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7일 화요일

고대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백제인들 -백제인들이 개발한 나침반, 신라방.중국화교들은 백제 후예들

고대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백제인들
백제인들이 개발한 나침반, 신라방.중국화교들은 백제 후예들이였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989&section=section78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사람들- 배의 노, 키,나침반을 발명한 백제인 

이 글은 김성호 박사의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년)'에서 발췌한 것이다. 

김성호 박사는 1983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통해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본기의 이설, 광개토태왕의 비문, 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한 비류백제의 실재를 주장하여 주목을 받았던 학자다.

'중국진출....'을 통해 김성호 박사는 중국 25사에 나타나는 주산군도의 해민들의 정체를 구명하고 이들이 백제 유민들로 명나라 때까지 동아시아 바다를 실제로 지배한 해양세력임을 밝히고 있다. 

아래 내용은 김성호 박사의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 가운데 극히 일부를 발췌하여 덧붙인 것이다. 

▲ 백가제해(해상제국 백제의 22담로)
1. 바다의 주인들 

고대인에게 바다는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였다. 18세기, 동력선이 개발될 때까지 바다는 대대로 전문지식을 이어온 특정 家門이나 집단의 전유물 이었으며, 인도로 가는 해상로를 개척할 때까지 유럽의 귀족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공급하는 향신료를 원산지 가격의 1,000배 이상을 주고 사다 먹었다. 

유럽에서 대양을 항해하는 것은 왕실의 후원을 등에 업고 목숨을 거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남길 수 있는 벤처산업이었다. 향신료 가격은 금값에 필적할만 하였다. 그렇다면 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왜구와 임진년의 침략으로 유명한 일본일까? 아니면 중국? 그도 아니면 먼 가야왕국까지 공주를 시집 보낸 인도였을까? 정답은 바로 백제왕국과 그 유민들이다. 


2. 오랑캐의 배 


고대 동아시아의 배는 바닥모양과 추진체에 따라 크게 선(船)과 박(舶)으로 나눈다. 船은 바닥이 평평하고 배 옆의 도(櫂)를 저어 전진하는 카누와 같은 형태로 강과 운하를 항해할 수 있는데, 舶은 흰 돛을 달아 바람을 이용하고 배 꼬리에 노(櫓)를 달아 전진하며 바닥이 뾰족해 파도를 해치고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배로 중국인들은 이것을 '오랑캐의 배'라고 불렀다. 

AD1세기부터 AD15세기까지 무려 1,500년간 아시아의 동쪽 바다를 백제(유민)들은 이런 배를 타고 지배했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지도에서 보듯이 동 아시아 곳곳에 남아있다. 이들은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이 이전 왕조들과 달리 자신들을 명나라 지배안에 강제 편입하려 하자 목숨을 걸고 300년간 싸우다가 대부분 고려, 일본, 필리핀,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화교로 알고 있는 이들이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바로 명나라의 海禁政策에 대항하여 싸우다 피신해간 사람들이고 이들은 대부분 백제 유민들의 후손이었다. 

3. 주산군도의 백제인 

이들은 양자강 하구 항주만 입구에 있는 주산군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했고, 그 문화는 멀리 사라센까지 전파되었다. 9세기에 사라센 여행가인 이븐 후르다드베와 마우스디는 이 땅을 일러 "이 나라는 Syla(신라)라는 나라로 금이 많고 경관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져 모든 것이 충족된 아름다운 나라"라고 묘사했고, 10세기에 '알 이드리시'와 14세기에 '앗 다마시키'라는 사라센인은 "신라는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그 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 목걸이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라는 기록을 남겨, 이들이 말한 신라가 통일신라가 아니라 주산군도의 백제유민들이 세운 해상왕국임을 나타내고 있다.

4. 나침반을 발명한 백제인

최근에 사라센에 나침반을 전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유인즉, 사라센어로 나침반은 Khann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어로 나침반을 뜻하는 침(針)과는 관계가 없고 우리말 '가늘다'의 어근인 '가는'이란 말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 명태조가 주산군도의 주민들로부터 빼앗은 항해관련 서적들을 정리하면서 '항해 관련 서적들이 모두 오랑캐 말로 되어 있어 본토인들이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였다'는 명사(明史)의 기록은 바다의 주인이 중국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신라방에 신라인들이 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신라방 사람들이 '한가위'가 무엇을 하는 날인지 몰랐다는 唐書의 기록은, 그들이 바로 백제가 망하기 전부터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던 백제의 유민들이었기에 신라인으로 불리면서도 신라인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를 몰랐던 것이라고 한다. 등소평의 해외 화교자본 유치정책이 실시된 후 화교들이 중국 땅에 들어와 최초로 한 일은 주산군도에 있던 백제인들의 절을 복원하고 여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화교의 정체가 무엇인지 시사하고 있다. [출처] 

화교..' 백제멸망으로 흩어진 유민들"

"'화교..' 백제멸망으로 흩어진 유민들"
[역사시사]화교.나침반.신라방은 백제관련, 교류는 왜 필요한가?
 
윤복현 저널리스트 
▲ 아시아 해상제국-이시아 지역에 22담로 설치
백제의 기원과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 영역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 東夷列傳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韓은 세 종류가 있으니, 첫번째를 마한馬韓이라 하고, 두번째를 진한辰韓이라 하며, 세번째를 변진弁辰이라 한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이 낙랑과 접하며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고, 그 북쪽이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하고 있다. 무릇 78국이며 백제伯濟가 그 중의 한 나라이다." 

기록의 내용은 한반도남부지역은 단군3조선붕괴이후 조선유민들에 의해 3한이 생겼는데, 한반도서부지역에 속하는 마한이 54개국(읍단위 국가)으로 가장 컸는데, 그 속에 백제가 있다는 의미다. 백제라고 할 때는 온조백제를 의미한다.광개토태왕비문에는 이잔(구태백제는 이잔)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온조백제를 고구려와 만주의 패권을 다투던 부여의 왕 구태가 후한세력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통합을 하고 서남해 지역을 장악하여 아시아 해상제국을 건설했다.그래서 우리가 보통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라고 할 때는 온조가 세운 '십제'를 통합한 구태백제를 의미한다. 온조는 고추모의 아들로 시조로 추모왕(고추모)를 삼았으며, 온조나라를 통합한 구태백제는 부여왕 구태를 시조로 삼고 제사를 지냈다.

 지나문헌인「북사」와 「수서」에서 백제시조 구태에 대해 기록하기를, “동명(고두막한=북부여 5대 단군)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신당서(新唐書)]에서 백제의 위치를 기록하기를,"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직경사동육천리이영빈해지양 서계월주 남왜 북고려 개유해내지 기동신라야)"

해석하면"백제는 경사(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하는데,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 북쪽은 고려(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들 나라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

즉, 국경은 지나국의 월주지역,일본열도, 북쪽의 고구려와 경계하고 있는 백제는 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정도가면 바닷가(한반도 서남해)도에 위치하고 있고, 백제 동쪽(경상도)으로 신라가 위치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한나라부터 역사 왜곡을 진행시켰기때문에 그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또한,『구당서』에서 백제영역을 이르기를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구태백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과 동남아지역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지나대륙.일본.인도.서남아시아로 연결되는 서남해로 통하는 한반도(서남부)를 본국으로  지나 동남부지역과 동남아시아,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22개에 이르는 담로(총독부 :무역.군사.행정관리)를 설치한 거대한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는 단순히 한반도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였던 것이다.

▲  백제 대향로-머리는 마고한국(마한=마조선)의 상징 봉황-백제가 마고한국을 계승했다는 의미
화교.나침반.신라방은 백제관련 용어


고대 동아시아의 배는 바닥모양과 추진체에 따라 크게 선(船)과 박(舶)으로 나눈다.

"船"은 바닥이 평평하고 배 옆의 도(櫂)를 저어 전진하는 카누와 같은 형태로 강과 운하를 항해할 수 있는데, "舶"은 흰 돛을 달아 바람을 이용하고 배 꼬리에 노(櫓)를 달아 전진하며 바닥이 뾰족해 파도를 해치고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배로 지나인들은 이것을 '이(夷)의 배'라고 불렀다. 이 두가지 배를 총칭하여 "선박"이라고 불렀다. 한반도인들은 고대부터 해양족이였다. 특히 서남해 지역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해양무역이 활발한 지역이다. 구태백제가 아시아 해상제국을 건설한 기반은 서남해지역민들의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에 있었다.

A.D. 1세기부터 A.D. 15세기까지 무려 1,500년간 백제인들은 이런 배를 타고 아시아 바다를 지배했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지도에서 보듯이 동아시아 곳곳에 남아 있다. 백제멸망이후에도 백제유민들은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이 이전 지나왕조들과 달리 명나라 지배 안에 강제 편입하려 하자,목숨을 걸고 300년간 싸우다가, 대부분 고려, 일본, 필리핀,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화교"로 알고 있는 이들이 사실은 지나대륙의 지나인들이 아니라,바로 명나라의 '해금정책(海禁政策)'에 대항하여 싸우다 피신해 간 사람들이고 이들은 대부분 백제유민들의 후손이었다. 

백제멸망이후 주산군도의 백제유민들의 해상무역활동  

원나라 사서인 [원사(元史)]의 기록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있다. 때는 백제본국이 멸망한 먼 훗날이 되는 1267년, 고려 원종 8년 때의 기사다.

"백제가 사신 양호를 파견하여 황제를 조알하고 비단을 하사 받았다"

이에 대해 사학계 일각에서는 사서의 기록이 고려와 백제를 혼동해서 그리 기록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고려가 백제의 옛 강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기록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지만, 모두 납득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고려 측에서도 양호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를 조알하고 비단을 하사 받은 사실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뿐더러 양호라는 사람의 존재조차 나타나지 않기 떄문이다.
  
원나라 황제에게 비단을 선사한 이들 백제인들 양자강 하구 항주만 입구에 있는 '주산군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동 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했던 백제유민들이였으며, 그 문화는 멀리 사라센까지 전파되었다. 9세기에 사라센 여행가인 이븐 후르다드베와 마우스디는 이 땅을 일러, 

"이 나라는 "Syla(신라)"라는 나라로 금이 많고 경관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져 모든 것이 충족된 아름다운 나라다." 라고 묘사했고, 10세기에 '알 이드리시'와 14세기에 '앗 다마시키'라는 사라센인은   "신라는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그 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 목걸이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라는 기록을 남겨, 이들이 말한 신라가 후기신라가 아니라 주산군도의 백제유민들이 세운 해상왕국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외에도 백제의 존재는 백제가 멸망하고, 견훤의 후백제마저 멸망한 뒤에도 백제와 관련된 이해할 수 없는 흔적들은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983년 고려 성종 2년에 성종이 송나라 황제로 부터 받은 책봉문을 보면 "고려는 삼한(한반도 남부지역)의 옛 땅과 백제가 남긴 봉지(탐라 등 서남해 도서지역)를 가지고 있다"는 구절이 등장하고, 이어 985년에 내려진 송나라 황제의 조서를 보면 "항상 백제의 백성들과 장족들을 평안케 하여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은 현재 고려가 다스리는 삼한지역(한반도)의 백제인들과 벽란도에 무역하러 오는 장족 백제유민들을 잘 보살펴 주라는 당부다.

장족의 실체는 누구인가? 지나국 동남부 광서성 장족자치지구에 가면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놀랄 수 밖에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라는 이름의 지명들, 길거리의 간판이나 버스 광고판에서 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백제라는 단어들, 그리고 엄마를 엄마라 부르고 아빠를 아빠라 부르는 장족 아이들과 우리 민족에게 밖에 없다는 맷돌.방아(호남지역의 맷돌과 방아), 지게, 그리고 강강수월래의 문화가 그 곳 장족자치구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백제권에 속하는 한반도 호남지역의 전주와 완산, 그리고 기린봉이 장족지도에 존재하고 있는 이 지역의 장족들은 지나인들이 백제허라고 부르는 그 지역을 '대백제'라고 발음하고 있다.

이미 KBS '역사 스페셜'에서 몇 차례 다룬 문제이지만, 후백제가 멸망한 뒤 3년 후 지나국 광서성 지역에 대거 한국계 지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호남지역의 전주를 비롯하여 완산, 기린봉, 그리고 금산사 등 후백제의 중심 지역에 있던 지명과 유적의 명칭이 후백제가 멸망한 뒤 대거 이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지나지명과 일치하는 대부분의 지명이 신라 시대에 지나국에서 들여 왔기 때문이라는 기존 학설과는 정반대로 대치되는 사건으로 백제멸망이후에도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 백제유민들과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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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고려 왕조와의 긴밀한 관계 역시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인 상산사(湘山寺)의 역사를 기록한 상산지(전10권) 8권에 보면 1311년, 이 절의 주지인 철산장로가 고려왕에게 선물을 요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낱 사찰의 주지가 멀리 떨어진 고려왕에게 선물을 요청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에 대한 고려의 답이 화려하다는데에 의문점이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철산장로의 요청에 대해 고려왕은 기록에 따르면 '세상을 밝히는 여명주, 금으로 새긴 불경, 봉의 깃털로 만든 모자, 금실로 사람 천명을 새긴 옷, 금 밥그릇, 여덟가지 진귀한 보물로 만든 부처상' 등을 선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이런 기록들은 백제 담로지역이였던 광서성 일대에 남아 있는 무수한 백제계 지명들과 풍습과 맞물려이 지역이 어떠한 형태로든 백제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리 역사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는 결국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이 이미 백제와 관련된 지역이었음을 암시하는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침반은 아시아 해상무역을 독점한 백제인들의 발명품

최근에 사라센에 나침반을 전한 것은 지나인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백제인들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유인즉, 사라센어(아랍어)로 나침반은 "Khann"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나어로 나침반을 뜻하는 침(針)과는 관계가 없고, 우리말 '가늘다'의 어근인 "가는(細)" 이란 말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백제멸망이후 백제의 발명품까지 신라의 전유물이 되었다.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주산군도의 주민들로부터 빼앗은 항해관련 서적들을 정리하면서 "항해 관련 서적들이 모두 오랑캐 말로 되어 있어 지나본토인들이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였다."는 명사(明史)의 기록은 바다의 주인이 지나인들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역사교육을 통하여 산동지역의 신라방에 신라인들이 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신라방 사람들이 신라에서 유래한 '한가위'가 무엇을 하는 날인지 몰랐다는 당서(唐書)의 기록은, 그들이 바로 백제가 망하기 전부터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던 백제의 유민들이었기에 신라인으로 불리면서도 신라인의 최대명절인 '한가위'를 몰랐던 것이라고 한다. 백제멸망 후 백제유민들의 거주지를 신라방으로 당나라가 부른 것이다.지나지역의 좀이 되었다고 지나문헌에 기록할 정도로 지나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였던 백제를 철저히 지우기 위해서 말이다.

▲ 공주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지나국의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화교(백제유민들)와 아시아 경제공동체

등소평의 해외 화교자본 유치정책이 실시된 후, 화교들이 지나국 땅에 들어와 최초로 한 일은 주산군도에 있던 백제인들의 절을 복원하고 여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화교의 정체가 무엇인지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백제 멸망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알 수 없는 백제의 흔적들은 그 이전부터 등장하고 있는 백제와 백제의 해외경영의 흔적들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든 문제라는 것이다. 

백제는 바다를 매개로 아시아 전역에 연결된 대백제였다는 사실과 함께 서해를 통하여 지나국과 무역을 하는 21세기를 맞아 지나국의 돈줄을 쥐고 있는 백제유민들로서의 화교와 교류하고 백제라는 공통적 인식하에 지나국과 대한민국이 공존번영하는 차원에서 경제협력과 역사문화교류을 하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아시아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교류협력하여 공존번영하는 길은 바다를 통하여 길을 열었던 백제에 대한 인식과 백제찾기에서만 가능한 배경이 될 것이다. 우리가남이가만을 내세우는 우물안개구리들의 역사관으로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크게 융성할 수 없으며 갈등과 대립과 전쟁을 부추기며 한반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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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코리아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장에서 고 임승국 교수가 백제 동성대왕 시절 중국대륙에 진출한 ‘남제서(南齊書)’의 기록을 소개하여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런데 최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한적실에 보관중인 1637년 발행 남제서 판본이 공개되어 화제인데 그 주요내용을 소개해 본다.

남제서(南齊書)는 남조 양나라 때인 537년에 소자현이 편찬한 것으로, 남조 제나라(479년~502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중국 25사 중의 하나이다.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 지도를 먼저 하나 소개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나오는 북위가 존재할 당시 형세도를 일본인이 그린지도인데 지금 나오는 지도도 대동소이하다.

▲ 북위시 일본인이 그린 당시 형세도     ©플러스코리아

백제 동성대왕은 24년 동안 재위(ad479 ~ ad501)에 있었던 백제 24대왕이다. 당시 주변정세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백제 : 678년 존속 (b.c18 ~ ad660)
* 북위 : 149년 존속 (ad386 ~ ad534)
* 남제 :  24년 존속 (ad479 ~ ad502)
 → 남제는 24년 동안 왕이 7번 바뀐다. (동성대왕 재위년과 동일)

상기와 같은 내용을 참고하여 아래 남제서 원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원문 내용 중 ‘⑧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원문]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해설]
이해(AD490년) 위노(북위)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동성대왕)는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노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중국 북방을 통일했다고 하는 강력한 북위의 효문제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 동성대왕을 공격을 하였는데 백제 동성대왕이 4명의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뒷부분 내용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원문]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해설]
(백제 군사가) 야간에 습격하여 번개같이 공격하였더니 흉리(북위)가 크게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바닷물로 쓸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백제의 군사가 북위의 기병 수십만을 몰살시켰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대왕조를 보면 490년 기록은 없고 488년에 짧은 문장 하나가 기록되어있다.

[원문]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해설]
10년(488)에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한반도 서남부에 있는 백제를 기준으로 보면 남제서의 기록은 몇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첫째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려면 고구려가 길을 빌려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기록이 없고, 둘째 그렇다면 북위의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고 와서 공격하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남제서 기록이 스스로 해결 해준다. 즉 동성대왕이 북위군의 공격을 격퇴한 공로를 치하하여 태수를 7명 임명하는데, 그 태수 임명지역이 곧 백제 강역이기 때문이다. 그 임명지역과 현재 위치를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은데, 아래 원문에 나오는 번호순서대로 살펴보자.

① 광양태수 : 하북성 창평, 랑향 인근 (북경 인근)
② 조선태수 : 미상
③ 대방태수 : 미상
④ 광릉태수 : 강소성 양주시
⑤ 청하태수 : 하북성 영년시
⑥ 낙랑태수 : 미상
⑦ 성양태수 : 산동성 성양시 

7태수 중 지명이 확인되는 4명의 태수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강역을 연결해보면 중국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유역까지 포함이 되는데, 현재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는 백제가 그 강역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영토를 중국본토에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된다. 

▲ 남제서에 나오는 동성대왕이 임명한 태수위치     ©플러스코리아

이것은 중국의 25사중 하나인 남제서에 나오는 기록이니 부정할 수도 없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러한 역사를 기록한 남제서 백제전 앞부분 15줄 320자를 누군가가 고의로 삭제하였다는 것인데, 아래 원문 자료를 보면 검게 나타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증언한 고 임승국 교수의 증언이 맞다는 말인다. 도대체 154줄 320자에는 어떠한 내용이 들어 있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중국정부는 15줄을 삭제하였을까?

남제서의 기록을 보면 동성대왕 시절 백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국력을 가진 나라로 보여진다. 우리는 왜 이러한 역사를 교육하지 않는 것일까? 일시적으로 진출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강역이 넓다. 이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 고려대 중앙도서관 한적실 보관 1637년 발행 ‘남제서 백제전 원문’


▲ 남제서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고구려 백제 유민 이야기 , 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 이야기 

연세국학총서 75 | 양장본

지배선 지음 | 혜안 | 2006년 09월 30일 출간

목차

머리말

제1장 고구려 유민 왕모중의 발자취
1. 임치왕 이융기의 노예 왕모중
2. 황제 즉위 이전의 이융기와 왕모중 관계
3. 현종 이융기와 왕모중 관계
4. 왕모중의 병부상서 요구
5. 결론

제2장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발자취와 고구려 멸망
1. 『당서』에 나타난 남생의 집정 이전기
2. 묘지문에 나타난 남생의 가계
3. 묘지문에 나타난 남생의 흔적
4. 남생의 고구려 집정기
5. 당과 제휴한 남생
6. 고구려 멸망과 남생
7. 당에 의한 고구려 식민지배와 장안에서의 남생
8. 고구려 유민의 고구려 부흥운동
9. 요서·요동으로 파견된 남생
10. 남생의 최후
11. 묘지문에 보이는 남생 평가
12. 결론

제3장 남생의 아들 헌성의 당에서의 행적
1. 묘지문에 나타난 헌성의 가계
2. 묘지문에 나타난 헌성의 성장기
3. 묘지문에 나타난 헌성의 아버지 남생의 죽음
4. 당의 장군으로 개선한 헌성
5. 헌성의 활약
6. 헌성의 억울한 죽음
7. 결론

제4장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남산의 발자취
1. 남산의 묘지문의 첫부분
2. 묘지문에 나타난 남산의 가계와 청·장년기
3. 보장왕 명령에 따른 남산의 항복
4. 결론

제5장 백제 장군 흑치상지의 토번.돌궐 토벌
1. 백제에서의 흑치상지
2. 백제 멸망과 흑치상지
3. 백제 부흥운동과 흑치상지
4. 당으로 잡혀간 흑치상지
5. 흑치상지의 토번토벌
6. 흑치상지와 서경업의 난
7. 흑치상지의 돌궐 토벌
8. 흑치준의 흑치상지 복권운동
9. 결론

제6장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
1. 흑치준의 가계
2. 흑치준의 행적
3. 결론

부록
찾아보기

흑치상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2167

흑치상지 배신자의 이름으로 죽은 비운의 장수

흑치상지 이미지 1
백제 출신의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에 대해서는 중국의 [신당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열전’에 전기가 실려 있다. 한편 1929년 중국의 낙양에서 흑치상지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거기서 그들의 생애를 일러주는 기록이 나왔다. 이는 앞의 두 책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조국을 버리고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산 사람에게 내리는 후세의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아니면 비운의 장수인가.

흑치상지가 살아간 시대, 조국 백제의 멸망기

흑치상지는 백제에서 태어났다. 무왕이 다스리던 서기 630년이었다. 상지의 가문은 대대로 달솔이라는 벼슬을 했는데, 중국의 병부상서 그러니까 지금의 국방부차관 같은 꽤 높은 자리였다. 실제로는 왕족 가문이었고, 흑치 지역에 봉해졌으므로 이 성을 썼다. 할아버지는 현덕이었고, 아버지는 사차였으며, 모두 달솔을 지냈다. 상지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동작이 빠르고 힘이 세고 꾀가 넘쳐났다. 약관 스무 살에 달솔이 되었는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들어선 지 9년째 되는 649년이었다. 어려서부터 고상한 생각을 가졌고, 기질과 정기가 재빠르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의자왕은 무왕의 큰아들이었다. 왕자 때의 그는 용맹하고 담력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 사이에 사랑으로 지냈다. 그러기에 그는 ‘백제에 태어난 증자(曾子)’라는 평을 받았다. 이렇듯 자질이 훌륭한 사람이었음에도, 의자왕의 말년은 술과 여자에 깊이 빠졌다가, 끝내 나라를 잃은 마지막 왕이라는 불행한 이력을 남기고야 말았다. 상지는 이런 왕의 밑에서 달솔을 지냈다.
이 무렵 백제의 왕족 가운데 복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일찍이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자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자리를 잡고 끝까지 당나라에 저항했다. 그는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 백제 부흥운동을 꾀하였다. 복신은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일컬었다. 점점 힘이 세지자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군사의 명령권을 한 손에 쥐었다. 왕에 오른 부여풍은 그저 복신의 말만 따를 뿐이었다.
그때 흑치상지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또한 달솔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었다. 소정방이 사비성을 함락시켰을 때, 상지는 부하들을 데리고 임존성으로 갔다. 그러자 열흘이 못되어 그에게 찾아든 사람이 3만 명이나 되었다. 상지에 대한 당시 백제인의 신임이 상당히 두터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지는 주류성에서 복신이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복신과 연합하고 마침내 2백여 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조국 부흥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당 고종은 흑치상지가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줄 알고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출처 : Kavin07 at zh.wikipedia.com>
그러나 부흥운동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였다. 복신이 너무 설쳐대자 부여풍이 앙심을 품고 그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상지는 고민했다. 663년, 상지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이때 당나라 고종은 상지가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 줄 알고 사신을 보내 설득했다. 항복하면 후하게 대접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상지는 깊이 고민하면서 친구인 지수신과 의논했다.
“내가 이제 당나라 황제의 말을 들으면 항복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성은 더 고생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상황이 이러니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세.”
결국 두 사람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유인궤는 상지를 보고, “이 사람을 보건대 충성스럽고 지혜가 있다. 기회를 얻으면 공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지와 지수신은 부여풍이 지키는 나머지 성을 빼앗았다. 그렇게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상지는 당나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지수신은 식구들을 버려두고 고구려로 가버렸다.
상지는 마침내 당나라에 들어가서 양주자사가 되었다. 많은 공을 세웠고, 신임을 얻어 664년 웅진성(부여)으로 잠깐 돌아와, 남은 성안 사람들을 보살폈다.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

백제 출신이지만 당에서 승승장구하다

흑치상지의 이름이 다시 들리는 것은그로부터 6년 뒤인 672년, 마흔세 살의 나이로 충무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에서이다. 그는 충실한 이민자가 되었다. 어쨌건 겉으로야 당나라에 대해 제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하다. 비록 당나라의 신하가 되었지만, 그가 일하는 방법은 늘 똑같았다. 상지는 아랫사람들에게, “나는 공평한 것을 나의 소임으로 삼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기로 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를 아름답게 여겨 좌령군장군으로 옮기고, 더 큰 마을에 땅을 내려 주었다. 사람들은, ‘장군은 무거운 문빗장을 들어 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지혜로는 외적을 막아낼 수 있었으나 지혜 있는 것을 떠벌리지도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오히려 드러난다, 우직하게 인격을 닦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상지의 행실은 산처럼 똑바로 서서, 모든 사람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러는 동안 상지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아들 준(俊)이 태어난 것이다. 676년, 상지의 나이 마흔일곱 살 때였다. 물론 그러는 상지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다음 해, 상지는 서도(청해) 지방에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당나라 사람 이경현은 황제의 대사가 되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경현이 군대를 지휘하면서 싸움마다 지는 것이었다. 황제도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되어, 상지를 좌무위장군으로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대사를 시켰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흑치상지의 사위로 알려진 순장군(珣將軍)이 조성한 석굴에서 출토된 순장군공덕기의 탁본.
상지에게도 슬슬 불행의 그늘이 다가왔다. 쉰여섯 살 때인 684년, 서경업이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키자 상지는 나가서 이를 평정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상지는 연연도대총관이 되어 돌궐을 격파하였다. 돌궐의 장수 골졸록은 상지와의 싸움에서 크게 졌다. 이 일로 상지는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라는 벼슬을 받았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때 상지는 동료 장군인 보벽과 의견 충돌을 빚었다. 보벽은 과감한 공격을, 상지는 신중한 처리를 주장하였다. 황제는 보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보벽 혼자 진공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이 때문에 온 진영이 무너지고 말았다. 보벽은 처형당했다. 그러나 상지도 온전할 수는 없었다. 당나라에 와서 겪는 첫 시련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689년, 상지가 예순 살을 앞둔 해였는데, 조회절이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켰다. 평소 상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무리가 황제 앞에서, 상지가 반역의 무리에 끼었다고 모함하였다. 처음에 황제는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그이야말로 의심스럽다는 신하들의 말에 황제도 귀가 솔깃했다. 그들은 상지가 반드시 신임을 얻어 옛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의심은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었다. 상지는 옥에 갇혀 죽으면서, “내가 내 고향 백제를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만, 이런 누명을 쓸 줄이야 몰랐구나.”라고 한탄하였다.

흑치상지는 배신자인가, 아니면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흑치상지가 억울하게 죽은 뒤 10여 년이 흘렀다. 아들 준은 이제 스물세 살의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준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당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로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는 말을 하였다. 황제는 이 말을 들었다. 사신을 보내 준에게 돌아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하였구나. 이제 다시 살펴보니 반역하였다는 증거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신당서]에서
흑치상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백제유민 예식진의 묘지석. 중국 지역에서 발굴되는 백제인의 묘지석은 망국의 한을 품고 당나라로 건너간 백제 유민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드디어 준은 아버지의 묘를 낙양의 북망산으로 이장하였다. 황제는 장례에 드는 물건과 일할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 뒤 불과 7년 뒤인 706년, 상지의 아들 준이 낙양에서 죽었다. 겨우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같은 북망산에 장사지냈다.
흑치상지와 그 아들 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늘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그들은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산 것을 보면 배신자요, 출중한 능력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보면 성공자이다. 세운 전공이나 올라간 벼슬로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7대 장수로 손꼽혔다. 더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백제부흥운동의 끝자락에 희망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이였다고 해야 옳을까. 마지막에 모함을 받은 것은 지나치게 높이 올라간 벼슬 때문에 당한 견제였다. 그렇다면 배신자도 성공자도 아닌 비운의 장수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상지가 얼마나 아랫사람을 인자하게 다스렸는지 유명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한번은 병사가 상지의 말을 때린 적이 있었다. 이를 보던 어떤 사람이 상지에게 엄히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상지는, “말도 소중하고, 병사도 소중하지. 그러나 사사로운 실수이거늘, 어찌 병사를 매로 다스리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아래 거느리는 부하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 자기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상지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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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기 이미지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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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4년 10월 6일 월요일

-마사 누스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For Love of Country>

"스토아 학파는 세계 시민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의 원천이 될 수도 있는 지역적 정체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가 지역적 유래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동심원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라고 제안한다. 첫번째 동심원은 자아를 둘러싸고 있고, 두번째 것은 직접적인 가족을 포함하며, 이어서 세번째 것은 확대된 가족을, 그 다음에는 순서대로 이웃이나 지역 집단, 동료시민, 그리고 동료 국민을 아우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목록에 민족, 언어, 역사, 직업, 사회적 성 혹은 생물학적 성에 따른 정체성에 근거한 배열을 손쉽게 추가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동심원 밖에 있는 가장 큰 동심원은 인류 전체의 동심원이다. 세계 시민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모든 사람들을 동료 시민 이상의 존재로 만들면서, “동심원들은 어느 정도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1~2 세기 경의 스토아 철학자 히에로클레스) 것이다." -마사 누스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For Love of Country> p.31

2014년 10월 5일 일요일

찰스 테일러 지음, 『근대의 사회적 상상』-‘유럽을 지방화하기’

철학자의 빛나는 상상력 … 유럽적 근대성 상대화 할 것 제안
찰스 테일러 지음,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상길 옮김, 이음, 2010)
2010년 04월 05일 (월) 16:09:59교수신문  editor@kyosu.net
공동체주의자이자 헤겔에 대한 창조적 해석의 철학자로 알려진 테일러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라는 책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나름의 깔끔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근대의 도덕질서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를 진행하고 있다. 근대의 도덕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경제, 공론장, 인민주권이라는 세 가지 사회적 상상의 축이 제시되고 있다. 근대인들은 이 세 가지의 사회적 상상을 통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를 상상하고 또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자신의 역할을 인지한다. 곧 사회적 상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것이 근대인들이 주체로서 판단하고 행위하면서 사회적 삶을 살아가고 영위해 나가는 방식이다.

근대적 도덕 질서의 성립은 중세적 도덕질서로부터의 탈피의 과정이었고, 그것은 곧 중세의 사회적 상상에서 근대의 사회적 상상으로의 전이이다. 중세가 세 개의 위계제를 통해, 즉 플라톤적 자연법 질서가 중세 기독교 사회 속에 투영된 방식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상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 근대는 그로티우스와 로크가 말하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해 사회를 구성한다고 가정된다. 새로운 상상계의 출현이다. 이러한 새로운 상상계의 변환과정을 테일러는 세속화라는 이름으로 규정한다.
세속화는 새로운 상상계의 변환과정

세속화는 종교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하지만 종교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는 종교가 사회적 형태 및 사회적 관계를 구조화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종교적 믿음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근대의 사회적 구조와 관계들을 결정하고 규정할 새로운 상상 그리고 그것의 구현체가 필요한 것이다. 테일러는 새로운 상상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있는 축으로서 경제, 공론장, 인민주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축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경제, 사회, 정치라는 근대의 분업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근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월러스타인이나 아리프 딜릭 그리고 허쉬만 등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세속화는 종교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하지만 종교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는 종교가 사회적 형태 및 사회적 관계를 구조화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종교적 믿음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근대의 사회적 구조와 관계들을 결정하고 규정할 새로운 상상 그리고 그것의 구현체가 필요한 것이다. 테일러는 새로운 상상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있는 축으로서 경제, 공론장, 인민주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축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경제, 사회, 정치라는 근대의 분업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근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월러스타인이나 아리프 딜릭 그리고 허쉬만 등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하지만 테일러의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점은 이 책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세속화라는 틀이다. 기독교에 의해 구조화된 사회로부터 탈피해 정교분리의 원칙에 근거하면서 종교는 사적 영역에 한정되는 방식으로 근대적 정교분리의 원칙이 형성된다. 이러한 세속화를 둘러싼 서구인들의 논의들은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낯설다. 하지만 유럽에서 근대정치의 형성과정이 교회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의 과정 속에서 이뤄졌다는 한 정치신학자-테일러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인 고쉐(M. Gauchet)-의 말처럼 유럽의 근대성 형성은 기독교로부터 벗어나는 ‘탈주술화과정’이었다. 탈주술화의 과정은 종교로부터 벗어나 다시 종교적인 것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포섭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의 과정에서 종교적인 것은 사적 영역으로 제한됐지만 사실 종교의 위치가 명확해진 것은 아니었다. 잠재돼 있던 그 경계의 문제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시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세속화의 문제, 그 구체적인 작동을 둘러싸고 현대 사회의 쟁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9·11테러 이후 종교간 갈등이 냉전 이후 새로운 쟁점이 되고 있다. 국민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실험으로 유럽연합이 출범하면서 그 의미는 더욱 부각된다. 유럽연합이 그 통합의 질을 높이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발목이 잡혀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유럽정체성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다. 유럽에서 세속화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적용은 별개의 문제이다. ‘히잡’ 착용을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는 프랑스 공화주의와 이슬람 간의 갈등, 역시 히잡을 착용하겠다는 아랍 출신 교사의 임용을 둘러싼 독일에서의 갈등, 그리고 런던, 마드리드, 네덜란드 등에서 있었던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테러는 그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서

그런데 이 갈등의 축이 서구보편주의의 압도에 따라 근대와 전통, 서구의 세속화와 이슬람의 전통주의로 그려지고 있다. ‘히잡’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련의 행위들의 양식 속에 위치된다.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억압, 구체적으로 여성에 대한 교육의 제한, 남편에 대한 선택권의 박탈, 외적인 권위에 의해 통제되는 성생활과 개인생활 등이다. 그것은 이미 서구적 근대성이 ‘극복’했던 전통적인 것들이다. 19세기 서구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적 진출을 행하기 시작하면서 내세웠던 ‘문명화’ 담론이다. 비서구적 문화가 요구하는 ‘차이’의 권리 혹은 문화적 권리는 그들 내부의 억압을 합리화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일축된다. 이러한 것은 우리도 19세기 말의 한반도에서 경험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테일러가 마지막에서 거론하고 있는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곧 서구적 근대성의 보편주의를 버리고 다양한 근대성 중의 하나임을 강조하면서 유럽적 근대성을 상대화할 것을 주문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것은 공동체주의자로서 다문화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테일러의 정치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에 경제, 공론장, 인민주권이 실현되고 작동하는 공간으로 존재해 왔던 국민국가의 문제를 다시 한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근대 국민국가는 민주주의라는 틀을 형성하면서 세가지 축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했다. 하지만 유럽의 예에서 보이듯이 현 시점에서 국민국가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의 틀로서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 또한 규모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공론장 과 인민주권에 근거한 근대적 민주주의 역시 한계에 도달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라이프니쯔와 로크의 개인에서 출발한 근대의 도덕적 질서의 하나의 순환이 일단락되고 새로운 모색의 시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일러가 근대의 도덕질서의 가장 명확한 표현으로 ‘인권’을 제시하고 또한 유럽적 근대성을 상대화할 것을 제안하는 것은 근대의 끝자락에서 근대를 넘어설 민주주의적 모색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쉽게 읽히면서도 테일러가 사용하거나 근거하고 있는 개념들은 대부분 논쟁적이기도 하면서 함축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제목이 말하듯이 상상력이 발휘된 저작이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기도 하다.  번역을 깔끔하게 한 이상길 교수 역시 그간 부르디외, 푸코, 폴 베인 등 사회학, 철학, 역사학 등의 다방면의 번역의 경험이 있다. 그러한 번역들은 근대성과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역자의 일관된 연구관심 속에서 이뤄져 왔으며, 이 책의 번역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번역어의 선택과 관련해서 ‘nation’의 번역어는 항상 번역자를 괴롭히는 개념이다. 많은 경우 이상길 교수는 ‘국가’라는 번역어를 선택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경우 대부분은 ‘국민’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듯하다. 그 외에도 프랑스사학계에서는 나름대로 합의된 번역어들-incorruptible은 로베스피에르의 별명이다-이 존재하는 단어들에 대해서는 그 합의를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홍태영 국방대·국제관계학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정치학 박사 취득. 저서로는 『국민국가의 정치학』등이 있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발전, 정체성, 인권 등에 관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