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7일 일요일

장타이옌(章太炎), 장빙린(章炳麟, 1868년~1936년)

장빙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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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빙린
장빙린(章炳麟, 1868년~1936년)은 중국 말 민국 초기(民國初期)의 학자이자 혁명가이다. 저장 성 여항현(余抗縣) 출신이다. 자는 매숙(枚叔). 호는 태염(太炎)이다.

생애[편집]

소년 시절에 일찍이 배만의식(排滿意識)에 눈떴다고 한다. 청년 시대에 유월(兪越)에게 사사하여 고증학을 수학하고, 《좌씨전(左氏傳)》을 연구한 뒤에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였으나 그들의 공양학파(公羊學派)와는 학문상의 견해를 달리하여 곧 그들과 결별하였다. 무술정변 후 한때 일본에 망명하여 개혁파를 떠난 채 배만운동(排滿運動)을 결의하였다. 〈구서〉에서 강렬한 배만사상을 표명한 데 이어 〈박강유위론혁명서(駁康有爲論革命書)〉와, 추용(鄒容)의 저서인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에서 청조를 매도하여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는 불전(佛典)을 연구했다. 또한 저장(浙江) 계통의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의 결성에 관여하였다. 출옥 후 도쿄에 가서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기관지인 <민보(民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혁명을 맹렬히 고취하였다. 신해혁명 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정치에 반대하였고, 쑨원(孫文) 등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뒤에는 정계를 떠나 국학(國學)의 연구와 유지에 전념하여 민국의 학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필요]

사상[편집]

혁명가로서의 그의 특색은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입각한 종족혁명주의(種族革命主義)에 있고, 쑨원 등의 서구적·근대적 혁명이론을 승인하지 않았다. 학자로서는 고증학의 정통을 자부하였고, 특히 소학(小學) (현학·훈설(訓說)·音韻學)에 상세하며, 음운학의 권위로서 불교에도 통하여, 고증학·제자학(諸子學)·불학(佛學)을 망라한 국학을 주장하였다. 그 학풍은 혁명사상과 마찬가지로 국수주의적이다. [출처 필요]

저서[편집]

저서로는 전술한 것 외에 <문시(文始)>, <신방언(新方言)>, <소학문답(小學問答)>, <검론(檢論)>, <국고론형(國故論衡)> 등 대단히 많다. 이것들은 <장씨총서(章氏叢書)>, <동속편(同續編)>, <태염문록(太炎文錄)>, <동속편(同續編)>에 대체로 수록되어 있다. 루쉰(魯迅), 저우쭤런(周作人), 첸쉬안퉁(錢玄同) 등이 그의 훈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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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 최고의 먹물로 통하는 국학대사 장타이옌 한족 중심의 중화근대민족국가 건설을 주장하였다.
쑨원(孫文)의 동지였으며 또한 정적(政敵)이었고 루쉰(魯迅)의 스승이기도 했던 장타이옌(章太炎)이 1936년 6월 14일 쑤저우(蘇州)에서 사망했다.

20세기 초 만주족이 세운 청(淸)를 무너뜨리고 한족 중심의 중화민족주의를 주장했던 장타이옌의 사상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시점에서 새롭게 세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화이유별(華夷有別)을 주장하며 민족의 혈통주의를 중시했던 장타이옌이 조선과 베트남을 한족과 같은 혈통으로 보고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극단적 중화패권주의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 같은 선뜩함이 느껴지기도 하며 앞으로 우리가 남북관계, 북중관계를 생각할 때 한 번쯤 곱씹어 볼 대목이기도 하다.

말로는 중국적 가르침을 본질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실용적 발전을 위해 이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중국의 문자와 언어, 전통사상과 철학도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을 중국에 가져다 접목시켜 쓸 수 있겠느냐는 장타이옌의 비판적 일침은 거침없이 앞만 보고 '서구화'에 목을 매는 현대중국에 여전히 유효한 충언처럼 보인다.

근대의 마지막 대학자이자 현대의 문을 열어 준 장타이옌의 주장이 당대에도 여전히 통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학문적 식견이 그만큼 깊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장타이옌의 제자였던 루쉰은 스승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쓴 글에서 "일곱 번 체포되고 세 번 투옥되어서도 끝까지 혁명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七被追捕,三入牢獄,而革命之志,終不屈僥者)"고 스승을 경외하며 높이 평가했다.

장타이옌은 저장성(浙江省) 위항(余杭)에서 1869년 태어나 어릴 적부터 조부로부터 반만반청(反滿反淸)사상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본명은 장빙린(章炳麟)이고 타이옌(太炎)은 호(號)인데 자신이 존경하던 명말청초의 고증학자 황종희(黃宗羲, 자가 태충(太沖))와 고염무(顧炎武)에서 '타이옌(太炎)'을 따왔다고 한다.

성장기에 경전 연구와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을 접했으며 량치차오(梁啓超),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교류하며 변법유신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은 이미 부패하여 통치 능력을 상실했으니 한족 중심의 새로운 근대 민족국가를 건립하기 위해 청을 타도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혁명을 주장하다 투옥되기도 하였다.

장타이옌은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가 쑨원과 함께 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여 <민보(民報)>를 주간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쑨원과 뜻을 같이 했으나 사상적 이견을 보이면서 갈라서 광복회를 결성하여 수장이 되었으며 1912년 쑨원이 고문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거절하고, 한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대총통 취임을 지지하여 쑨원과 대립적 위치에 서기도 하였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송자오런(宋敎仁)를 암살하자 반원(反袁)운동을 주장하다 1916년까지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8년 이후 정계를 은퇴한 후에는 학문연구와 강학에만 전념하며 문사철(文史哲) 다방면에 빼어난 저술과 업적을 남겼다.

청말 최고의 먹물로 통하는 장타이옌은 '국학대사(國學大師)'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그의 동서고문을 오가는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문장들은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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