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8일 월요일

북위 효문제 - 탁발광

http://blog.daum.net/shanghaicrab/15717526

북위의 효문제 - 탁발광

글: 증기흠(曾紀)

북위 효문제의 개혁은 중국역사에 있어서 일대사건이다. 후세인들이 글을 통해서 찬양해 마지 않는 사건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과서는 논쟁거리를 감추어 두었다:

- 강대했던 북위가 쇠망한 것은 효문제의 개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 효문제개혁의 폐단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 북위가 급격하게 멸망하게 된 진정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 누가 북위개혁의 진정한 선구자인가?
- 용감했던 효문제는 어떠한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는가?

소년황제

467년, 탁발굉(拓跋宏)은 당시 북위의 수도인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태어났고, 2년후에 태자에 봉해진다.

비록 이미 중원에 진입하여 중원의 주인이 되었지만, 탁발부(拓跋部)는 여전히 과거 조혼의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탁발굉이 태어날 때, 그의 부친인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은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탁발부가 북위를 건립한 후, 중원왕조가 황권통치를 유지하는 방법을 일부 배웠고, 제도로 만들어 엄격히 집행했다. 예를 들어, 후궁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태자가 되면, 모친은 죽임을 당한다. 그 뜻은 황제가 어려서 즉위하면, 대권이 모친계통의 외척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탁발굉은 2살때 태자가 되면서,모친인 사황후(思皇后) 이씨(李氏)는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야만적인 조치는 나이어린 탁발굉에게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아니라, 이후 가정생활이 처량하고 불행할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탁발굉은 어려서부터 생모를 잃었으므로, 조모인 풍태후(馮太后)의 손에서 자란다. 풍태후는 혈친은 아니지만, 명목상으로는 조모(할머니)였다. 그녀는 한족이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책을 약간 읽었으며' 봉건적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성격이 굳건했고, 일처리가 과단성이 있어 정치가의 풍모가 있었다. <<위서. 황후열전>>에서는 그녀를 '지략이 뛰어나고, 시기심이 있으며, 잔인했다. 큰 일을 할 수 있었고, 살리고 죽이거나 상벌을 내림에 있어서 바로바로 결정했다"  탁발굉의 부친인 탁발홍은 즉위시에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북위는 고아와 과부만 남아 정국이 안정되지 못했었는데, 풍태후는 이때 솜씨를 발휘한다. 권세를 부리던 승상, 차기대장군 을혼(乙渾)을 체포하고, 관중의 반란을 평정했으며, 임조칭제(臨朝稱制, 조정을 주재하고 최고명령권을 행사하다)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탁발굉이 출생하자, 풍태후는 즉시, '정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정권을 탁발굉의 부친인 탁발홍에게 넘겨주었다. 헌문제 탁발홍이 친정을 시작한 후, 산택의 금지령을 해제하고, 창고를 열어 이재민을 구휼하고, 병사를 이끌고 유연을 정벌하는 등, 젊은 황제로서 여러가지 사업들을 의욕적으로 벌였다. 권력욕이 왕성한 풍태후로서는 참지 못하고 북위의 정치에 간여하기 시작한다. 이는 자연히 헌문제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그들은 친모자간이 아니다. 그리하여, 궁중투쟁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지게 된다. 결과는 뿌리가 깊고 정치적인 지략이 뛰어난 풍태후의 승리였다. <<위서. 천상지>>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황상이 태후에게 핍박받아, 태자에게 황제위를 전하니, 효문제이다"

탁발굉이 즉위할 때 나이 겨우 5살이었다. 평성의 황궁에 있는 태화전에서 융중한 등극식을 거행할 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안겨서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나이 겨우 5살된 아이이다보니, 풍태후로서는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임조칭제하고, 권력을 자기의 수중에 장악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거역하여 '양위'하게 된 헌문제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나이어린 효문제는 자기가 생각하는 모델에 맞추어 교육하고 인도했다.

탁발굉의 혈관속에는 선비족인 탁발씨의 혈액이 흘렀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한족문화의 훈도와 교육을 받았다. 그를 둘러싼 대신들도 문화수양이 높은 한족 사대부들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으며, 자질이 극히 뛰어났다. <<위서. 고조기>>에는 그가 '오경의 뜻을 한번 보면 바로 말할 수 있었다.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않고도 정수를 깨달았고, 사,전,백가등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풍태후는 친히 <<권계가>>, <<황고(皇誥)>>등의 글을 써서 그로 하여금 읽고, 외우게 하여, 유가의 충효, 인애, 예의등 봉건도덕사상을 탁발굉에게 전수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언행을 가지고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풍태후는 생활에서 절제하고 검약하였으며,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았고, 아랫사람에게 관대하게 대하였는데, 탁발굉도 그대로 따라 하였다.

어릴 때의 생활은 탁발굉의 내심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었고, 그의 일생에 영향을 미첬다. 이후, 탁발굉은 평생동안 시문을 좋아하고, 대량의 시부문장(약40권)을 지었다. 그는 정치에 근명했고, 열심히 통치했다. 개인생활은 근검절약했다. 그는 봉건윤리도덕을 제창하고, 효제, 인의, 충신을 중시했으며, 그 자신이 몸소 실행하였을 뿐아니라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따르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가 나중에 실행하는 전면적인 한화(漢化)정책의 기초이자 지도사상이 된다.

당연히, 탁발굉이 완전히 선비족의 습속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당시는 남북대치상태이고, 전쟁이 빈번하였으므로, 제왕이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탁발굉은 글을 익히는 동시에, 무공도 익혔다. 그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고, 그가 원하는대로 맞혀서 죽일 수 있었다. 팔힘도 좋았다. 십여세때 이미 손가락으로 양의 어깨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성장한 탁발굉은 기마술, 활쏘기등 무공을 갖추고 한문화의 소양을 지닌 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되었다.

선도자

탁발굉의 부친 헌문제 탁발홍은 '양위'시에 겨우 19살이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퇴위후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일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태상황의 신분으로 그는 친히 병사를 이끌고 유연을 치러나가기도 하고, 계속하여 전국각지를 순시했다. '국가의 대사는 모두 물어보았다' 그리고 풍태후에 의하여 쫓겨난 옛신하를 다시 기용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와 풍태후간의 갈등을 격화시키게 된다. 궁중투쟁이 더욱 적나라하게 되고, 피바람이 일었으며 잔혹하게 되었다. 투쟁쌍방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혈연과 가족의 정도 모두 도외시되었다. 상대방을 피바람속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끝날 일이었다. 풍태후와 헌문제간에는 혈연관계도 없다. 그에게 황제위를 내놓도록 하고, 태상황이라는 직함을 붙여서 살려둔 것만 해도 풍태후로서는 이미 손속에 정을 남긴 것이었다. 그러나, 헌문제는 아직 어렸다. 풍태후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일을 벌였다. 그리하여, 헌문제는 풍태후의 눈엣가시로 되어버린다. 476년, 풍태후는 아예 깔끔하게 헌문제를 죽여버린다.

이 해에 탁발굉은 10살이었다.

헌문제가 죽다, 풍태후은 태황태후에 오른다. 그녀는 490년에 죽을 때까지, 임조칭제하고, 수중의 권력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풍태후가 정권을 잡았지만 그녀는 식견과 안목을 가진 정치가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이상을 가지고 새로운 황제를 길러냈을 뿐아니라, 전체 북위를 자기가 구상하는 틀과 모델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목표는 아주 명확했다. 하나는 남조로 진공하여, 그들이 내란에 처한 틈을 타서, 회북의 큰 영토를 빼앗아서, 북위의 국경선을 넓혀 회하일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내부를 개혁하여, 한인왕조의 예의제도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자잘한 개혁은 아프지도 않고, 당연히 그다지 큰 작용을 하지도 못하며, 유효하게 목적을 이루기 힘들다. 그러나, 대규모의 개혁은 반드시 기득권자와 완고하게 선비의 옛풍속을 고집하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닥치게 된다. 그리하여, 풍태후는 과감하게 정적들을 제거해나갔고, 그들을 죽이거나, 파면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 후에 그녀는 풍씨가족구성원에 의지하여, 환관과 한족관리를 중용하고, 선비원로를 끌어들여, 자신의 곁에 믿을만한 심복을 배양했으며, 권력을 공고히 하고, 개혁을 강화했다.

풍태후의 일련의 개혁조치중에서, 영향이 가장 큰 것이라면 봉록제(俸祿制)를 추진한 것이다.

유목민족이 남하한 목적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왕왕 "처음에 올 때는 말 한마리에 채찍 뿐이었는데, 돌아갈 때는 마차만 백량이다"라는 말을 했다. 씨족수령은 병사들이 더욱 용감하게 전투를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전리품은 개인에게 귀속시켜주고, 논공행상을 통해서 상을 내렸다. 이러한 정책은 병사들에게 전투의욕을 북돋워 주었다. 사람들마다 용감하게 싸우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뒤로 물러서거나 배반하거나 도망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그리하여 전투력이 아주 높아졌다. 선비 탁발씨가 북위를 건립한 후, 과거의 유습을 남겨두었다. 그러다보니 백관에 녹봉이 없었다. 수입은 주로 노략질과 하사품이었다. 북방을 통일하고, 전쟁과 약탈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관리들은 공개적으로 부패하고 백성들로부터 돈을 긁어모았다. 북위의 관료사회가 부패하고, 재정이 결핍되고, 국가기구는 엄중하게 썩어들어갔다. 선비귀족도 향락에 물들어갔다. 옛날의 용감하고 전투적인 기풍은 점차 소실되었다. 역대황제는 이에 불안감을 느꼈다. 여러번 불법을 저지르는 관리들을 처벌했지만, 근본적으로 관리부패라는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484년, 효문제는 명을 내려 봉록제를 시행한다. 봉록은 매3개월에 1번씩 내린다. 매년 10월부터 기산한다. 동시에 탐관오리에게는 엄격한 처벌규정도 둔다: "녹봉을 받은 다음에도 부패를 계속하여 1필에 이르면 죽인다"

봉록제를 추진한 후, 북위의 중앙집권과 봉건화과정은 가속화된다. 이는 확실히 관리의 일상생황에 보장을 주었고, 탐관오리를 막는데 효과를 나타냈다. 이는 효문제개혁의 전주일 분아니라, 북위가 유목노예제정권의 잔재를 벗어버리고, 한족관료정치체제를 받아들인다는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바로 녹봉제를 시행한지 1년만에 확실한 효과를 거두자, 북위는 다시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하나의 개혁을 시행한다. 바로 균전제(均田制)이다. 즉 국가의 명의로 토지를 분배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호족세력의 토지소유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그들의 수중에서 많은 노동력을 빼앗아 왔다. 농민에게는 자기의 것인 토지를 나누어주고, 국가는 재정수입을 확보받았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땅을 줌으로써 많은 농민들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생산이 회복되고,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는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균전제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토지개혁이다. 북위, 북제, 북주, 수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 난다. 이 제도는 고대에 300년간 지속되고, 일본, 한국등 주변국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혁은 표면적으로는 효문제 탁발굉의 명의로 반포되고 시행되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풍태후가 한 것이다.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풍태후이다.


효문제가 날로 자람에 따라, 그와 풍태후의 관계도 날로 미묘하고 복잡해졌다. 문제의 관건은 결국 하나이다. 권력. 봉건제도의 최고통치자로서 권력이 모든 것이다. 심지어 생명보다 중요하다. 풍태후는 권력욕이 아주 강했다. 그리고 시기심이 강하였다. 그녀는 하루하루 커가는 효문제가 '총명'해지는 것을 보고는 장래에 통제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고, 풍씨에 불리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황제를 폐위시킬 생각도 품었다. 그녀는 탁발굉을 방안에 가두어놓고, 삼일동안 식사를 넣어주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때는 한겨울 음력12월이었다. 탁발굉은 홑옷만을 입고 있었다. 풍태후는 대신을 불러서 논의했다. 함양왕인 희(禧)를 새황제로 올리면 어떨것인지를 논의했는데, 적지 않은 원로대신이 격렬하게 반대해서 할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내관으로 하여금 효문제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매 10일마다 한번씩 보고하게 하였다. 환관은 효문제의 잘못을 밀고했다. 그러면, 풍태후는 대노해서 바로 탁발굉에게 전해지고, 곤장을 십여대 얻어맞았다. 효문제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탁발굉은 천성이 총명하고 참을성이 있었다. 그의 부친처럼 혈기방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풍태후와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풍태후의 성격으로 봐서, 아무리 신하들이 간하더라도 북위의 황제자리에서 쫓아내 버렸을 것이다.

486년, 효문제의 나이가 만 20세가 되었다. 이미 성인이 된 것이다. 정리나 상황으로 보아, 풍태후가 계속하여 임조칭제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부득이 권력을 척발굉에게 넘겨준다. 그리하여, 황제는 비로소 곤룡포와 면류관을 하고 친히 자신이 조서를 쓰게 되는 것이다.

탁발굉이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풍태후는 완전히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효문제였다. 탁발굉이 황제로 있던 28년간을 권력을 중심으로 나누어보면 3단계이다: 제1단계는 5살에 등극해서 20살때 친정할 때까지로, 이때의 대권은 완전히 풍태후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제2단계는 20세에 친정을 시작해서 24세에 풍태후가 죽을 때까지로, 이때의 대권은 그와 풍태후가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제3단계는 24세에 풍태후가 죽은 이후 33세에 그가 죽을 때까지로, 이때는 그 혼자서 권력을 장악했고, 그는 대담하게 대규모 전반적인 한화개혁을 추진하였다. 엄격하게 말하면, 효문제가 진정으로 북위의 대권을 장악한 기간은 팔, 구년에 불과하다. 다만, 봉건황제의 지위에 어려서부터 있었으므로, 신하들과 백성들의 마음 속에 무상의 위엄과 이미지가 심어져 있었으므로, 일단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일대영주의 모습을 드러냈다.

풍태후는 490년에 죽는다. 향년 49세이다. 풍태후가 죽은 후, 탁발굉은 아주 비통해 하며 5일간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하루 세끼를 작은 그릇으로 쌀죽 한그릇만을 먹었을 뿐이다. 상복도 계속 벗지 않았다. 풍태후가 유언으로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라고 했지만, 그는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고대의 예법에 따라 3년간 수효(守孝)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비록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쳐 3년 수효는 흐지부지 되기는 했지만.

효문제가 풍태후의 장례에 이렇게 신경쓴 것은 몇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는 확실히 풍태후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비록 풍태후가 그를 질책하고, 폐위하려고까지 하기는 했지만, 길러준 은혜, 가르쳐준 은혜, 황제에 앉혀준 은혜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효문제는 장례의 형식을 통하여, 한족의 봉건예의문화 총효인의를 몸소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셋째는 그는 이를 통하여 문무대신들에게 자신의 의사, 즉 풍태후의 개혁정책을 철저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자 했다.

일인극

척발굉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했던 첫번째 일은 북위의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그는 대대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의 내용은 우리가 한 단어로 개괄할 수 있다: 전반한화(全盤漢化). 낙양으로 천도한 것은 그가 전면적으로 한화하겠다는 결심을 표명한 것이고, 그가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전환점과 표지가 되었다.

선비 탁발부락은 멀리 변경지방에서 발원하였다. 그들은 원래 인구가 적었다. 넓다란 중원에 들어온 후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약탈만 하려고 한다면, 한바탕 약탈을 벌인 후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과거의 야만적인 유목생활과 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원에 장기적으로 자리잡고, 생활하려면, 할 수 없이 조정해야만 했다. 과거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유목생활을 농경생활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선비 척발부가 남하하면서 이미 천도했던 역사가 있다.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가 북위를 건립할 때의 수도는 성락(盛樂, 지금의 내몽고 허린가르 북쪽)이었는데, 나중에 398년에 평성으로 천도했다. 즉, 평성도 북위통치자의 천도의 산물인 것이다. 만일 현재의 영토와 통치에 만족한다면, 평성이 선비족들에게는 이상적인 수도이다. 그러나, 형세의 발전에 따라, 북방의 유연과 고창의 위협은 이미 해소되었고, 남방으로 영토를 계속 확대하고 있었다. 웅재대략을 지닌 효문제 척발굉으로서는 북위의 전략목표를 '남조의 제나라를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한다"로 명확히 하였다. 평성은 황토고원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날씨가 춥고, 토지가 척박하며, 교통이 불편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략목표를 수행하는데에는 부적합했다. 가장 주요한 점은 이곳의 선비귀족들 중에서, 사상이 보수적이고, 생활이 부패하며, 옛 선비의 습속을 고집하는 개혁에 반대하는 완고한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볼 때, 선비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개혁해야 했다. 개혁의 관건은 평성을 떠나는 것이고, 중원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척발굉은 비교형량한 후에 눈을 고대에 천하의 가운데였고 기후가 비교적 온화한 낙양으로 돌렸다. 그가 낙양을 중시한 것은 아마도 이곳에 한족사대부가 많이 살았고 한족의 문화중심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외에 낙양은 남조와도 근접해 있어, 수시로 병력을 동원하기 좋았다. 남조를 무너뜨리고 천하통일하려는 웅심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보수세력의 본거지를 벗어나야만, 순조롭게 전반한화의 개혁방침이 성공할 수 있다.

탁발굉은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낙양천도문제를 급작스럽게 꺼내다가는 반드시 선비귀족들의 강렬한 반대에 부닥칠 것이라는 것을. 남천은 그들의 현재 가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미 습관화된 생존환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말타고 활쏘는 유목생활의 장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지 않은 선비귀족들은 북위의 천하는 평성을 거점으로 하여 하나하나 말등에서 싸워 얻은 것이다. 만일 평성을 벗어난다면, 용감하게 전투하는 민족정신이 상실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한족은 통치하기 어려울 뿐아니라, 거꾸로 그들에게 동화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선비족들은 탁발굉처럼 어려서부터 한문화에 접촉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문화에 대하여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별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탁발굉의 마음처럼 그다지 긴박감이나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한족을 더욱 압박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며, 즐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므로, 탁발굉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방사람들은 근본을 그리워한다. 갑자기 옮긴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천도를 강행한다면, 잘안될 수도 있다. 아마도 수습하기 어려운 내란에 처할 수도 있었다. 순조롭게 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탁발굉은 심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생각해본 다음에, 상당히 교묘한 방책을 하나 내놓는다.

493년 오월, 효문제는 신하를 소집하여, 남으로 제나라를 토벌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태상경 왕담으로 하여금 남조를 토벌하는 것에 대한 길흉을 묻는다. 결과는 "혁(革)"괘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척발굉은 큰 소리로 말하였다: "탕무혁명은 하늘에 따르면 사람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어서 효문제는 자기의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집행한다.

493년 칠월, 효문제는 친히 30만 보병,기병을 이끌고 평성에서 출발하여 제나라를 치러 남하한다. 날씨는 계속 좋지 않았다. 큰 비가 그치질 않았다. 도로는 진흙탕이었고,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음울한 하늘은 쇠솥처럼 머리위를 뒤덮고 사람을 숨도 쉬기 힘들게 내리 눌렀다. 이리하여 평소에 편안하게 지내던 선비귀족들은 피곤함이 배가되었다.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1달여를 간 다음에, 겨우겨우 낙양에 도착한다. 낙양에서 잠시 쉬어가리고 한다. 척발굉은 일부러 폭우가 내리는 날씨를 골라서 떠난 것이다. 대군을 계속 이끌고 남하하려한다는 말을 듣자, 선비귀족들은 모두 놀라서 하나같이 탁발굉의 말 앞에 무릎을 꿇고 더 이상 남진하지 말도록 간청했다. 효문제는 시기가 되었다고 보고, 교환조건을 제시한다. "만일 더 이상 남진하지 않는 것은 좋다. 그렇다면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그 후에 사람들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하였다. 천도를 원하는 자는 왼쪽, 동의하지 않는 자는 오른쪽. 그의 말에 모두 왼쪽으로 자리잡았다. 오른쪽에 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명 되지 않았다. 왼쪽의 선비귀족, 문무대신은 모두 무릎을 꿇고 방아깨비처럼 머리를 내리찧으면서, '만세'를 외쳤다. 탁발굉은 그 모습을 보고는 정식으로 천하에 선포한다: 북위는 낙양으로 천도한다.

이 중대한 결정은 이처럼 그 혼자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면서 일인극으로 완성되었다. 평성에 남아 있던 선비귀족은 마음 속으로 불만이었다. 그러나, 대군을 탁발굉에 데려간 후이므로 반항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93년 시월, 효문제는 낙양에 건물을 짓도록 명한다. 다음 해 삼월, 그는 평성으로 돌아가서, 다시 선비귀족과 문무대신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쓰는 설득공작을 벌인다. 그리고 남으로 내려갈 인원과 평성에 남을 인원을 정리하고, 차례차례 천도를 진행한다.


495년 구월, 평성의 문무백관 및 후궁이 낙양으로 옮기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효문제의 한화개혁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인 3년에 걸친 천도가 완성된다.

비극인생

척발굉은 선비족의 일원으로, 그의 혈관에는 척발씨의 혈액이 흐른다. 본민족문화에 대하여 자연히 가깝게 느껴지고 호감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한민족의 유가문화의 훈도와 영향을 받아,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인자가 그의 마음 속에 동시에 존재했다. 분명히 서로 충돌하고 부딛쳤을 것이다. 둘을 비교하면, 그는 이성적으로는 한문화에 동조했고, 완전히 한문화의 발아래 무릎꿇었다. 그리고 고심해서 그의 신하와 백성들을 선진적인 문화의 길로 이끌고 갔다.

낙양천도후, 북위의 한화개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효문제는 더 이상 과거의 부분적인 개혁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속도와 강도를 높인다. 여러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추진한다. 한족문화를 모조리 가져와서 쓰는 것이다.

내부개혁과 동시에, 척발굉은 남북통일의 목표도 잊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성격이 과단하며, 아주 박력이 있고, 담략이 있었다. 다만 성격이 조금 조급하였고, 어떤 일들은 그가 혼자서 다 이루려고 욕심을 냈다. 막 낙양에 천도하자마자, 대신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안정되기도 전에, 병력과 물자의 준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황급히 정벌을 시작했다. 병사를 넷으로 나누어, 전면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반만에 실패로 끝난다.

496년 시월, 제1차남조정벌이 무위로 돌아간 후 1년여만에, 그는 남조내부의 정치동란의 좋은 기회를 틈타, 다시 대거 제나라를 치러 내려간다. 이때, 효문제는 비교적 충분한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북위군사가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남양, 신야등 적지 않은 군현을 얻었다. 다만, 와양전투에서 위나라군은 참패하고, 1만여명의 병사가 전사하며, 3천여명이 포로로 잡힌다. 나중에 다시 전세를 뒤집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 7개월에 걸친 남조정벌은 결정적인 승리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만다.

498년 사월, 척발굉은 주군병 20만을 징집하여 8월중순까지 집결을 마치도록 한다. 제3차남조정벌을 준비하는 것이다. 남조정벌에 나선 고창의 병사들은 원정을 두려워 하여 속속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마침 제나라의 명제가 죽는다. 효문제는 '상중인 나라를 치지 않는 것이 예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남조진공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하여 내부를 정돈한다. 오랜동안의 정벌로 효문제는 피로해진다. 그리고 내부의 각종 갈등으로 몸과 마음이 다 어지러웠따. 바로 이때, 후원에서 돌연 불이 난다. 어떤 사람이 황후인 풍묘련(馮妙蓮)이 환관을 참칭한 승려 고보살과 사통했다고 보고한다. 이는 불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었다. 척발굉은 대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황후를 감금하라고 명령하고, 고보살 및 둘을 연결시켜준 궁중집사 쌍몽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효문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데다 몸과 마음이 초췌해져, 이미 허약했던 몸에 큰 병을 얻는다.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서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는데,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제를 토벌하러 나선다. 결국 병이 뼛속깊이 들어, 효문제는 499년 사월 이십육일 정벌도중에 죽는다. 나이 겨우 33세때의 일이다.

효문제는 죽기 전에, 음탕한 풍황후를 잊지 않았다. 그는 유언을 남겨서, "황후는 부덕을 지키지 않았으니, 사후에 조정일에 간섭할 수 있으니 자진토록 하고, 자리를 잡아서 황후의 예로 안장해주라"

척발굉은 황위를 위하여, 북위의 국가대업을 위하여, 거의 가정이 행복과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의 개인생활은 다중비극이 겹쳐져 있었다. 부모, 부인, 아들이 누군가에 죽임을 당하거나, 사사당하거나, 자기가 명을 내려 죽게 하였다. 척발굉의 혈연지친과 가정생활에는 처량하고 참담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는 그의 일생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다.

성패영웅

후세인들이 척발굉을 높이 평가받고, 학자들의 그에 대한 연구 및 그의 역사에서의 지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의 전공때문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문치 즉 전반한화때문이다. 연구결과의 하나는 바로: 북위의 쇠망은 효문제의 개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후세인들의 척발굉의 전반한화개혁에 대한 평가는 세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전면적인 긍정이다. 그는 북위사회의 봉건화를 완성하고, 각민족의 융합을 추진했으며, 당시사회의 안정, 경제의 번영과 문화의 진보를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효문제의 전반한화는 당시의 역사발전조류에 순응한 면이 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개혁방침을 채택한 점도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긍정과 부정이 모두 있는 것이다. 척발굉의 한화개혁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가 청탁을 가리지 않고, 정화와 쓰레기를 구분하지 않고, 취사선택없이 전면적으로 한족문화를 흡수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벌제도의 건립은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낳았다. 선비귀족을 날로 부패 무능하도록 만들었고, 사병의 지위를 하락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전투력을 상실시켰다. 그가 낙양으로 천도한지 얼마되지 않아, 준비가 부족하고 내부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하에서 연이어 3차의 대규모 정복전을 일으킨 군사행동은 너무 조급했다.

셋째는 전면부정이다. 효문제의 한화는 썩은 유가화, 소극적인 한화이다. 그저 한족의 번잡한 예의와 낡아빠진 요소만을 배웠다. 그리하여 척발부의 용감하고 전투적인 기질을 잃어버렸다. 그의 개혁은 북위를 진흥시키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반대로 민족의 유약과 국가의 쇠망을 초래했다.

사실의 진상은 설사 효문제의 개혁이 없었더라도, 척발부는 이미 조상때의 용감함과 강맹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북위의 쇠망도 모두 척발굉의 조치때문은 아니다. 만일 당초에 낙양으로 옮겨서 남부세력을 강화하지 않았더라면, 남제의 북벌이 더 일찌감치 성공했고, 중원의 고토를 회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척발굉의 개혁상 잘못이라면 대북의 변방지역에 대하여 소홀히 하였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낙양천도후, 정치군사중심이 남으로 옮겨간 후, 효문제의 개혁은 주로 낙양을 중심으로 황하유역에서 진행되었다. 과거의 발상지인 평성을 중심으로 한 대북지역은 아마도 경제조건의 제약인지 혹은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니면 남쪽에 정력을 집중해서인지 어쨌든 돌보지 않았다. 남부는 전면적으로 한화하였지만, 북부는 강렬한 선비의 경향을 보존하고 있었다. 선비말, 선비복...선비습속이 예전과 똑같았다. 문벌귀족제는 대북변방의 귀족을 바깥으로 내몰았고, 그들을 하층의 서민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자, 북위는 점점 낙양을 중심으로 한 집단과 평성을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 분열된다. 결국 거대한 정치내란에 휩싸이고, 북위의 멸망은 가속화된다.

북위가 신속히 멸망한 근본원인은 효문제의 뒤를 잇는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봉건통치의 큰 특색의 하나는 인치이다. 흥망성쇠가 왕왕 권력자와 밀접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좋은 군주는 국력을 강성하게 하지만, 혼군, 폭군, 용군(庸君)은 국력을 쇠약하게 한다. 이는 수천년이래로 중국봉건사회의 철칙이다. 효문제가 죽은 후, 후임자는 평범하고 무능했다. 혹은 멍청하고 포악했다. 갈수록 이전만 못했다. 30년도 되지 않아 멀쩡하던 북위는 끝장나고 만다.

민족간의 융합과 동화는 인류전체의 역사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발전추세이다. 이로써 볼 때, 효문제 척발굉은 1500여년전에 전반한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바로 역사의 조류와 발전의 추세에 순응한 위대한 개혁이라 할 것이다. 도덕측면의 선악판단과 공리적인 성패득실을 따지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는 선진문화를 인정하는 자각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후세인들에게 고귀한 모범을 세운 것이라 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