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제국의 눈- 내부적인 개혁으로서의 근대 프로젝트

내부적인 개혁으로서의 근대 프로젝트

 
2013-11-10 10:37
http://booklog.kyobobook.co.kr/snake86/1299968    신고
제국의 눈(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저자 쳔 꽝싱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2003.10.01
정가 10,000 원 판매가 8,500 원 ( 15% +3%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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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주는 통찰력은 정말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식민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자신보다 더 후진적인 지역에 대한 2차적 제국주의가 될 수 있다는 점.

세계화된 현대에 있어서 단일된 정체성이란 권력에 봉사하는 기망에 불과하다는 점, 특히 민족개념.

식민주의의 청산이 식민시기 이전의 순수한 사회의 재발견이 아니라는 점. 이러한 견해는 결국 봉건적 사회의 이상화나 아니면 그러한 자연적인 민족 개념을 내세운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

이거 다 우리나라에 그대로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고 한 문단을 그대로 인용해둔다.

그러나 어떤 위치에 있는 주체든지, 탈식민이 의미가 모두 협의의 식민시기 이전으로 회귀하여 오염되지 않은 과거를 되찾아오는 데 있어서는 안된다. 이는 피식민자의 모든 과거를 미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탈식민주체 자신이 식민사의 각인을 초월할 수 있다고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탈식민의 의의는 순종 순수한 주체성을 찾아 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 속에서 강화된 보수성과 획일성 그리고 위계화된 사고틀을 제거하는 데 있으며, 역사의 우연과 충돌과정에서 깊이 뿌리내린 반작용(대응)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 있다.

식민주의가 봉건전제주의에 가한 충격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 민주 같은 가치는 사회와 문화상상 속에서 이미 제거되기 어려운 지위를 획득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다양한 역사단계마다 그것에 어떻게 다양한 의미와 더 진보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느냐는 것이다. 그 가치들은 탈식민운동의 문화자원이자 출발점이기도 하다. 만약 이들 자원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리관유 식으로 전부 서구라는 울타리로 몰아넣은 뒤 내부의 식민을 합리화하려 한다면 탈식민은 단지 봉건적 전제주의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반적 수용과 전반적 거부 사이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며 탈식민은 그 틈새에서 이미 굳어버린 중심을 지양하고 새로운 연결점을 찾아 새로운 공간을 개발해야 한다.

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대동단실기 , 신복룡

대동단실기 

선인한국학 연구총서 54 | 개정증보판

신복룡 지음 | 선인 | 2014년 10월 10일 출간

책소개

대동단(大同團)은 유교의 애민사상뿐만 아니라 노장사상까지 포함한 일종의 혼합사상으로서 원시사회주의의 성격을 담고 있는 민족주의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이 온 세계와 더불어 사는 이상 사회가 되기를 소망했다.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대동단이 아직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점조직(點組織)의 비밀 결사였기 때문에 자료를 얻기 어려웠다는 점도 있지만, 그것이 역사의 망각 지대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 후세에 전승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가지는 가치조차 비하될 이유는 없다. 이는 사향을 아무리 보자기에 싸둔다고 해도 그 향마저 감출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자소개

저자가 속한 분야

저자 신복룡(申福龍)은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동 대학원 수료(정치학박사)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임
미국 조지타운대학 객원 교수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 및 대학원장 역임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역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 교수 역임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부회장
역·저서 :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국정치사》, 《전봉준평전》, 《한국분단사연구》(2001년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수상), 《한말외국인기록》(전 23권), 《한국사 새로 보기》,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한국정치사상사》(2011년도 한국정치학회 인재학술상 수상), 《입당구법순례행기》, 《정치권력론》

목차

제1장 모멸(侮蔑)의 시대
1. 뜬구름
2. 유랑(流浪)
3. 귀소(歸巢)
4. 함성(喊聲)

제2장 동지들
1. 규합
2. 뱃놀이
3. 조직과 이념

제3장 그늘 속에서
1. 지하 문서의 제작
2. 1차 피검(一次被檢)
3. 조직의 재정비

제4장 탈출
1.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2. 의친왕(義親王) 이강 공(李堈公)
3. 밀계(密計)
4. 안동역(安東驛)에서

제5장 여한(餘恨)
1. 개천절의 제2만세사건
2. 남은 무리들
3. 해외로 간 무리들
4. 옥바라지
5. 만가(輓歌)

【부록】
1. 대동단사건에 대한 경성지방법원 예심결정서
2. 대동단사건에 대한 경성지방법원 1심 판결문
3. 대동단사건에 대한 공소심 판결문
4. 일제치하에서 한국인에게 적용된 법령
1) 신문지법(新聞紙法)
2) 보안법(保安法)
3) 출판법(出版法)
4)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칙령(勅令) 제324호
5)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6) 조선태형령시행규칙(朝鮮笞刑令施行規則)
7)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1919년의 시대정신과 대동단(大同團)-복벽(復?)과 공화에 관한 논쟁을 중심으로
1. 서론
2. 1919~1920년의 정치적 분위기 : 절망과 분노의 이중주
3. 3·1운동의 발발
4. 1919년 공화정과 복벽(復?)의 논쟁
5. 결론 : 1919년의 시대정신

출판사 서평

대동단(大同團)은 유교의 애민사상뿐만 아니라 노장사상까지 포함한 일종의 혼합사상으로서 원시사회주의의 성격을 담고 있는 민족주의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이 온 세계와 더불어 사는 이상 사회가 되기를 소망했다.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대동단이 아직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점조직(點組織)의 비밀 결사였기 때문에 자료를 얻기 어려웠다는 점도 있지만, 그것이 역사의 망각 지대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 후세에 전승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가지는 가치조차 비하될 이유는 없다. 이는 사향을 아무리 보자기에 싸둔다고 해도 그 향마저 감출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919년의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것이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루지 못했다는 회한에 빠진 전협(全協)을 비롯한 몇몇 선각자들은 민족의 전면적인 참여를 통하여 다시 한번 독립운동을 전개하리라고 마음먹고, 전국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11개 사회 대표자로서 한 단체를 조직했다. 그것이 곧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었다. 대동단이 활약한 시기는 3·1운동의 물결이 누그러지기 시작한 1919년 4월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4월까지 1년 남짓한 기간이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대동단은 지하 문서를 배포하고 [대동신보](大同申報)라는 지하 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그러나 대동단의 업적으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1919년 11월 초순에 의친왕 이강 공의 상해 탈출을 기도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결국 바라던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것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대동단이 가지는 극적인 요소는 그 지도급 인물 중의 일부가 전 일진회(一進會) 회원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자신의 부덕을 씻고 개과하여 민족 전선에 투신했으니, 우리는 그들의 행적을 미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항간에서는 전협과 그의 몇몇 동지들의 전력을 들어 그들의 논공행상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으나, 처음에는 선(善)했다가 나중에는 부덕(不德)한 사람이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처음에는 다소의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대의의 길을 걸었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처사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 中)

명나라 시대 여진인, 애신교로 울히춘 , 이상규, 다키구치 게이코

명나라 시대 여진인


애신교로 울히춘 지음 | 이상규, 다키구치 게이코 옮김 | 경진 | 2014년 10월 20일 출간

책소개

2006년부터 2년간에 주로 명나라 시대 여진대자 자료를 중심으로 한 해독 성과를 정리하고 한문 사료 기술과의 대비를 통해 명나라 시대에서의 여진 사람의 가장 새로운 실상을 복원해 냈다. 이 책에서 구축한 여진대자 자료에 바탕을 둔, 명나라 시대 여진 사람의 역사는 현재 성행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중세에 관한 연구에 새로운 지견(知見)을 제공하고 한층 더 발전될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저자소개

저자 : 애신교로 울히춘

저자 애신교로 울히춘愛新覺羅 烏拉熙春(Aisin Gioro Ulhichun)은 리쓰메이칸(立命館) 아시아태평양대학 교수.
교토대학 유아시아문화연구센터 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박사.
『여진 문자서연구』(2001, 풍아사), 『여진언어문자신연구』(2002, 명선당), 『거란언어문자연구』(2004, 동아역사문화연구회) 등 거란, 여진, 만주 제 민족의 언어문화와 역사 관련 저서와 논문.

역자 : 이상규

저자 이상규(李相揆)는
경북대학교 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중국 해양대학교 고문교수, 동경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역임.
?훈민정음에 나타나는 사성 권점 분석? 외 논문과 『방언의 미학』(2007, 살림), 『둥지 밖의 언어』(2008, 생각의나무), 『한글 고문서 연구』(2011, 도서출판 경진, 2012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한글 고목과 배자』(2013, 도서출판 경진), 『여진어와 문자』(2014), 『한글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 사람들의 삶』(2014) 외 다수의 저서.

역자 : 다키구치 게이코

저자 다키구치 게이코(瀧口惠子)는
계명문화대학교 조교수.
일본 돗쿄(獨協)대학 경제학부 졸업.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석ㆍ박사.
『일본의 컴퓨터 언어지리학』(2012, 도서출판 경진), ?한국어 인칭접미사 ‘꾼’에 대한 일본어 대응어 양상?(2013, 한국문학언어학회) 외 다수의 논문.

목차

역자 서문
서언

제1장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여진
제1절 역사상의 ‘여진女眞’과 ‘여직女直’
제2절 여진의 민족 문화
1. 언어 문자 2. 문학
3. 이름과 성씨 4. 생활 습속
5. 종교 6. 문화사
제3절 여진과 주변 민족의 관계
1. 여진과 조선의 관계
2. 여진과 명나라의 관계
3. 여진과 몽골과의 관계
제4절 여진의 경제생활
1. 목축ㆍ사냥ㆍ채집 2. 농업
3. 수공업 4. 무역
제5절 여진의 제 부족

제2장 『여진역어』
제1절 『여진역어』 해제
1. 갑종 『화이역어』 2. 을종 『화이역어』
3. 병종 『화이역어』 4. 정종 『화이역어』
제2절 『여진역어』의 ‘잡자’
1. 여진어를 철자하는 데 전용한 여진대자
2. 여진어와 한어 역음어에 겸용된 여진대자
3. 한어 역음어를 철자하는 데 전용한 여진대자
제3절 『여진역어』 ‘잡자’의 표의자ㆍ불완전 표의자 및 표음자
제4절 여진대자의 표음 방식
1. 교착 2. 중합
3. 차음 4. 중복
제5절 『여진역어』 ‘잡자’의 여진대자에 대한 문제
1. 오자 문제: 첫째, 본자가 판명된 것
2. 오자 문제: 둘째, 본자를 판정하기 어려운 것
3. 이체자의 문제
제6절 『여진역어』 ‘잡자’의 여진 어휘
제7절 『여진역어』 ‘잡자’의 여진 어휘에 대한 문제
1. 불필요한 격어미가 첨가된 단어
2. 철자가 오류인 단어
3. 뜻이 오류인 단어
4. 소속 문류가 잘못된 단어
5. 여진어 문법에 맞지 않은 연어
6. 동사의 형상에 있는 불통일성
제8절 『여진역어』 ‘잡자’의 주음 한자
1. 편의상의 표음
2. 한어 어미에 대응되는 주음
3. 여진자의 음운에 합치되지 않은 주음
4. 음절말 자음에 통일적인 주음 한자를 사용하지 않은 것
5. 음절 어미음을 표기하지 않은 것
6. 불완전 표의자 주음에 통일 원칙이 존재하지 않은 것
7. 글자에 따른 주음과 단어에 따른 주음과의 구별
제9절 『여진역어』 ‘잡자’의 필사본

제3장 영영사기비永寧寺記碑
제1절 비석의 건조 경위
제2절 비석의 발견과 관련된 기술
제3절 비석 문자의 성격
제4절 여진대자와 비문의 연구사
제5절 여진대자 비문의 언어적 배경
1. 음운상 특징 2. 어휘상 특징
3. 문법상 특징
제6절 여진대자 비문의 서사書寫상의 특징
제7절 비문에 보이는 ‘길렬미吉列迷’와 ‘제종야인諸種野人’
1. 퉁구스 남어파 제어와의 대응어가 있는 예
2. 퉁구스 남어파 제어와의 대응어가 없는 예
제8절 여진대자ㆍ몽골자 비문의 복원
제9절 여진대자 비문의 역문
제10절 한자 비문의 녹문錄文
제11절 여진대자 비문의 고증과 해석
제12절 여진대자ㆍ몽골자 비문 어휘 총록
1. 여진대자 비문 어휘
2. 몽골자 비문 어휘

부록 명왕신덕明王愼德, 사이함빈四夷咸賓
결어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사라진 언어를 통해 지워진 역사를 더듬다
역사의 전승 시스템, 언어와 문자를 통해 삶을 바라보다

세계사를 새로 재편하는
기적과 같은 탄력성과 힘을 내재한 민족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용비어천가』와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여진족들이 우리나라에 투항하거나 조공을 받친 기록들이 매우 빈번했다는 사실과, 여진어 지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여진을 정벌했던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다양한 집단으로 흩어져 살면서 때로는 그들 집단이 결집하여 금나라와 대청 제국을 일으킨 파란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역사란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이 중심이 되기도 하고 중심이 주변이 되는 역사적 노정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통해 확인했듯이 중화의 입장에서 문화적으로 열등하고 미개한 동이족으로만 치부했던 몽고족과 만주족들은 세계사를 새로 재편하는 기적과 같은 탄력성과 힘을 내재하고 있었다.

언어와 문자, 그 힘의 영역

중국의 동북공정의 역사관에서는 발 빠르게 은나라 역사에서부터 요사, 원사, 금사를 비롯한 청사를 중화중심의 역사 속으로 끌어안으며 고조선사, 고구려사나 발해사를 중화의 역사 속으로 재편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이 시대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이미 명나라 시대에 철령위 설치와 관련하여 조선-명나라 간에 생겨난 갈등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 길주, 단주, 영주, 웅주, 함주 등지에 잔류하던 10개 처 여진인을 강제로 요동성으로 환속시키는 조건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의 국경권을 중국으로부터 인정받으며 조정되었다. 한편 왕가인(王可仁)이 명나라 황제의 칙지를 들고 10개 처 여진인들을 회유해보았지만 이미 조선에 뿌리를 내렸던 여진인들은 조선의 인민임을 주장했던 역사의 기록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15세기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제국국가들이 이민족이나 부족들을 지배하면서 소수 부족이나 국가의 언어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중국을 중심으로 특히 중화의 지배자로 등극했던 만주족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가 중화 문명의 원심력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언어와 문자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조선 안에서의 만주학, 세계 유일의 여진어 전사 자료로 평가

언어와 문자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와 역사의 전승 시스템의 일부이다. 우리나라 국경에 인접해서 살았던 관계로 갖가지 외교적 갈등과 분쟁의 흔적들이 고려사나 조선사에 많은 사료의 자국을 남겨 두었듯이 그를 통한 만주어 연구에서도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조선의 만주어연구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역원이 폐쇄되면서 막을 내렸으나, 이 2백여 년간 10여종의 만주어 사서ㆍ교과서 편찬으로 대표되는 이 방면의 업적은 참으로 세계 최고의 만주어 연구국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훈민정음이라는 우수한 표음문자로 만주어음을 사음하고 있는 점과, 만주어와 동일한 문법구조를 가진 조선어로 만주어를 정확히 번역한 자료들은 소중한 만주어 문헌이라 할만하다. 불행하게도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여진어 교재가 산일되어 버렸지만, 《용비어천가》에는 상당수의 여진 어휘가 훈민정음으로 기록되어 있어 세계 유일의 양질의 여진어 전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진어 연구, 여진 역사와 문화사를 담아낸
가치있는 가장 최근의 저서

전통이 단절되고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이 만주지역에 대한 연구와 만주어나 여진어 연구가 앞서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하나인 아이신기오로 울라희춘(愛新覺羅 烏拉熙春) 교수의 ≪명대의 여진인≫(교토대학 학술출판회, 2014)이라는 책은 여진어 연구와 여진 역사와 문화사를 소개한 가치 있는 가장 최근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 중세 연구에 새로운 지견 제공

2006년부터 2년간에 주로 명나라 시대 여진대자 자료를 중심으로 한 해독 성과를 정리하고 한문 사료 기술과의 대비를 통해 명나라 시대에서의 여진 사람의 가장 새로운 실상을 복원해 냈다. 이 책에서 구축한 여진대자 자료에 바탕을 둔, 명나라 시대 여진 사람의 역사는 현재 성행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중세에 관한 연구에 새로운 지견(知見)을 제공하고 한층 더 발전될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명나라 시대에서 여진 문자 사용의 100년 전통 가능성 제시

《영영사기비》에는 8~9곳이나 글자가 누락되어 있고 『여진역어』에는 오기ㆍ오식과 한어 문법과 여진 어휘가 혼재된 피진 언어적 상황이 빈번하다. 그것들은 모두 여진어를 모르는 한인의 소위로 인한 것인데, 전자가 단순히 찬자장(鑽字匠)의 개인적 행위에 불과한 것임에 반해, 후자는 바로 명나라 정통 연간(1436~49) 이후에 건주?해서에서의 여진 문자 사용의 쇠퇴를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조선 사료에는 명나라 성화 18(1482)년에 이르러도 여전히 여진자 ‘서계(書契)’가 조선에 도착하였다는 기사가 보이며, 명나라 시대에서 여진 문자 사용의 전통은 100년 이상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명나라 시대 여진 문자 자료의 재발견이 더더욱 기대되는 바이다.

箕子 전승의 확대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 중국 고대 문헌을 중심으로

http://blog.daum.net/windada11/8764595

箕子 전승의 확대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 중국 고대 문헌을 중심으로


吳 炫 受*
* 한국학중앙연구원

Ⅰ. 머리말
Ⅱ. ‘朝鮮’과 ‘箕子’ 관련 사료의 종합적 검토
Ⅲ. 箕子朝鮮說 형성과 확대 과정
Ⅳ. 맺음말


•국문초록

‘朝鮮’을 기재한 고대 문헌에서 殷․周 교체기에 箕子朝鮮 조문은 14회라는 많은 회수가 기재되어 있지만, 西周代에는 단 1회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箕子와 朝鮮을 연계시키고 있는 기사들이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문헌 고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우선 箕子朝鮮說 등장 이전의 기자 전승을 분석해 보았는데, 기자 전승의 원형은 기자와 紂王의 대립이었다. 이것이 ‘囚箕子說’ → ‘釋箕子說’ → ‘箕子來朝說’ → ‘洪範敎授說’의 순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기자와 조선을 연계시킨 전승이 새로이 추가되어 간다. 󰡔尙書大傳󰡕은 기자를 조선과 연계한 최초의 문헌으로, 前漢 武帝代 伏生의 문도가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기자 전승은 󰡔史記󰡕 단계에 ‘麥秀之詩作者說’이, 󰡔漢書󰡕에서는 ‘箕子敎化說’과 ‘犯禁八條' 항목이, 또 󰡔魏略󰡕에서는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이, 󰡔三國志󰡕와 󰡔後漢書󰡕에서는 ‘犯禁八條制定說’이, 마지막으로 󰡔隋書󰡕와 󰡔太平寰宇記󰡕에서는 ‘箕子朝鮮⇒高句麗說’이 새로 등장한다. 이러한 기자 전승이 확대된 역사적 배경은 前漢 武帝의 조선 정벌과 樂浪郡의 효율적 통치, 그리고 隋․唐代 고구려 침략시에 침공의 명분을 얻기 위해 필요했던 사상과 역사 방면에서의 조치로 보인다. 따라서 箕子朝鮮說은 해당 전승이 필요했던 시대의 역사적 산물로서 실제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주제어
箕子—紂王對立說, 囚箕子說, 釋箕子說, 箕子來朝說, 洪範敎授說, 麥秀之詩作者說, 箕子敎化說, 朝鮮侯=箕子之後孫說, 犯禁八條制定說, 箕子朝鮮⇒ 高句麗說


Ⅰ. 머리말

고조선사 연구에서 기자조선 문제는 지난 100년 간 끊임없는 논쟁거리였다. 대체로 남․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중국 학계는 이를 인정하여 왔다. 중국학계는 黃歷鴻과 吳晋生1)이 󰡔尙書大傳󰡕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閻海2)는 󰡔周易󰡕 「明夷」篇에 보이는 ‘明夷’에 대해, 丁征磊3)도 明夷와 ‘八條之敎’에 대해 기자조선과 관련시키고 있다. 張博泉4)과 李德山5)은, 󰡔三國志󰡕와 󰡔後漢書󰡕에 보이는 ‘八條之敎’가 역사적 사실임을 의심치 않는다.

중국학계의 무비판적인 태도에 비해서, 남․북한 및 일부 러시아 학계에서는 대체로 기자 전승의 시대적 맥락을 분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60년 대에 이미, ‘箕子東來說’은 날조되고,6) 심지어는 문학적인 색채까지도 띈 것으로,7) 漢나라 세력이 한반도에 세력을 뻗치면서 생긴 부산물이라는 견해8)가 제시되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箕子東來說이 秦․漢代 이후 구체화되었다는 연구,9) 고조선 지역에 대한 중국 측의 권리 확보 차원이었다는 연구,10) 武王의 기자방문과 기자의 洪範演述說이 전설상의 箕子東走․東封說과 결합되었다고 본 연구,11) 기자 전승의 윤식․확대를 논한 연구12) 등이 있었다.

1) 黃歷鴻․吳晋生, 「“箕子朝鮮”鉤沉」, 󰡔北方文物󰡕 3, 2001, 52~56면.
2) 閻海, 「箕子東走朝鮮探因」, 󰡔北方文物󰡕 2, 2001, 6면.
3) 丁征磊, 「중국의 기자(箕子)조선에 관한 인식」, 선문대 석사학위논문, 2007, 9~19면.
4) 張博泉, 「箕子‘八條之敎’的硏究」, 󰡔史學集刊󰡕 1, 1995, 19~25면.
5) 李德山, 「關于古朝鮮几个問題的硏究」, 󰡔邊疆史地硏究󰡕 2, 2002, 59~60면.
6) 리지린, 󰡔고조선 연구󰡕, 열사람, 1963, 129~130면.
7) 丁仲煥, 「箕子朝鮮考」, 󰡔東亞論叢󰡕 2, 동아대학교, 1964, 11면.
8) 沈㬂俊, 「箕子東來與否와 㠱侯에 대하여」, 󰡔淑大史論󰡕 2, 淑明女大 史學科, 1965, 38면.
9) 尹乃鉉, 「箕子新考」, 󰡔韓國史硏究󰡕 41, 한국사연구회, 1983, 3~6면.
10) 유.엠.부찐 저, 國史編纂委員會 역, 󰡔古朝鮮󰡕, 國史編纂委員會, 1976, 109~112면.
11)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7, 44~45면.
12) 全海宗, 「古代 中國人의 韓國觀」, 󰡔동아시아사의 비교와 교류󰡕, 지식산업사, 2000, 34~48면.


2000년대에 들어 와서는, 조선 정벌과 漢郡縣 지배의 정당성 확보 차원으로 본 연구,13) 漢人들의 위만조선에 대한 관심과 「洪範」篇의 부상 등에 기인한다고 본 연구,14) 기자가 옥에 갇힌 전승에서부터 隋代에 고구려 침략의 명분으로 작용했던 시기까지를 분석한 연구,15) 樂浪郡으로부터의 자료 축적과 고조선 지배의 당위성 및 토착화된 漢人들의 가계 현시 욕구로 본 연구가16) 있었다. 이러한 남․북한 학계의 논설은 대체로 중국 학계의 연구보다 기자조선 관련 기록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기자 및 기자조선를 다루고 있는 고대 문헌들에 대한 분석이 다소 정치하지 못하고, 전체 기자 전승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확대되어 갔는지를 정확히 집어내지 못한 감이 든다.

그런데 기자 전승의 문제를 고조선사의 체계 속에서 파악하려면, 우선 ‘기자’와 ‘조선’ 관련 기록의 상관 관계부터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기자 전승의 양상을 다루기에 앞서, 전체 고조선을 다루고 있는 중국 고대 문헌 속에서 기자조선의 기재 현황은 어떠한지 파악하고자 한다. 이어서 기자 전승의 원형은 무엇이고,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변천하였는지 밝히고자 한다.
최종적으로는 기자 전승의 확대 과정은 어떠한 계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고, 또 그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지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3) 이성규, 「고대 중국인이 본 한민족의 원류」, 󰡔한국사시민강좌󰡕 32, 일조각, 2003, 134면.
14) 沈載勳, 「상쟁하는 고대사 서술과 대안 모색― 󰡔詩經󰡕 “韓奕”편 다시 읽기」, 󰡔東方學志󰡕 137, 延世大 國學硏究院, 2007, 275~281면.
15) 조원진, 「기자조선 연구의 성과와 과제」, 󰡔단군학연구󰡕 20, 단군학회, 2009, 399면.
16) 오강원, 「󰡔삼국지󰡕 배송지 주와 󰡔위략󰡕 고조선 관련기사」, 󰡔정신문화연구󰡕 35-3,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168면.


Ⅱ. ‘朝鮮’과 ‘箕子’ 관련 사료의 종합적 검토

1. ‘朝鮮’ 기재 사료의 현황 분석

중국의 고대 문헌과 사서에는 ‘조선’ 관련 기록이 기재되어 있어, 고조선 연구에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 검토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문헌과 사서로는 先秦時代와 漢代에 성서된 󰡔管子󰡕, 󰡔戰國策󰡕, 󰡔淮南子󰡕, 󰡔鹽鐵論󰡕, 󰡔易林󰡕, 󰡔尙書大傳󰡕, 󰡔潛夫論󰡕, 󰡔說文解字󰡕, 󰡔山海經󰡕, 󰡔漢書󰡕 등이 있다.
󰡔後漢書󰡕와 󰡔三國志󰡕는 성서 시기가 비교적 늦지만, 양서에는 ‘朝鮮侯’를 언급하고 있는 󰡔魏略󰡕이 소개되어 있어,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이들 문헌 및 사서에서 ‘조선’ 기재 상황을 살펴보면, 󰡔管子󰡕 3회, 󰡔戰國策󰡕 1회, 󰡔淮南子󰡕 2회, 󰡔鹽鐵論󰡕 6회, 󰡔易林󰡕 5회, 󰡔潛夫論󰡕 1회, 󰡔尙書大傳󰡕 2회, 󰡔說文解字󰡕 2회, 󰡔山海經󰡕 2회, 󰡔史記󰡕 42회, 󰡔漢書󰡕 51회, 󰡔後漢書󰡕 15회, 󰡔三國志󰡕 10회 등, 총 142회이다.

이와 같은 방대한 기사들과 기자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기사가 어떤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기록된 것인지에 대한 분류가 필요하다.
‘조선’의 기록은 역사적 배경을 시대순으로 봤을 때, 殷․周 교체기 ‘기자의 朝鮮東來’ 기사가 가장 앞선다. 그리고 春秋時代 齊나라 桓公의 북벌과 戰國時代 燕나라의 東胡 및 조선 공략, 그리고 秦나라의 조선 침략, 漢
나라의 조선 정벌에 따라, 고조선사의 전개는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러므로 142회의 ‘조선’ 기재는 1)殷․周 교체기, 2)西周時代, 3)齊나라의 북벌전후(春秋時代), 4)전국 燕나라의 침략 전후(戰國時代), 5)秦나라 침략기(秦帝國期), 6)漢나라 침략기(漢帝國期) 등, 총 여섯 시기로 분류 가능하다. 이들 기사들을 시기 분류한 바에 따라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표 1>과같다.

<표 1> ‘朝鮮’ 기사의 시대 배경 현황


비고: 시대가 불분명한 기사는 합산에서 제외/ 동일시기 기사는 중복합산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통해서, ‘조선’은 殷․周 교체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료에서부터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표 1>에서 보면, 殷․周 교체기, 西周時代, 春秋時代, 戰國時代, 秦帝國期, 漢帝國期로 넘어가면서 ‘조선’이 기재된 회수는 14회, 0회, 3회, 9회, 6회, 109회로 전반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 세력의 영역은 확대되었고, 또 그에 따라 외방에 대한 지식과 견문이 확장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殷․周 교체기라는 매우 한정된 시간에는 무려 14회라는 많은 회수가 기재되어 있지만, 300~400년간의 西周時代에는 단 1회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아스럽다. 이상한 현상은, 이 시기 ‘조선’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기사가 공히 ‘기자의 조선 지역으로의 동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라서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최초의 기록인 󰡔尙書大傳󰡕 이전의 先秦 문헌상에 나타나는 기자는 殷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자, 어진 인물로만 묘사되었고, 조선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다.17) 그러던 것이 󰡔尙書大傳󰡕과 󰡔史記󰡕,「宋微子世家」에서부터 기자를 조선에 연결시키고 있는데, 󰡔史記󰡕에서 기자는 독립된 ‘世家’로 분리되지도 못했고, 「宋微子世家」에서조차도 武王이 ‘克殷’한 이후의 행적과 관련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18) 그 밖의 문헌들에서도 西周 武王이 殷나라의 紂王에 의해 옥에 갇힌 기자를 풀어주자,
기자가 부끄러워하여 조선으로 갔고, 武王이 그를 조선에 봉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설이 성립하려면, 기자가 동래하기 이전에 조선은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한 조선이 기원전 11~8세기에 문헌상에 기록되지 않다가, 기원전 7세기 春秋時代가 개막하면서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조선’을 언급한 문헌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 즉 春秋~戰國時代에 걸쳐 성서된 것으로 알려진 󰡔管子󰡕에는 기자와 관련된 내용이 일체 없다.
漢나라 이후의 사서에서 조선을 언급할 때, 혹은 사서의 주석가들은 대부분 ‘조선’과 관련하여 기자의 조선 동래를 언급하고 있다. 중국 측에서 기자조선의 동래가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라면, 󰡔管子󰡕에서 조선을 다룰 때, 기자를 언급하는 게 이치에 맞을 것이다. 따라서 기자조선 전승은 최소한 戰國時代 이후에 가서야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신뢰성을 반감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기자조선을 처음으로 언급한 󰡔尙書大傳󰡕을 필두로 하여, 각 문헌들에 대한 정밀한 문헌 고증이 필요한 것이다.

‘기자조선’을 언급한 문헌으로는 前漢代(기원전 206~기원후 8년)에 편찬된 󰡔尙書大傳󰡕․󰡔史記󰡕․󰡔易林󰡕, 後漢代(25~220년)에 편찬된 󰡔潛夫論󰡕․ 󰡔漢書󰡕, 三國時代 魏나라(220~265년) 사람이 편찬한 󰡔魏略󰡕, 西晋代(265~ 316년)의 󰡔三國志󰡕와 劉宋代(420~478년)의 󰡔後漢書󰡕, 唐代(618~907년) 魏徵과 長孫無忌가 편찬한 󰡔隋書󰡕, 北宋代(960년~1126년) 樂史가 편찬한 󰡔太平寰宇記󰡕가 있다.
이 문헌들을 탐색하다 보면, 기자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이러한 문헌들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기에 앞서, 기자 전승의 원형은 무엇인지가 먼저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밝힐 수 있다면, 이 원형으로부터 어떠한 시기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 기자 전승이 확대되었고, 또 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 탐색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17) 조원진, 앞의 논문, 399면.
18) 吳江原, 「중국 중고교 역사 교과서의 古朝鮮 서술 분석과 비판」, 󰡔중국 역사 교과서의 한국 고대사 서술문제󰡕, 동북아역사재단, 2006, 35면.


2. 기자 전승의 원형 탐구

箕子朝鮮說이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에서 기자 전승을 다루고 있는 문헌으로는 󰡔尙書󰡕, 󰡔論語󰡕, 󰡔周易󰡕, 󰡔春秋左氏傳󰡕, 󰡔竹書紀年󰡕, 󰡔荀子󰡕, 󰡔韓非子󰡕, 󰡔戰國策󰡕, 󰡔淮南子󰡕, 󰡔逸周書󰡕, 󰡔史記󰡕, 󰡔漢詩外傳󰡕, 󰡔法言󰡕, 󰡔論衡󰡕, 󰡔潛夫論󰡕 등이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대체로 기자와 紂王, 기자와 武王 간의 관계에 대해서 짤막한 기사를 담고 있다. 각 기사들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箕子朝鮮說’ 등장 이전의 箕子 관련 기재 현황





󰡔尙書󰡕
①「周書」<武成>
釋箕子囚, 封比干墓, 式商容閭. 散鹿臺之財, 發鉅橋之粟, 大賚于四海, 而萬姓悅服.  / 釋箕子說
②「周書」<洪範>
惟十有三祀, 王訪于箕子. 王乃言曰, 嗚呼, 箕子, 惟天陰騭下民, 相協厥居, 我不知其彝倫攸敍. 箕子乃言曰, 我聞, 在昔鯀陻, 洪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畀洪範九疇, 彝倫攸斁. 鯀則殛死, 禹乃嗣興, 天乃錫禹洪範九疇, 彝倫攸敍. / 洪範敎授說
/ 孔丘?(春秋時代)

󰡔周易󰡕
③ 「明夷」
箕子之明夷, 利貞. / 箕子之明夷說  / ? (西周~戰國時代)

󰡔論語󰡕
④ 「微子」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 囚箕子說 箕子賢人說 / 孔丘의 문도 (春秋時代)

󰡔春秋左氏傳󰡕
⑤「僖公」
吾聞唐叔之封也, 箕子曰其後必大. / 箕子豫見說 / 左丘明 (春秋時代)

󰡔竹書紀年󰡕
⑥「帝辛」
五十一年, 王囚箕子, 殺王子比干, 微子出奔. / 囚箕子說
⑦「周武王」
十六年, 箕子來朝. / 箕子來朝說
/ ? (戰國時代)

󰡔荀子󰡕
⑧「議兵」
紂刳比干, 囚箕子爲炮烙刑. / 囚箕子說
⑨ 「正論」
(紂)刳比干, 囚箕子. / 囚箕子說
⑩ 「大略」
武王始入殷, 表商容之閭, 釋箕子之囚, 哭比干之墓. / 釋箕子說
⑪ 「成相」
比干見刳, 箕子累(縷). /
/ 荀況과 그의 문도 (戰國時代)

󰡔韓非子󰡕
⑫ 「喩老」
昔者紂爲象箸, 而箕子怖, ……, 故箕子見象 箸以知天下之禍. / 箕子豫見說 / 韓非(戰國時代)

󰡔戰國策󰡕
⑬ 「秦策」
箕子接輿漆身而爲厲, 被髮而爲狂, 無益於殷楚. / 箕子狂人說 / 劉向(戰國時代~前漢)

󰡔淮南子󰡕
⑭「齊俗訓」
王子比干, 非不智箕子髮佯狂以免其身也. / 箕子狂人說
⑮「泰族訓」
箕子比干, 異趨而皆賢. / 箕子賢人說
/ 劉安(前漢)

󰡔逸周書󰡕
⑯「克殷解」
(武王) 乃命召公, 釋箕子之囚, 命畢公衛叔, 出百姓之囚 / 釋箕子說 / ?(西周~漢)

󰡔史記󰡕 ⑰
「周本紀」
命召公釋箕子之囚, 命畢公釋百姓之囚. 釋箕子說 / 司馬遷 / (前漢)

󰡔韓詩外傳󰡕
⑱ 卷第3
封殷之後於松, 封比干之墓, 釋箕子之囚, 表商容之閭. / 釋箕子說 / 韓嬰(前漢)

󰡔法言󰡕
⑲ 「淵騫」
昔者, 箕子之漆其身也, 狂接輿之被其髮也, 欲去而恐罹害者也, 箕子之洪範接輿之歌鳳也. /箕子狂人說.
洪範敎授說 / 揚雄(前漢)

󰡔論衡󰡕
⑳ 「逢遇」
箕子遇商紂也. ……, 以賢事惡君. / 箕子賢人說
21.「遇會」
箕子比干囚死, 當桀紂惡盛之時. / 囚箕子說
22.「龍虛」
箕子之泣訂之. ㆍ
23.「實知」
紂作象箸而箕子譏. / 箕子豫見說
/ 王充(後漢)

󰡔潛夫論󰡕
24.「讚學」
箕子陳六極.
25.「賢難」
比干之所以剖心, 箕子之所以爲奴. / 囚箕子說
26.「浮侈」
箕子所晞.
/ 王符(後漢)


①에서는 武王이 갇혀 있던 기자를 풀어주는 장면,
②에서는 武王의 기자 방문과 기자의 ‘洪範九疇’를 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③에서는 기자가 明夷로 갔다고 하고,
④에서는 箕子를 殷나라의 현인이라 했으며,
⑤에서는 기자가 唐叔의 나라가 커질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⑥에서는 殷나라의 紂王이 箕子에게 행한 부당한 처사와
⑦에서는 기자가 來朝하는 장면,
⑧~⑪에서는 기자가 옥에 갇히는 장면이 나온다.
⑫에서 기자가 殷나라에 닥칠 화를 예견했다고 하고.
⑬과 ⑭에서 기자가 被髮하고 광인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⑮에서는 기자를 현인으로 보았고,
⑯과 ⑰에서는 武王이 갇혀 있는 기자를 풀어주었으며,
⑱에서 기자가 몸에 옻칠한 것과 洪範을 교수한 것을 말하였다.
또⑲에서 기자를 현인이라 했고,
⑳에서 기자가 옥에 갇힌 것에 대해 말했으며,
22.에서는 기자가 殷나라에 닥칠 화를 예견했다고 한다.

이들 기사에서 기자와 조선과의 어떠한 관련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들이 전하는 구체적인 기자 전승은 ‘箕子狂人說’이 ⑬․⑭․⑮․⑱에서, ‘囚箕子說‘이 ④․⑥․⑧․⑨․⑯․⑰․⑳에서, ‘釋箕子說’이 ⑩․⑰에서, ‘箕子之明夷說’이 ③에서, ‘箕子來朝說’이 ⑦에서, ‘箕子賢人說’이 ⑲에서, ‘箕子豫見說’이 ⑤․⑫․22.에서, 그리고 ‘洪範敎授說’이 ②와 ⑱에서 기술되어 있다. 기자 전승의 원형은 이 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선 󰡔尙書󰡕에서 말하는 ‘洪範’이라는 담론은 西周 초기의 기자가 아니라, 戰國時代 末에 이루어졌다고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므로,19) 洪範에 관한 기자 전승을 액면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설사 이와 같은 劉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尙書󰡕의 ‘洪範敎授說’은 기자 전승의 원초적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기자 전승의 발단은 ‘기자와 武王’이 아니라, ‘기자와 紂王’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箕子賢人說’과 ‘箕子豫見說’도 기자와 紂王의 대립각 속에서 기자를 숭상시키는 작업과 관련된 시대 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보다 선행하는 기자 전승은 ‘囚箕子說’로 보인다. 그런데 이 ‘囚箕子說’ 조차도 紂王을 폭군으로 보고, 폭군시대에 현자가 출현한다는 통념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 여기에 현자(箕子)와 성왕(武王)을 연결하는 관점에서 기자를 洪範의 작자로 확대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20)

19) 劉節, 󰡔古史辨󰡕 第5冊 下篇, 「洪範疎證」, 402면,
“洪範一篇, 據前諸證, 實非周初箕子所傳, 其著作時代當在秦統一中國以前, 戰國之末.”
20) 全海宗, 앞의 논문, 44면.


그러나 본고에서 중시하는 것은 기자가 누구였는지가 아니고, 그에 관한 전승이 어떻게 확대되어 갔는가 이다. 그런 점에서, 기자의 실존성을 담보로 했을 때, 첫 번째 윤색의 과정은 옥에 갇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옥에 갇히기 전에, 그가 했던 행동, 즉 기자가 紂王에게 간했다는 점을 논점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했던 행위로 인해 紂王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받았을 것이거나, 또는 기자 스스로 도모책을 구사했을 것이다. 위기사들에서는 炮烙刑․紂作象箸․漆身․被髮佯狂 혹은 옥에 갇히는 형벌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武王에 의한 ‘釋箕子’,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격인 ‘箕子의 來朝’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전자보다는, 기자가 옥에 갇히는 경우가 합리적이다.

따라서 ‘囚箕子說’은 1차 윤색을 거친 것으로, 오히려 이는 西周 武王의 덕을 과장하기 위한 작업의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 즉 기자 전승의 원형은 기자와 紂王의 대립일 것이고, 이로부터 紂王이 기자를 옥에 가두고(囚箕子說), 이어서 武王이 갇혀있던 기자를 풀어주는 장면(釋箕子說), 그리고 기자가 무왕에게 내조하는 장면(箕子來朝說) 및 기자가 武王에게 洪範을 가르치는 장면(洪範敎授說)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서는 ‘箕子-紂 王對立說 → 囚箕子說 → 釋箕子說 → 箕子來朝說 → 洪範敎授說’의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기자조선과 관련된 ‘箕子東來說’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았다. 최소한 여기까지는 역사적인 사실일 가능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지난 세기 동안 여러 차례 ‘(己+其)’ 관련 청동기들이 발견되어 왔다. 청동기 명문상의 기(己+其)族을 箕子와 관련된 족단이라 할 때, 이들은 西周 燕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逸周書󰡕, 「克殷解」(⑯)와 󰡔史記󰡕, 「周本紀」 (⑰)에서 武王이 克殷한 이후 召公으로 하여금 수감중이던 기자를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召公과의 인연으로 기자로 대표되던 (己+其)(箕)族 일파가 燕나라 근처로 사민되어, 燕나라의 보호 아래 있었을 것으로 보게 되었다.21)
서주는 건국 초기에 周族을 하북성 지역에 분봉할 때, 周族이 상층부를 구성하는 가운데, 殷나라의 유민들을 周族의 하위 신분으로 사민시키면서 지역 거점을 확보해 나갔다.22) 서주 초기 이질적 문화 지역에 분봉된 燕나라의 통치자는 殷 유민들에게 일정 지위를 보장해 주었을 것인데, 그들은 菫鼎․復鼎․圉方鼎 등에서 보이는 菫․復․圉와 같은 인물들이 었을 것이다.23)

(己+其) 

21) 沈載勳, 「商周 청동기를 통해 본 㠱族의 이산과 성쇠」, 󰡔歷史學報󰡕 200, 歷史學會, 2008(a), 400면.
22) 沈載勳, 「商周시대 移民과 국가 —동서 융합을 통한 절반의 중국 형성—」, 󰡔東洋史學硏究󰡕 103, 東洋史學會, 2008(b), 28~34면.


그리고 箕族도 西周에 의해 燕나라가 분봉되던 기원전 11세기 말 하남성 일대의 근거지를 떠나, 북경 일대로 이주되어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24) (己+其) 관련 청동기들의 분포상에서 보면, 이러한 양상은 여실히 드러난다. 1867년 북경 盧溝橋 인근에서 (己+其) 관련 기물인 盉가 출토되었다.25)
이 명문에는 “匽(燕)이 亞((己+其)侯)에게 貝를 하사하자, 亞가 父乙을 위하여 제사용 그릇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26) 그리고 1973년 발굴된 琉璃河 燕나라 묘지 M54의 (己+其) 관련 기물은 (己+其)族 사민의 흔적을, M253의 其史觶는 (己+其)族의 후예가 燕나라의 조정에서 사관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의미하며, 또 이것들은 1982년 琉璃河 인근 順義縣 牛欄山에서 발견된 (己+其) 관련 청동기들과 함께 (己+其)族들이 북경 지역에서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존속했음을 보여 준다.27)

이러한 문헌 및 고고학적인 정황으로 봤을 때, (己+其)族의 도착지는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箕子-紂王對立說’, ‘囚箕子說’, ‘釋箕子說’, ‘箕子來朝說’, ‘洪範敎授說’ 자체를 역사적으로 불신할 수 만은 없을 지도 모른다. 최소한 이중에서 어느 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기자 전승으로는 조선과 어떠한 연결점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尙書大傳󰡕의 편찬이 완료된 前漢代의 어느 시점까지는 箕子朝鮮說은 아직 성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箕子朝鮮說은 오히려 (己+其)族이 하북성 지역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했던 것과 漢나라가 동북면 지역에 있던 조선을 정벌했던 두 개의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어 탄생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하에서는 이러한 추론이 합리적인 것인지 구체적으로 검증해 보고자 한다.
우선 기자와 조선을 연계시킨 기자 전승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해당 조문의 사료
맥락적 의미와 또 그것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논의를 모아 보도록 하겠다.

23) 裵眞永, 「西周初期 燕國의 成立과 姬燕文化의 形成에 관한 試論」, 2000년도 동양사학회 秋季 學術發表會 發表要地, 2000.10, 5면.
24) 박대재, 「箕子 관련 商周靑銅器 銘文과 箕子東來說」, 󰡔先史와 古代󰡕 32, 한국고대학회, 2010, 127면.
25) 郭大順․張星德, 󰡔東北文化與幽燕文明―早期中國文明󰡕, 南京: 江蘇教育出版社, 2005, 387면.
26) 沈載勳, 앞의 2008(a) 논문, 396면.
27) 沈載勳, 앞의 2008(a) 논문, 397~399면.



Ⅲ. 箕子朝鮮說의 형성과 확대 과정

1. 箕子朝鮮說 형성과 그 역사적 배경

󰡔尙書大傳󰡕 이하 기자 전승을 담고 있는 문헌은 󰡔史記󰡕, 「宋微子世家」와 󰡔易林󰡕, 「未濟」․「革」․「豐」篇, 그리고 󰡔潛夫論󰡕, 「五德志」篇 등이 있다.
󰡔尙書大傳󰡕의 「周書」 <洪範五德志>條에는 武王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고, 이어서 武王이 그를 조선에 봉하자, 이후 기자가 來朝하여 武王에게 洪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史記󰡕, 「宋微子世家」에서는 洪範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나오고, 그리고 기자가 내조시에 ‘麥秀’라는 시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易林󰡕, 「未濟」․「革」․「豐」 篇과 󰡔潛夫論󰡕, 「五德志」篇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짤막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 문헌의 편찬 시기는 앞의 세 책은 前漢代이고, 󰡔潛夫論󰡕은 後漢代이다. 이를 <표 3>으로 정리하였다.

‘기자조선’을 최초로 언급한 문헌은 前漢代에 편찬된 󰡔尙書大傳󰡕과 󰡔史記󰡕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史記󰡕는 상고사에 관해서는 前故에 따라 기록하는 역사서이므로, ‘기자조선’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기존의 문헌을 참고했을 것이므로, 󰡔尙書大傳󰡕이 󰡔史記󰡕보다 앞설 것으로 볼 수 있다. 󰡔尙書大傳󰡕은 기자를 조선과 최초로 연관시킨 문헌이라는 점에서, 그 저작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尙書大傳󰡕의 저작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箕子東來說’이 언제 성립했는가를 밝힐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箕子朝鮮說의 형성시기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학계에서는 너무나 쉽게 그 저작자를 伏生으로 단정해 버렸다. 그럼으로써, ‘箕子東來說’의 성립 시기를 前漢 武帝의 고조선 침략 시기보다 약 반세기 이른 文帝代로 한정하게 되었고, 이것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를 꽤 복잡하게
만들었다.

<표 3> 漢代의 箕子朝鮮 관련 기사




󰡔尙書大傳󰡕
「周書」<洪範五德志條>
武王釋箕子之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二祀來朝, 武王因其朝, 而問洪範.
/ 箕子東來說. 箕子來朝說. 洪範敎授說
/ 伏生의 문도(前漢)

󰡔史記󰡕 <宋微子世家>
武王旣克殷, 訪問箕子. 武王曰, 於乎. 維天陰定下民, 相和其居, 我不知其常倫所序. 箕子對曰,在昔鯀陻鴻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從鴻範九等, 常倫所斁. 鯀則殛死, 禹乃嗣興. 天乃錫禹鴻範九等, 常倫所序. ……, 於是, 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其後箕子朝周, 過故殷虛, 感宮室毁壞, 生禾黍, 箕子傷之, 欲哭則不可, 欲
泣爲其近婦人, 乃作麥秀之詩以歌詠之. 其詩曰, 麥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僮兮, 不與我好兮.所謂狡童者, 紂也. 殷民聞之, 皆爲流涕.
/ 洪範敎授說. 箕子東來說. 箕子來朝說. 麥秀之詩作者說
/ 司馬遷(前漢)

󰡔易林󰡕
 「未濟」
武王伐紂而有天下, 以元女大姬, 嫁胡公而封諸陳. 朝鮮之地, 箕伯所保, 宜人宜家, 業處子孫, 求事大吉. 箕子, 紂諸父. 武王伐紂, 遂歸周, 封於朝鮮.
/ 箕子東來說

「革」
朝鮮之地, 箕子所保, 宜家宜人, 業處子孫. 箕子, 紂諸父, 武王伐紂, 遂歸周, 封於朝鮮.
/ 箕子東來說

「豐」
天命赤烏, 與兵徼期, 征伐無道, 箕子遊遨. 󰡔史記󰡕 商紂無道, 九年, 武王東觀兵于孟津, 有火自上復于下, 至於王屋. 流爲烏, 其色赤, 是時諸侯不期而會者八百, 遂伐紂而有天下, 箕子歸, 周封于朝鮮.
/ 箕子東來說

/ 焦延壽? (前漢)

󰡔潛夫論󰡕
「五德志」
武王封微子於宋, 封箕子於朝鮮.
/ 箕子東來說
/ 王符(後漢)


󰡔尙書大傳󰡕은 본서에서 伏生의 撰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필두로 해서, 唐代 陸德明의 󰡔經典釋文󰡕, 「敍錄」에서도 󰡔尙書大傳󰡕의 작자를 伏生이라고 명기 하였다.28) 이러한 설에 대해, 대부분의 고조선 연구자들은 무비판적으로 믿어 왔었다.29) 그러나 󰡔史記󰡕, 「儒林列傳」에서는, 伏生이 󰡔尙書大傳󰡕을 편찬 했다는 기록은 없고, 단지 󰡔尙書󰡕의 流轉 과정30)과 ‘伏生 → 張生․歐陽生 → 兒寬’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흐름31)만이 기재되어 있다. 특히 孝文帝가 󰡔尙書󰡕를 구할 때, 󰡔尙書大傳󰡕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었던 것은, 그때까지 󰡔尙書大傳󰡕이 아직 저술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伏生의 나이가 이미 90을 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 그가 󰡔尙書大傳󰡕을 집필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後漢代의 鄭玄은, 伏生의 문도가 스승의 유세를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32) 그리고 淸代 永瑢은 그 저작자를 구체적으로 張生과 歐陽生으로 지적하기까지 하였다.33)
그러므로 伏生 사후에 張生․ 歐陽生이나, 심지어 朝․漢전쟁(기원전 108년) 시기를 몸소 겪었을 兒寬(?~기원전 103년)이 스승의 이름에 가탁하여 󰡔尙書大傳󰡕을 편찬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文帝 당시 󰡔尙書大傳󰡕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었던 상황과, 그때 伏生의 나이가 이미 90을 넘었던 상황, 그리고 ‘伏生 → 張生․ 歐陽生 → 兒寬’으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보았을 때, 󰡔尙書大傳󰡕의 저작자는 伏生 사후 그의 문도들이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司馬遷이 󰡔尙書大傳󰡕의 ‘기자조선’ 조문을 보았을 것으로 가정한다면, 󰡔史記󰡕가 완성된 기원전 91년 이전에 󰡔尙書大傳󰡕은 이미 편찬되어 있었을 것이다.


28) 陸德明, 󰡔經典釋文󰡕, 「敍錄」, “尙書大傳三卷, 伏生作.”
29) 丁仲煥, 앞의 논문, 11면; 尹乃鉉, 앞의 논문, 3면; 丁征磊, 앞의 논문, 8면; 李丙燾, 앞의 책, 44면.
30) 班固, 󰡔漢書󰡕 卷88, 「儒林傳」 第58, “秦時禁書, 伏生壁藏之, 其後大兵起流亡. 漢定, 伏生求其書, 亡數十篇, 獨得二十九篇.”
31) 班固, 󰡔漢書󰡕 卷88, 「儒林傳」 第58, “伏生敎濟南張生及歐陽生, ……, 歐陽生字和伯千乗人也, 事伏生授兒寬, 寬又受業孔安國至御史大夫, 自有傅寬有俊材.”
32) 鄭玄, 󰡔尙書大傳󰡕 卷1上, 「序錄」, “直齋書錄解題, 尙書大傳凡八十有三篇, 當是其徒歐陽張生之徒雜記所聞.”
33) 永瑢, 󰡔四庫全書總目󰡕, “然則此傳乃張生歐陽生所述, 特源出于勝爾, 非勝自撰也.”


이와 관련하여 전해종은 󰡔尙書大傳󰡕의 편찬자를 伏生으로 보고 있지는 않지만, 그 시기를 文帝나 景帝代로 한정하고 있다.34) 그러나 󰡔尙書大傳󰡕이 고대 문헌사에 있어서 최초로 기자를 조선에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문제가 있다. 그의 논설로는 伏生의 문도들이 왜 이 시기에,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떠한 근거에 의해서 기자를 조선에 연계시켰는지 밝힐 수가 없다.
文․景帝代는 기자를 조선에 연계시킬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시대인 것이다.
기자를 조선에 연계시킨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前故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箕子東來說’이 등장한 것은 그와 같은 논리 체계가 필요했던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前漢代에 있어서 그것이 필요했던 시기는 武帝가 조선을 정벌하던 시기 외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尙書大傳󰡕의 편찬 시기는 伏生의 사후, 그의 학맥이 1~2세대가 지난 兒寬이 활동하던 시기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가 죽은 시기는 太初 2년(기원전 103년) 12월으로서, 생전에 고조선이 멸망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尙書大傳󰡕을 편찬하면서, 箕子를 朝鮮과 연관시켰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兒寬은 司馬遷과 친분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에,35) 朝․漢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양국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들로 보았을 때, 󰡔尙書大傳󰡕의 ‘箕子東來說’은 고조선 지역이 漢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시점을 전후하여 새로 첨가된 것으로,36) 伏生의 견해로볼 근거가 없는 것이다.

34) 全海宗, 앞의 논문, 40~41면.
35) 班固, 󰡔漢書󰡕 卷58, 「公孫弘卜式兒寬傳」 第28, “太史令司馬遷等言, 曆紀壞廢, 漢興未改正朔, 宜可正. 上乃詔寬與遷等共定漢太初曆. 語在律曆志.”


그런데 󰡔尙書大傳󰡕의 편찬자는 箕子東來說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떤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는 앞에서 제시한 고대 문헌의 기자 관련 조문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그런데 󰡔周易󰡕 ‘明夷’ 괘사의 “箕子之明夷”에대해서, 중국학계에서는, 이를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37) 그런데 ‘明夷’는 전통적으로 군자가 곤경에 처한 상황을 비유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38) 이러한 ‘明夷’의 원래 의미가 ‘東夷’로 오인되고,39) 또 東夷를 ‘조선’으로 보면서, 箕子朝鮮說이 필요한 시기에 이것을 적절하게 활용했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伏生의 문도들은 󰡔尙書󰡕 뿐만 아니라, 고전으로서 󰡔周易󰡕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을 것이므로,40) ‘明夷’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尙書大傳󰡕 저작시 은연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추론에 따른다면, ‘箕子東來說’의 창작 시기는 고조선 침략을 전후한 시기로 한정지을 수 있다. 그 창작 의도는 다분히 고조선 침략의 명분을 쌓고, 漢四郡 통치의 정당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견해는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는데, 漢나라의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고조선 지역에 대한 자국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던 시도라는 것이다.41) 그리고 이후 중국 문헌에서 고조선은 기자가 봉해졌던 지역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오게 되면서, ‘고조선=기자의 나라’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42)

36) 리지린, 앞의 책, 129~130면.
37) 閻海, 앞의 논문, 75~78면.
38) 이성규, 앞의 논문, 137면.
39) 沈㬂俊, 앞의 논문, 36면.
40) 班固, 󰡔漢書󰡕 卷21上, 「律曆志」 第1上, “御史大夫兒寬明經術.”
41) 유.엠.부찐 저, 앞의 책, 109~111면.

그동안 기자조선의 실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고고학 자료로 요서 지역의 喀左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에서 발견된 殷․周式의 청동예기43)를 들고 있었다.44) 그러나 ‘孤竹’이나 ‘(己+其)侯’銘 청동예기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이 지역을 기자조선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그래서 喀左 일대의 청동예기를 孤竹國, 또는 기자조선의 유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이미 여러 차례 제출되었다.

大凌河 유역에서 ‘孤竹’銘 청동예기는 일반 묘장에서 출토되지 않았고, 孤竹과 관련된 기타 어떠한 유물이 발견되지도 않았다.45) 또한 殷나라 말기까지 그 문화의 북한계선은 滹沱河 유역까지였고, 西周 초기 그 문화의 북한계선은 永定河 유역까지였기 때문에,46) 이 지역을 西周의 봉함을 받은 기자와 연결시킬 수 없다. 그리고 喀左 일대의 청동예기는 (己+其) 외에도 匽侯, 孤竹, 蔡, 史伐, 叔尹, 伯矩, 圉, 魚, 舟 등 다양한 族徽가 하나의 매납 유구에서 모두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를 기자조선의 유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47)

42) 조원진, 앞의 논문, 400면.
43) 喀左의 小波汰溝에서 ‘登逆․父乙․父庚․天竈’銘(朝陽市博物館 編, 「小波汰溝銅器窖藏」,
󰡔朝陽歷史與文物󰡕, 遼寧大學出版社, 1995)이, 北洞村에서 ‘孤竹․(己+其)侯’銘(遼寧省博物館朝陽地區博物館, 「遼寧喀左縣北洞村發現殷代靑銅器」, 󰡔考古󰡕 4, 1973; 喀左縣文化館․朝陽地區博物館․遼寧省博物館․北洞文物發掘小組, 「遼寧喀左縣北洞村出土的殷周靑銅器」, 󰡔考古󰡕 6, 1974)이, 山灣子에서 ‘叔尹․伯矩․子荷戈․父乙’銘(喀左縣文化館․朝陽地區博物館․遼寧省博物館, 「遼寧省喀左縣山灣子出土殷周靑銅器」, 󰡔文物󰡕 12, 1977)이, 海島營子(馬廠溝)에서 ‘魚父癸․蔡․戈父庚․史伐․匽侯’銘(熱河省博物館籌備處, 「熱河凌源縣海島營子村發現的古代銅器」, 󰡔文物參考資料󰡕 8, 1955)의 청동예기가 발견되었다.
44) 李亨求, 「大凌河流域의 殷末周初 靑銅器文化와 箕子 및 箕子朝鮮」, 󰡔韓國上古史學報󰡕 5, 韓國上古史學會, 1991, 28~30면; 李亨求, 「渤海沿岸 大凌河流域 箕子朝鮮의 遺蹟․遺物」, 󰡔古朝鮮과 扶餘의 諸問題󰡕, 新書苑, 1997, 69~73면.
45) 裵眞永, 「甲骨-金文으로 본 商代 北京地域 政治體」, 󰡔中國史硏究󰡕 47, 中國史學會, 2007, 16~18면.
46) 오강원, 「商末周初 大凌河 流域과 그 周邊 地域의 文化 動向과 大凌河 流域의 靑銅禮器 埋納遺構」, 󰡔韓國上古史學報󰡕 74, 韓國上古史學會, 2011, 20면.
47) 吳江原, 「古朝鮮 位置比定에 관한 硏究史的 檢討(1)」, 󰡔白山學報󰡕 47, 白山學會, 1996, 93면.

이 보다는 大凌河 유역의 魏營子類型 집단이 하북성 북부의 非西周系 집단을 매개로 하여, 西周․燕나라와 간접적인 교류를 하면서 大凌河 유역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합리적이다. 喀左 和尙溝 목곽묘군에서 출토된 殷나라 청동예기의 族徽와 같은 글자로 석독되는 族徽가 산서성 靈石 旌介村에서 무려 34건이나 확인된다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48) 또한 喀左 일대의 청동예기 매납 유구에서 발견되는 族徽는 대부분 하북성 중북부를 중심으로 한 殷末․周初 고분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고도 한다.49) 그러므로 喀左 일대의 청동예기를 근거로 하여 기자조선의 역사성을 상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尙書大傳󰡕 다음으로 󰡔史記󰡕, 「宋微子世家」에서 ‘기자조선’을 언급하고 있다. 「宋微子世家」에서는 󰡔尙書大傳󰡕의 ‘箕子東來說’ 외에, 武王이 기자를 봉한 이후 武王에게 신속할 때, 殷나라에 대한 감회를 소상히 이야기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 기자가 殷나라의 옛 도읍지에서 ‘麥秀’라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고 하니(麥秀之詩作者說), 이것은 기자 전승이 문학적 윤색미가 농후하게 되는 과정으로도 본다.50) 그런데 ‘麥秀之詩’는 󰡔尙書大傳󰡕에서 微子의 작이라고 하는 것을,51) 󰡔史記󰡕에서는 司馬遷이 의도적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자의 작이라고 하여,52) 기자 전설의 허구성을 확대시켜 버렸다.

그리고 󰡔尙書大傳󰡕과 󰡔史記󰡕, 「宋微子世家」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가니 武王이 그를 조선에 봉했고, 이어서 기자가 武王에게 내조한 후, 洪範에 대해 문답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武王이 먼저 기자를 방문하자, 기자가 洪範을 설하였고, 그 후에 武王은 그를 조선에 봉하였으며, 이후 기자가 내조하여 ‘麥秀之詩’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중요한 변화 양상은, 후자에서 武王이 먼저 기자를 방문했다는 점이다. 후자에서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洪範 등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武王이 기자를 방문하는 장면으로 윤색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전자보다 후자에서 기자의 상대적 위치가 높아진 듯한 인상을 받는다.

48) 鄒衡, 「夏商周考古論文集」, 󰡔夏商周考古學論文集󰡕, 文物出版社, 1980, 320면.
49) 박대재, 앞의 논문, 132~136면.
50) 丁仲煥, 앞의 논문, 11면.
51) 󰡔尙書大傳󰡕 卷5, 「略說」, ‘微子’에 대한 注, “麥秀之歌, 當在行遯時作.”
52) 전해종, 앞의 논문, 5면.

그런데 󰡔史記󰡕에서는 「宋微子世家」 외에 「本紀」와 「表」․「書」등에도 기자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유독 「宋微子世家」에서만 箕子東來說을 담고 있다.53) 만약 기자가 조선과 관련된 인물이라면, 기자동래에 관한 기록은 「宋微子世家」보다도 오히려 「朝鮮列傳」에 나오거나 「箕子列傳」을 따로 두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宋微子世家」는 司馬遷의 기술이 아니라, 劉欽이 고의로 竄亂한 것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54) 따라서 「宋微子世家」의 箕子朝鮮說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다음으로 󰡔易林󰡕은 다소의 논란이 있으나, 前漢 昭帝代(87~74년) 焦延壽가 찬했다고 한다.55) 그런데 明代 鄭曉가, 󰡔易林󰡕은 焦延壽가 찬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56) 이어서 淸代 朱彝奠과 顧炎武(1613~1682년)는, 後漢代 이후의 사람이 焦延壽에게 가탁한 것이라고 하였다.57) 그리고 淸代 黃汝成은, 구체적으로 後漢 사람 崔篆이 󰡔周易林󰡕을 지었다고 하였는데,58) 이 견해는 근대의 胡適(1891~1962년)이 수용한 바 있다.59) 이외에도 何焯(1666~1722년)은, 後漢의 許峻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60) 焦延壽說, 崔篆說, 許峻說 모두 나름대로 논리가 있지만, 󰡔易林󰡕의 ‘기자조선’ 관련 내용은 󰡔尙書大傳󰡕類의 원시성을 보이면서, 󰡔漢書󰡕, 「地理地」 같은 정교한 논리 체계는 없다. 그러므로 󰡔易林󰡕은 아마도 前漢代에 편찬되었다고 볼 수 있다. 󰡔易林󰡕의 저작자를 최소한 焦延壽라 할지라도, 그 시대는 이미 漢四郡 설치 이후에 해당하여, 그렇다면 󰡔易林󰡕은 󰡔尙書大傳󰡕보다 늦은 시기에 편찬된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潛夫論󰡕은 後漢代 王符(80?~167?년)가 당시의 혼란한 현실정치를 비판하면서 저술한 것이다. 여기서 王符는 기자가 조선으로 봉해진 것을, 微子가 宋나라에 봉해진 것과 같은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箕子東來說은 󰡔易林󰡕과 後漢代 은둔지사로 평가받는 王符의 저작에까지 등장하고 있어서, 前漢代 중반부터 시작된 기자조선관이 최소한 後漢代에는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의식은 곧바로 後漢~ 魏․晉․南北朝時代를 거치면서 확대․재생산되었으며, 隋․唐代에는 정책적 명분으로까지 그 차원이 상승하게 된다. 이하에서는 이에 대해 논의를 모아 보도록 하겠다.

53) 서영수, 「󰡔史記󰡕古朝鮮 史料의 構成 분석과 新 解釋(1)」, 󰡔단군학연구󰡕 18, 단군학회, 2008, 64~65면.
54) 梁啓超, 「要籍解題及其讀法」, 󰡔飲冰室專集󰡕 5, 臺灣: 中華書局, 1936, 29면.
55) 魏徵․長孫無忌, 󰡔 隋書󰡕 卷34, 「經籍志」, “易林十六卷, 焦贛撰.”
56) 鄭曉, 󰡔古言󰡕, “易林十六卷世傳出焦延壽, 雖隋唐藝文志亦然. 今考漢書儒林傳、藝文志, 及荀氏漢紀, 皆不言焦氏著易林. 惟東漢書云, 許曼著易林, 至今行於世又云, 崔篆著周易林六十四篇, 用决吉凶多占驗. 隋唐藝文志在易林新林數家, 又不言有許氏易林. 沙隨程氏云, 延壽傳易於孟喜, 行事見儒林傳中, 今按傳言延壽獨得隱士, 說托之孟氏, 不與田丁輩同, 乃在京房列傳中儒林傳, 京房未嘗言延壽行事也. 近世彭安成叙易林. 深惜焦氏學不行無傳亦以易林, 歸焦氏矣. 大抵志隋唐藝文者, 皆謂焦氏易林, 後人因之其來已久. 余按漢書漢記, 疑今之易林未必出于焦氏.”
57) 朱彝奠, 󰡔經義考󰡕 卷6, 「易」, “易林疑是東漢以後人撰, 而托之焦延壽者. 延壽在昭宣之世, 其時左氏未立學官. 今易林引左氏語甚多, 又往往用漢書中事. 如曰, ‘彭離濟東, 遷之上庸’, 事在武帝元鼎元年曰, ‘長城旣立, 四夷宾服, 交和結好, 昭君是福’.”; 顧炎武, 󰡔日知錄󰡕 卷18, 「易林」, “事在元帝竟寧元年曰, ‘火入井口, 陽芒生角, 犯曆天門, 窺見太微, 登上玉床’, 似用李尋傳語曰, ‘新作初陵, 逾陷難登’, 似用成帝起昌陵事, 又曰, ‘劉季
發怒, 命滅子嬰’, 又曰, ‘大蛇當路, 使季畏懼’, 則又非漢人所宜言也.”
58) 黃汝成, 󰡔日知錄集釋󰡕, “後漢崔駰傳載, 其祖父篆著周易林六十四篇, 用決吉凶, 多占驗. 晉李石續博物志曰, 篆著易林, 或曰卦林, 或曰象林.”
59) 胡適, 「易林斷歸崔篆的判決書 -考證學方法論擧例-」, 󰡔 歷史語言硏究所集刊󰡕 20上, 江蘇古籍出版社, 1948, 47면.
60) 何焯, 󰡔 義門讀書記󰡕 第3卷, “著周易林六十四篇, 卽今所傳之易林否更考之, 又許峻亦著易林, 見方術傳.”


2. 箕子朝鮮說의 정론화와 그 역사적 맥락

秦․前漢代를 거치면서 箕子朝鮮說이 등장한 이후, 後漢代부터는 기자를 본격적으로 準王의 조선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한 기사는 後漢代 班固(32~92년)의 󰡔漢書󰡕, 北代 魚豢(220~265년)의 󰡔魏略󰡕, 西晋代 陳壽(233~297년)의 󰡔三國志󰡕, 그리고 劉宋代 范曄(398~445년)의 󰡔後漢書󰡕에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정론화 과정은 隋․唐代까지 이어져 고구려를 침략하는 시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고구려 침입 시기를 전하는 唐代 魏徵(580∼643년)과 長孫無忌(594~659년)의 󰡔隋書󰡕, 北宋代 樂史(930~1007년)의 󰡔太平寰宇記󰡕에는 기자와 관련하여 또 한 번 새로운 내용이 첨가된다. 특히 󰡔太平寰宇記󰡕에는 고조선이 灤河 유역에 있었던 것처럼 기술되어 논란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後漢代 이후부터 전개되었던 기자조선 정론화 과정은 어떠했고, 또 隋․唐代에 중국인들이 箕子朝鮮說을 활용했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을 파악하려고 한다. 아래 <표 4>는 前漢代 이후 기자조선 정론화 과정과 隋․唐代 고구려 침략 시기에 이용되었던 기사들이다. 이들 기사들을 통해서, 그 시대적 배경을 분석하면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명하고자 한다.


<표 4> 後漢~北宋代의 ‘箕子朝鮮’ 관련 기사




󰡔漢書󰡕
<地理志>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多, 至六十餘條. 可貴哉, 仁賢之化也. 然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 箕子東來說. 箕子敎化說
/ 班固(後漢)

󰡔魏略󰡕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韓條>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 朝鮮侯= 箕子之後孫說
/ 魚豢(北魏)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濊條>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準僭號稱王.
/ 箕子東來說. 犯禁八條制定. 說/朝鮮侯=箕子之後孫說
/ 陳壽(西晋)

󰡔後漢書󰡕
「東夷列傳」<濊條>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飮食以籩豆.

「東夷列傳」<倭條>
論曰,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始其國俗未有聞也, 及施八條之約, 使人知禁, 遂乃邑無淫盜, 門不夜扃, 回頑薄之俗, 就寬略之法, 行數百千年, 故東夷通以柔謹爲風, 異乎三方者也. 苟政之所暢, 則道義存焉. 仲尼懷
憤, 以爲九夷可居. 或疑其陋.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亦徒有以焉爾. 其後遂通接商賈, 漸交上國. 而燕人衛滿擾雜其風, 擾, 亂也. 於是從而澆異焉. 老子曰, 法令滋章, 盜賊多有. 若箕子之省簡文條而用信義, 其得聖賢作法之原矣.

/ 箕子東來說. 箕子敎化說. 犯禁八條制定說
/ 范曄(劉宋)

󰡔隋書󰡕
 「裵矩傳」
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 魏徵․. 長孫無忌(唐)

󰡔太平寰宇記󰡕
「河北道ㆍ平州」 <盧龍縣>
朝鮮城, 卽殷箕子受封之地.
/ 樂史(北宋)


󰡔漢書󰡕, 「地理志」에서는 전대의 ‘箕子東來說’ 외에, 기자가 조선으로 간 이후의 행적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를 ‘箕子敎化說’과 ‘犯禁八條’ 조목으로 구체화할 수 있겠다. 이 조문에서 기자가 조선으로 간 후, 그는 조선 백성들에게 예의로서 교화시키고, 농사와 누에 기르기․직조 등의 산업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는 ‘犯禁八條’가 있어서 사람들이 유순했는데, 樂浪郡 통치기에는 민심이 흉폭해져서 법이 60여 조에 이르렀다고 한다.
앞서 司馬遷이 제시한 箕子像은 폭군에게 간언하고 성군에게 진언하는 현자였을 뿐, 조선을 교화한 제후의 상은 아니었다.61)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들은 後漢代에 이르러 새로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기자를 ‘조선을 교화시킨 성인’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업이 그 당시에 ‘왜 필요했겠는가’가 의문이다. 그런데 󰡔漢書󰡕, 「地理志」에는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기서는 犯禁八條를 조선의 관습법처럼 묘사했는데, 그 내용 중에 “樂浪朝鮮民犯禁八條”라고 했던 점에서, 犯禁八條는 조선 유민으로서의 樂浪郡民들의 법체계였음을 알 수 있다. “樂浪朝鮮民”이란 말을 “樂浪郡의 조선인”이란 뜻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소박한 관습법적인 고조선의 법체계에 대한 漢人들의 인식은 樂浪郡 성립 이후에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箕子敎化說’은 ‘犯禁八條' 조항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최소한 樂浪郡이 설치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시기인 前漢 말경부터 ‘箕子敎化說’이 생겨났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어서 󰡔魏略󰡕에서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는 틈에 燕나라가 稱王하는 것을 보고, 그 자신도 稱王하려고 했던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朝鮮侯를 기자와 연결시키고 있다. 前漢代 ‘箕子東來說’ 및 ‘箕子敎化說’ 등의 ‘箕子朝鮮說’ 입론화 과정과 또 前漢 末의 ‘犯禁八條'가 ‘60여 조’가 되면서 기자의 순풍이 약화됐다는 논리 사이의 연결 고리는 바로 이와 같은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이다. 즉 朝鮮侯는 현인 기자의 후손이었는데, 衛滿에 의해 기자의 후손이 무너지고, 또 樂浪郡이 들어서면서 기자의 순풍이 사라졌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朝鮮侯는 戰國時代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을 통치했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戰國時代 고조선의 왕이 기자의 후손이었다면, 고조선 당대의 문헌인 󰡔史記󰡕, 「朝鮮列傳」에서 반드시 명기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은 魚豢이 활동했던 시기의 시대 의식이 발현된 전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魚豢은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을 명기했을까? 그런데 중국에서 출토된 樂浪 유민인 王氏의 묘지명에서 기자를 자기 집안 시조로 기술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62) 이러한 현상은 기자를 선조로 하는 주민 집단이 樂浪郡 내에서 형성되었고, 이들이 지배적 지위를 꾸미는 과정에서 기자 전승이 윤색되었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63) 이러한 영향 때문에 기자를 朝鮮侯와 연계시키는 논리가 생겼는지, 아니면 그 전부터 있던 기자조선의 논리를 王氏가 끌어 들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선후가 어찌되었든,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의 근거를 漢化된 토착 세력, 혹은 유력 호족과 연결시킨 주장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史記󰡕에서는 「宋微子世家」에서만 箕子東來說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司馬遷 자신조차도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을 크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64) 즉 기자조선에 대한 강한 필요성은 司馬遷 사후에나 가능했지 않았나한다. 그것은 군현내의 漢化된 토착 세력에 의하여 자기 정통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왕이 기자의 후손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65)

즉 樂浪郡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樂浪郡=朝鮮=箕子의 나라’, ‘樂浪郡과 漢나라는 강한 연대 속에 있다.’는 것을 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것은 ‘樂浪郡, 즉 조선은 원래 기자의 땅으로, 이 땅은 그에 의하여 처음으로 문명교화가 일어났으며, 기자조선은 周나라의 봉건국가였다.’는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논리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하는 과정에서 任那日本府設을 주장한 배경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져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61) 이성규, 앞의 논문, 136면.
62) 노태돈, 「箕子東來說의 사실성 여부」,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풀빛, 1998, 298면.
63) 尹龍九, 「3세기 이전 中國史書에 나타난 韓國古代史像」, 󰡔한국고대사연구󰡕 14, 한국고대사학회, 1998, 125~126면.
64) 오강원, 앞의 2006 논문, 35면.
65) 尹龍九, 앞의 논문, 128~129면.


실제로 위만조선과 漢나라의 전쟁은, 초기부터 漢나라에 불리했다는 것은 󰡔史記󰡕, 「朝鮮列傳」에 잘 나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漢나라는 漢四郡 설치 이후 위만조선의 지배층을 중국 내지로 이봉하여, 고조선의 최상층부 세력들을 해체시켜 버렸던 것이다.66) 그리고 漢나라의 樂浪郡 지배가 원주민 사회가 보유했던 체제가 연장된 國邑體制였던 점67)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토착민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樂浪郡 통치의 일정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樂浪郡 지배도 처음에는 遼東郡에 의존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漢나라가 樂浪郡의 지배질서를 수립하는 데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68) 樂浪郡 통치에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이 사상적․역사적인 방법들이었을 것이고,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은 그러한 배
경하에 고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기자 전승은 중국 측의 입장만이 강조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어떤 사상․제도․문물 등이 한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오는 강한 압력 이외에도, 그 체제 자체에서 그들을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실천 의지가 반드시 수반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소한 고구려시대부터는 기자에 대한 숭배 의식이 엿보인다.69) 그리고 앞서 살펴 본 樂浪유민 王氏의 묘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漢化된 토착 세력이 자기 기반의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기자와 관련한 일련의 전승을 취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물론 그러한 세력이 王氏로 못박을 수는 없겠지만, 위만조선이 멸망하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漢나라에 투항하거나, 침략국을 지지한 토착 세력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 세력은 고대로부터 자기 정체성을 기자와 연결시킴으로써, 기자조선이 한국 역사의 고유 영역으로 자리잡게 만든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5세기 후반~6세기 초에 이르는 北魏代의 王舒, 王禎, 王基, 元願平妻王氏, 安樂王 三子妻 韓氏 묘지에서는 모두 낙랑 遂城人을 칭하면서 기자조선의 전승을 동시에 전하고 있다.70) 이를 통해 보면, 樂浪郡 멸망 후 200여년이 지난 상태였지만, 당시 北魏 귀족이었던 이들 집안은 기자조선에서 樂浪郡으로 이어지는 나름의 전통을 간직하는 등, 강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71)

66) 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 73~74면.
67) 권오중, 󰡔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46~47면.
68) 서영수, 「衛滿朝鮮의 形成過程과 國家的 性格」, 󰡔韓國古代史硏究󰡕 9, 신서원, 1996, 114면.
69) 劉呴, 󰡔舊唐書󰡕 卷199上, 「列傳」 第149上, <東夷>, ‘高麗.’, “其俗多淫祀, 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70) 임기환, 「낙랑 유민 관련 금석문」, 󰡔(譯註)韓國古代 金石文󰡕 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583~592면; 윤용구, 「樂浪遺民의 墓誌 二例」, 󰡔仁荷史學󰡕 3, 인하대 사학과, 1995, 5~9면.
71) 오영찬, 앞의 책, 161~162면.

다음으로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濊條>와 󰡔後漢書󰡕, 「東夷列傳」<倭條>에서도 󰡔漢書󰡕, 「地理志」에서 말하는 ‘犯禁八條’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전자는 󰡔漢書󰡕와 󰡔魏略󰡕의 내용을 섞어 압축한 느낌이 드는데, 특이하게 “作八條之敎以敎之”라고 하였다. 후자에서도 “始其國俗未有聞也, 及施八條之約”이라 하여, 마치 기자가 ‘犯禁八條’를 제정했던 것처럼 묘사해 놓았다. 그런데 앞의 󰡔漢書󰡕 단계에서는 기자가 도착했던 조선에 이미 ‘犯禁八條’가 존재했던 것처럼 서술하였었다. 즉 󰡔漢書󰡕, 「地理志」에서는 조선인들과 낙랑군민들이 ‘犯禁八條’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 기자가 이를 제정했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 󰡔三國志󰡕와 󰡔後漢書󰡕에서는 이것이 ‘八條之敎’로 변하였다.
󰡔漢書󰡕는 고조선 고유의 법체계라는 관점에서 다루었던 반면에, 󰡔三國志󰡕와 󰡔後漢書󰡕에서는 기자가 조선민의 교화를 위한 방책으로서 제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후자는 󰡔漢書󰡕의 “敎其民以禮義”와 “犯禁八條”의 두 개 전승을 결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고조선 고유의 관습법으로 볼 수 있는 ‘犯禁八條’를 기자가 제정한 것(‘犯禁八條制定說’)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기자 전승이 前漢代에서 後漢代로 경과하면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漢書󰡕․󰡔魏略󰡕․󰡔三國志󰡕․󰡔後漢書󰡕의 찬자는, 고조선이 곧 기자조선이라는 前漢 武帝代 역사화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들 󰡔漢書󰡕․󰡔魏略󰡕․󰡔三國志󰡕․ 󰡔後漢書󰡕의 찬자가 箕子朝鮮說의 확대를 의도적으로 고안하여 기재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서 편찬 시대를 거치는 각 시대의 공론화된 역사 의식이 이들 역사서에 반영되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箕子朝鮮說의 역사화 과정은 隋․唐代를 지나면서 또 한번 변화를 겪는다. 󰡔隋書󰡕, 「裵矩傳」에서는 고구려를 孤竹國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또 이를 기자조선으로 기술하였고(‘箕子朝鮮⇒高句麗說’), 北宋代의 󰡔太平寰宇記󰡕, 「河北道 平州」 <盧龍縣>條에서 하북성 盧龍縣의 朝鮮城을 기자가 수봉된 조선으로 보았다. 그런데 고구려는 고대의 孤竹國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라는 것과, 또 ‘孤竹國을 고조선’으로 등치시키면서 발생한 역사적 오류이다.

그리고 하북성에서 殷․周 교체기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문헌과 고고학상의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朝鮮城이 등장하는 󰡔太平寰宇記󰡕의 기사는 곧, 樂浪郡 이치에 따른 혼동에서 발생한 것이지, 결코 역사적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본다.72) 春秋時代 초기에 齊나라가 山戎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그 이웃에 있던 孤竹이 함께 공략당하는데, 이러한 사정은 󰡔管子󰡕에 잘 나와 있다.73)
즉 孤竹은 山戎 등과 더불어 灤河 하류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여서, 󰡔管子󰡕에서부터 등장하는 ‘조선’이 요령성 지역으로 비정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와 같은 오류가 발생하게 된 계기는 隋․唐나라가 이를 高句麗 침략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으로 본 견해74)가 가장 설득력이 높다.

72) 河北省 盧龍縣의 孤竹國을 古朝鮮의 樂浪郡과 연결시키는 논리는, 기원후 313년 이후 평양의 樂浪郡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李健才, 「關于古朝鮮和樂浪郡在遼東等地的記載和問題, 󰡔博物館硏究󰡕 3, 1997참조).
73) 󰡔管子󰡕 卷第8, 「小匡」 第20, “中救晉公, 禽狄王, 敗胡貉, 破屠何而騎寇始服, 北伐山戎, 制令支, 斬孤竹.”;
󰡔管子󰡕 卷第8, 「小匡」 第20, “桓公曰, 余乘車之會三, 兵車之會六, 九合諸侯, 一匡天下, 北至於孤竹山戎穢貉.”;
󰡔管子󰡕 卷第16, 「封禪」 第50, “桓公曰, 寡人北伐山戎孤竹.”;
󰡔管子󰡕 卷第9, 「覇形」 第22, “北伐孤竹, 還存燕公.”
74) 조원진, 앞의 논문, 399면.


Ⅳ. 맺음말

이상으로 春秋時代에 편찬되었던 󰡔尙書󰡕에서부터 시작하여, 北宋代의 󰡔太平寰宇記󰡕까지 기자 전승과 관련하여, 그것의 원형은 무엇이고, 그 원형이 각 시대를 통과하면서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또 그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箕子朝鮮說이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에서 기자 전승은 ‘箕子狂人說’, ‘囚箕子說’, ‘釋箕子說’, ‘箕子來朝說’, ‘洪範敎授說’, ‘箕子之明夷說’, ‘箕子賢人說’, ‘箕子豫見說’ 등이 있었다.
여기서 기자 전승의 원형은 기자와 紂王의 대립으로, 이로부터 기자 전승이 파생되어 나왔다. 그것은 ‘箕子 -武王對立說’ → ‘囚箕子說’ → ‘釋箕子說’ → ‘箕子來朝說’ → ‘洪範敎授說’ 의 순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기자조선을 최초로 언급한 문헌인 󰡔尙書大傳󰡕은 前漢 武帝代 伏生의 문도가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편찬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尙書大傳󰡕의 찬자가 󰡔周易󰡕 明夷 괘사의 “箕子之明夷”를 원용하여, ‘明夷’를 조선으로 해석하여 ‘箕子東來說’로 발전시킨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그다음 󰡔史記󰡕, 「宋微子世家」에서는 ‘麥秀之詩作者說’이 새로 등장하고, 後漢代부터는 기자를 본격적으로 準王의 조선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漢書󰡕에서는 ‘箕子敎化說’과 ‘犯禁八條' 항목을 추가하여, 기자를 ‘조선을 교화시킨 성인’으로 끌어올렸다. 󰡔魏略󰡕에서는 또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이 등장하였고, 󰡔三國志󰡕와 󰡔後漢書󰡕에서는 기자가 ‘犯禁八條’를 제정했던 것처럼 묘사했으며, 唐代의 󰡔隋書󰡕와 北宋代의 󰡔太平寰宇記󰡕에서는 고구려를 孤竹國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하북성 盧龍縣의 朝鮮城을 기자가 수봉된 지역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기자 전승이 前漢代에서 後漢代로 경과하면서 조작되었고, 隋․唐代에까지 이어져 고구려 침략의 명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도표 1>은 이상의 논의를 최종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喀左 일대의 청동예기는 西周 燕나라와 하북성 지역 永定河 이북의 북방 세력, 그리고 요령성 지역의 魏營子類型 집단 사이에 있었던 대외 교류적 측면에서 매납된 유물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높다. 따라서 이들 청동예기로 요령성 지역에서 기자조선을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경 일대 ‘(己+其)’관련 청동예기를 근거로 최소한 기자의 존재성과 (己+其)族 집단의 사민 가능성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집단이 이동해 갔을 하북성 지역의 燕나라 인근을 기자조선 지역이라 한다면, 최소한 기자 집단이 이동해 가기 이전에 하북성 지역에는 이후에 ‘조선’으로 불릴 만한 세력이나 최소한 조선과 관련된 지역 명칭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기자조선을 제외하고 殷․西周代에 조선은 문헌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소한 하북성 지역으로 기자 집단이 이동해간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해당 지역을 기자조선으로 상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殷․周 교체기에 기자조선과 관련된 기자 전승은 후대에 왜곡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위만조선이 멸망하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漢나라에 투항하거나, 침략국을 지지한 토착 세력 중에서 기자를 자신의 선조와 연결시키는 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기자조선관을 더욱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한 내적 요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자조선관은 고래로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근거 없이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에라도 우리 스스로가 타자를 우리로 인식했던 지난날의 역사적 과오를 냉철히 성찰하는 계기를 가져야 하겠다.

(己+其)


<도표 1> 고대 중국 문헌을 통해 본 箕子 전승의 흐름





투고일: 2012.7.7
심사일: 2012.9.4
게재확정일: 2012.9.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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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pansion process of the Kija's legend and their historical context

Oh, Hyun-su

Among the ancient documents which record 'Joseon', the Kija Joseon article appears as many as 14 times during the Yin-Zhou transition. However it does not appear even once during the following Western Zhou. Therefore there is a need to verify whether the passages linking Kija and Joseon reflect historical fact. Firstly, the Kija legend before the appearance of the Kija Joseon theory was analyzed, the original form of the Kija legend was that of antagonism between Kija and King Zhou. This was expanded in the following sequence: 'Kija being imprisoned by King Zhou' → 'King wu freeing Kija' → 'Kija visiting King wu' → 'Kija explaining the Hongfan to King wu'. From this, a legend linking Kija and Joseon was newly added.
The first document to link Kija with Joseon was the Sangseodaejeon, which was written during the period of Emperor Wu of the Former Han Dynasty by a disciple of Fu Sheng, who recorded his master's teachings. Afterwards, new elements were added to the legend of Kija in the following sequence: the Shiji records that 'Kija composed a poem called 'maixiu'' → the Hanshu records that 'Kija civilized the people of Joseon' → the Weilue records that 'Joseonhu was a descendant of Kija' → the Sanguozhi and Houhanshu records that 'Kija enacted the eight forbidden behaviors' → the Suishu and Taipinghuanyuji records that 'the ancestors of Goguryeo was Kija Joseon'.
The historical background to the expansion of the Kija legend was ideological and historical measures taken to grant moral justification to Emperor Wu of the Former Han Dynasty's invasion of Joseon and the need for efficient rule of Lo-lang Commandery and the Sui-Tang Dynasty's invasion of the Goguryeo Dynasty. Therefore, the Kija Joseon theory was a result of the historical needs of the time and does not reflect historical fact.

Key Words : Kija being imprisoned by King Zhou(囚箕子說), King wu freeing Kija(釋箕子說), Kija visiting King wu(箕子來朝說), Kija explaining the Hongfan to King wu(洪範敎授說), Kija composed a p oem called 'maixiu'(麥秀之詩作者說), Kija civilized the people of Joseon(箕子敎化說), Joseonhu was a descendant of Kija(朝鮮侯=箕子之後孫說), Kija enacted the eight forbidden behaviors (犯禁八條制定說), the ancestors of Goguryeo was Kija Joseon (箕子朝鮮⇒ 高句麗說)

우울한 중국인, 량샤오성

우울한 중국인


량샤오성 지음 | 고상희 옮김 | 가치창조 | 2012년 12월 15일 출간

책소개

중국 사회 우울함의 근원은 무엇인가!

집단적 우울증에 걸린 중국 지식인의 더 나은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뜨거운 자기비판서 『우울한 중국인』. 중국 사회 우울함의 근원을 파헤친 책으로, 상처받은 중국인의 영혼을 뼈아픈 통찰로 끌어안았다. 중국인은 왜 평범한 삶을 죽기보다 두려워하는지, 남을 믿지 못하는 중국인은 대체 무엇을 믿는지 등 중국인의 특성을 살피고, 중국인이 스스로 강해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저자 량샤오성은 이 책에서 중국이 ‘거대 경제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하위계층의 집단적 우울 증세에 대해서 진단한다. 그는 중국인의 우울증을 현재의 관점이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송나라에서 이어지는 집단적인 노예근성과 유가 사상의 폐해 등을 예로 들며 신중국 수립 후 문화대혁명 등 크고 작은 여러 사건 등을 겪으며 중국인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적 불신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저자소개

저자 : 량샤오성

저자 량샤오성은 작가이자 중국 베이징 어언(語言)대학교 교수이다. 본적은 산둥(山東)성 룽청(榮城)이고 1949년 하얼빈(哈?濱)에서 태어났으며, 1977년에 푸단(復旦)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했다. 량샤오성은 1997년 ‘중국사회 계층분석’에서 중국의 경제적 계층 분화 현상을 해부하면서 개혁 개방 이후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을 가져온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그늘을 조명한 바 있다. 대표작으로 『오늘 밤 폭설이 내린다』, 『어느 홍위병의 자백』, 『연륜』, 『떠 있는 도시』, 『중국사회 각 계층분석』, 『이곳은 신비로운 땅이다』 등이 있으며, 소설, 에세이, 잡문 등 1억 6,000만 자(字) 가량을 썼다. 지금까지도 펜으로 글쓰기를 고집한다.

역자 : 고상희

역자 고상희는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천진 남개대학 교환학생과 중국 북경 북경사범대학 어학연수를 마친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현재 학원에서 강의하면서 잡지 번역과 도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별별시장 달달한 여행』『중국 여행이야기』『중국 유적지 소개』 등이 있다.

목차

제1장 중국인의 우울한 표정
1. 두 가지 힘에 이끌려 성장한 중국인
2. 천년을 이어온 병소(病巢): 산을 옮기는 것보다 노예근성을 뿌리 뽑기가 더 어렵다
3. 수치를 모르는 현대의 공민
4. 분노는 ‘상부구조를 재정비’할 기회다
5. 완곡함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병리현상이다
6. 문화에 대한 반성만으로는 대중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다
7. 땅을 잃은 농민은 진리를 찾았을까?
8. 중국 청년계층 분석
9. 중국의 중산층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제2장 비정상적인 관계
1. ‘조화’라는 정책목표는 실패했는가?
2. 질 낮은 ‘속성 귀족’
3. 어른과 아이의 비정상적인 관계
4. 더러운 화장실만큼이나 혐오스러운 엘리트 집단의 사교 모임
5. “생전에는 차관급 인물이었지.”
6. 우리는 왜 ‘평범한 삶’을 두려워하는가?
7. 능력에 비해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벼락부자를 만났을 때
8. 허리를 곧게 펴기란 쉽지 않다
9. 중국의 기록부
10. 문화의 업보
11. 애매한 밸런타인데이
12. 국가 간의 경쟁은 곧 두 나라 여자끼리의 경쟁
13. 신은 늘 우리를 시험한다
14. ‘인간관계학’에 관한 7문 7답

제3장 평범함이라는 죄
1. 사랑은 어째서 더 이상 우리를 감동시킬 수 없을까?
2. 광고에서 나타나는 원숭이와 스타의 매력
3. 상업의 본질은 외로움
4. 자본이라는 장미는 가시를 품고 있다
5. 빈부의 기원과 결과
6. 존귀와 비천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진실
7. 중국에서는 왜 경외심이 통하지 않을까?
8. 정협위원의 ‘중국 특색’
9. 우리는 왜 이다지도 권태로운가?

제4장 골목과 시골에서 만난 ‘작은 중국’
1. 비좁은 골목길
2. 배우와 관객
3. 어느 지방세 징수원의 고백
4. 위순이 아주머니의 주식
5. 낙타에 관한 단상
6. 형님

제5장 세기의 해결책을 찾아서
1. 그리스 신화는 단지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2. 혁명을 안 하면 쓰나? :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을 구할 것인가
3. 유가사상의 우등생이 되기를 거부한다
4. 입체적인 중국인이 되자
5. ‘공평한 세상’은 모든 인류의 정신적 생명
6. 권력과 미학
7. 욕망의 무리와 싸워서 비긴 한평생

후기 향후 30년, 나는 제3의 눈으로 중국을 바라볼 것이다
역자후기

책 속으로

“얘야, 우리 집안이 펴는 길은 너밖에 없다.”
도시 서민층 출신의 젊은이들 중에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은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지만 이런 말이 십자가와 다를 게 무엇인가? 이 말을 해석하면 이렇다. 넌 반드시 명문대에 합격해야 한다. 명문대를 나와야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성공할 기회가 주어진다. 성공해야 엄마아빠가 네 덕에 사람들 앞에서 기를 펼 수 있고, 행복하며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다. 너는 이렇게 해야 효도하는 것이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아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본문 「중국 청년 계층 분석」중에서

어느 나라를 둘러봐도 개똥이 쓰레기인지 아닌지 믿을 만한 결론을 내놓은 환경부처는 없을 것이다. 좋은 취지의 규정이나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생각지도 않게 인간관계를 오히려 조화롭지 않게 몰아가는 경우가 있다.
결국 사람이 문제다. “규정이나 제도는 죽었지만 사람은 살아 움직인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말도 중국처럼 인구가 13억이 넘는 나라에서는 인구가 적은 나라와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 본문 「‘조화’라는 정책목표는 실패했는가?」중에서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한마디로 줄곧 ‘어떻게 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다’는 여기에서 동사로 쓰였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붙어 신경전을 펼칠 때, “당신이 (이 몸을) 어쩔 건데?” 하는 사람이 꼭 있게 마련이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첫 번째에 비하면 동력이 떨어진다. 위의 상황을 다시 빌리자면, 상대가 예리한 공격을 해오는데도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아예 뒤로 물러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는데요?”
이럴 때 세 번째 부류가 등장해서 두 번째 부류를 종용한다.
“붙어요! 뭐가 겁나서 그래요? 약한 척하지 말아요.”
- 본문 「생전에는 차관급 인물이었지」중에서

마음의 3할만 욕망에 내줘라, 나머지 7할은 이성으로 채워라.
- 본문 「욕망의 무리와 싸워서 비긴 한 평생」중에서

독재적이거나 전제적인 정치체제와 범민주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의 현실 사이에서 민주적인 관리방식을 채택하기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인류는 이미 이성의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에 이성을 바탕으로 각종 민주제도의 그럭저럭 괜찮은 점들을 포용할 수 있다. ‘백성으로 하여금 도리를 따라 행하게 할 수는 있어도 도리의 원리를 알게 하기는 어렵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논어』의 한 구절 ? 역주)’, 공자가 봉건제왕들을 대신해 제시한 이 통치전략은 가장 악독한 전략이자 오늘날의 중국인이 가장 경멸하는 구절이다.
- 본문 「‘공평한 세상’은 모든 인류의 정신적 생명」중에서 닫기

출판사 서평

“지금, 15억 중국인이 위험하다!”
세계 최강의 G2시대를 개막시키고도
중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책!

집단적 우울증에 걸린 중국 지식인의 더 나은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뜨거운 자기비판서

전 세계 17개 출판사가 무삭제본 판권 쟁탈전을 벌인 화제의 책! 자국민들은 열광했으나 중국본토 베스트셀러 순위집계에서는 빠진 책! 상처받은 중국인의 영혼을 뼈아픈 통찰로 끌어안은 책!

더 이상 인민을 위한 중국은 없다!
오직 인민 스스로 자각하고, 인민 스스로 자기 삶을 결정하며,인민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자아를 잃은 중국인의 우울한 얼굴, 그것이 바로 중국의 실체다
‘분노한 청년’이라는 화두를 던졌던 가장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대작가 량샤오성이 중국 사회 소외계층의 우울함의 근원을 거리낌 없이 파헤치며 그 출구를 모색한다!

중국인은 왜 평범한 삶을 죽기보다 두려워하는가?
남을 믿지 못하는 중국인은 대체 무엇을 믿는가?
중국에서는 왜 경외심이 통하지 않을까?

중국 특색, 중국에만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저자 량샤오성은 이 책에서 중국이 이른바 ‘거대 경제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하위계층의 집단적 우울 증세에 대해서 진단한다.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든 젊은 층에게서 이런 증세가 두드러진다. 평범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자살을 택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이 요즘 중국의 젊은이다. 비범한 삶을 산다는 것이 결국 자신이 가진 재산과 몸값으로 보장되는 사회 구조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개혁 개방이 불러온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상업화 시대의 조류 속에서 수많은 중국 젊은이들이 갈팡질팡하고 당황하고 낙심하고 분노한다. 저자는 중국인의 우울증을 현재의 관점이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송나라에서 이어지는 집단적인 노예근성과 유가 사상의 폐해 등을 예로 들며 신중국 수립 후 문화대혁명 등 크고 작은 여러 사건 등을 겪으며 중국인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적 불신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해외 언론 매체 논평
2012년, ‘우울한 중국인’이 조용히 중국의 또 다른 키워드로 떠올랐다…….
- 홍콩 《아주주간》亞洲週刊

우울증을 해소해야만 국민의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다.
- 홍콩 중국통신사(中國通迅社)

‘펀칭(憤靑, 분노한 청년)’의 원조인 량샤오성이 하루아침에 인기를 얻은 것은
바로 이 특별한 제안 덕분이다.
- 타이완 《연합보》聯合報

국민의 보편적인 정신상태를 ‘우울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
작가에게 ‘뭔가 다른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일본 다이아몬드 온라인판

이렇게 ‘부정적인’ 책이 세계강국에서 빠르게 팔려나갔다는 것은 가히 불가사의하다.
- 미국 《월드저널》World Journal

당나라 시기의 중국을 비판한 글은 세계는 물론이고 중국의 사료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당나라의 시는 용맹한 정신과 낭만적인 기질, 위엄 있는 품격을 자랑한다. 그러나 송나라의 사(詞)는 퇴폐적이고 지루하며 자기연민에 빠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한족은 시인기질을 잃고 말았다. 집단적인 노예근성이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전제정치와 이민족의 통치를 거치면서 중국인에게는 뿌리 깊은 노예근성이 생겨났다. 노예근성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산을 옮기기보다 노예근성을 뿌리 뽑기가 더 어렵다. 루쉰은 이처럼 뿌리 깊은 노예근성에 슬픔과 분노를 느껴 답답함을 안고 『약藥』을 썼다. 이 같은 비판이 중국인의 영혼을 아프게 자극했다. 그러나 이런 통증에는 반드시 노예근성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뒤따라야 한다. 오늘날의 중국인은 량치차오와 루쉰 등의 눈에 비쳤던, 무지하고 냉담하며 무감각하기까지 했던 과거의 중국인이 아니다. 중국인의 국민성은 유례없는 변화를 겪었다.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시간적으로 현실과 가장 가까운 역사다. 중국인의 정신에 새겨져 있는 왜곡된 심리는 온갖 형태의 외부적 힘에 의해 되살아나곤 한다. 현대 중국인의 ‘우울증’을 해독하는 일은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 걸핏하면 파이를 키우자고 말하면서 파이를 인간적으로 공평하게 나누자는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않는 일부 중국인은 중국에 현재만 있고 미래는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천년만년…….
▶▷ 중국 네티즌은 판도라이면서 동시에 프로메테우스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이성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일부분은 이미 손에 쥐었다. 판도라는 변신에 능해서 단박에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변신한 모습을 찾을 때마다 그녀의 진짜 모습에 한 발씩 더 다가갈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모습으로 변신한 판도라 상자의 아래층은 이미 열렸다. 그 속에 감추어졌던 희망이 갈수록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걷어내고 있다.
▷▶ ‘땅을 잃은’ 농민이 정말로 혁명 덕분에 자기 소유의 ‘진리’를 찾아 평등해졌는가? 이들이야말로 중국의 혁명을 이루었고, 중국이 거둔 모든 찬란한 성과를 모두 가능케 한 주역인데 말이다.
▶▷ 배려와 동정, 평등과 경외심 같은 중산층의 보편적인 가치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단언컨대 지금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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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본이 나왔구나! 장사의 공항서점에서 예쁘장한 직원이 내게 추천한 책이었다. 직원이 단지 두 명이었는데 모두 내게 달라붙어 열심이었다. 손님이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우울한 중국인(鬱悶的中國人)]. 제목이 참 인상적이다. 국내에선 한창 중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장미빛 전망만을 늘어놓고 있던 차에 이 책은 마치 한국인 저자가 쓴 것처럼 우리 사회의 우울하고 답답한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뭔가 시의적절한 현실감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한마디로 베스트셀러감 제목이었다. 당시 중국 서점 내에서도 눈에 잘 띄는 곳에 공자 관련서적들과 더불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중국 사회가 집단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무척 현대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기에 재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량샤오성(梁曉聲)도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중국사회의 집단우울증만을 다룬 사회과학적 분석은 아니었다. 잡문집에 가까운 글이다. 그래서 한동안 내 책장에 그냥 처박혀 있었다.  
     
    우울증은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의 문제다. 중국의 지식인 량샤오성은 행복을 개인적 차원으로, 마음의 문제로 환원하려고 드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량사오성은 13억 중국인들이 우울해지고 있는 원인으로 개혁 개방 이후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과 자원의 불균등이 가져온 중국식 경제성장의 그림자와 상류층의 부정부패를 지적한다. 외적인 성장 아래에는 소외된 대중들의 우울증이 만연하고 있다. 특히 고등교육을 받고 도시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소시민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물질만능주의도 이런 우울증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의 사랑학 개론이 재밌다. 일단 사랑에 대한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사랑의 정수는 극히 보편적이고 평범하고 실질적인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연애소설이나 기사도문학에 등장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해'처럼 사실상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다. 사랑이 행위라는 점에서 세상의 사랑은 동등하다. 계급과 신분의 차이, 빈부의 차이, 외모와 조건을 따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저자는 사랑은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본성과 일치한다고 강조하면서, 그것은 구식이 아니라 매우 클래식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사랑'이 술어로 쓰인 모든 행위 가운데 '사랑을 구걸하는 것'이 가장 저열한 것이다. 남자라면 졸렬하고, 여자라면 천박하다. 가령 한 사람이 열 번을 윤회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아홉 번을 다시 태어나도 절대로 사랑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절실히 필요하다면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체면 따윈 내던지고 구걸할 수 있을 것 같다.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일 때는 음식과 옷을, 집도 절도 없이 거리를 떠돌게 된다면 묵을 곳과 돈을, 모욕을 당한다면 동정과 도움을 구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사랑만은 구걸하지 않겠다."(154-5쪽)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삶의 목적과 의미, 가치는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인배가 되지 않는 데 있다. 시민의식의 양성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사람의 무지와 무능의 상태는 그 자체가 형벌이다. 요즘 젊은 중국인들은 ‘평범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자살을 택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비범한 삶을 산다는 것이 결국 자신이 가진 재산과 몸값으로 보장되는 사회 구조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개혁 개방이 불러온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상업화 시대의 조류 속에서 수많은 중국 젊은이들이 갈팡질팡하고 당황하고 낙심하고 분노한다.
     
    "문명화된 사회란 모두가 성인이 되도록 이끄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명화된 사회는 모두가 최대한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이끄는 사회를 말한다. 또한 인간의  비천함으로 말미암은 현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이 고귀함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이익에 눈이 멀어 굽실거리거나 비열하지 않도록, 한마디로 비천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독려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고귀함에 대한 경외심을 지킨다면 우리는 부자연스럽거나 자유롭지 않게 살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영혼이 고귀함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 반대는 부자연스럽고 병적인 상태다. 실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의 최우선적인 전제는 기쁘게 사는 것이다."(289쪽)
     
    전체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독창적이다. 이는 인간관계가 정치화된 1960년대의 중국과 인간관계가 상품화된 1990년대의 중국에 대한 견해와 일치한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전체주의보다 더 낫다고, 상품화된 인간관계가 정치화된 인간관계보다 더 낫다고 결론을 내린다. 전체주의 시대는 정치화 시대였고 사람에게 일말의 자주권도 없었다. 반면에 자본주의 시대는 비록 상품화 시대이지만 적어도 사람에게 자기격리의 자유가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적어도 자기격리의 자유가 있다. 스스로를 원숭이처럼 우리에 가둬놓고 외부 세상이 어떤지, 멋진지 별것 없는지 냉담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정치화 시대에는 예외 없이 모두가 정치에 의해 우리에 갇힌 원숭이였다. 우리 안에는 정치적 관계밖에 없었다. 동시에 정치는 우리 바깥까지 삼엄하게 감독했다. 스스로 우리에 가두는 편이 우리에 갇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서로를 이용하는 편이 서로를 해치는 것보다 훨씬 인간의 좋은 본성에 어울린다."(220-1쪽) 닫기

  •  Modern 57: <우울한 중국인>, 량샤오성 지음, 고상희 옮김, 가치창조(2012), 488쪽............(중국 톺아보기 18)서평 전문보기 : http://pinepark.blog.me/60187990723“중국인은 얇은 종이를 연상시킨다. 짓눌린 심리상태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자아를 잃은 우울함뿐이다. 모두가 이 시대에 우울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시대의 잡다한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우울함은 욕구 불만이 밖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내면에 쌓여 정신을 피폐시키는 심리적 현상이다. 중국인의 ‘우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단 저자는 국가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택한 ‘사회주의의 길’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하지만 다양한 일상의 우울한 치부보다 치명적으로 심각한 것은 모든 중국인의 사상과 행동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옥죄는 사찰제도이다. 중학교 때부터 누군지 모르지만 지정된 공산당원에 의해 ‘작성된’ 개인 이력은 평생 중국인을 따라다닌다.개인이력기록제는 중국 공산당이 전체 인민을 철저하게 통제해 나가는 효과적인 도구다. 국가 공권력이 내놓고 하는 철저한 개인 사찰제도인 셈이다. ‘민간인 사찰’로 전 국민의 분노를 산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제도임에 틀림없다.이런 반인권적, 전체주의적 개인사찰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지 못하고 자기기록부 내용을 ‘볼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소박한 소망이 애처롭다. 그래도 명망 있는 작가이자 교수인 저자의 사고가 이렇다면 대다수 인민과 소심한 지식인들에게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작가적 양심을 제대로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중국의 이런 상황이 바로 우울증의 근원이 아닐까? 빅 브라더의 관찰과 감시에 가위눌린 량샤오성의 이런 인식의 한계는 이 책의 전편에 걸쳐 나타난다.저자는 정신적으로 지체되고 있는 중국사회의 제 현상을 여러 각도로 관조하고 있다. 하지만 우울한 중국인에 대한 그의 힐링과 우울증 처방전은 변죽만 울린다. 몰라서일까 아니면 알고도 말할 수 없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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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울한 중국인 wk**ffk | 2013-01-13 | 추천: 0 | 5점 만점에 3점
    우울한 중국인 - 량샤오성 지음
     
    『우울한 중국인』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둔 중국의 이면에 우울함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중국인에 대해서 다룬 책이다. 처음에 『우울한 중국인』을 읽기 시작할 때는 심리학적인면을 많이 다룬 책이 아닐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우울한 중국인』을 읽다보니 이 책 교양서로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란 것을 느꼈다.
     
     
     『우울한 중국인』은 중국의 역사 과정에서 개방화와 성장 등의 변화 과정을 통해 중국인들이 갖고 있는 심리적인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울한 중국인』에서는 단순히 중국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각각의 소제목마다 들고 있는 예들도 중국의 고전에서부터 다른 나라의 사례까지 방대한양의 사료와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종종 『우울한 중국인』속에서 중국의 역사를 잘 모르면 이해가 안되는 내용도 집약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울한 중국인』은 중국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면 쉽게도 읽힐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교양서의 수준을 생각하고 읽기에는 다소 어렵다고 느껴졌다.
     
     『우울한 중국인』을 통해서 중국에 국한되어 생각하기 보다는 현재의 대한민국도 빈부격차나 양극화 등으로 인해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고, 이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많은 나라들의 다양한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는 것도 이책 『우울한 중국인』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울한 중국인』을 통해 중국을 중국인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더불어 중국와 함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병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라 전체에 깔려있는 이 우울함은 개인의 손을 이미 떠난것 같다. 국가가 해결해야 할 모든 국가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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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울한 중국인> 량사오성 so**love | 2013-01-13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량샤오성
     중국에 대하여 가장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량샤오성은 작가이자 중국 베이징 어언대학교 교슈이다. 1949년 하얼빈에서 태어났으며, 1977년에 푸단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했다. 량샤오성을 1997년 '중국사회 계층분석'에서 중국의 경제적 계층 분화 현상을 해부하면서 개혁개방 이후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을 가져온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그늘을 조명한 바 있다. 지금까지도 펜으로 글쓰기를 고집한다.
     - 본문 저자 소개 인용
     
    우울한 중국인
     제목은 '우울한 중국인', 책 소개 카피는 "지금, 15억 중국인이 위험하다." 그 위험은 집단적 우울증에 빠진 중국인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책의 초반에는 왜 현대 중국인이 집단적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중국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지어 설명하는데,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공감했다. 평소 중국과 중국어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중국인들이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얼마나 소극적이며 개인적인 국민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수 차례 들은 적이 있었고, 그러한 국민성의 결과가 현대 중국인의 집단적 우울증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중국인의 민족성 자체가 소극적이며 우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공맹시대와 당나라의 시를 언급하며 중원을 향한 포부와 끝없는 도량을 지녔던 중국인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으로 현대 중국인들의 우울증 증세는 국가와 정부의 정책의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그 정책 중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부동산 정책인데, 토지와 집을 국가로부터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중국인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도저히 스스로 집을 마련할 수 없는 거품 가득한 부동산 시장 앞에서 무기력함과 우울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앞서 저자 소개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량샤오성은 국가 정책에 대해 잘못된 점은 강력하게 비판하는 성향의 작가인 듯 하다.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그의 성향은 중국인의 우울증은 치료가 가능하며 아직도 중국인은 커다란 포부를 지닌 중원의 주인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듯 하다.
     
    입체적인 중국인
     저자는 중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학에서 중문학을 강의하는 교수다. 그가 말하길, 요즘 중문학도들은 문학적 본질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혹은 중문학을 배워서 어디에 쓰냐고 묻는다고 한다.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저자의 토로가 백번 이해된다. 문학은 문학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배워서 어디에 쓰려면 기술을 배우면 된다. 문학은 배워서 어디에 쓰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인문학 열풍이 한창이다. 근 10년간 자기계발서와 외국어 관련 서적이 서점을 장악했다면, 최근에는 감성적인 힐링 에세이와 고전, 철학, 종교와 예술에 대한 서적이 대세를 이룬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고, 취업난과 경기침체로 묘사되는 사회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감성적 동물이라는 방증이다. 저자가 말하는 입체적 중국인은 이러한 감성을 가진 뿌리깊은 중국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 한국인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는 말이다. G2로서의 경제적 파워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전개되어야만 발전적인 중국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함이라는 죄
     저자는 평범하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 중국인을 비판한다.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자살을 선택할 것이라는 인터뷰의 내용도 있다. 이 인터뷰는 우리나라의 아이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장래희망이 9급 공무원, 조금 더 욕심을 내면 7급 공무원. 요즘 아이들이 선호하는 직업인데, 이는 안정적 직업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한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인데, 중국인은 평범함이 죄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참으로 놀랄만 한 일이다. 게다가 저자는 그러한 중국인을 비판하기까지 한다니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것이 맞지 않을까. 좀 더 원대한 포부와 꿈을 가져야 옳을 일이다. 닫기
  • 우울한 중국인 co**reate | 2013-01-13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왜 이 책 제목이 우울한 중국인일까. 책의 앞부분은 우울증에 처한 중국의 모습을 다각도로 진단한다. 왜 중국이 우울해졌는지.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중국이 현재까지 거쳐온 과정에서 우울증을 앓게된 원인을 진단하려 한다. 하지만 책 중반 이후에서는 우울한 중국인의 모습이라고 볼수가 없다. 저자가 살고 있는 이웃들의 여러 다양한 모습을 글로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인기가 있는 중문학 교수라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와 맹자등 나라적으로 유명한 사상가들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철학자나 성경을 인용하며 폭넓은 학문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인터넷 시대인데도 인터넷을 좀처럼 활용하지 않는 고지식한 식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보수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인 모습으로 중국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보인다. 그렇다면 중국이 현재 처한 상황을 대변하는 한마디가 우울증일까. 이책을 읽는 내내 되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정말 중국은 우울증에 빠진걸까.
    중국은 국가 주도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왔다. 미국 다음으로 무시할수 없는 막강한 힘을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중국은 일본의 영토 주권에 맞서 힘을 과시하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중국내에 살고 있는 중국사람들의 삶의 질은 어떠한가.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 걸까. 어느나라치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계층이 중산층이다. 중산층이 건강해야 나라가 튼튼해진다. 상류층으로 올라갈 기회가 생기고 하층으로 떨어질 확률이 적은 구조가 건강한 구조다. 우리나라도 복지 복지 하는 것도 너무 잘사는 부류와 어렵게 살고 있는 계층간의 폭이 더 확대되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걸꺼다. 그 폭이 커지는 것이 위기일 것이다. 왜 위기로 여길까. 아무래도 상대적 박탈감때문일 것이다. 열심히 일해도 그 수고의 댓가가 돌아오지 않을때 삶을 더 힘들게 느끼는 걸 꺼다. 중국의 위기는 우리나라가 느끼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보기 때문에 위기로 보는 것같다. 중국과 수교를 맺은걸 기념해서 매체에서는 중국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난하더라도 희망을 일치 않고 열심히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받은 기회를 고향에서 아니면 가난한 농촌에서 가난을 벗어나도록 자기 재능을 나누는 모습들을 보면서 앞으로 달라질 중국의 가능성을 많이 생각했다. 농촌의 변화는 더디더라도 앞선 생각을 가진 이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가난을 극복할 수 있을거란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었다. 하지만 도시의 삶은 어떠할까.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지식으로는 문제가 심각하다. 중국의 위기는 거기서부터인것 같다. 대도시가 발전하면서 그 도시안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상대적으로 올라가야하는데 오히려 발전할수록 떨어지고 격차는 더 벌어지고 가능성은 낮아지니 상대적 우울함이 더 심해질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 병리 현상을 진단하는 저자의 역할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곪아터진 이유를 알아야 대처를 하듯이 병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하다.
    책 제목을 우울한 중국인으로 선택한 것은 중국 사회가 건강치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독자이지만 힘을 가진 자의 선택때문에 나라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처럼 현재 중국이 겪고 있는 현상도 어찌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산적해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중국을 보면서 우리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저자의 바램대로 30년안에 현재와는 다른 중국이 되어져 있기를 바래 본다. 현대화된 중국, 시진핑 시대 부패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보다 건강한 중국인의 삶이 될때 부유한 국민 강한 국가가 진정으로 중국이 외치고 나아가야할 미래일 것이다. 외치보다는 내치로 강해진 중국이라면 우리도 진정 두려움을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