의 비교를 바탕으로 분석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비교대상인 대안(역주: 위에서 언급한 이상적인 세계)의 본질이 절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느슨한 사고과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유방임적 상태에서 화폐, 법률이나 정치체제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건 어떤 체제인가? 이상적인 세계에 화폐, 법률이나 정치체제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건 어떤 체제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이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고, 그렇다면 누구나 제멋대로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상적인 세계가 자유방임적 상태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기엔 분석이 거의 필요없다 -- 자유방임적 상태의 정의와 이상적인 세계의 정의가 같지 않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이상적인 세계라고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현상황에서 그 (이상적인 세계)까지 어떻게 갈 것인지 아직 발견해내지 못했으므로, 그런 논의는 전부 경제정책에 있어 무관하다. 더 나은 접근방법은 현실과 비슷한 상황을 가정하고서 분석을 시작하여 제안된 정책 변화의 효과를 조사하고 새로운 상황이 전체적으로 봐서 기존의 상황보다 나은지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정책에 대한 판단은 실제 상황과 어느 정도 연관을 갖게 될 것 같다.

[후략 - 코스는 외부효과를 고려할 때 생산수단을 물질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의 "권리"로 보는 것이 분석에 유용하다고 밝힘. / 역주 - 이 관점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가 1890년대부터 주구장창 주장한 것과 똑같은 관점임. 한편, 코스의 거래비용이론은 하이에크의 결론 -- 정부 및 기타 사회제도가 (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장에 드는 거래비용을 최소한도로 낮추도록 진화되어 가며, 이런 인위적인 질서는 자생적 질서에 필수적이고 보완적인 동시에 부차적임 -- 과 배치되지 않음.]

[출처: Coase, Ronald. (1960). "The Problem of Social Cost." p. 440]


주관적인 견해인데, 문제는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시장에 드는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제도(사유재산권, 계약 준수, 독립적인 사법기구, 원활한 정보교류 등등) 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지만 -- 그래도 현실은 시궁창 OTL -- 시장외의 방법에 대해선 성공보다 실패사례가 훨씬 더 많고 막상 성공한들 비용대 효과면에서 적자일 때가 대부분이고(Winston, 2006), 정치세력의 전횡이나 정치세력의 교체 등으로 인해 오히려 시장참여자가 극도로 회피하려고 하는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죠. 그러므로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저의 의견을 드리자면, 명백하게 시장실패가 역사적으로 입증된 분야(공공재 및 외부효과 ㄳ)를 제외하면 시장외의 방법은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미봉책일 뿐 영구적으로 적용할 것이 못된다고 봐요.

1.3.
그리고 '공공선택이론'은 정치인(관료 포함)과 유권자를 모두 사적 이해를 추구하는 하나의 '시장 참여자'로 보고 어떻게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에 거래 -- 유권자는 표와 돈을 제공, 정치인은 유권자의 이해관계에 맞는 정책 제공 ㄳ -- 가 이뤄져 정책이 결정되는지 과정을 연구합니다. [과연 계급투표는 가능한가? [경제학적 관점] by 트윈드릴, IV. b. 투표의 무용성 참조 - 링크] 

(사실, '공공선택이론'이 구제도학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만. ;;;)

1.4.
그리고 신제도학파는 '시장경제체제'를 타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해야 잘 움직일지 연구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차이점이 있지요.


2.
사설이 너무 길어졌는데, 먼저 제도와 조직을 먼저 정의내린 다음, 신제도학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학자마다 여러가지 정의가 난립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를 살펴보면, 제도란 개인의 행동을 좌우하고 사회 내의 상호작용(제도적 짜임새: institutional framework)를 구성하는 명시적인 법규와 암묵적인 사회적 규범(역주: 문화 포함)이예요. 반면, 조직은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자 다른 집단에 대항해 집단적인 협동을 위해 만들어낸 명시적/암묵적 합의를 가리켜요.
예를 들어, 사유재산권 제도는 법으로 정해진 명시적인 법규와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사회적 규범으로 나눌 수 있어요. 만약 법이 사유재산권을 보호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했다고 한들, 그 법이 제대로 적용이 안되면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사회적 규범이 될 수 없는 것이고요. (대표적인 예: 대부분의 후진국 OTL) 반대로 사유재산권 제도가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았어도 사회적 규범에 의해 얼마든지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지하경제가 자라날 수 있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예: 북한, 골드러쉬 시절의 미국 서부) 어느 쪽이든 문제점은 하나의 제도가 법규나 규범 면에서 부족하면 그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거래비용이 획기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지요.


3.
신제도학파에는 3가지 분파가 있습니다. 우선 신제도학파의 선구자인 더글라스 노스가 포함된 사회학적 제도주의(Sociological institutionalism), 합리적선택 제도주의(Rational choice institutionalism), 마지막으로 역사학적 제도주의(Historical institutionalism)이지요. (어느 분의 설명에 의하면 "디테일로 보면 훨씬 다양"하다는데 제가 배움이 얕아 OTL 거기까진 다루지 않겠어요 ^^)

신제도학파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거의 확고하게 형식적인 제도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습화된 제도가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밑으로는 굵은 글씨 넣지 않습니다.)
4.1. 사회학적 제도주의
사회학적 제도주의는 수많은 다른 제도들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는 환경을 가정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란 제도를 본다면, 이 제도는 사회의 교육제도의 일부인 동시에 정부의 자금지원(일시적인 법규 = 정책)이나 일반 시민의 교육열(규범) 등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사회적 압력(peer pressure)"라고 부름. 진화심리학에선 '선택압'이라고 하던가요?)

이러한 환경에서 각 제도는 전체 환경에 영향을 받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해요.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단순히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뿐 아니라 이 제도적 환경에서 "정당성"을 획득해야 하는 거죠. 여기서 정당성의 기준이란 그 사회의 기존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예요. 하지만 새로운 제도가 유입되면 그것이 기존 제도에 영향을 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적 환경은 진화하게 되는 것이지요.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옛날 악습이 새로운 전통으로 대치되는 것이지요.

혁명이나 정복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기존 제도(법규와 규범)이 무너지고 일종의 공백이 생겨요. 그 공백을 새로운 제도가 채울 수 있는데, 어느 제도가 먼저 정착하느냐는 그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규범이 좌우하는 것이지요. 정복자가 강제로 제도를 이식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제도가 실질적으로 정착할 수 있느냐도 피정복자의 제도에 달려있다고 보면 되어요. (물론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중남미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음 -_-;; )

그렇다면 개인은 어떨까요? 제도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그 제도의 규칙과 규범에 어느 정도 제약을 받고 또한 의무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어요. 간단히 말하면 흔히 얘기하는 '상황이랑 주제 파악'을 하면서 행동하는 것이죠. 물론 개인이 무조건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예요. 하지만 "천재는 시대의 산물"이고,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갈파했듯이 역사 진보에 있어 개인의 역할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사회학적 제도주의는 보고 있어요. (저는 이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아요.)

결론적으로 말해 정책이든 법률이든 (고전적인 의미에서 '형식적인') 제도이든 이식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제도와 경쟁한 끝에 받아들여져 '정당성'을 획득해야만 그 제도적 환경에 사는 개인의 행동이 변한다는 이야기이지요.


4.2. 합리적선택 제도주의
신제도학파의 분파인 합리적선택 제도주의는 합리적선택이론(집단을 다룰 때는 합리적기대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이 제도를 통해 자신의 목표와 욕구를 채울 수 있게 된다는 점을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깨닫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제도는 각 개인이 자신의 효용을 최대화 하도록 시도하는 "규칙과 유인의 체계"입니다. 한편, 개인의 합리성은 제도에 의해 일정 수준 제약을 받아요. 예를 들어, 손재주가 좋은 선비는 자신의 소질을 계발해 돈을 버는 대신 사농공상이란 인식에 가로막혀 글을 배우는, 얼핏 보기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사회학적 제도주의에서의 개인은 제도에 순순히 따르는 체스말에 가깝고, 합리적선택 제도주의에서의 개인은 어떻게든 제도를 벗겨먹으려드는 장삿꾼에 가깝죠.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비유일 뿐입니다. 사회학적 제도주의가 제도의 속박을 강조하지만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반대로 합리적선택 제도주의가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지만 제도의 강제성을 무시하는 것도 절대 아니예요.

한편, 합리적 선택 제도주의가 주류경제학에 편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히 말해 주류의 언어(Lingua Franca)를 쓰기 때문이죠. 주류경제학이 수리모형을 만들 때 애용하는 이론적 기반(합리적선택/기대이론)을 공유하므로 수리모형에 쓰이는 가정으로 넣기가 편해요. 컴퓨터로 말하자면 플랫폼을 공유한다고나 할까요. ^^

무엇보다 합리적선택 제도주의는 정책면에 있어 제도적 유인을 설계하기가 편해요. 반면, 사회학적 제도주의나 역사적 제도주의는 계량화가 힘들고 접근법도 다르기 때문에 수리모형을 만드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주류경제학이 완전히 배척하는 건 아니고요, '너흰 유용성이 떨어지니 아직 행님들 노는데 끼어들지 마라' 이런 거죠. 그러다가 쓸만한 연구가 나오면 결론만 가져가고 그러는 거고요.



4.3. 역사학적 제도주의
'역사학적 제도주의'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경로의존성'입니다. 제도적 환경이 처음 생겨났을 때 정한 경로가 그 환경에 속한 제도들이 발전하는 와중에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이야기예요. 그 '경로의존성'을 문명의 격차란 거시적인 관점에서 잘 설명한 책이 바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이고요. 일부 문명은 진보하지만, 일부 문명은 순환의 함정에 빠져 몇백년, 아니 몇천 년이 지나도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회에 위기가 발생하면, 구성원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제도의 변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봐요. (자발적인 예: 페리 개항 이후의 일본 / 강제적인 예: 태평양 전쟁 이후의 일본)


4.4.
경제학에는 수많은 세부분야가 있고 각 세부분야가 요구하는 목적에 맞는 이론이 다른데 합리적선택 제도주의는 만능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도구적인 관점에서 주류의 일부인 거예요. 만약 사회학적 제도주의가 다루는 내용이 계량화가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수리모형에 가져다 쓸 수도 있을 테고요.

경제사는 수량경제사(낙성대연구소)처럼 수리모형을 다루기도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거나 영향을 주려는게 아니라 과거를 관찰하는만큼 계량화가 힘든 분야도 질적 연구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문화"란 요소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사회학적 제도주의에 어울리는 학문이지요.


4.5.
편의상 신제도학파 내의 분파를 나누었지만, 한 분파에 속한 학자가 엄격하게 그 분파의 방법론에 맞는 연구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니예요. (학계가 무슨 도제 제도도 아니고 -_-;; ) 사회과학의 분파가 다들 그렇듯이 서로 겹치는 경우도 많고 영향을 주고 받는 경우도 많으니 엄격하게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5. 두줄요약
수박겉핡기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못된 부분은 지적해주시고,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이예요. ^^


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2편 - 아빠A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어짐.



참고자료:
이요섭, 편저. (2007). "진화경제학의 이해." 서울: 연암사.
Coase, Ronald. (1960). "The Problem of Social Cost."
Diamond, Jared. (1997). "Guns, Germs and Steel." New York: W.W. Norton & Company.
Winston, Clifford. (2006). "Government Failure vs. Market Failure."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e-AEI
기타 본인이 다양하게 섭렵한 책과 논문 [...갑자기 포스팅의 신뢰도가 추락하는 소리가 들리네요. OTL]


덧. 며칠째 (주류이건 비주류이건) 다른 학파 이야기를 하려니 "이러다가 자아분열 되는 것 아닌가?"하는 염려가 드네요. ㅎㅎ 그런데 우리 학파에 대해 쓰려고 하면 조금이라도 틀리는 불경죄를 감히 저지를까봐 손이 덜덜 떨린다능 ㅜ.ㅡ 잘 써봐야 신앙간증이고 못 쓰면 팬레터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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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2편 - 아빠A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 by 트윈드릴

다른 생각 by 아빠A님에서 트랙백
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1편 - 구/신 제도주의 학파 by 트윈드릴에서 이어짐


"...정치적 자유와 기본인권(civil liberty)의 출현은 경제적 자유와 떼놓을 수 없이 이어져 있다."(p.829)

이점에 대해서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페이퍼도 있기는 하죠.

http://sprinter77.egloos.com/2922168

원본페이퍼는 요기 [링크: http://www.people.fas.harvard.edu/~jrobins/researchpapers/unpublishedpapers/jr_IncomeDemocracy.pdf ]

민주주의의 '증가'정도와 경제의 '성장' 정도는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 잘나가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옛날부터 그냥 잘 살았었다, 라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경제적 자유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다, 라는걸 전제하는 이상, 저 굵게 표시된 문장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증가정도와 경제의 성장은 상관관계(원문의 답글에서 제시된 대로, 인과관계일 필요는 없지만 말이죠...)가 있어야 하는데,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듯 합니다. 아니면 경제적 자유는 민주주의와 독립적이어야 하는데, 아마 이걸 증명하는 것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듯. 오래된 논쟁거리죠 이것도?;;;


먼저 저는 오돌또기 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지만 해당 포스트만으로 짐작하건대, 논문에서 자의적인 결론을 뽑아내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고밖에 안 보이네요. 물론, 독립적인 사례로 전체를 판단할 수야 없지만 저의 첫인상은 그렇네요.

"정치적 자유 + 기본인권 = 민주주의"는 아니예요.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인식에는 "정치적 자유 + 기본인권"이 민주주의와 동일하게 여겨질 지 몰라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엄격하게 따지면 다르죠. 그리고 저는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이나 원인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요.

민주주의 실현과 경제 성장과는 인과관계는 물론이고,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아담 셰보르스키의 논문 링크) 일부 산유국을 제외한 모든 선진국(1인당 국민소득 기준)이 민주주의를 정치 체제로 삼고 있지만, 민주화는 잘 살고 못 살고 와는 전혀 관계 없이 찾아오고 다만 잘 사는 나라가 그 기회를 붙잡아 민주주의를 영속적으로 유지할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것뿐입니다. 덧붙여 경제 구조와 정책(무역, 환율, 재정, 통화, 복지) 등이 정부가 경제를 갖고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최대한의 영역이고, 정부가 경제를 망치기는 참으로 쉬워도 반대로 경제를 어떻게 성장-발전시킬 수 있냐는 윌리엄 이스털리가 The Elusive Quest for Growth에서 밝혔듯이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실현과 경제 성장을 연결시키는 것은 자의적인 논리일 뿐, 논리적이나 실증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는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만의 장점이 많이 있지만 경제성장은 그 중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물론 민주주의의 장점--예를 들어, 불확실성 감소 및 정책의 연속성 강화, 투명성 강조 등등--이 경제성장에 다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주: 명료화를 위해 "그 기회를 붙잡아"를 추가했습니다.)

[출처: http://hvanb756.egloos.com/3293617]



위에서 언급한 아담 셰보르스키가 민주주의와 경제성장과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가난한 사회는 민주주의를 할 능력이 없으니 독재를 해서라도 경제를 발전시키는 게 낫다는 군부독재 정당화논리"를 반박하기 위해서였지요.


나는 정치체제와 경제성장 간의 상호관계를 연구한다. 두 가지 질문를 논의하도록 하겠다. (1) 경제발전이 정치체제의 출현과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가 와 (2) 정치체제가 경제적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가 이다. [중략]

가난한 나라가 부유한 나라보다 일반적으로 느리게 성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부분의 가난한 나라가 독재정이고 모든 부유한 나라가 민주정이므로 민주정 하에 경제성장이 빠르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허나 그것은 유효한 결론이 아니다. 차이는 그 정치체제를 둘러싼 환경(conditions)이지, 정치체제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정치체제를 둘러싼 환경과 그 정치체제의 효과를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 정치체제가 출현하고, 어떤 조건하에 살아남거나 죽는지 이해가 필요하다. [중략]

중간 요약 (주: 위의 (1)번 질문에 대한 대답):
우리는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흔하고 매우 가난한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드물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경향을 관찰할 수 있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의 결과로써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국에서 민주화가 일어날수록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경로는 다양하다. 사실, 민주화는 예측할 수 있는 패턴을 따라가지 않는다. 허나 민주주의가 어떤 이유든 간에 일단 정착하고 나면, 그 생존은 몇 가지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요인들에 달려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1인당 소득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경제발전의 수준이다. 하지만 정치제도(political institutions - 역주: 헌법, 권력분립, 사법권 독립 등을 가리킴) 역시 중요하다.

[중략 - 8페이지 동안 민주정과 독재정이 각각 생산수단(자본=투자 및 노동)과 정치적 안정과 인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루고 있음.)

결론:
만약 민주주의가 이따금 가난한 나라에서 갑툭튀(spring up)해도 빈곤 앞에서 굉장히 연약하다. 허나 부유한 나라가 (민주화된 경우라면) 민주주의는 난공불락이다. 그렇기에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독재자의 지배를 받을 확률이 높다. [중략]

환경적 요인의 스펙트럼 전체를 감안해 국가들을 관찰할 경우, 정치체제는 총소득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일반적인 염려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가난한 나라에서조차 투자율을 낮추지 않는다(역주: 가난한 사람은 소비가 우선이기 때문에, 저축을 강요/유도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투자가 잘 안된다는 관점이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경제학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음 ㄳ). 국가가 가난하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통치자가 선출되든 강제로 권력을 잡고 있든 별다른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독재정은 노동력의 증가와 임금을 낮추는 데 의존하나, 민주주의는 보다 높은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기술진보에 보다 많은 혜택을 얻는다. 부유한 독재정 하의 성장이 부유한 민주정에 비해 노동의존적이고 노동착취적이고, 그 때문에 소득의 기능적 분배가 다르긴 해도, 총소득의 평균 증가율은 비슷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전의 제단 위에 민주주의를 희생시켜야 할 조그마한 근거조차 찾지 못했다. 지난 50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극소수의 국가들은 독재정 하에서뿐 아니라 민주정이었더라도 이러한 위업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비슷하다. 평균적으로 보면, 두 체제 하에 총소득은 비슷하게 증가한다. 덧붙여 1인당 소득은 민주주의 하에서 더 빨리 증가한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 국가는 낮은 인구성장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독재정은 오직 "안정적"일 경우 -- 다시 말해, 그 누구도 독재자가 바뀌거나 독재정 자체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때만 --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독재정 하에선 정책이 독재자의 의지 -- 때때로 변덕 -- 에 달려 있기 때문에 독재정은 경제적 성과에 있어 크나큰 편차를 보인다. 몇몇은 기적을 만들었고, 몇몇은 재난을 만들었으며 대부분 둘 다 만들어냈다. 정책과 성과가 워낙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독재정 하의 국민은 앞날을 설계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가정은 가장 위험도가 낮은 자산 -- 이른바, 아이들 -- 을 축적한다. 그 결과, 독재정 하에선 1인당 소득은 비교적 느리게 올라가고, 비교적 짧은 기대수명을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자원부족이 삶을 궁핍하게 만드는 가운데, 정치체제는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물질적 풍요에 있어서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출처: Przeworski, Adam. (1991)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 링크]


한줄요약: 삼성에 입사한다고 애인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삼성에 입사한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 오래 연애할 가능성이 높아짐. ㄳ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현재의 경제 격차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제레드 금강석씨가 말한대로, '원래 그 동네가 먹고 살만한 동네여뜸' 이론 + 기술 확산(기술확산에는 가축과 종자의 확산이 크죠) 이론 보다 나은건 별로 없는것 같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는 원래 잘 나갈만 해서 잘 나가는거고, 최근 300년간 서구보다 뒤쳐진 것은 그냥 '잠시 그랬던' 것 뿐일 수도 있는거죠.


여기에 대해 몇 문장을 쓰다가 아무리 봐도 어그로를 끌 것 같아 지웁니다. [...]

다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이론은 거시적인 의미에서 '문명의 격차'를 설명하는 것이고, 더글라스 노스의 이론은 좀 더 단기적인, "어째서 다른 나라 -- 특히 프랑스(와 포머란츠 덕분에 중국도 포함?) -- 가 아니라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근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설명을 잘"하는 근대화론이란 차이점이 있어요.

그리고 일부 신제도학파가 전통적인 의미의 '제도'의 개념을 확장시켜 문물, 문화, 심지어 신호체계와 종교체계까지 포함시키고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신제도학파 역사학적 계열에 들어간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여전히 개인적인 의견을 추가하자면, 제도주의의 기본 전제는 제도를 적용할수 있는 '관료주의적 시스템'이 안착이 되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이 오히려 일반적인 제도주의보다 동아시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도 있죠. 이 관점에서 보면 제일 필요한 a는, 제도가 아니라 관료주의의 안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조선시대의 근대화는 1400년대부터 시작하는군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때 근대적인 의미의 "관료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예전 식민지였던 독립국가에게 있어 '관료주의적 시스템'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영국에서 100여년에 걸쳐 일어난 제도의 변화를 최대한 압축 --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 시켜 강제이식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아빠A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형식적인 "제도"를 강제이식했다고 한들 성공적으로 이뤄진 케이스가 거의 없고, 오히려 '관료주의적 시스템' 때문에 제도가 형식만 남아 소시민을 지하경제로 몰아내는 경우가 후진국에 다사다난하다는 거죠. 에르난도 데 소토의 『자본의 신비』를 요약해서 인용하자면(지금 책이 없어서요 ^^),

저자와 연구팀은 그 법적 난관을 알아보기 위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직접 조그만 의복점을 차리기로 한다. "그후 연구팀은 서류를 작성하고 대기줄에 서서 기다리고, 페루에서 자영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증명서를 얻기 위해 리마 도심에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했다. (연구팀이) 매일 6시간을 소모한 결과, 간신히 자영업 등록을 마쳤다 -- 289일 후에 말이다"(p. 18).

이것은 그나마 양반인 것이 이집트에서 국가가 소유한 사막의 땅을 구입해 합법적으로 등록하기 위해 걸리는 절차는 31군데 기관을 거쳐 77개의 관료적 절차를 마쳐야 하는데, 대략 5년에서 14년이 걸린다. 농지를 주택지로 변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6년에서 11년 사이다. 470만명의 이집트인이 토지를 불법점거하고 주택을 짓는 이유를 알만하다. 덧붙여 하이티에선 토지 구입과 등록에 19년이 걸리는데, 이 절차를 마친다고한들 구입자가 토지를 완전히 합법적으로 소유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조사한 나라 모두 합법적 등록만큼이나 합법적 유지가 거의 힘들었다"(p. 21). 도시 이주민은 법의 테두리에 들어오기 워낙 힘들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요약 및 번역은 본인]

[출처: De Soto, Hernando. (2000). "The Mystery of Capital." 서지 정보 차후 입력 OTL]


혹시 효율적인 '관료주의적 시스템'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라면 18세기와 19세기에 지방관료가 얼마나 민중을 착취했는지 조선사부터 읽어보시길 권유드려요. [...]


그 외에도 한국의 경제성장에는 정치적으로 가까운 곳에 일본과 미국이라는, 세계 1,2의 '시장'이 있고 이 시장과 한국이 '연결'이 되었다, 이런 류의 이슈가 훨 크지 않겠습니까? 더 큰시장 -> 더 잘 되는 분업이라는 아담스미스의 가장 기본적인 논제를 따르자면 말이죠.


"트윈드릴 2010/06/30 05:42 # 삭제
신제도학파의 근대화론의 핵심주제는 "만약 어느 나라가 근대화한 요인이 a, b, c, d, e있으면 다른 b, c, d, e가 없다고 가정하면 이빨 대신 잇몸으로 씹을 수 있을지 몰라도 a가 없으면 근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1989년 논문에선 저렇게 단정짓지 않았지만 후속 연구로 입증 ㄳ)"라는 이야기니까요. a보다 b나 c가 실제적으로 근대화에 기여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a가 없었다면 b나 c가 생길 수 없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셔도 상관없고요. [출처: http://hvanb756.egloos.com/3340090#7783207.03 ]"



경제사는 제대로 배운적이 없다보니 좀 주저리 주저리 한 편입니다만, 정책에 발가락 끝이라도 담구고 있는 처지에, 요즘 처럼 정책을 에브리바디 서로 배끼는데도 경제의 차이가 확확 나는걸 보면 제도주의에 대해서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능;;;


저는 오히려 정책을 에브리바디 서로 베끼는데도 경제의 차이가 확확 나는걸 보면 제도주의(더 나아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에 대한 확신이 드는데 관점의 차이이려나요? ^^ 

어째서 경제성장에 비우호적인 제도적 구조(institutional framework)를 갖고 있는 국가들(economies)이 단순하게 성공적인 국가들의 체제를 베끼지 않을까? 그들은 베끼거나 아니면 최소한 베끼려고 노력한다. 시장경제를 생성하려는 돌진은 제3세계와 과도기 국가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결과를 보라. 지금까진 성공적인 중국과 체코부터, 지금까지 성공적인 모습이 몇 안되는 구 소련 공화국까지 결과는 다양하다. 그리고 여전히 폐물 꼴인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도 있다.

[중략 - 기존의 개발경제학이 기술이나 인적/물적 자본처럼 외견상의 형태에 집중한 것을 비판한 뒤, 국가경제와 정책에 채찍과 당근을 골고루 섞어 개인과 집단의 바람직한 행동이 경제성장과 연관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함.]

우리가 전체 과정을 이해하기엔 모자라지만, 나는 몇몇 설명을 제안하고자 한다. ... 첫째...경제상장의 핵심원인은 정치-경제의 제도적/조직적 구조이다. ... 둘째, 경제성장은, 타산적인(impersonal) 정치적 및 경제적 시장(역주: 정치적 시장이란, 공공선택이론에 의해 정치인과 관료가 유권자와 거래 -- 표를 주고 정책을 받음 -- 를 하는 것을 가리킴)에 있어 낮은 거래비용을 제공할 안정적인 정치/경제적 제도에 달려 있다. 셋째, 사회의 가치관(belief system)과 그것이 어떻게 진화하느냐에 따라 제도와 제도의 진화가 결정된다.

[중략]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 두 개 남아있는 가운데 이 논문을 마친다...(1) 경제적 변화는 과정이며 그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경제이론의 정적인 본질은 그 과정을 이해하는데 부적합하다. ... (2) (시장) 행위자의 가치관과 인간 학습의 본질은 우리가 추구할, 진화중인 제도적 정책들을 정한다. 신고전 경제학파의 합리성 가정은 개인이 자신의 사익추구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그에 맞춰 행동한다. 1만년에 걸친 인류의 경제사는 그러한 가정이 굉장히 잘못되었음을 알린다.

[출처: North, Douglas. "Some Fundamental Puzzles in Economic History/Development."]


결국 같은 정책을 베낀다고 해도 누가 그 정책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거죠. 그 원인을 신제도학파나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나 사회의 구성원에게서 찾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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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3편: 제도의 정착 [수정]

hvanb756.egloos.com/3428771
*강희대제 님과 아빠A님과 비밀글 님의 지적에 따라 일부 내용 추가 및 삭제합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이 설명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아빠A님이 갖고 계신 '충분한 근거'의 기준이 저와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오해를 할까봐 덧붙이는데 기준의 높고 낮음은 각자 마음이므로 어느 정도의 기준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기란 힘듭니다. 일반적으로 이공계 분들이 기준이 높고,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은 이론에 필수적인 근거나 반증의 기준이 널럴한 편이지요 -_-;; *

아빠A님의 식민지근대화론 관련 포스팅들에 대한 설명

I. 누군가가 살러간 동네 vs 안살러간 동네? by 아빠A - 링크: http://sprinter77.egloos.com/3014735
0. 들어가기에 앞서
아빠A님께서 먼저 식민지근대화론 찬성자의 논리를 잘못 이해하고 계시므로 -- "일본의 식민지는 '살러 간' 식민지고 다른 국가들의 식민지는 수탈하거 간 식민지라서 차이가 난다" -- 식민지근대화론이 차용하고 있는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개인적으로는...그냥 그 동네가 한족들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지역이니 그런거지." 첫번째부터 세번째 문단까지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맞는 말이고, 저도 동의하니까요.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입니다.

요컨데, 일본의 식민지는 '살러 간' 식민지고 다른 국가들의 식민지는 수탈하거 간 식민지라서 차이가 난다, 라는건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치환한, 사실상 개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네들은 '살러 갔다가 실패'했지. 그리고 유럽과 기후가 비슷한 동네, 즉 남아공에만 정착에 성공한 것이다. 그 외에 아메리카 지역은, 북아메리카는 그럭 저럭 기후도 견딜만 했을 뿐 아니라, 선주민의 대부분이(90~95% 정도라고 하던데...) 사실상 질병의 형태로 전멸하지 않았나. 빈땅에서야 천천히 정착해도 되지.

물론 이 경우 이번에는 '영국 예외론'이 튀어나온다. 영국인 식민지들은 그나마 사실 성공한 편에 속하는데, 미국, 남아공, 호주가 대표적. 하지만 인도와 중동,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런식으로 예외론을 계속 붙여나가는게 과연 어느정도의 엄밀성이 있는지는 좀;;;

여전히 백인들은 아직도 남아메리카의 밀림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출처: 누군가가 살러간 동네 vs 안살러간 동네? by 아빠A]


2.
식근론자는 "일본의 식민지는 '살러 간' 식민지고 다른 국가들의 식민지는 수탈하거 간 식민지라서 차이가 난다"는 주장을 할까요?

맞아요.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식민지로 이주했다, 이주하지 않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식민지 --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피지배민족 -- 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냐 차이이지요.

우선 일본은 조선을 영구병합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거야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예요. 마카오나 홍콩처럼 몇십 년짜리 조차 계약이 아닌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식민지에서 물러설 계획이 없었어요.

일본과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차이점은 (어쩌면 인종적 차이가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피지배자들을 동화시키려고 했는가 아닌가 예요. 그것도 프랑스처럼 단순히 피지배자들을 프랑스식으로 문명화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을 일본인과 버금가는 위치까지 올리는 영구병합 정책이었죠. 이 '내선일체'가 실질적으로는 구호에 그쳤을지 몰라도, 총독부의 주도 하에 근대적인 법령과 제도를 세우게 돼요.

(이하 스크린샷은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발췌했습니다. 구글 검색으로 뉴데일리 웹사이트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총독부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제도이식과 인식변화에 신경을 썼어요.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신분제 철폐와 사유재산제 확립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대한민국 이야기』를 읽어보시길 권유해요. PDF 파일 [링크]인데 이미 인터넷 상에 공개된 내용이니 저작권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봐요.)

3.
저는 이미 예전에 더글라스 노스Douglas North의 1989년 「Constitutions and Commitment」 논문을 요약[포스팅 링크]하면서 근대화(=입헌주의+자본주의(삭제!) ->산업화 및 민주화)의 전제조건은 "사유재산권 확립"과 "계약 준수 담보"와 "독립적인 사법기구"라는 관점을 신제도학파가 취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영훈 교수 역시 신제도학파에 속한만큼 그 점을 강조해요.

4. '영국 예외론'은 밑에서 언급할게요.



II. 식근론이 진짜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by 아빠A
1.
식근론이 진짜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조선이 발전했다가 아니라

그 이론이 왜 인도 - 아프리카에는 적용이 안된걸까를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나로서는 동아시아에 대한 일련의 식근론적 설명이 '제도의 안착'에 대한 보편적 설명을 좀 결여한게 아닌가 싶다.

인도나 아프리카라고 해서 식민지 지배자들이 근대적인 법률과 사적 재산이라는 관점을 아예 안들여 왔다는 건가? 그래서 그 동네의 엘리트들이 전혀 보고 배울수도 없도록? 그 동네의 엘리트들은 지금도 꾸준히 유학을 가는데?

[출처: 식근론이 진짜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by 아빠A]


2. 인도-아프리카의 현실
다른 식민지들의 경우, 대체적으로 식민지의 관료조직 최상위를 백인 이주민들이 차지하는 대신 사회의 하부구조는 근대적 제도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담당하고 있었어요.

윌리엄 이스터리William Easterly의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에 의하면, 1893년 인도 식민지의 관료조직 내 영국인 수는 898명이었어요. 인도계 관료까지 포함하면 4849명이 3억 인구를 다스린 셈이에요(Easterly, 2006, p. 273).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인도에 머무는 영국군의 수가 급증했지만 1900년 이전까지 10만명을 넘은 적이 없고요. 인도계 육군병력은 20만명 이내를 유지했어요.

비유하자면, 대전에 공무원이 달랑 300명 있으면 어떨까요. [...]


그리고 이 관료들 중 현장직은 당연히 신입의 몫[...]이었는데, '젊고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현지어를 모르고 진정한 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준비기간도 거치지 않고 머나먼 장소로 파견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극소수 유럽계 관료들의 무능함과 현지적응 실패가 맞물려 실제 업무는 '족장'으로 선임된 현지인들이 담당했어요. 전통적인 부족사회의 경우, 그 부족의 족장이 그대로 유임되었지만, 부족이란 개념이 없으면 -_-;; 아무나 연장자를 하나 골라 족장으로 세웠습니다.

문제는 유럽인들이 이 족장들에게 무제한적인 권력을 허락했다는 점이에요. 족장들을 전통적으로 견제해 왔던 세력들은 명령전달의 효율성이란 미명 하에 해체되었고, 정작 감시해야 할 유럽인 관료들은 겉보기에 일처리만 잘 된다면 실제 상황이야 어떻든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오리엔탈리즘 측에서 유럽 제국주의를 깔 때 가장 설득력이 높은 주제이기도 합니다.)

나이지리아의 어느 유럽인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족장은 법이요, 자신보다 유일하게 높은 권위 -- 저택에 눌러앉아 '조언자' 역할을 하는 백인 관료 -- 에게만 복종한다. 족장은 자신의 경찰을 고용할 수 있다. ... 때때로 족장은 동시에 검사와 재판관이 되며, 유희를 위해 교도관으로 하여금 피해자들을 가둬놓도록 명령할 수 있다. 그 어느 동양의 전제군주도 이 흑인 독재자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리지 못했는데, 이건 전적으로 그들이 뒷구석에 잠자코 머물러있는 백인 관료들로부터 받고 있는 지원 덕분이다." (Easterly, 2006, pg. 275)


이와 같이 아프리카에 비하면 인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도인들은 관료조직에 합류할 수 있었고, 오랜 통치기간 동안 영국의 제도와 법규, 문물, 사상을 받아들였으니까요. 인도 출신 뉴스위크 편집장인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는 『자유의 미래The Future of Freedom』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인도는 민주주의를 영국과 대륙의회Congress Party로부터 받았다.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수많은 핵심제도들 -- 법정, 의회, 행정규칙, (유사)자유언론 -- 을 수립해 운영했다. 다만 그 제도 안에서 인도인들이 권력을 많이 행사할 수 없었다.

[출처: Zakaria, Fareed. (2003). "The Future of Freedom: Illiberal Democracy at Home and Abroad." New York, NY: W.W. Norton & Company. pg. 108]


실제로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영국식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어요(지금은 겉보기엔 민주주의지만 속으론 지역토호+힌두원리주의 ㄳ). 인도의 첫 수상 네루는 "최후의 영국신사"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요. ^^;;; 인도가 독립 이후 경제발전에 실패한 이유는 민주주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관료주의적으로 경제를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이걸 부정하는 사람은 경제학계에 거의 없어요. 관료제가 경제발전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진 몰라도, 관료주의는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 적이 거의 없어요.

반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의 조선인들은 어땠을까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기구는 백인 식민지들과 달리 맨 아래까지 구석구석 통제가 가능하도록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료조직은 비록 행정구역처럼 여러 형태는 조선시대로부터 빌렸을지 몰라도 내용은 달랐지요. 제일 중요한 것은 중인 출신 조선인들이 이러한 관료조직에 협력하고 참여해 새로운 제도에 대해 보고 배웠다는 점이고, 훗날 이들은 테크노크라트로 거듭나 독립 후 대한민국 관료제의 몸통이 됩니다.

그리고 인적자본을 설명할 때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 이야기』 9장에서 "대한민국이 식민지기로부터 계승한 유산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니, 이 경우는 유산이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적 능력이 자기 의지로 애써 축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높은 교육 수준의 인적 자본입니다"라고 운을 떼요."

인적 자본
대한민국이 식민지기로부터 계승한 유산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니 이 경우는 유산이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적 능력이 자기 의지로 애써 축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높은 교육 수준의 인적 자본입니다. 대중의 교육열이 폭발하는 계기는 3·1운동이었습니다. 민족의 긴 장래를 위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이 움튼 것이지요. 1920년대의 대중교육은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을 20~30%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교육열은 1920년대 후반에 주춤하였다가 1930년대가 되면 다시 폭발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입학 지원이 정원을 초과하여 소학교에 입학하는 데도 해를 넘기면서 순서를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1930년대 말이 되면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이 남자의 경우 60%를 넘어서지요. 대중의 이러한 교육열에 밀려 일제도 할 수 없이 1946년부터 의무교육제를 시행한다는 계획을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중등 이상의 고등교육도 확대되었습니다. 총독부는 고등교육의 대중적 확대에 무척 인색하였습니다. 고급 인재를 많이 길러내서는 그들의 지배정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지요. 중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은 대중의 교육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일본으로의 유학 행렬이지요. 유학생의 수는 이상하게도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부터 부쩍 그 수가 증가하는데, 1942년 현재 총 2만 9,427명에 달했습니다. 그 중에 2만 2,044명, 75%가 중학생이었습니다(《일본유학 100년사》,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59쪽). [중략]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총독부의 각급 관서와 학교에 관리와 교사로 취직하였습니다.《재인식》에 실린 나미키 마사히토(並木眞人) 교수의 <식민지기 조선인의 정치참여>에 의하면 1940년경 그 수가 거의 17만에 달하였습니다. 주로 하급직이었습니다만, 조선인 관리와 교사의 수는 일본인보다 많았습니다. 그렇게 1910년부터 총독부의 관리와 교사를 지낸 사람이 모두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연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수십만에 달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금융조합·수리조합 등의 조합과 은행·회사 등에 취직하여 근대적인 행정과 경제활동을 훈련받은 고급 인력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떠받친 세력이었습니다.

나미키 교수는 식민지기의 대일(對日) 협력을 이데올로그형과 테크노크라트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전자는 이광수와 같이 정신마저 일본식으로 되자고 한 사람들로서 전시기의 징병·징용에 적극 협력한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후자는 위에서 말한 하급직 관리, 조합원, 은행원, 회사원, 그 밖에 의사와 법률가 등으로 근대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일 협력은 소극적인 것이었으며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데올로그형의 협력자는 정치적으로 소거되었습니다만, 후자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관련하여 나미키 교수는 제헌의회 의원의 약 30%가 테크노크라트형 인물이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연속적이었다는 겁니다.

[출처: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7955 ]



3. 정당성 획득
"인도나 아프리카라고 해서 식민지 지배자들이 근대적인 법률과 사적 재산이라는 관점을 아예 안들여 왔다는 건가?" by 아빠A

"아예 안들여"온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원주민들이 그 제도와 직접 부딪힐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대표적인 예가 중남미이에요. 스페인 정복자들이 15-18세기 내내 지배층을 형성했고, 1800년대에 독립한 이후에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주민들과 혼혈인들과 별도로 자신들만의 리그 -- 근대적인 제도를 누림 ㄳ --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근대적인 법률과 사적 재산' 제도가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어요.

자꾸 도입 부분에 방점을 찍는데, 이미 '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1편 - 구/신 제도주의 학파' by 트윈드릴 포스팅[링크]에서 언급했듯이 제도의 정착은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이러한 환경에서 각 제도는 전체 환경에 영향을 받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해요.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단순히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뿐 아니라 이 제도적 환경에서 "정당성"을 획득해야 하는 거죠. 여기서 정당성의 기준이란 그 사회의 기존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예요. 하지만 새로운 제도가 유입되면 그것이 기존 제도에 영향을 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적 환경은 진화하게 되는 것이지요.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옛날 악습이 새로운 전통으로 대치되는 것이지요.

혁명이나 정복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기존 제도(법규와 규범)이 무너지고 일종의 공백이 생겨요. 그 공백을 새로운 제도가 채울 수 있는데, 어느 제도가 먼저 정착하느냐는 그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규범이 좌우하는 것이지요. 정복자가 강제로 제도를 이식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제도가 실질적으로 정착할 수 있느냐도 피정복자의 제도에 달려있다고 보면 되어요. (물론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중남미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음 -_-;; )



[중략] 결론적으로 말해 정책이든 법률이든 (고전적인 의미에서 '형식적인') 제도이든 이식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제도와 경쟁한 끝에 받아들여져 '정당성'을 획득해야만 그 제도적 환경에 사는 개인의 행동이 변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출처: 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1편 - 구/신 제도주의 학파 by 트윈드릴]

이영훈 교수는 대부분의 신제도학파 사람들이 그렇듯이-_;; 사회학적 제도주의와 합리적선택 제도주의를 절충합니다.


4.
"그 가운데 어느 제도가 실질적으로 정착할 수 있느냐도 피정복자의 제도에 달려있다고 보면 되어요." by 트윈드릴

이제 위의 구절을 갖고 또다시 자본주의 맹아론을 꺼내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피정복자 조선의 제도과 규범 덕분에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쉬웠을 거라고요.



오해를 할까봐 덧붙이는데, 저는 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조선시대는 16세기 말까지 문화와 문명 둘 다 다른 나라에 못지않았고, 수량경제학 연구의 추정치에 의하면 생활수준 역시 상위권 20% 안에 들었어요(수정: '최상위권'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두 호란을 겪으면서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력이 약화되고 사회구조의 모순이 커지는데 그걸 개선하는데 실패하였지요. 무엇보다도 20세기까지 성리학을 붙들고 있었고요.

식민지근대화론의 함의는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근대적인 제도들이 '정착할 수 있게 된 원인' -- 선택과 정착은 다름! -- 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겪은 인식변화이고, 그 인식변화는 '민족주의'든 '부국강병'이든 '산업입국'이든 어떤 구호든 간에 일본제국주의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III. 번외편
1. '영국 예외론'
"영국인 식민지들은 그나마 사실 성공한 편에 속하는데, 미국, 남아공, 호주가 대표적." by 아빠A

성공한 영국 식민지에는 "미국, 남아공, 호주"뿐 아니라 캐나다, 홍콩, 케이만 아일랜드, 트리니다드 토바고, 뉴질랜드도 포함됩니다. 여기서 미국 - 캐나다 - 호주 - 뉴질랜드는 모두 정착식민지입니다. 즉 본국 출신의 경우 이미 근대적인 제도의 세례를 받았던 만큼 식민지근대화론의 '인식변화' 과정을 거칠 필요없이 바로 근대화에 돌입했지요. 남아공은 보어전쟁 이후 정작 승리한 영국인들 대신[...] 머리 숫자가 많은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흑인을 억압하는 사회구조가 됩니다. 역사상 최초의 포로수용소를 만든 사람은 영국인이 맞지만, 아파르트하이트(apartheid - 인종격리정책)은 영국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지요. 케이만 아일랜드나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섬나라인데 전통적으로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1980년 이전 독립한 식민지 국가들 가운데 몇 안되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한 모범 케이스이기도 합니다.

영국 식민지를 세 가지로 분류하면, (1) 정착식민지 (2) 19세기 중반 이전 침략식민지 (3) 19세기 말 이후 침략식민지로 나눌 수 있는데, 현재 경제발전이나 자유민주주의 수준을 보면 (1) >>>> (2) >> (3) 입니다.




참고문헌
Easterly, William. (2006). "The White Man's Burden: Why the West's Efforts to Aid the Rest Have Done So Much Ill and So Much Good." New York, NY: The Penguin Press.
North, Douglas C. & Weingast, Barry R. (1989). "Constitutions and Commitment: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Governing Public Choice in Seventeenth-Century
Zakaria, Fareed. (2003). "The Future of Freedom: Illiberal Democracy at Home and Abroad." New York, NY: W.W. Norton &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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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4편 - IF 가설과 인식변화와 이승만 긍정론(?) by 트윈드릴

I. IF 가설
1. 반(反)사실 사고실험counterfactual theory
*미리 언급해 두는데, 이 이야기는 역사학에 한정합니다. 인과관계가 확실한 이론을 다루고 변인통제가 가능하고 실험을 반복할 수 있는 정상과학에서 IF 가설은 엄연히 과학적 방법론의 일부입니다. 거기선 통제 실험controlled experiment라고 부르지만요^^*

IF 가설이란 "만약 ...했더라면 그 이후는 무엇이 벌어졌을까?"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예를 들어, '만약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누가 이겼을까?'라든지 '만약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후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질문 말이다.

그리고 이 IF 가설(혹은 가상역사)는 그 가설을 내놓는 사람이 어떤 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역사적 사실들을 취합해 그럴 법한 이야기를 꾸며내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IF 가설이 '사고 실험'이란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설득력 있게 들릴지언정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IF 가설의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결론을 세워놓고 그 결론에 맞음직한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임 -_-;;)

더 중요한 것은 IF 가설의 유용성이란 과거를 정당화하거나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가 무슨 실수를 했는데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자'는 교훈적인 관점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만약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누가 이겼을까?'라는 IF 가설에서 우리가 집중해야할 사항은 당시 조선의 취약한 군사력이나 조정의 정치적 분쟁, 이순신을 발탁한 유성룡의 혜안, 이런 것이라는 얘기다. 그밖의 IF 가설은 무의미한 지적유희일 따름이다. 

2. 자본주의 맹아론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IF 가설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일본이 통치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어쩌라고? 조선이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걸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 와서 아무리 울부짖어봤자 역사적 사실이 변하는가? 한편, 조선의 수많은 업적은 가치중립적 개념인 근대화를 억지로 끌어오지 않아도 찬사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인데, 자본주의 맹아론은 그럴 법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조차 실패했다. *단서를 모으는 것과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과학적 가설을 받아들이는 기준' by 漁夫 포스팅을 참조해 주세요*


3. 식민지근대화론 = 식민지 축복론?
분명히 입장표명을 하는데,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 축복론이나 식민지 수혜론이나 식민지 미화론이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냥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물론 반일감정이 남아있는 시점에서 그걸 대중에게 납득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사실 이런 논쟁은 학계에서 치고 받고 싸우는 게 정답이다. 그런데 그 공론장에 벗어나 언론플레이를 하는 쪽 -- 일반적으로 언론플레이를 하는 편은 그 논쟁에서 지고 있는 진영일 확률이 높음 -- 이 있고, 대중이 그 언론플레이에 놀아나 학계의 논쟁을 제대로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친일파! 매국노! 로 매도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기가 힘든거야 사실이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떠들지만은 맙시다. 듣기 싫으면 듣지 않고 대신 그 문제에 대해 감정 배설을 하지 않는 것도 차선의 선택입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학계 내 논쟁에서 이기고 있는 사람은 언론플레이에 의존할 이유 및 필요가 없다. 십중팔구 언론플레이에 의존하는 사람은 논쟁에서 발리고 있는 진영이라고 무방하다. 논쟁에서 역전할 수 있다면 그 시간에 논문에 글자 하나를 더 쓰지 왜 신문지상에 친일파니 매국노 드립을 친단 말인가?

며칠 전에 추천했는데, 아무도 읽지 않은 듯한 글[...하기사 인터넷 논쟁이 다 그렇지만 -_-;;]에서 발췌해 옵니다.

[출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꽤 괜찮은 글 -
http://theacro.com/zbxe/262649 ]

[한국사회는 아직도 근대화가 진행 중이다] 라는 논의도 있는 판국에, 그 시초가 식민지 시절에 있냐, 그 이전이냐, 이후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 경험이 어떻게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것이 다른 국가들의 근대화와는 어떤 차이를 보이고, 현실에 있어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직시하고 분석하는 것인데 말이죠.

일본이 식민지로 만들어준 덕분에 근대화가 되었다는 둥, 결국엔 대국적인 견지에서는 외려 도움이 된게 아니냐는 둥의 얘기는 애초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라, 그것을 갖고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것은 소모적이고 도움이 안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몰역사적이고 비학문적이고요. 그런건, [제임스 국왕의 세금정책이 동부13주 식민지의 독립으로 이어졌으니까 결과적으로 미국은 영국이 독립시켜준게 아니냐] 는 소리랑 똑같은거니까요.

결론: 있는 그대로 보기


덧.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IF 가설'나 '가상역사'처럼 그럴듯한 명칭을 붙여주니까 이걸 자꾸 '설득력있는 근거'랍시고 내놓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영미 학계에선 '반(反)사실 이론counterfactual theory'이란 강한 표현을 쓴다. counter(반대)를 붙이는 이유는 사실과 조금 틀릴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뉘앙스조차 배제하기 위해서다. 사실과 반대, 즉 사실이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영미 학계에서는 IF 가설이 역사적 사실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counterfactual이란 표현을 쓴다.



II. 인식변화
의도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 관료주의 by 아빠A 에서 트랙백
"식민지근대화론의 함의는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근대적인 제도들이 '정착할 수 있게 된 원인' -- 선택과 정착은 다름! -- 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겪은 인식변화이고, 그 인식변화는 '민족주의'든 '부국강병'이든 '산업입국'이든 어떤 구호든 간에 일본제국주의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트윈드릴)

"6. 마지막 결론에 있어서 내가 애매하게 생각하는건 이런거다. 그게 왜 근대적인 제도들인데? 그냥 이름을 근대라고 붙인거라면 오케이. 가치중립적으로 수용해야지. 하지만 화용론이라는게 있어서 말이져;;;" (아빠A)

나는 문장 앞부분에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근대적인 제도들"과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겪은 인식변화"를 분명히 구분했다. 그리고 나서 인식변화의 예시로써 "'민족주의'든 '부국강병'이든 '산업입국'이든 어떤 구호든 간에"라고 적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근대적인 제도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나의 글솜씨가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영어로 쓸까? -_-;; The colonial modernization theory argues the cause that enabled those modern institutions we are enjoying now to be recognized and accepted, is the transformation of norms experienced by our prior generations, and that such a change, whether its rhetoric was nationalism, national prosperity and stronger defense or industrialization, took place during the colonial period under Japan.)

그리고 인식변화라는 게 식민지 시대가 끝나자 '쨘!'하고 모든 한국인들이 근대시민의식을 갖게 된 혁명적 변화가 아니다. 이영훈 교수가 강조했듯이, 일본제국주의 시대는 문명의 대전환이 이루어졌으며, 그 대전환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인에게 조선시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민족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근대화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교육 엘리트들은 그 필요성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유' '인권'처럼 근대적 사상도 받아들였으나, 훗날 근대적인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는 일반 대중에게 있어선 내용물과 관계없이 목적의식이 우선이었다.

*지금 저는 두더지 잡기처럼 여기저기 순서없이 다루고 있으므로 그냥 다음 글을 정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꽤 괜찮은 글 - http://theacro.com/zbxe/262649' 제가 이 글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맥락에는 동의하고 비전공자가 읽기에 괜찮기 때문입니다*

식민지근대화: 인과의 역전

식민지 시절, 확실히 조선인들은 무엇인가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친일에 속하든, 항일에 속하든, 아니면 어느 쪽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없이 일상을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든간에, 변해버렸습니다.

그것은, [독립을 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를 이루는 것이 민족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절대적인 중요성을 띄게 되는 순간]을 조선인들이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눈을 뜨기 이전과 눈을 뜬 이후의 차이가 바로 [식민지 근대화]의 본질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에 깔아놓은 근대적 구조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혜택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유리된 현실 속에서 조선인들은 더욱 강렬하게 [근대적 구조] 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역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 의 실체인 것입니다.

[식민지 근대화]의 정체는 '일제의 근대화 덕분에 조선인들도 먹고살게 되었다'는 둥, '일제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생겨났다'는 둥의 너절한 [시혜냐, 가해냐?]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이전까지는 여러가지 이유로 (특히, 물리적 기반의 미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로) 구조적인 근대화에 미치지 못한 조선이, 식민지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통해 강렬하게 [민족주의] 에 각성함으로써 [근대화] 에 목적적으로, 거의 강박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인과의 역전인 것입니다.

보통 [근대화] 라는 것은 '근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체제가 변화하는 그 전체적인 과정이죠. 물리적/경제적 변화로 인해 구체제로써는 봉합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강렬한 폭력을 통해 구체제를 깨부수든, 아니면 보다 온건하고 지속적인 개혁으로 구체제를 꼬드겨 변화시키든간에 어쨌든 하나의 [정석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현상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근대국가이념이나 시민개념이 생겨나고, 민주적 제도가 도입되는 것이죠.

[식민지 근대화]는 그 인과의 역전입니다. 앞서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해 희생이 된 식민지는 그 상황으로 인해 복합적 모순을 경험합니다. 한 편으로는 독립을 상실하고 외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화가 되는 과정에서 자력으로는 아직 깨부술 수 없었던 구체제가 해체되어 버리는 진보적/해방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식민지 경험이 가혹할 수록 구체제가 사리져버린 이념의 공백을 재빠르게 채우는 것은 엄청나게 가속된 민족주의이고, 자생적으로는 아직 근대화로 나아가기를 기대할 수 없는 물리적, 물질적 기반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그 의식이 먼저 목적론적으로, 필요에 의해, 생존을 위해 근대화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의 요체입니다.
이러한 생존적 차원에서 근대화의 필요성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후의 과정은 자연적/자생적인 근대화의 코스를 밟지 않고, 엄청나게 단축되고 축약된 형태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부분들에서 근대화가 계획적이고 인위적이고 집약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그 전체의 과정을 뜻한다는거죠.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 은 "식민지 시절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히는 이론이 아니라, "식민지 경험이 어떠한 근대화의 유형을 이끌어냈느냐"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꽤 괜찮은 글 - http://theacro.com/zbxe/262649 ]

나는 인식변화를 가리켜 제도가 '정착할 수 있게 된 원인'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근대화의 추동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 지도 모르겠지만, 요점은 그 인식변화가 일본제국주의 덕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탓에 일어났다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이란 이야기다.

*지금 아빠A님과의 이야기가 헛도는 이유는 자꾸 근대화에 무언가 선한 느낌을 받고, 동시에 일본제국주의 '덕분에' 근대화가 일어난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란 주관적인 인상을 받고 있는데, 이번 포스팅으로 그런 의구심을 지울 수 있었기 바랍니다^^*

*주의: 위의 내용은 신제도학파 관점에서 해석한 식민지근대화론입니다. 모든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이것과 똑같은 관점을 갖고 있진 않을 겁니다*


III. 이승만 긍정론?
애비 없는 나라에 살면 어떠한가. by 아빠A에서 트랙백
1.
먼저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정부수립 이후에는 무능한 정치인, 한국전쟁 시기에는 무능하고 부패한 군통수권자, 말년에는 사법살인에 부정선거까지 저지른 준 독재자였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낙제점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기준으로는 어떨까? 한국사의 연속성 -- 구한말 조선 - 일제식민지 - 대한민국 -- 의 관점에서는? 다른 제3세계 정치인과 비교하면?

2.

혁명이나 정복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기존 제도(법규와 규범)이 무너지고 일종의 공백이 생겨요. 그 공백을 새로운 제도가 채울 수 있는데, 어느 제도가 먼저 정착하느냐는 그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규범이 좌우하는 것이지요. 정복자가 강제로 제도를 이식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제도가 실질적으로 정착할 수 있느냐도 피정복자의 제도에 달려있다고 보면 되어요. (물론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중남미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음 -_-;; )

[중략] 결론적으로 말해 정책이든 법률이든 (고전적인 의미에서 '형식적인') 제도이든 이식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제도와 경쟁한 끝에 받아들여져 '정당성'을 획득해야만 그 제도적 환경에 사는 개인의 행동이 변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출처: 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1편 - 구/신 제도주의 학파 by 트윈드릴 - 링크: http://hvanb756.egloos.com/3349749 ]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자 전제조건은:
(1)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로 인해 구체제가 무너졌음
(2) 구체제의 붕괴 탓에 이념의 공백이 생겼음
(3) 피지배자 한국인들은 이미 '근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목적의식을 형성했음

(1)과 (2)는 "일종의 공백"에, (3) "이미 '근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목적의식"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규범"에 해당한다. 즉 근대적인 제도라면 무엇이든지 정착할 수 있는 토양이 이미 자리잡은 셈이다. 그러므로 식민지 독립 이후 첫 국가원수는 그러한 이념의 공백을 메꾸고 신체제를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그 새로운 제도(법규+규범)은 '근대화'란 명분 하에선 지극히 적은 반발과 저항 속에 받아들여질, 다시 말해 "정당성을 확보"할 가망성이 높았다. 그 새로운 제도는 경로의존성에 의해 지속될 확률이 높으므로 첫 단추를 바로 끼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빠A님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겠다.

3. 제도의 정당성이라는 이야기는 '내'가 꺼낸게 아니고 '트윈드릴'님이 꺼낸 것이며, 또한 트윈드릴님은 이에 대해서 '제도주의의 중요한 주장'이라고 하셨다. 또한 이영훈은 신제도주의자라고 하셨고. 따라서 나로서는 '그럼 그런 설명을 해주세요'라고 묻는게 당연하다. [중략] 그런 관점에서 트윈드릴님이 '정당성', 다르게 말하면 그 제도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다른 제도를 밀치고 수용이 되는가 (간단히 말하면, 현찰 박치기를 카드가 밀어내는 것 같은것, 한글 전용이 국한문 혼용을 밀어내는 것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강조는 본인]

[출처: 법조문이 없어서 망한 아프리카? by 아빠A]

근대적인 제도들이 어떻게 개별적으로 수용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것은 아빠A님이 몸담고 있는 이노베이션 분야을 예시로 들자면, 특정 경영기법이 어떻게 개별적으로 기업에 도입되고, 기존의 조직문화에 받아들여지는지 그 과정을 파악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회사가 도산 직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정하면, 그 회사원들은 어거지라도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경영기법을 받아들이는데 상대적으로 저항을 덜 한다. 즉 생존이란 목적의식이 새로운 제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셈이다. 북한이 김일성 하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나 남한이 이승만 하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 를 받아들인 것이나 둘 다 '근대화를 통한 생존'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진 대중의 상대적인 무저항 속에 이루어졌다.

이영훈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완벽과는 한참 거리가 멀지만 일단 첫 단추를 구멍에 쑤셔넣는데 성공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근거로써 자유민주주의, 농지개혁, 한국전쟁 승리(...솔직히 이 부분 '국민방위군' 때문에 OTL),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각자 생각에 달려있다고 본다.

(나는 이영훈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사실이나 해석이 틀렸다고 보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 하지만 한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다면 저런 인식이 딱히 틀렸다고 보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의견을 삼가겠다-_-a)

3.
'다른 제3세계 정치인과 비교하면?' ...참으로 암울한 질문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암울한 질문이다. 아마 눈감고 지구본에 다트를 던지면, 이승만 전 대통령 같은 정치인이라도 자기네 국가원수와 맞바꾸고 싶어할 나라에 꽂힐 확률이 상당히 높을 것 같다. [...]



IV. 번외편
덧. 아빠A님은 "그 제도들이 어떻게 조선에서 정당성을 획득해 가는가, 라는 것을 비교해서 설명해 주면 좋겠는데...그쪽의 전문가들은 다 아는 말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이 요청, 아니 부탁이 딱히 부당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이미 두 달 전에 나름대로 이영훈 교수가 어떤 학파이고, 그 학파에서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링크]그것이 식민지근대화론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경제학 이론'적 설명[링크]를 충분히 했다고 믿습니다. 솔직히 저는 두달전에 이미 답변드린 질문에 또다시 답변해야 한다는 현실이 굉장히 난감합니다. 그때 재반론 하지 않으셨기에 제 대답을 적어도 납득이 가는 설명으로 받아들였다고 믿었는데, 지금 와서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은 곤란해요.

그리고 지금 아빠A님은 많은 질문과 반론을 올리셨고, 저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답변과 재반론을 올렸습니다. 저는 논쟁에 기본적인 예의를 요청드립니다.저는 아빠A님의 지적에 대해 맞다 싶으면 그것에 대해 맞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링크 - http://sprinter77.egloos.com/3015839#3853622 ] 지적이 틀리다 싶으면 그것에 대해 반박을 했습니다. 아빠A님도 이제부터 제가 답변하거나 재반론한 것에 대해서 아빠A님이 인정하거나 수긍하는 점에 대해서 분명히 입장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거나 수긍하지 않으면 반박하시거나 최소한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 적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토론에 있어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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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근론 논쟁에 대한 A/S 5편: 투 트랙 전술과 경제발전의 전제조건

hvanb756.egloos.com/3432761
I. 식민지근대화론의 두 얼굴 - 새로운 학설의 투쟁과 내용
'왜 식근론자들은 일제강점기의 경제성장와 제도도입을 강조하는가?'

나츠메 님은 제도의 도입을 중요시하고, 나는 '규범'이라고 불리는 인식변화와 형식적인 제도이식을 동시에 다루면서 그 과정이 어떻게 제도(법규+규범)의 정착으로 이끌어나갔는지 설명했다.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츠메 님과 나는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학설이 주류가 되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당연히 그 학설이 현실을 더 잘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미 주류인 학설을 무너뜨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해 기존의 주류 이론은 무엇인가? 바로 '식민지 수탈론'이다. 일제가 악랄하게 조선 출신 피지배자들의 재산 -- 토지와 곡물 -- 을 수탈해 갔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 주류 이론을 무너뜨리기 위해 식근론은 먼저 일제강점기의 경제성장과 제도이식을 역설하며, '식민지 수탈론'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학설의 투쟁이다. 반면 내가 지금까지 신제도학파(주로 사회학적 계열)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것은 식민지근대화론의 맥락이다.

한쪽에선 식민지수탈론과 자본주의맹아론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다른쪽에선 식민지근대화론의 내용을 설파하는 투 트랙two track은 새로운 학설이 주류 이론으로 오르기 위해 당연히 채택하는 전술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왜 일제강점기의 경제성장과 제도도입을 들이대냐, 는 소리가 자꾸 나온다. -_-;; 식민지 수탈론이 없었다면 모를까, 식근론이 왕좌(=주류)에 오르려면 먼저 왕좌에 앉아있는 식민지 수탈론부터 끌어내려야 할 것 아닌가?



II. 경제발전의 전제조건 vs. 경제성장의 핵심요인 (제도와 자본 사이) 및 "아담 스미스에 머무른 사람"
2. 이영훈 교수의 중요한 업적은 '경제 수량사'다. 경제 수량사를 하는 양반이, 신제도주의적 관점을 끌어 들이면서,'제도'와 '자본'중 어느것이 경제성장에 더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하지 않는다는게 말이 되나? 그리고 이 논의는 중요할 수 밖에 없는게, 이영훈 교수는 일제시대의 제도가 미친 영향이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지 않나? 나는 그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거다. 님하의 주장을 다 수용한다고 쳐도, 한 5% 쯤? 특히나 그 이후의 경제성장이든 그 이전의 경제성장이든,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경제 성장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그 비중은 - 필수조건이라고 해서 메이저인건 아니라고... - 작을 수 있는 요소를 자꾸 내세우는데 불편하다 이말이다.

식근론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해도, 내가 여전히 느껴지는 의문을 간단히 그림으로 그리면 이런거다.

---------------------------------------------------------경제성장률

자본 투자 및 큰 시장에의 연결에 의한 설명되는 부분

일본 - 일본 및 미국 - 미국 - 미국 및 중국

---------------------------------------------------------
일제시대에 도입되었다는 제도들에 의해서 설명되는 부분
---------------------------------------------------------
시간 : 일제시대 ------------------------------------------현재

이런식으로 비중이 다를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비중이. 어느쪽에 취미를 갖고 있느냐 라는 것과 어느것이 중요시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다르다고 본다.

3. 적어도 트윈드릴님은 법규와 규범을 모두 포함해서 제도로 보시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설명을 잘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 위의 그림을 보시다 시피, 저는 아직도 아담스미스에 머무른 사람이라...

[출처: 부재증명을 논하다 by 아빠A]


1.
자꾸 경제발전의 전제조건precondition과 경제성장의 핵심요인determinant를 뒤섞는데, 두 달 전부터 줄곧 강조했듯이신제도학파는 경제발전의 전제조건을 찾는게 우선순위이지, 경제성장의 핵심요인을 찾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의 핵심요인은 딱 집어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특정 국가 경제성장의 핵심요인은 보편적인 이론이 아니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Commented by 트윈드릴 2010/06/30 05:42 # 삭제
신제도학파의 근대화론의 핵심주제는 "만약 어느 나라가 근대화한 요인이 a, b, c, d, e있으면 다른 b, c, d, e가 없다고 가정하면 이빨 대신 잇몸으로 씹을 수 있을지 몰라도 a가 없으면 근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1989년 논문에선 저렇게 단정짓지 않았지만 후속 연구로 입증 ㄳ)"라는 이야기니까요. a보다 b나 c가 실제적으로 근대화에 기여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a가 없었다면 b나 c가 생길 수 없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셔도 상관없고요. [출처: http://hvanb756.egloos.com/3340090#7783207.03 ]
근대적 제도가 정착되어야 자본투입으로 경제성장이 가능해지는 반면,
제도없인 아무리 자본을 쏟아부어 봤자 장기적으론 헛수고라는 의미도 된다.



2. "이영훈 교수는 일제시대의 제도가 미친 영향이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
인식변화란 독립 이후에 근대적인 제도가 다시 도입되어 안착하기 쉽도록 토양을 까는 것이고, 한국은 더 나아가 이승만 정부와 미국이 새로운 체제로써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선택했으며 식민지 시절에 교육받은 중인 출신 엘리트가 인적자본이 되어 그 제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도와 궁극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이 정도가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근대화론이 주장하는 바이다.



*아빠A님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아니라 이영훈 교수나 다른 학자가 말하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논의해 주시기 바래요. 즉 인용문을 첨부해 달라는 이야기에요.

3.
"적어도 트윈드릴님은 법규와 규범을 모두 포함해서 제도로 보시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설명을 잘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 http://sprinter77.egloos.com/3017116#3854935 참조

4. "저 위의 그림을 보시다 시피, 저는 아직도 아담스미스에 머무른 사람이라..."
아빠A님이 "아담 스미스에 머"물렀다면 다음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III. 정부부채에 관련해
[전략] 사람들이 재산 소유권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계약에 대한 신뢰가 법으로 유지되지 않거나, 정부 권력이 밀린 부채를 갚으라고 나서지 않는--정의로운 행정절차를 정기적으로 향유하지 않는 나라에서 상공업이 오랫동안 번영하기가 드물다.

(현대영어 원문: Commerce and manufactures can seldom flourish long in any state which does not enjoy a regular administration of justice, in which the people do not feel themselves secure in the possession of their property, in which the faith of contracts is not supported by law, and in which the authority of the state is not supposed to be regularly employed in enforcing the payment of debts.)

[출처: Smith, Adam. (1776).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구텐베르그 프로젝트 txt 파일 링크)]
알고 지내는 신제도학파 교수가 사석에서 자신들이 연구하는 주제는
'아담 스미스의 재발견'이라고 한 것이 전혀 겸손이나 우연이 아니라능.


아빠A님은 지금 자꾸 허수아비를 세우는데, 나는 일관성 있게 신제도학파 관점에 바탕해 경제발전의 전제조건을 언급했다. 그리고 경제성장에 있어 이영훈 교수는 제도와 인적 자본 둘 다 강조하고 있다. 비밀글 님에 따르면 이 '맨파워론'은 1990년대 후반부터 경제사학계의 논의를 주도했다고 한다.


덧.
있는 그대로 보자니 영 있는 그대로 볼수가 없는 부분이 바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사회상이라던가 경제상 뭐 이런거인거 같음.(그러면서 본인도 있는 그대로 볼수가 없음. ㅇㅇ)

*그것까지 있는 그대로 보자고 한다면 무감정한 기계밖에 더 될까요^^* 저보다 가슴이 따뜻하신 迪倫 님의 경제사가 가르쳐 주지 않는 눈물들 포스팅을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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