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위협했던 존재, 몽골 유목민족 '준가르'
네번씩 원정 나선 왕 중국 역사상 유례 없어…
예일대 퍼듀 교수, 유라시아 경합 역사 非한족 중심 재조명
피터 C.퍼듀 지음|공원국 옮김|길|924쪽|4만8000원
"곡식이 바닥나면 우리는 곡식을 얻기 위해 강둑과 늪으로 갈 것이다. 나는 갈단을 쫓기 위해 눈을 먹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회군할 수 없다."
1696년 준가르 지도자 갈단을 붙잡기 위해 나선 청나라 강희제의 원정군은 보급난에 시달렸다. 강희제는 주린 배를 채우려고 눈을 삼키면서 버티려 했지만,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벌써 세 번째 준가르 원정이었다. 강희제는 네 번째 친정(親征)을 마치고서야 갈단(재위 1671~1697)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역대 황제 중 다른 민족을 정벌하기 위해 네 차례나 직접 나선 것은 거의 유례가 없다.
준가르는 중앙유라시아를 무대로 활약한 오이라트 몽골족이 17세기 들어 세운 유목 제국이다. 지금은 잊힌 제국이지만, 오늘날의 신장(新疆), 몽골, 시베리아 일부까지 영향력을 떨치며 청과 러시아를 위협하던 막강한 세력이었다. 미국 예일대 퍼듀 교수는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만주족의 청과 러시아, 그리고 몽골족 준가르가 경합을 벌인 유라시아 심장부를 주목한다. 이 책은 2005년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학계의 논란이 됐다. 중국 중심의 역사 서술 대신 변경(또는 非한족)을 중심에 두고 중국사를 조명했기 때문이다.
- 준가르 원정에 네 차례나 직접 나선 청나라의 강희제. 그는 수차례에 걸쳐 북경에서 강남 지방을 순시한 군주이기도 했다. 그림은‘강희남순도’(부분). /도서출판 길 제공
준가르가 활약한 중앙유라시아 지역은 흔히 정치적·문화적으로 분열된 후진 사회로 간주돼왔다. 그러나 이곳은 종교, 언어, 문화가 서로 섞였고,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선진 지역이었다. 저자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근대 제국의 점령이 19세기에 이 지역을 후진적인 곳으로 격하한 것이지 이 지역의 본질적인 특징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준가르의 몰락을 가져온 원인은 1745년 갈단 체렝의 죽음이 몰고온 내부 분열이었다. 둘째 아들 체왕 도르지 남잘이 아버지를 계승했으나 폭력적이고 괴팍했다. 첫째인 라마 다르자가 동생을 제거하고 후계자가 됐지만 손꼽히는 전사 다와치, 아무르사나와 충돌했다. 라마 다르자가 죽자 권력을 차지한 다와치는 아무르사나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르사나는 청에 자기를 준가르 국가 수장으로 앉혀주면, 부하 5000명을 데리고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1755년 아무르사나는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다와치를 정벌하러 왔다. 다와치가 포로로 잡힌 뒤, 아무르사나는 준가르 지배자로 청에 맞섰다. 청은 아무르사나를 추격했고, 러시아로 도망간 아무르사나는 천연두를 앓다가 죽었다. 이로써 준가르 제국은 사실상 해체됐다.
퍼듀 교수는 청의 준가르 정복이 세계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우선 청의 지배자와 신민들에게 이 승리는 자기들이 알고 있던 세계의 범위가 획기적으로 확장된 사건이었다. 정복으로 국가 영토가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신민들의 이주, 무역, 행정,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청의 정복은 또한 17~18세기 당시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던 제국주의적 팽창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구 상 거의 모든 지역에서 새롭게 중앙집권화된 국가들이 군사적 정복, 이주민, 선교사,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무역상들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중국의 경험 또한 이런 세계적 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만이 아닌, 보편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논리다.
중국의 팽창은 유라시아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준가르 정복은 기원전 2000년 이후 농경 사회의 가장 강력한 대안이었던 유목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 지위를 박탈당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많은 내륙아시아인은 유목 전사들의 쇠퇴가 화약 확산과 중앙아시아 대상 무역의 이동 때문에 16세기에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유라시아 최후의 유목 국가 준가르는 18세기 중반까지 초원을 죄어오는 만주족 군대와 맞섰다. 방대한 분량과 낯선 인명, 지명 때문에 혼란을 느낄 수 있겠다. 하지만 청·러시아와 경쟁했던 준가르 제국의 복권을 통해 유라시아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의 기쁨도 함께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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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58)
준가르의 몰락을 가져온 원인은 1745년 갈단 체렝의 죽음이 몰고온 내부 분열이었다. 둘째 아들 체왕 도르지 남잘이 아버지를 계승했으나 폭력적이고 괴팍했다. 첫째인 라마 다르자가 동생을 제거하고 후계자가 됐지만 손꼽히는 전사 다와치, 아무르사나와 충돌했다. 라마 다르자가 죽자 권력을 차지한 다와치는 아무르사나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르사나는 청에 자기를 준가르 국가 수장으로 앉혀주면, 부하 5000명을 데리고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1755년 아무르사나는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다와치를 정벌하러 왔다. 다와치가 포로로 잡힌 뒤, 아무르사나는 준가르 지배자로 청에 맞섰다. 청은 아무르사나를 추격했고, 러시아로 도망간 아무르사나는 천연두를 앓다가 죽었다. 이로써 준가르 제국은 사실상 해체됐다.
퍼듀 교수는 청의 준가르 정복이 세계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우선 청의 지배자와 신민들에게 이 승리는 자기들이 알고 있던 세계의 범위가 획기적으로 확장된 사건이었다. 정복으로 국가 영토가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신민들의 이주, 무역, 행정,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청의 정복은 또한 17~18세기 당시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던 제국주의적 팽창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구 상 거의 모든 지역에서 새롭게 중앙집권화된 국가들이 군사적 정복, 이주민, 선교사,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무역상들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중국의 경험 또한 이런 세계적 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만이 아닌, 보편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논리다.
중국의 팽창은 유라시아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준가르 정복은 기원전 2000년 이후 농경 사회의 가장 강력한 대안이었던 유목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 지위를 박탈당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많은 내륙아시아인은 유목 전사들의 쇠퇴가 화약 확산과 중앙아시아 대상 무역의 이동 때문에 16세기에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유라시아 최후의 유목 국가 준가르는 18세기 중반까지 초원을 죄어오는 만주족 군대와 맞섰다. 방대한 분량과 낯선 인명, 지명 때문에 혼란을 느낄 수 있겠다. 하지만 청·러시아와 경쟁했던 준가르 제국의 복권을 통해 유라시아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의 기쁨도 함께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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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
(1634~1758)
파란색 선이 둘러싼 영역.
만주족인 청의 등장은 북방 유목민족의 흥망을 바꾸게 된다. 계속되는 내분과 청의 정벌로 몽골은 사실상 분열되고 정복되거나 힘을 못 쓰는 상황이였다. 그 반면 중국 서쪽의 오이라트는 준가르를 중심으로 뭉쳐서 단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도자로 갈단이 등장하면서 이후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청군과 준가르군의 전투.
결국 서역의 교역로를 안정화하고 몽골과 티베트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제는 오랜 준비 끝에 준가르 원정에 나서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는 하나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해 결국 얻은 성과는 미미했다. 갈단이 죽은 후에는 체왕 랍탄이 뒤를 이어 전성기를 구가하여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준가르 제국에 로망을 느끼는 이들도 있으나 애석하게도 준가르 제국의 국력은 인구수나 농업 생산력으로 러시아나 청조에 비하면 여전히 약한 수준이였다.
여하튼 세력이 팽창한 준가르는 과거 비슷한 유목제국을 세운 몽골처럼 후계자 문제로 내분크리가 작렬해 약화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건륭제가 즉위하고 청나라는 본격적인 준비 끝에 다시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압도적인 청의 국력과 내분이 겹친 준가르는 결국 후계자싸움에서 역전을 노린 아무르사나의 투항으로 청에 복속된다. 그러나 청이
한고조의 토사구팽을 거울삼아 준가르 땅을 4명의 대등한 칸을 세워 분할통치하려하자 자기가 혼자 대빵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아무르사나가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한번 배신했는데 두번을 못하겠어? 물론 이미 대세가 기운 판에 상대가 될 리 없었고 아무르사나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갔으나 결구 이역만리에서 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가르가 계속 반란과 저항을 할 낌새를 보이자 건륭제는 주도면밀한 준가르 족 학살정책을 벌이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사서에서는 준가르 족에 대한 절멸 시도를 발뺌하고 있긴 하나 학살하는 장수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죽이진 않고 밖으로 내쫓는 장수들에게는 벌을 줬다는 것에서 이미... 결국 다수의 준가르 족은 도망치거나 학살당해 사라진 민족이 되었다.
서하도 그렇고 여기는 아무래도 몰살당하는 마가 끼였나 보다
여하튼 이후 같은 오이라트 민족이였지만 카스피 해까지 이주해온 부족들이 다시 준가르 족이 소멸되어 사라진 땅에 다시 이주할 것을 요청하자 건륭제는 이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이 더 강화되는 기회라 여기고 허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배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다른 유목민족을 동원해 이들의 귀환을 최대한 저지하려 했다. 결국 이들 오이라트의 마지막 후예는 다시 준가르 분지에 돌아오긴 했으나 계속된 전투와 질병 등으로 6만 9천 정도만이 살아서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준가르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후 투르키스탄의 부르하 앗딘과 호자 지한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긴 했으나 결국 완전히 평정되고 티베트에서 신장-위구르, 외몽골에 이르는 모든 영토가 완전히 복속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건륭제는 십전노인이라는 명성을 위해 준가르 지방 원정의 공로를 쪼개 여러 개의 원정으로 둔갑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후 이 지역에 원래 살던 준가르 족이 사라지자 위구르 인들이 번영하게 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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