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7일 일요일

장타이옌(章太炎), 장빙린(章炳麟, 1868년~1936년)

장빙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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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빙린
장빙린(章炳麟, 1868년~1936년)은 중국 말 민국 초기(民國初期)의 학자이자 혁명가이다. 저장 성 여항현(余抗縣) 출신이다. 자는 매숙(枚叔). 호는 태염(太炎)이다.

생애[편집]

소년 시절에 일찍이 배만의식(排滿意識)에 눈떴다고 한다. 청년 시대에 유월(兪越)에게 사사하여 고증학을 수학하고, 《좌씨전(左氏傳)》을 연구한 뒤에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였으나 그들의 공양학파(公羊學派)와는 학문상의 견해를 달리하여 곧 그들과 결별하였다. 무술정변 후 한때 일본에 망명하여 개혁파를 떠난 채 배만운동(排滿運動)을 결의하였다. 〈구서〉에서 강렬한 배만사상을 표명한 데 이어 〈박강유위론혁명서(駁康有爲論革命書)〉와, 추용(鄒容)의 저서인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에서 청조를 매도하여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는 불전(佛典)을 연구했다. 또한 저장(浙江) 계통의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의 결성에 관여하였다. 출옥 후 도쿄에 가서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기관지인 <민보(民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혁명을 맹렬히 고취하였다. 신해혁명 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정치에 반대하였고, 쑨원(孫文) 등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뒤에는 정계를 떠나 국학(國學)의 연구와 유지에 전념하여 민국의 학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필요]

사상[편집]

혁명가로서의 그의 특색은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입각한 종족혁명주의(種族革命主義)에 있고, 쑨원 등의 서구적·근대적 혁명이론을 승인하지 않았다. 학자로서는 고증학의 정통을 자부하였고, 특히 소학(小學) (현학·훈설(訓說)·音韻學)에 상세하며, 음운학의 권위로서 불교에도 통하여, 고증학·제자학(諸子學)·불학(佛學)을 망라한 국학을 주장하였다. 그 학풍은 혁명사상과 마찬가지로 국수주의적이다. [출처 필요]

저서[편집]

저서로는 전술한 것 외에 <문시(文始)>, <신방언(新方言)>, <소학문답(小學問答)>, <검론(檢論)>, <국고론형(國故論衡)> 등 대단히 많다. 이것들은 <장씨총서(章氏叢書)>, <동속편(同續編)>, <태염문록(太炎文錄)>, <동속편(同續編)>에 대체로 수록되어 있다. 루쉰(魯迅), 저우쭤런(周作人), 첸쉬안퉁(錢玄同) 등이 그의 훈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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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 최고의 먹물로 통하는 국학대사 장타이옌 한족 중심의 중화근대민족국가 건설을 주장하였다.
쑨원(孫文)의 동지였으며 또한 정적(政敵)이었고 루쉰(魯迅)의 스승이기도 했던 장타이옌(章太炎)이 1936년 6월 14일 쑤저우(蘇州)에서 사망했다.

20세기 초 만주족이 세운 청(淸)를 무너뜨리고 한족 중심의 중화민족주의를 주장했던 장타이옌의 사상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시점에서 새롭게 세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화이유별(華夷有別)을 주장하며 민족의 혈통주의를 중시했던 장타이옌이 조선과 베트남을 한족과 같은 혈통으로 보고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극단적 중화패권주의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 같은 선뜩함이 느껴지기도 하며 앞으로 우리가 남북관계, 북중관계를 생각할 때 한 번쯤 곱씹어 볼 대목이기도 하다.

말로는 중국적 가르침을 본질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실용적 발전을 위해 이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중국의 문자와 언어, 전통사상과 철학도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을 중국에 가져다 접목시켜 쓸 수 있겠느냐는 장타이옌의 비판적 일침은 거침없이 앞만 보고 '서구화'에 목을 매는 현대중국에 여전히 유효한 충언처럼 보인다.

근대의 마지막 대학자이자 현대의 문을 열어 준 장타이옌의 주장이 당대에도 여전히 통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학문적 식견이 그만큼 깊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장타이옌의 제자였던 루쉰은 스승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쓴 글에서 "일곱 번 체포되고 세 번 투옥되어서도 끝까지 혁명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七被追捕,三入牢獄,而革命之志,終不屈僥者)"고 스승을 경외하며 높이 평가했다.

장타이옌은 저장성(浙江省) 위항(余杭)에서 1869년 태어나 어릴 적부터 조부로부터 반만반청(反滿反淸)사상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본명은 장빙린(章炳麟)이고 타이옌(太炎)은 호(號)인데 자신이 존경하던 명말청초의 고증학자 황종희(黃宗羲, 자가 태충(太沖))와 고염무(顧炎武)에서 '타이옌(太炎)'을 따왔다고 한다.

성장기에 경전 연구와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을 접했으며 량치차오(梁啓超),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교류하며 변법유신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은 이미 부패하여 통치 능력을 상실했으니 한족 중심의 새로운 근대 민족국가를 건립하기 위해 청을 타도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혁명을 주장하다 투옥되기도 하였다.

장타이옌은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가 쑨원과 함께 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여 <민보(民報)>를 주간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쑨원과 뜻을 같이 했으나 사상적 이견을 보이면서 갈라서 광복회를 결성하여 수장이 되었으며 1912년 쑨원이 고문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거절하고, 한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대총통 취임을 지지하여 쑨원과 대립적 위치에 서기도 하였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송자오런(宋敎仁)를 암살하자 반원(反袁)운동을 주장하다 1916년까지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8년 이후 정계를 은퇴한 후에는 학문연구와 강학에만 전념하며 문사철(文史哲) 다방면에 빼어난 저술과 업적을 남겼다.

청말 최고의 먹물로 통하는 장타이옌은 '국학대사(國學大師)'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그의 동서고문을 오가는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문장들은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를 전후로 한 동서문명 논쟁 - 두아천(杜亞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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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를 전후로 한 동서문명 논쟁 근대의 동아시아

아래 글은 한세대 강명희(姜明喜) 교수님의 54 시기 중국의 3 신문명건설 탐색」의 일부를 읽고 정리하고 느낌을 더한 것입니다.

신문화운동 시기 호적(胡適)‘’재조(再造)문명(文明)’을 꿈꾸며 서양문화를 도입하여 활력을 상실한 중국문명을 치유하고자 했듯이, 이대조(李大)3의 문명건설을 제기하였지만, 그는 동서문명의 특성을 겸비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를 그 모델로 상정하였다. 1919 9월 연구계(硏究系)에 의해 창간된 해방과 개조에 게재한 논설 「제3종문명」에서 장동손은 습관과 미신의 제1종 문명과 자유와 경쟁의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제2종문명에 이은 제3종문명을 호조와 협동의 사회주의 세계주의로 특징지웠다.

신해혁명 후 황제제도 붕괴에 따른 전통사회 측면에 동요가 시작되었다해도, 2천년 동안 국시(國是)였던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신청년』그룹의 도전, 打倒孔家店을 제기한 54 신문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탈피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청년그룹의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문화급진주의 신문화운동은 국수파뿐만 아니라 학형파(學衡派) 등 문화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을 불러일으켜 신구문화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전통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 서양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전반서화의 필요성 또는 가능성을 두고 오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문제는 서양의 실체가 무엇인가 였다.

1910년대 후반 동서문화 논전은 두아천(杜亞泉)의 비판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 중국본위문화건설논쟁까지 근 20년 지속되었는데, 논쟁의 초점은 중국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는 수준의 차이냐 성질의 차이냐 하는 것과 문화의 변동과 융합에 관한 관점의 차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동방잡지』 주편인 두아천은 「재론신구사상지충돌(再論新舊思想之衝突)」과 「정적문명여동적문명(靜的文明與動的文明)」을 1916년 『동방잡지』에 연이어 발표하며, 동서문화의 차이는 성질의 차이므로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신구문화의 차이는 새로운 요소와 구 요소의 구성 정도의 차이므로 신문화로써 구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문명이나 장단점이 있고 성질이 다르므로 남의 것을 취해 대체할 수 없고, 단지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뿐이라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다만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 중 어느 것이 더 우수하고, 문화는 지금 발전하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대답할까?)

주지하듯이 진독수(陳獨秀) 1915년 『청년잡지』(이듬해 『신청년』으로 개명)를 창간한 것은 공교국교화(孔敎國敎化) 운동과 복벽운동 등 복고적 경향을 차단하고 서양의 가치를 적극 수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1911년 경에도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대립하고 있었다. 신문화운동이 흥기하기 이전에 이미 시대 풍조는 급속히 변하여, ()과 서(西)는 선()이고 구()는 악()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일어났다.

진독수는 『신청년』창간호에 발표한 「법란서인여근세문명(法蘭西人與近世文明)」에서, 인권설, 진화론, 사회주의를 발전시킨 프랑스문명과 자유 민주 평등 박애사상을 찬양하며 이러한 신문명을 창조한 프랑스문명이 아니었으면 세계는 아직 흑암 중에 처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두아천은 서양문명의 물질적 과학기술적 요소의 수용을 지지하면서도, 중국의 도덕은 인심을 다스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배격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유교사상을 부정함에 따라 야기된 정신과 사상의 혼란을 우려하여 유교로써 사상의 통일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문화조화론) 사상의 통일을 주장하는 그의 논설은 당시 사상과 학술의 자유를 추구하던 신문화 진영의 거센 비판을 야기하였다.
그는 대전 기간인 1917년에도 서양문명에 일어날 거대한 변화를 예측하고 사회주의 흥기와 과학문명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와 도덕적 경향이 강해지면 중국전통도덕에 접근할 것을 예견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중국에서는 서구의 민주와 과학을 지향하는 신문화운동이 한층 고조되어 갔다. 두아천의 보수적 논설은 오늘날 현대 문화보수주의 흥기의 전신으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동조적 반향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신문화파의 반박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5.4 운동 직후 양계초가 유럽에서 귀국하여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을 발표할 때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전후 유럽에서 과학문명의 위기감과 현대문화 비판 사조가 흥기하였을 뿐 아니라, 5.4 운동 후 중국 지식계에도 민족주의 감정과 서양에 대한 불신 정서가 편만하여, 중국의 현대화를 위한 공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구유심영록』은 과학만능을 믿던 유럽인들의 대전 후 당혹감을 서술하며, 서양 과학 문명을 비판하고 서양인의 입을 빌어 중국문화를 찬양하고,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를 구할 처방은 바로 중국의 전통사상이라 주장하였다. 나아가 신문화운동에 대해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비판을 가하며, 공자와 유교의 정신가치를 변호하여, 현대문화보수주의의 선언서라 칭해지기도 한다.
양계초는 중국인이 오해할까봐, 과학만능주의가 파산한 것이지 결코 과학이 파산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국수파들은 그의 논설을 신문화파에 대한 공격의 무기로 사용하였다.(한 사람의 말과 글을 일부만 떼어놓고 그것을 악용하면 완전히 다른 뜻으로 드러난다. 세상의 많은 이단학설도 정통학설의 일부를 가지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확대해석하여 다른 길로 샌 것이다.) 양계초는 여전히 서학을 배우고 과학을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를 전제로 하여 중국의 전통문화의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했다. 서양의 과학기술로써 중국 전통사회의 가치를 지키자는 청말의 체용론내지 부강론을 상기시키지만, 5.4 시기 양계초는 전통적 인문가치로써 현대화와 과학기술 발전 과정을 규제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서 관점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문화급진주의에 반대한 장사소(章士釗)도 이 시기 중서문명의 조화에 관한 문화변용론 입장에서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에 착안하여 절대 분할 불가능하며, 어떤 단계든지 구 기초 위에 신 요소가 수용되어 신구요소가 잡거(雜居)하는 상태이며, 이것이 조화이고 이 가운데 사회는 나날이 진화한다는 것이다. 신 기운이 정체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옛 덕목 역시 불가망이라 보았다. 물질적으로 고쳐 새롭게 하며(改新), 도덕적으로 구()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명백한 보구(保舊) 입장인데, 문화의 연속적 속성에 입각한 입론을 통해 신청년 그룹의 허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문제제기였다.
장사소의 소위 신구잡유조화론은 과격한 문화혁신에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지만, 신청년그룹이 막상 적극 대응하지 못한 반면, 오히려 『시사신보(時事新報)』를 통해 연구계 장동손 장몽린 등이 경계심을 가지고 반격하였다. 장동손은, 신구잡유는 사실이나 그것은 공존상태이지 조화가 아니라는 점, 사회와 시대 그리고 문화의 변화는 모두 자연물의 생장처럼 신진대사의 진화과정이지 여러 요소가 평온하게 조화된 정지 상태가 아니라는 점과 이러한 진화과정은 단순한 이행(移行)’이 아니고, 잠재적 변화가 축적되다가 대변화를 일으키는 돌변 과정을 통해 진보하며, 이 과정에서 신구 요소가 충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장동손은 신청년그룹의 급진적 전통파괴에도 동조하지 않았는데, 서양문화가 중국에 유입되는 것은 필연적 추세이기 때문에 수입할지 말지 논쟁할 필요도 없고, 단지 서양문화를 어떻게 수입할 것인지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장동손은 조화론이 수구론 보다 더 해롭다고 보았다. 구사상은 소멸될 것이므로 수구론은 의미가 없지만, 조화론은 사실상 중체서용의 번안판이지만 이론적 설득력이 있어 사회개조를 저해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보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신구사상과 동서문화가 융합하여 숙성단계를 거쳐 보이지 않는 변화기간(潛變)을 거쳐 새로운 제3의 사상으로 변화해 하는 것이라는 신진대사적 문화융합이론을 제시하며, 전통파괴에 동조하지 않는 만큼 신사상의 수입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했다.(단지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융합하여 변화발전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인 셈이다. 다른 조화론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실 差不多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1921년 양수명(梁漱溟)이 발표한 「동서문화급기철학(東西文化及其哲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논전을 재연했다. 양수명은 중국 인도 서구문화가 각기 다른 사유방식과 인생태도 내지 취향을 가진 성질이 다른 문화로 보고, 서양의 우월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의 사유방식을 이지(理智)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 주지주의적인 것으로 특징지우고, 이런 서양문화가 인생의 가치를 손상시켰다고 서술했다. 이에 비해 중국의 유가적 무소위이위적(無所爲而爲的) 직관적 인생생활은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부합하며 인생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양수명도 서양문화를 전반 승수하되 유가의 인생태도로써 서양의 인생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현대화와 유기적 인생태도를 결합시키는 문화방안을 설계했다.

양수명의 입론에 대한 반론 중 문화급진파를 대표하는 호적(胡適, 후스)와 전통파괴와 옹호에 모두 반대한 장동손의 비판에 각각의 문화변용에 관한 입장의 차이가 잘 드러나 있다. 호적의 비판은 양수명이 번다한 세계문화를 간단한 단선적 공식으로 정리한 획분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점, 중국문화 건설의 주제는 당장 구체적으로 동서문화를 선택하는 것이지 장래 동방문화가 번신하여 세계문화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 세계 각 민족이 이상적 경지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유가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민족문화도 변화지 않는 향방(向方)은 아니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胡適, 「讀梁漱溟先生的<東西文化及其哲學>1923.3.,『동서문화논전문선』534~52) 양수명과 호적은 문화 정체성과 현대화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호적이 중국의 역사문제에 중점을 두었다면 양수명은 인생, 가치문제에 중점을 두고 논쟁했다.

(사실 호적은 '정치형 문화'요 '권력형 문화'인 유교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가 '全般西化論'을 제창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전통문화와 서구문화가 자연히 절충될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에는 관성같은 힘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양수명은 인류문화가 서양 - 중국 - 인도 문화 순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백영서 교수의 「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에서 양수명은 중국문화와 인도문화는 진취적인 서양 문화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너무 일찍 고도의 문화로 들어간 것이니, 중국인이 당장 취해야 할 태도는 먼저 서구 문화를 철저히 수용하되 중국문화의 기본 정신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만년으로 갈수록 서양 문화에서 멀어졌다. 그는 중국의 전통에서 중국의 위기를 해결할 길을 찾아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쪽을 기울어졌다. 이런 양수명의 입장이 100%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그의 글을 다 읽어보지 못한 채, 논문으로만 접하다다보니 그런 것 같다.ㅠ)

장동손은 양수명이 서양문화는 물욕의 경쟁이라고 본 것이 착오라며, 중국인의 고유 인생태도를 다시 제창하는 것을 비판하였다.(장동손, <東西文化及其哲學>, 學燈, 1922.3.19, 『동서문화전선』 501~14) 그는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려는태도를 방기하며 안분자족하자는 태도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나아가되 방법을 바꾸자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장동손은 서양문명이 이미 세계문화의 지위를 획득한 만큼 중국은 반드시 서양문화를 채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양수명이 민족성의 차이 때문에 중국인은 진정으로 서양민족의 문화를 습득할 수 없다 한데 반하여, 장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성도 민족심리도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양수명의 초기 사상에는 서양문화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중국과 인도 문명으로 발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였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장동손의 비평도 100% 납득할 수는 없다.)

장동손은 이지적으로 중국문화의 낙후를 인정하고 신사상과 서양문화 수입을 적극 주장했다. 그는 또 각 민족성의 인소는 변할 수 있지만 제거할 수 없는 것이어서 외래문화를 충분히 도입한 후에도 고유의 근성은 소멸되지 않고 반드시 어딘가 남아있는 상태(변태)이므로, ‘전반서화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지만, 구도덕 사상 문화는 도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장동손은 정서적으로 전통문화에 대해 동정하고 있지만, 양수명과 달리 중국인의 근본적 인생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길드사회주의와 민주와 과학의 기초인 서양철학을 연구하고 소개하면서, 서양인의 적극적 인생관을 중국인이 학습하고 체득하기를 바랐다.

『학형(學衡)』파 지식인들도 국수(國粹)를 잃지 않으면서 유럽화도 성취할 수 있는 동서문명의 문화재건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국과 서양이 모두 마멸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통섭하고 융합하는 장기적 노력을 거쳐 비로소 문화건설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혁신파의 서양 모방과 수구파의 고인(古人) 모방은 모두 노예적인 태도라 비판했다. 그들은 그리스문명 이래 인본주의와 유가도덕을 융합시키는 신문화 건설을 제시하였다. 학형파 문화보수주의자들은 신문화운동이 서양문화의 정화가 아닌 말류를 천박하게 수입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서양고전문명 이래 인문 전통을 중시하여 중서문화가 심층에서 평등하게 교류하는 중서융합을 주장했다. 두아천도 서양문명을 진력하여 수입하는 것이 가하지만 중국고유문명을 근거로 이에 합할 수 있는 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양계초와 신인문주의 정신에 입각한 학형파 문화보수주의는 모두 중서(中西)의 신구(新舊) 문화를 조화시키자는 문화조화론 입장이었다.


국수파를 일단 논외로 한다면, 진독수(陳獨秀)와 호적(胡適) 이외의 입론은 모두 전통 타도에 동조하지 않으며 동서문화의 융합 내지 조화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융합하고 조화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상당한 입장차가 존재했다. 서양의 민주와 과학의 가치를 인정한 양수명, 전통문화를 배격하지 않았지만 문화조화론을 경계한 장동손은 모두 서양에서 배우는 것은 인정했지만 무엇을 배울 것인지, 중국의 문화전통을 본위로 할 것인지 아니면 그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정도인지 큰 차이가 있었다.

구제강[顧頡剛(고힐강),1893~1981], 고사변 [古史辨]

구제강(顧頡剛, 1893년 ~ 1980년)은 중국의 역사학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고힐강으로 부르기도 한다.
1920년 베이징 대학 중국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26년 샤먼(厦門)대학, 1929년에는 옌징(燕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고대사에 대한 옛 기록을 의심하는 '의고변위'로 유명하며, 1927년 이후로 1942년까지 7권의 《고사변》을 발표하였다. 그는 중국 역사지리학과 민속학의 비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구제강[顧頡剛(고힐강),1893~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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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사학자. 국고정리운동에 참가,《변위총간》간행, 《고사변》을 편집했다. 전통문화를 의심, 그 우상 타파에 힘쓴 의고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중일전쟁 중 민중계몽에 주력했다. 저서는 《삼황고》등이다.

    국적중국
    활동분야역사
    출생지중국 장쑤성[江蘇省]
    주요저서《삼황고》 《중국강역연혁약사》 《오가갑집》 등
    장쑤성[]에서 태어났다. 1920년 베이징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전후부터 국고정리운동()에 참가하였다. 특히 중국 고대사는 위조된 전설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변위총간()》을 간행, 《고사변()》(7책)을 편집하였으며, 전통문화를 의심하여 그 우상을 타파하는 데 힘써 의고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또 지리연구로 《우공()》()을 편집하였고, 민속연구에도 힘썼다. 중일전쟁 중에는 민중계몽에 주력하였으며, 저서에는 《삼황고()》 《상서연구강의()》 《중국강역연혁약사(沿)》 《오가갑집()》 등이 있다.

    고사변[古史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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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1941년 구제강 등이 중국 고대사의 과학적 연구를 표방하여 편찬한 책.

      구분역사서
      저자구제강 등
      시대1920~1940년대
      전7권. 고서()에 기록된 고대 사실은 대개 후세에 위조된 것이라고 하여, 문헌비판 방법으로 고증하였다. ‘중국 사학계의 혁명적인 저서’라고 평하나, 현실과 동떨어진 아카데미즘의 경향이 짙다. 후스[첸무[펑유란[馮]·이구쉬안퉁[:] 등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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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사변 자서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72
      고힐강 지음, 김병준 옮김 / 소명출판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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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인문학 서적치곤 그리 두껍지 않아 하루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 몇 장을 남기고 일이 생겨 오랫만에 이어 읽으니 처음 읽었을 때에 받았던 많은 느낌들이 선명하지 않아 글을 적음에 매우 아쉽다. 애초에 나는 이 책을 산 것이 아니라 얻은 탓에 크게 흥미를 갖지 않았고 더군다나 제목이 선뜻 책에 다가설 정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아 제법 오래 묵혀 두었다.
      한국인으로서 내가 가진 책들은 대다수가 우리나라에 관한 것이다그 나머지는 중국에 관한 것이 가장 많은데 이것도 거개가 시대가 편중되어 있다.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에 관한 책은 고작 중국공산당을 이해하기 위한 책들로 그것도 대장정에 관한 책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 가운데 읽게 된 이 책은 20세기의 중국학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선인들의 자서전을 읽기를 좋아했다. 딱딱한 일반 책에서 볼 수 없는, 그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그 됨됨이가 형성되기까지의 중요한 요소인 가정환경과 시대상황을 알 수 있고 더구나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가 있으며 평소 어른들에게 들었으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의 의문을 풀게 하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예전에 출판사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구술자서전을 재미있게 읽었으며 현재 비슷한 책 몇 권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도 딸깍발이 일석 이희승선생의 자서전도 다시 보았었다.
      이 책도 앞부분은 원래 <고사변> 1책의 자서인데 워낙 길고 좋은 글이라 따로이 모아서 번역, 출간하였나보다. 이 책의 해제는 말미에 있는데 내 생각으론 먼저 해제를 읽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고힐강은 청나라 말엽인 광서 19년 1893년에 소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한학을 배워 학문의 기초를 쌓았는데 늘 의심을 가지고 비평하는 습관을 스스로 길렀다. 1913년, 북경대학의 예과에 입학한 그 해 겨울에 장태염의 강의를 들으면서 금문학과 고문학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고대사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철학과 시절, 북경대학 채원배총장이 학술의 자유를 주창하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가 <신청년>을 출판하여 신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어서 고힐강에게 구사상을 깨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북돋아 주었다. 한편으로, 멀게는 최술, 요제항, 정초의 의고학풍을 사숙하였고 가깝게는 청말의 거유였던 변법자강운동의 강유위와 갑골문을 발견한 왕국유의 학문에 자극받았다. 직접적으로는 전현동과 나중에는 학문적 차이로 소원해졌으나 한때 친했던 호적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60~62쪽에 있는 대학시절에 그가 작성한 일종의 연구계획은 그 방대함과 치밀함이 참으로 경이롭다.
      고힐강이 고대사에 관해 주장한 '누층적으로 조성되는 고대사'라는 학설은 책 뒷표지에 잘 나와 있다. 이는 후대로 갈수록 전설 속 고대사의 기간이 점점 멀리 불어난다는 점과 후대로 갈수록 전설 속 중심인물이 더욱 위대해진다는 점 등을 말한 것이다. 고힐강은 이 원칙에 따라 4가지 미신적인 관념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민족이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일원적 생각과 모든 지역이 원래부터 통일되어 있었다는 것과 신화를 모두 인격화시키려는 것과 고대가 태평성세였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발전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틀린 점도 있겠으나 그가 행한 역사학적 방법론은 뛰어나다고 하겠다.
      책의 뒷부분에는 고힐강이 죽기 직전인 1979년과 1980년에 작성한 <나는 어떻게 고사변을 편찬했는가>가 실려 있다. 그 중에 350편의 글과 325만자에 이른다는 <고사변> 제1~7책의 출간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책은 고힐강이 호적, 전현동, 유섬려 등과 고대사에 대해 토론한 편지와 글로서 쓰는 데에 두달이 걸렸다는 6만 자의 자서가 있다.
      -2책은 상편에서는 고대사 문제를 토론하였고 중편에서는 공자의 유가의 문제를 토론하였으며 하편에는 1책에 대한 사람들의 평론이 실렸다.
      -3책은 <역경>과 <시경>을 연구한 것이다.
      -4책은 북경사범대학의 교수였던 라근택이 편찬한 것으로 선진제자에 대해 상편에서 유가와 묵가를 하편에서 도가와 법가를 다루었다. 이 책에는 고힐강이 1932년 4월에 쓴 <여씨춘추로부터 노자의 성서년대를 추측함>이란 글이 실려 있다고 하는데 근래의 마왕퇴나 곽가점본 연구결과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5책은 상편에서 한대 경학상의 금고문 문제를 다루었고 하편에선 음양오행설의 기원 문제 및 음양오행설과 고제왕 계통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었다.
      -6책은 라근택이 상편에서 선진제자를 두루 고찰하였고 하편은 노자만을 전적으로 고찰하였다.
      -7책은 상편은 고사전설의 통론이며 중편은 삼황오제에 관한 고찰이고 하편은 도당, 유우, 하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라고 한다.
      이상의 7책에 대해 아직 번역서가 나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고대지리의 고증에 대한 글을 수록한 8책도 출판하기로 하였다는데 계속해서 그 뒤로도 <고사변>이 출간되었는지 궁금하다. 번역서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도 기회가 닿는다면 원문이라도 대총 읽어보고 싶다. 나아가 고힐강 이후로 의고학파에 얼마나 많은 발전이 있었는지 심히 궁금하기 짝이 없다.

      끝으로, 고힐강의 의고는 나도 놀랐지만, 단순하고 막연한 의심이 아닌 당대에 발굴된 최신의 고고학 발굴 유물자료까지 이용한 비판적 검토의 방법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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