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伯夷)를 둘러싼 모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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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리스 (남산 강학원)
1. 문제적 인물 백이(伯夷)
『사기』 총 130편중 <열전(列傳)>은 모두 70편이다. <본기(本紀)> 12편, <세가(世家)> 30편과 비교해 볼 때 최소한 양적인 면에서 『사기』 <열전>은 방대하다. 그런가 하면 <열전>은 제왕들의 역사인 <본기>나 제후급의 역사인 <세가>와 달리 다양한 삶의 계층들을 망라하고 있다. 예컨대 <열전>은 계급적으로 귀족이 아니면서도 충분히 영웅적이었던 인물들로부터 성별이나 직업, 혹은 지역 등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기록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백이(伯夷)는 바로 이러한 <열전>의 첫 번째를 차지한 인물이다. 당연하게도 <백이열전>의 중요성은 이제까지 숱한 학자 및 문인들에 의해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언급되어 왔다. 왜? 기념비적인 대작 『사기』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전> 파트 전체를 좌우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첫 번째 편이었으므로.
그런데 막상 <백이열전>을 직접 읽어 보면 몇 가지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단 <백이열전>은 의외로 내용이 소략하다. 기본적으로 분량이 매우 짧아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개입하기 어렵다. 요컨대 <백이열전> 전체 분량은 대략 1,000자 정도이다. 이 정도면 70편 전체 ‘열전’들 중에서도 결코 많은 분량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 중에서도 순수하게 백이 이야기를 전하는 대목은 대략 210여자에 불과하다.
말이 나온 김에 백이 스토리 전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달아나 버렸고,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고죽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둘째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西伯昌/주문왕)이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의 아들 무왕은 선왕으 시호를 문왕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 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무왕 곁에 있던 신하들이 무기로 그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태공(강태공)이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이에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우‧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이들은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백이와 숙제, 정말 닮았다...!
백이라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해 아버지의 뜻을 좇아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나라를 떠난다. 문왕의 소문을 듣고 주나라를 찾아갔지만 이미 문왕은 죽은 후였고, 그의 아들 무왕이 막 군사를 일으킨 상황. 백이는 무왕의 거사를 막아서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하지만 백이는 뜻을 굽히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끝내 굶어죽는다. 대체 이 이야기의 매력은 무엇인가?
한편 백이는 <열전>에 실린 수많은 인물들중 유일하게 주(周)나라 시대의 인물이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동양적 질서의 원형을 완성시키는 문왕‧무왕‧주공 삼부자가 정치 질서의 이상형으로서의 주(周)나라를 대표하는 데 반해, 백이는 정치 질서 바깥에서 개인적 삶의 어떤 가치를 표상하는 모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백이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조선 후기의 김득신은 사마천의 <백이열전>을 무려 1억만번 이상 반복해서 읽을 정도였다. 백이에 관해 언급한 인물들을 대강만 훑어봐도 공자‧사마천 등으로부터 소철‧한유‧박지원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가장 최근세로는 20세기 루쉰의 소설에까지 이르고 있다. 대체 왜, 백이는 수천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문제적 인물이 되는 것일까?
루쉰이 쓴 고사신편.
고사에 대한 리라이팅(삐딱하게 보기?) 인 셈인데,
여기에도 백이숙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무지 재밌다~
2. 원(怨) : 어떤 원망인가
논란은 공자(孔子)에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백이가 원망(怨)이 있었겠냐는 자공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인(仁)을 구하려다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었겠는가?”(『논어』, <술이>).
그런데 사마천의 <백이열전>은 공자의 이 대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물음을 시작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는 작게는 ‘백이’에 관한 사마천의 질문이면서, 크게는 열전 70편을 아우르는 사마천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찬찬히 되짚어봐야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과거의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했고, 또 ‘그들은 인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으로 본다. 그들의 ‘채미가(采薇歌)’를 보면, 공자의 말과는 다른 데가 있다.
백이숙제의 원망하는 마음,
이를 두고 공자와 사마천은 다르게 생각한다
앞서 전체를 인용한 백이의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에 이어진다. 논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공자는 백이에게서 아무 원망이 없었다고 하지만, 사마천이 보기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사마천은 백이의 시 ‘채미가’를 들고 있다. 백이에게는 어떤 비통한 심경이 있었다는 것. 공자 말씀처럼 그것이 비록 원망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우‧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과연 ‘채미가’는 백이의 비통한 심경이 보인다. 그런데 채미가에 비통한 심경이 보이는 것이 공자가 말한 원망이 없었다는 말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이왕에 공자의 맥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어』 <술이>편에 실린 공자와 자공간의 백이 관련 대화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염유는 공자 문하에서 자로와 더불어 정치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제자였고, 자공은 바로 이 위나라 출신으로 재력이 풍부하고 언어 부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자의 일급 제자였다.
염유가 말했다. “선생님(공자)께서는 위나라 군주를 위해 일하실까요?”
자공이 말했다. “오키! 내가 물어보지요.”
자공이 들어가 선생님께 물었다. “백이‧숙제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대답하셨다 “옛날의 현인들이다.”
(다시) 물었다. “원망이 있었을까요?”
대답하셨다. “인을 추구하다가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었겠느냐.”
(자공이) 물러나와 (염유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아마 일하지 않으실 거요.”
공자와 자공,
백이에 대한 문답은 공자의 비전과 사상을 표현하는 문답이었다.
때는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망명중이던 공자와 제자들이 위(衛)나라에 머물던 무렵이다. 당시 위나라는 군주 위령공(衛靈公)이 죽고 그의 손자인 출공 첩(輒)이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본래 위령공에게는 아들인 태자 괴외(蒯畏)가 있었다. 그런데 위령공이 살아 있을 때 괴외는 왕위 계승 문제로 문제를 일으켜 축출되었으며, 이로 인해 여러 해 국외 망명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인 위령공이 죽자 괴외는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며 위나라로 돌아오고자 했다. 하지만 괴외의 아들이자 위령공의 손자인 출공 첩은 이미 할아버지로부터 정식 왕권를 이어받은 공식 왕이었다. 이런 이유로 출공 첩은 아버지인 괴외의 귀국을 거부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을 놓고 다투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공자의 제자 염유는 이런 위나라에서 스승 공자가 과연 위나라를 도와 정치를 하실 것인지 안 하실 것인지 자공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이에 자공은 공자에게 백이 이야기를 들어 에둘러 자신의 궁금증을 물어보았던 것. 왜 백이인가? 백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위를 포기하고 나라를 떠났으며, 급기야 외국에서 비참하게 굶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생님, 그런 백이는 원망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공자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백이에게는 원망이 없었다, 고 말했다. 이유인즉 백이는 다만 자신의 인을 실천하고자 했고, 또 자신의 인을 실현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면 사마천과 공자의 말이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이 말한 것처럼 ‘채미가’에는 분명 백이의 비통한 심경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채미가’의 비통함, 아니 백 번 양보해서 ‘채미가’에서 백이의 원망을 발견한다 해도, 엄밀히 말해 그것은 공자가 말한 백이의 원망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채미가’에서 말한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 이는 은나라 주(紂)왕의 폭정을 무력 쿠데타로 뒤집은 주무왕이기 때문이다.
불효과 불충 사이의 딜레마,
이를 대하는 공자와 사마천의 태도.
아직은 좀 더 퍼즐조각이 필요하다
『논어』 속 백이와 <백이열전> 속 백이는 처음부터 초점이 달랐다. 하지만 사마천은 공자의 ‘원망(怨) 없음’을 백이에 관한 일반적 논의로 삼아 주무왕과의 대결에서 벌어진 백이의 비극적 운명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것은 과연 사마천의 실수였을까,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일까. 하지만 실수였든 아니든, 사마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백이에 관한 이야기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여러 주제로 재해석되는 난문(難問)의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불효와 군주에 대한 불인(/불충)’을 배경에 둔 성공한 쿠데타의 신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하지만 아직 이 문제를 이해하기 전에 백이를 둘러싼 이해의 파노라마를 조금 더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계속)
- 백이를 둘러싼 모험(2)
문리스 (남산 강학원)
3. 독(獨) : 한유의 백이송(伯夷頌)
선비가 빼어난 뜻을 지니고 홀로(獨) 뛰어난 행동을 하는 것은 오직 외로움에 맞출 따름이다. 사람들의 비평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라면, 모두 위대하고 뛰어난 선비로서 독실히 올바른 도를 믿으면서 그 자신의 지혜가 밝은 사람인 것이다.
온 집안이 그를 비난하더라도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온 나라와 온 고을이 그를 비난한데도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라면 아마도 온 천하에 한 사람 정도 있을 뿐이다. 더욱이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하더라도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라면 백년이나 천년에 한 사람 정도 나올 따름일 것이다.
백이 같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끝에 이르기까지 또는 만고에 걸쳐서 아무 것도 돌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해와 달도 그보다 밝다고 할 수 없고, 태산도 그보다 높다고 할 수 없으며, 천지도 그보다 넓다고 할 수 없다.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일어날 때에, 미자(微子)는 현명한 사람이라 제기(祭器)들을 안고 나라를 떠났고,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성인이라서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을 이끌고 천하의 제후들과 함께 가서 은나라르 공격하였는데, 그들을 비난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를 못하였다.
저 백이와 숙제만이 홀로(獨) 옳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은나라가 멸망하자 온 천하가 주나라를 떠받들었지만 그들 두 사람만이 홀로(獨) 주나라의 녹속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굶어죽게 되는 일까지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로써 말할 것 같으면 어찌 추구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도를 독실히 믿었고 그들 자신의 지혜가 밝았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지금 세상의 이른바 선비라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 하나가 그를 칭찬하기만 해도 곧 스스로 여유있다고 여기고, 보통 사람 하나가 그를 비판한다 해도 곧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다. 백이와 숙제만이 성인들을 비난하며 그 처럼 자신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성인이라 바로 만세의 표준이 되는 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백이 같은 사람은 빼어난 뜻을 지니고 홀로(獨) 뛰어난 행동을 하여, 하늘과 땅의 끝에 이르기까지 또는 만고에 걸쳐서 아무 것도 돌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라고 한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백이‧숙제가 없었다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집안을 망치는 자식들이 후세에 연이어 나왔을 것이다.(김학주 번역/ 문리스 살짝 손봄)
4. 부득이(不得已) - 박지원의 백이론(伯夷論)
4-1. 백이론伯夷論(상)
<사기>에, 무왕이 주를 치러 나서자 백이가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고,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백이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논한다.
백이가 무왕에게 충고한 사실은 경서(<서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제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맹자>)인데 사마천이 취하여 역사적인 사실로 만들었으니 이는 믿을 것이 못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책을 믿을진댄 논의할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백이는 이른바 천하의 대로(大老)요 현인이므로 서백이 일찍이 예의를 갖추어 그를 봉양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백이를 무기로 치려고 했던 것이다. 아, 선왕이 예의를 갖추어 봉양했던 신하이자 천하의 이른바 대로요 현인인데도, 측근의 신하들이 곧장 그 앞에서 무기로 치려고 했더니, 무왕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맹자>)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저 때 태공이 아니었던들 백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에 이윤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그를 떠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같이 여겼으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여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한 무왕의 뜻이기도 하다.
무왕은 아마도 천하를 향해. “은나라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했다”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왕은 또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나라가 노성한 사람의 말을 저버렸다” 하였다, 그러나 주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불의를 충고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왕은 또 한 번 더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나라가 죄 없는 이를 죽였다” 하였다. 그러나 주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온전히 죽음을 맞지 못했으니, 주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은 죄 없는 이를 죽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릇 이 세 가지는 무왕이 남을 정벌한 명분이었는데도, 어째서 이렇듯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단 말인가?
무왕은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고, 비간의 무덤에는 봉분을 해주었으며, 상용의 마을을 지나갈 때엔 수레에서 경의를 표했으면서도(<서경>), 유독 백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 살았을 때는 예의를 갖추어 봉양하기를 문왕과 같이 하고, 그가 떠날 적에는 신하로 대하지 않기를 기자와 같이 하고, 의롭게 여겨 표창하기를 상용과 같이 하고, 그가 죽었을 적에는 봉분하기를 비간과 같이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탕과 백이와 무왕은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천하와 후세를 위해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탕임금이 걸을 내쳤는데도 천하 사람들이 흡족해하며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는 자가 없자, 탕임금은 진실로 이미 염려하기를,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를 구실로 삼을까 걱정이다” 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마침내 그 뒤를 따라 그와 같은 일을 행했으니, 천하 사람들이 또 흡족해하며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후세를 위하여 염려됨이 진실로 클 것이다. 그러므로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리를 밝게 드러냈을 따름이니, 천하와 후세를 염려한 점은 똑같았다.
아, 예의를 갖추어 봉양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표창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신하로 대하지 않은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봉분을 만들어 준들 백이를 후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4-2. 백이론(하)
공자가 옛날의 인자(仁者)를 칭송했으니, 기자, 미간, 비간이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인(仁)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맹자가 옛날의 성인(聖人)을 칭송했으니, 이윤, 유하혜, 백이가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성(聖)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 태공은 옛날의 이른바 대로요 현인이었으니, 그 행실은 백이와 똑같고 도는 이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의 인을 칭송하며 세 분의 인자와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며, 맹자도 그의 성을 칭송하며 세 분의 성인과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 내가 은나라를 살펴보건대, 그 나라에는 다섯 분의 인자가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다섯 분의 인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백이와 태공을 합해서 하는 말이다. 저 다섯 분의 인자들은 소행은 역시 각자 달랐지만, 모두 절실하고 간곡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기다려야만 인이 되고, 서로 기다리지 않을 경우 불인(不仁)이 되는 처지였다.
미자는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도 없는데 충고하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은나라의 종사를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나라를 떠났으니, 미자는 비간이 왕에게 충고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비간은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서 충고하지 않느니 차라리 낱낱이 충고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충고하고 죽었으니, 비간은 기자가 도를 전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기자는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를 전하랴’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었으니, 기자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천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 기자는 태공이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태공은 속으로 자신을 은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少師/비간)는 죽었고, 왕자(王子/미자)는 떠났고, 태사(太師/기자)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은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고서 마침내 주를 쳤으니, 태공 역시 서로 기다릴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후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니, 태공은 백이가 의리를 밝혀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백이는 속으로 자신을 은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는 죽었고, 왕자는 떠났고, 태사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그 의리를 밝혀 놓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고서, 마침내 주나라를 받들지 않았다. 무릇 이 다섯 분의 군자가 어찌 좋아서 그렇게 했겠는가? 모두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서로 기다려서 인이 된다 할 것 같으면, 태공이 없었을 경우 기자가 목야(牧野)의 대사(大事)를 치렀어야 하고, 백이가 아니었다면 태공이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어야 한단 말인가?”
대답한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리를 기다릴 따름이니, 신포서와 오자서가 서로에게 고지(告知)한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소사(비간)가 없었다면, 왕자(미자)가 반드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었는데도 떠났다면, 왕자(미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왕자(미자)가 떠나지 않았는데도 소사(비간)가 홀로 죽었다면, 왕자(미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소사(비간)가 이미 죽고 왕자(미자)가 이미 떠났는데도 태사(기자)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태사(기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태공이 천하 백성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백이가 후세 사람을 염려하지 않았다면 백이와 태공은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자가 주나라로 달아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비간이 충고하다가 죽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기자가 도를 전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태공이 주를 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백이가 주나라를 받들지 않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백이 및 태공의 도를 은나라 세 분의 인과 합친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공자의 뜻이기도 하다. 공자가 태공을 칭송하지 않은 것은 아마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이의 경우에는 자주 그 덕을 칭송하고,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감히 백이를 세 분의 인자와 연계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 무왕에게 누가 될까 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에 다섯 분의 인자가 합해야 온전한 인이 된다면, 어찌 수고스럽지 않은가?”
대답한다.
“그런 말이 아니다. 그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로써도 인이 되기로 말하자면, 편협하거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어찌 백이가 청렴해서 성인이 되고 유하혜가 화합을 잘해서 성인이 된 사실을 가릴 수 있겠는가?” (신호열․김명호 번역/ 문리스 살짝 손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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