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5일 목요일

단군 기원을 말하다, 백상태

단군 기원을 말하다


백상태 지음 | 주류성 | 2014년 10월 03일 출간

책소개

담암은 원과 명이라는 중국대륙에서의 물리력 교체기, 불교와 성리학이라는 국내에서의 사상적 전환기에 자주의식 제고와 민생안정을 통해 우리삼한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일 뿐 아니라 미래와의 대화이기도 하다’는 전제를 시인하자면 담암의 이러한 인식과 주장은 이 공간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소개

저자 : 백상태

저자 백상태는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중퇴했다. <월간독서>·<소설문학> 등 잡지사 기자, <다리> 편집장을 거쳐 동아그룹 홍보담당 이사·동아건설 상무(문화홍보실장), 경기도청 도정홍보전문위원을 지냈다. 198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하여‘어떤 묘(墓)’, ‘그 여름’, ‘냄새 고(考)’, ‘수입리에서’등의 소설 작품과 <가헌 우상기 평전>, 다수 기업의 사사·단체사를 썼다. 대학시절 긴급조치·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극한상황에 처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동양고전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지한(止漢) 이준녕으로부터 한학과 유학경전을 배웠다.

목차

목차 / 04
서문 / 09

01. 꿈을 꾸다
1. 잉량화 마을 / 19
2. 지화명이 괘(卦) / 22
3. 상경 / 42

02. 담암의 선조와 가계
1. 이름에 얽힌 설화 / 52
2. 시조의 출자와 고려시대의 백씨 본관 / 55
3. 담암의 본관 대흥(大興)이 갖는 의미 / 63
4. 백씨와 울릉도, 그리고 영해 / 72

03. 담암의 가족
1. 아버지 백견(白堅)과 어머니 영해박씨 / 83
2. 부인 평해황씨와 다섯 아들 / 90
3. 담암의 형제들과 처가 형제들, 그리고 그 후예 / 98

04. 담암의 시대
1. 교체의 시대- 원·명 교체기 / 106
2. 변화의 시대-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 112

05. 담암과 그 시대 사람들
1. 그의 스승 ./ 130
2. 그의 동방·동문·선후배 / 148
3. 그의 문하생 / 165

06. 부정삼한(復正三韓)과 담암
1. 날카로운 사론(史論) / 180
2. 간관의 길 / 184
3. 관동 존무사, 사선랑(四仙郞)을 그리다 / 190
4. 부정삼한을 꿈꾼 정치도감 시절 / 193
<정치도감> <정치관> <배원(排元)의 단초> <정치도감 활동의 좌절>

07. 일국경시(一國更始)와 담암
1. 광주목사와 종부령 시절 / 213
2. 10과 중심 천거제와 인사행정의 개혁을 주장하다 / 217
3. 전리판서로 서연관이 되고, 보인당(輔仁堂)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 226
4. 반원(反元)개혁 국면과 <국사> 집필 / 231

08. 자주성 회복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위해
1. 공민왕 중기 개혁 앞에서 / 239
2. 경세제민을 위한 9조목 차자(箚子) / 249
<논 전주> <논 경리> <논 조세> <논 농상> <논 염법>
<논 차대> <논 녹봉> <논 상고> <논 휼형>

09. 단군기원을 최초로 쓴 상소
1. 상소 무렵의 정치적 상황과 척불소(斥佛疏) / 271
2. 척불소의 주지(主旨) / 276
3. 척불소가 끼친 영향 / 302

10. 담암과 나옹(懶翁)
1. 도(道)가 다르지만 나옹의 어록에 서문을 쓰다 / 308
2. <나옹화상 어록> 서문 / 319
3. 또 하나의 <나옹화상 어록> 서문 / 341

11. 효상(爻象)의 불길함과 낙향
1. 낙향 무렵 / 347
2. 윤씨(尹氏)분묘기 / 359
3. 문헌공(文憲公) 이재(?齋)선생 행장 / 369

12. 우왕(禑王)의 사부(師傅)
1. 담암은 신돈의 몰락에 관여했을까? / 376
2. 공민왕의 후사문제에 개입하다 / 395
3. 담암과 우왕 / 403

13. <고려사> 열전과 담암
1. <고려사> 열전 속의 담암 / 424
2. 담암 무자(無子) 설과 후손의 존재 / 432
3. <고려사> 열전의 실수와 오류 / 451

14. 시문(詩文)에 나타난 담암의 사유(思惟)
1. 담암의 시와 산문 / 473
2. 우리 동방(東方)을 강조한 자주의식과 현실개혁 의지 / 481
3. 율정설(栗亭說)과 영호루 금방기(金榜記) / 495
- 인간사에 비유한 사물과 현상

15. 담암을 알게 해주는 시문(詩文)
1. 시문학에 대한 담암의 견해 / 509
2. 척약재설과 동재설, 그리고 만사(輓詞) / 525
3. 글을 통해 본 담암의 취미 / 543

16. 꿈이 깨어지다
1. 공민왕의 죽음 / 548
2. 담암의 죽음 / 559
3. 영해와 선산 설- 담암의 묘소 / 569
담암 연보 / 576
참고자료 / 584

출판사 서평

담암 백문보는 누구인가?

이 책자는 원명(元明) 교체기인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학자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1303~1374)에 관한 글입니다. 담암은 1303년(고려 충렬왕29·계묘) 승평부사를 지낸 아버지 백견(白堅)과 어머니 영해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5세 때부터 당대의 대학자였던 국재 권부(權溥) 문하에서 수학하고, 익재 이제현(李齊賢)을 지공거로 한 충숙왕 7년(1320·경신) 문과에 18세의 나이로 급제했습니다. 이 무렵 이재 백이정(白?正), 역동 우탁(禹倬) 등으로부터 당시의 진보적 사상, 즉 <주역(周易)>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신유학(성리학)을 깊이 있게 전수받았습니다. 급제 후에도 10년 가까이 학업을 더 연마한 그는 1328년(충숙왕 15) 26세의 나이로 춘추관 검열에 보임됨으로써 비로소 환로에 들어섰습니다. 이후 한림(翰林)·정언(正言) 등의 사관(史官)·간관(諫官)으로 근무하면서 고려가 처
한 현실을 인식하게 되고, 또 충숙왕을 호종하여 원나라 수도에 가 1년가량 체류하면서 원이 지배하던 중국대륙의 실상도 아울러 파악했을 것입니다. 1341년(충혜왕 후2) 39세 때 간관의 최고직위인 정3품 우상시(右常侍)로 승진하고 이어서 43세에 관동존무사로 나갔습니다.
이후 담암의 이름이 사서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부정삼한(復正三韓)을 기치로 1347년(충목왕 3)에 설치된 폐정개혁기관 정치도감의 사(使)로서 활동하면서부터인데, 그의 나이 45세 때 일입니다. 그러나 담암을 비롯한 개혁적 인사들이 참여·지원했던 정치도감 활동은 국내 기득권층 및 부원배의 교묘한 방해와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실패하게 됩니다. 담암은 고려에 내재한 제반 모순의 원인이 원나라임을 깨달으면서 반원적 성향을 지니게 되고, 또 한족(漢族)의 도적집단 홍건적의 침입으로 온 국토가 유린되는 경험을 통해 반외세·자주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이어서 일국경시(一國更始)를 목표로 한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을, 대내적으로는 자주성 회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담암의 이런 인식은 단군의 건국사실과 우리 동방의 고유문화를 강조하는 글로 나타났습니다. 유명한 상소문 <척불소(斥佛疏)>에서‘우리나라는 대대로 동방을 지키고 있어 문물과 예악이 오랜 유풍이 있고, 단군으로부터 지금(1363년?공민12)까지 이미 3600년이 지났으니 곧 하나의 대주원이 되는 기회’라고 하면서 정치와 학문의 혁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대체로 ▲단군과 우리 동방을 드러낸 문화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민생안정을 정치의 목표로 보았으며 ▲불교와 같은 미신적 행태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부정부패를 비판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담암이 주장한 현실개혁의 논리가 편조(遍照?신돈)의 개혁정책에 반영된 측면도 있으나 담암과 신돈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이 다른 인물들이었습니다. 불교에 기반을 둔 신돈의 개혁정치가 모순을 드러내고 파행을 겪게 되자 그는 신돈을 숙청하는데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담암은 유학경전인 <주역>에서 변통의 논리를 이끌어내어 세계를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전(變轉)하는 실체로 인식하고, 자신이 처한 세계를 개조해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신유학에 근거한 담암의 선진적 현실개혁론과 강경 배불론(排佛論)이 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 등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조선왕조의 개창을 견인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공민왕의 후계자로 강령부원대군 우(禑)를 세우는 일에 깊이 개입하고 그 사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령을 이유로 제자 이숭인(李崇仁)을 대신 천거한 후 효상(爻象)의 불길함을 들어 낙향 했습니다. 그리고 1374년(공민왕 23·갑인) 공민왕이 시해된 9월로부터 약2개월 후인 그해 12월 작고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비슷한 두 사람의 죽음은 개혁군주 공민왕과 그를 지원했던 담암의 긴밀했던 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유학의 입장을 철저히 견지한 담암의 견해는 현전하는 2편의 사론(史論)과 11편의 상소문, 20여 편의 시·산문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담암은 원과 명이라는 중국대륙에서의 물리력 교체기, 불교와 성리학이라는 국내에서의 사상적 전환기에 자주의식 제고와 민생안정을 통해 우리삼한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일 뿐 아니라 미래와의 대화이기도 하다’는 전제를 시인하자면 담암의 이러한 인식과 주장은 이 공간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담암은 이처럼 자신이 깊이 공부한 <주역>에서 변통의 논리를 이끌어내어 스스로를 포함한 주변세계를 변전의 실체로 인식하고, 그 세계를 개조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며, 나아가 단군과 우리 동방의 전통을 드러낸 문화적 자주성을 누누이 강조해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해온 선진적 현실개혁론과 문화적 자주성 강조는 물론이고, 담암 자신조차도 널리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에 관한 자료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 후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크게 현창되지도 않았고, 후세의 학자들에 의해 깊이 연구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걸어온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말을 상기하자면, 담암에 대한 후세의 무관심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반증일 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걸어온 방향에 대한 믿음과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의 연계가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정도전의 강경배불론에 영향을 준 백문보

고려 공민왕 때 문신이자 학자인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303~1374)는 우리나라에서 단군기원을 최초로 언급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살던 14세기 중반 무렵이 단군으로부터 3천6백년이 지난 대주원의 기회임을 역설하고, 이러한 변혁기에는 정치와 학문의 혁신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그는 대체로 단군과 우리 동방을 드러낸 문화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민생안정을 정치의 목표로 보았으며, 불교와 같은 미신적 행태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부정부패를 비판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또 유학경전인 <주역>에서 변통의 논리를 이끌어내어 세계를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전하는 실체로 인식하고, 자신이 처한 세계를 개조해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신(新)유학에 근거한 담암의 선진적 현실개혁론과 강경배불론이 정도전 · 윤소종 등 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조선왕조의 개창을 견인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공민왕의 후계자로 강령부원대군 왕우를 세우는 일에 깊이 개입하고 그 사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왕조의 내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시해된 9월로부터 약2개월 후인 그해 12월 작고했다. 시기적으로 비슷한 두 사람의 죽음은 개혁군주 공민왕과 그를 지원했던 담암의 긴밀했던 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신유학의 입장을 철저히 견지한 담암의 견해는 현전하는 2편의 사론과 11편의 상소문, 20여 편의 시?산문 등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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