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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를 전후로 한 동서문명 논쟁
근대의
동아시아
아래 글은 한세대 강명희(姜明喜)
교수님의 「5∙4 시기 중국의 ‘제3 신문명’ 건설 탐색」의
일부를 읽고 정리하고 느낌을 더한
것입니다.
신문화운동 시기 호적(胡適)이 ‘’재조(再造)문명(文明)’을 꿈꾸며 서양문화를 도입하여 활력을 상실한 중국문명을
치유하고자 했듯이, 이대조(李大钊)도 ‘제3의 문명’ 건설을 제기하였지만, 그는 동서문명의 특성을 겸비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를 그 모델로 상정하였다. 1919년 9월 연구계(硏究系)에 의해 창간된 『해방과 개조』에 게재한 논설 「제3종문명」에서
장동손은 습관과 미신의 제1종 문명과 자유와 경쟁의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제2종문명에
이은 제3종문명을 호조와 협동의 사회주의 세계주의로
특징지웠다.
신해혁명 후 황제제도
붕괴에 따른 전통사회 측면에 동요가 시작되었다해도, 2천년 동안 국시(國是)였던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신청년』그룹의 도전, 즉’打倒孔家店’을
제기한
5∙4
신문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탈피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청년그룹의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문화급진주의 신문화운동은 국수파뿐만 아니라 학형파(學衡派)
등
문화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을 불러일으켜 신구문화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전통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 서양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전반서화’의 필요성 또는 가능성을 두고 오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문제는 서양의 실체가 무엇인가 였다.
1910년대
후반 동서문화 논전은 두아천(杜亞泉)의
비판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 ‘중국본위문화건설논쟁’까지 근 20년
지속되었는데,
논쟁의 초점은 중국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는 ‘수준’의 차이냐 ‘성질’의 차이냐 하는 것과 문화의 변동과 융합에
관한 관점의 차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동방잡지』 주편인 두아천은
「재론신구사상지충돌(再論新舊思想之衝突)」과
「정적문명여동적문명(靜的文明與動的文明)」을 1916년 『동방잡지』에
연이어 발표하며,
동서문화의 차이는 성질의 차이므로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신구문화의 차이는 새로운 요소와 구
요소의 구성 정도의 차이므로 신문화로써 구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문명이나 장단점이 있고 성질이
다르므로 남의 것을 취해 대체할 수 없고, 단지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뿐이라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다만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 중 어느 것이 더 우수하고, 문화는
지금 발전하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대답할까?)
주지하듯이
진독수(陳獨秀)가 1915년
『청년잡지』(이듬해 『신청년』으로 개명)를 창간한 것은
공교국교화(孔敎國敎化)
운동과 복벽운동 등
복고적 경향을 차단하고 서양의 가치를 적극 수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1911년 경에도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대립하고 있었다. 신문화운동이 흥기하기 이전에 이미 시대 풍조는 급속히
변하여,
신(新)과
서(西)는
선(善)이고
구(舊)는
악(惡)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일어났다.
진독수는
『신청년』창간호에 발표한 「법란서인여근세문명(法蘭西人與近世文明)」에서, 인권설, 진화론, 사회주의를 발전시킨
프랑스문명과 자유 민주 평등 박애사상을 찬양하며 이러한 신문명을 창조한 프랑스문명이 아니었으면 세계는 아직 흑암 중에 처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두아천은 서양문명의 물질적 과학기술적 요소의 수용을
지지하면서도,
중국의 도덕은 인심을 다스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배격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유교사상을 부정함에 따라 야기된 정신과 사상의 혼란을
우려하여 유교로써 사상의 통일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문화조화론) 사상의 통일을 주장하는 그의 논설은 당시 사상과 학술의
자유를 추구하던 신문화 진영의 거센 비판을 야기하였다.
그는 대전 기간인 1917년에도 서양문명에 일어날 거대한 변화를 예측하고 사회주의
흥기와 과학문명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와 도덕적 경향이 강해지면 중국전통도덕에 접근할 것을 예견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중국에서는 서구의 민주와 과학을 지향하는
신문화운동이 한층 고조되어 갔다. 두아천의 보수적 논설은 오늘날 현대 문화보수주의 흥기의
전신으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동조적 반향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신문화파의 반박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5.4 운동 직후 양계초가 유럽에서 귀국하여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을
발표할 때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전후 유럽에서 과학문명의 위기감과 현대문화
비판 사조가 흥기하였을 뿐 아니라, 5.4 운동 후 중국 지식계에도 민족주의
감정과 서양에 대한 불신 정서가 편만하여, 중국의 현대화를 위한 공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구유심영록』은 과학만능을 믿던 유럽인들의 대전 후 당혹감을 서술하며, 서양 과학 문명을 비판하고 서양인의 입을
빌어 중국문화를 찬양하고,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를 구할 처방은 바로 중국의 전통사상이라 주장하였다. 나아가 신문화운동에 대해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비판을 가하며,
공자와 유교의 정신가치를 변호하여, 현대문화보수주의의 선언서라 칭해지기도
한다.
양계초는 중국인이 오해할까봐, 과학만능주의가 파산한 것이지 결코 과학이 파산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국수파들은 그의 논설을 신문화파에 대한 공격의 무기로
사용하였다.(한 사람의 말과 글을 일부만 떼어놓고 그것을 악용하면
완전히 다른 뜻으로 드러난다. 세상의 많은 이단학설도 정통학설의 일부를 가지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확대해석하여 다른 길로 샌
것이다.) 양계초는
여전히 서학을 배우고 과학을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를 전제로 하여 중국의 전통문화의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했다. 서양의 과학기술로써 중국 전통사회의 가치를 지키자는 청말의
‘체용론’ 내지 ‘부강론’을 상기시키지만, 5.4 시기 양계초는 전통적 인문가치로써 현대화와 과학기술 발전
과정을 규제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서 관점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문화급진주의에 반대한
장사소(章士釗)도
이 시기 중서문명의 조화에 관한 문화변용론 입장에서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에 착안하여 절대
분할 불가능하며,
어떤 단계든지 구 기초 위에 신 요소가 수용되어 신구요소가 잡거(雜居)하는
상태이며,
이것이 조화이고 이 가운데 사회는 나날이 진화한다는 것이다. 신 기운이 정체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옛 덕목 역시 불가망이라 보았다. 물질적으로 고쳐 새롭게 하며(改新),
도덕적으로
구(舊)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명백한 보구(保舊)
입장인데, 문화의 연속적 속성에
입각한 입론을 통해 신청년 그룹의 허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문제제기였다.
장사소의 소위
‘신구잡유’ 조화론은 과격한 문화혁신에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지만,
신청년그룹이 막상 적극 대응하지
못한 반면,
오히려
『시사신보(時事新報)』를
통해 연구계 장동손 장몽린 등이 경계심을 가지고 반격하였다. 장동손은, 신구잡유는 사실이나 그것은 공존상태이지
조화가 아니라는 점,
사회와 시대 그리고 문화의 변화는 모두 자연물의 생장처럼 신진대사의 진화과정이지 여러 요소가 평온하게 조화된 정지 상태가 아니라는
점과 이러한 진화과정은 단순한 ‘이행(移行)’이
아니고, 잠재적
변화가 축적되다가 대변화를 일으키는 돌변 과정을 통해 진보하며, 이 과정에서 신구 요소가 충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장동손은 신청년그룹의
급진적 전통파괴에도 동조하지 않았는데, 서양문화가 중국에 유입되는 것은 필연적 추세이기 때문에
수입할지 말지 논쟁할 필요도 없고, 단지 서양문화를 어떻게 수입할 것인지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장동손은 ‘조화론’이 수구론 보다 더 해롭다고 보았다. 구사상은 소멸될 것이므로 수구론은 의미가
없지만,
조화론은 사실상
‘중체서용’의 번안판이지만 이론적 설득력이 있어 사회개조를 저해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보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신구사상과 동서문화가 융합하여 숙성단계를 거쳐 보이지
않는 변화기간(潛變)을
거쳐 새로운 제3의 사상으로 변화해 하는 것이라는 신진대사적
문화융합이론을 제시하며, 전통파괴에 동조하지 않는 만큼 신사상의
수입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했다.(단지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융합하여 변화발전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인 셈이다. 다른 조화론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실 差不多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1921년
양수명(梁漱溟)이
발표한 「동서문화급기철학(東西文化及其哲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논전을 재연했다. 양수명은 중국 인도 서구문화가 각기 다른
사유방식과 인생태도 내지 취향을 가진 ‘성질’이 다른 문화로 보고, 서양의 우월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의 사유방식을 이지(理智)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 주지주의적인 것으로 특징지우고, 이런 서양문화가 인생의 가치를 손상시켰다고 서술했다. 이에 비해 중국의
유가적 무소위이위적(無所爲而爲的)
직관적
인생생활은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부합하며 인생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양수명도 서양문화를 ‘전반 승수’ 하되
유가의 인생태도로써 서양의 인생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현대화와 유기적 인생태도를 결합시키는
문화방안을 설계했다.
양수명의 입론에 대한
반론 중 문화급진파를 대표하는 호적(胡適,
후스)와
전통파괴와 옹호에 모두 반대한 장동손의 비판에 각각의 문화변용에 관한 입장의 차이가 잘 드러나 있다. 호적의 비판은 양수명이 번다한 세계문화를
간단한 단선적 공식으로 정리한 획분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점, 중국문화 건설의 주제는 당장 구체적으로
동서문화를 선택하는 것이지 장래 동방문화가 번신하여 세계문화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 세계 각 민족이 이상적 경지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유가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민족문화도 변화지 않는 향방(向方)은
아니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胡適,
「讀梁漱溟先生的<東西文化及其哲學>」1923.3.,『동서문화논전문선』534~52쪽)
양수명과
호적은 문화 정체성과 현대화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호적이 중국의 역사문제에 중점을 두었다면
양수명은 인생,
가치문제에 중점을 두고 논쟁했다.
(사실 호적은 '정치형 문화'요 '권력형 문화'인 유교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가 '全般西化論'을 제창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전통문화와 서구문화가 자연히 절충될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에는
관성같은 힘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양수명은 인류문화가 서양 - 중국 - 인도 문화 순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백영서 교수의
「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에서 양수명은 중국문화와
인도문화는 진취적인 서양 문화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너무 일찍 고도의 문화로 들어간 것이니, 중국인이 당장 취해야 할 태도는 먼저 서구
문화를 철저히 수용하되 중국문화의 기본 정신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만년으로 갈수록 서양 문화에서 멀어졌다. 그는
중국의 전통에서 중국의 위기를 해결할 길을 찾아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쪽을 기울어졌다. 이런 양수명의 입장이 100%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그의 글을 다 읽어보지 못한 채, 논문으로만 접하다다보니 그런 것
같다.ㅠ)
장동손은
양수명이 서양문화는 물욕의 경쟁이라고 본 것이 착오라며, 중국인의 고유 인생태도를 다시 제창하는 것을
비판하였다.(장동손, 「讀<東西文化及其哲學>」, 『學燈』, 1922.3.19,
『동서문화전선』 501~14쪽) 그는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려는’ 태도를 방기하며 안분자족하자는 태도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나아가되 방법을 바꾸자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장동손은 서양문명이 이미 세계문화의 지위를 획득한 만큼
중국은 반드시 서양문화를 채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양수명이 민족성의 차이 때문에 중국인은 진정으로 서양민족의
문화를 습득할 수 없다 한데 반하여, 장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성도 민족심리도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양수명의 초기 사상에는 서양문화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중국과 인도 문명으로 발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였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장동손의 비평도 100% 납득할 수는
없다.)
장동손은 이지적으로 중국문화의 낙후를 인정하고 신사상과
서양문화 수입을 적극 주장했다. 그는 또 각 민족성의 인소는 변할 수 있지만 제거할 수
없는 것이어서 외래문화를 충분히 도입한 후에도 고유의 근성은 소멸되지 않고 반드시 어딘가 남아있는 상태(변태)이므로, ‘전반서화’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지만, 구도덕 사상 문화는 도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장동손은 정서적으로 전통문화에 대해 동정하고
있지만,
양수명과 달리 중국인의 근본적
인생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길드사회주의와 민주와 과학의 기초인 서양철학을
연구하고 소개하면서, 서양인의 적극적 인생관을 중국인이 학습하고 체득하기를
바랐다.
『학형(學衡)』파
지식인들도 국수(國粹)를
잃지 않으면서 유럽화도 성취할 수 있는 동서문명의 문화재건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국과 서양이 모두 마멸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통섭하고 융합하는 장기적 노력을 거쳐 비로소 문화건설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혁신파의 서양 모방과 수구파의
고인(古人)
모방은
모두 ‘노예’적인 태도라 비판했다. 그들은 그리스문명 이래
인본주의와 유가도덕을 융합시키는 신문화 건설을 제시하였다. 학형파 문화보수주의자들은 신문화운동이
서양문화의 정화가 아닌 말류를 천박하게 수입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서양고전문명 이래 인문 전통을
중시하여 중서문화가 심층에서 평등하게 교류하는 중서융합을 주장했다. 두아천도 서양문명을 ‘진력하여 수입’하는 것이 가하지만
중국고유문명을 근거로 이에 합할 수 있는 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양계초와 신인문주의 정신에 입각한 학형파
문화보수주의는 모두 중서(中西)의
신구(新舊)
문화를
조화시키자는 문화조화론 입장이었다.
국수파를 일단 논외로
한다면,
진독수(陳獨秀)와
호적(胡適)
이외의
입론은 모두 전통 타도에 동조하지 않으며 동서문화의 융합 내지 조화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융합하고 조화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상당한 입장차가 존재했다. 서양의 민주와 과학의 가치를 인정한
양수명,
전통문화를 배격하지 않았지만 문화조화론을 경계한 장동손은 모두 서양에서 배우는 것은 인정했지만 무엇을 배울 것인지, 중국의 문화전통을
본위로 할 것인지 아니면 그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정도인지 큰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