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5일 일요일

유럽을 지방화하기-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은이) | 김택현 | 안준범 (옮긴이) | 그린비 | 2014-08-30 | 원제 Provincializing Europe: Postcolonial Thought and Historical Difference (2000년)





그린비 ‘프리즘 총서’ 15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서발턴 연구 집단’(Subaltern Studies Group)을 이끄는 역사가 중 한 명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대표작. 이미 여러 저작이 번역된 동료 라나지트 구하와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과 달리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차크라바르티의 저작이다. 2000년에 출간된 이후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핵심 저작으로 자리매김한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유럽을 지방화하기’ 기획은 단순히 유럽을 격하하는 시도가 아니다. 반대로 저자는 유럽 근대성이 확립한 보편적인 사상들이 비유럽 지역의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임을 인정하면서, 그 사상들이 이 사회들에 전파되어 ‘번역’되면서 어떤 굴절을 겪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설명한다. 더불어 이를 위해 역사주의적 사고방식, 즉 자본주의와 근대화가 유럽에서 시작되어 인도 같은 비서구 사회들에 이식되었으므로 이들 사회의 근대성은 ‘미완’ 혹은 ‘결여’라는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맑스와 하이데거 사상을 이론적 지주를 삼아 인도 근대성 역사의 몇몇 편린들을 탐구하는 이 저작에서 독자들은 역사학 외부의 이론을 단순히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이 스스로 이론을 생산하는 드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으며, 또 우리의 근대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
2007년판 서문_글로벌화 시대에 유럽을 지방화하기
감사의 말

서론_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관념
역사주의의 정치
서발턴 연구와 역사주의 비판
이 책의 계획
‘역사주의’라는 용어에 관한 노트


1부_역사주의와 근대성 서사

1장_포스트식민성과 역사의 술책
이행 서사로서의 역사주의
‘결여’를 다르게 읽기
인도 근대성에서 역사와 차이
유럽을 지방화하기?

2장_자본의 두 역사
자본, 추상 노동 그리고 차이의 지양
비판으로서의 추상 노동
역사들과 자본 분석성

3장_생활 세계들을 노동과 역사로 번역하기
역사의 시간
활동을 ‘노동’으로 옮김
번역의 두 모델
역사적 시간과 번역의 정치
자본주의로의 번역 안에 있는 차이의 역사로서의 노동

4장_소수자 역사들, 서발턴 과거들
소수자 역사들: 동화와 저항
소수자 역사들에서 서발턴 과거들로
서발턴 과거들: 하나의 사례
서발턴 과거들의 정치
죽은 과거와 산 과거
시간 매듭들과 역사 서술에 대하여


2부_귀속의 역사들

5장_가정의 잔혹함과 주체의 탄생
동정심과 계몽적 주체
계몽적 주체를 대리보충하기: 차이의 번역
근대적 주체로서의 과부: 내면성 그리고 순수성의 문제
누가 고통을 증언하게 되는가?

6장_민족과 상상태
보는 것의 방법들로서의 민족주의
산문, 시 그리고 현실성의 문제
산문, 시 그리고 캘커타의 근대성
장막을 꿰뚫고 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것
민족주의 역사에서 하나의 문제로서의 상상태

7장_우다: 사회성의 역사
벵골의 우다 논쟁
우다와 민주적 발화의 탄생: 하나의 계보학
우다와 도시 공간의 창출
우다에서의 말하기와 공동체
여성, 우다, 공적 문화
우다와 자본주의적 근대성 안에 거주하기

8장_가족, 형제애, 봉급 노동
조상들, 신들 그리고 시민 사회 영역
민족주의와 가정의 테마
형제애, 가부장제 그리고 정치 사상
결론

에필로그_이성 그리고 역사주의 비판
케냐타, 아피아, 코삼비 읽기
시대착오에는 무엇이 투입되어 있는가?
역사주의를 넘어서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P.17~18 : 유럽을 ‘지방화’한다는 것은, 유럽의 관념들이 보편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 어떤 보편적 타당성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특수한 지적.역사적 전통들에서 나왔다는 것, 바로 이것이 어찌 된 일이며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상이 장소와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었다. 사상은 기원이 되는 장소들을 초월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장소들은 자신의 각인을 사상에 남겨 순수하게 추상적인 범주들이라는 관념을 의심케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서 나의 출발점이 된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유럽의 사상이 인도인의 삶과 실천에 말없이 날마다 현존한다는 점이었다. 계몽 사상은 내 감성 중의 일부였다. 나는 계몽 사상이 그런 것인 줄 몰랐을 뿐이다. 벵골에서 맑스는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가 독일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 벵골 학자들은 최소한의 문헌학적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자본』을 번역했다. 유럽 사상에 진 무거운―그리고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빚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내 출발점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 기획의 한 가지 목표는, 엄밀히 말하자면, 이 빚의 특이한 성격을 깨닫는 것이었다. ― 「2007년판 서문_글로벌화 시대에 유럽을 지방화하기」
P.113~114 : 하지만 ‘우리’ 모두가 종종 비-유럽의 상이한 아카이브를 갖고 ‘유럽적’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지배적인 메트로폴리스의 역사들과 서발턴적인 주변부의 과거들 사이의 일종의 동맹의 정치와 기획에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것을 유럽 지방화 프로젝트라, 즉 근대 제국주의와 (제3세계) 민족주의가 힘을 모아 행한 도전과 폭력에 의해 보편적인 것이 된 바로 그 유럽을 지방화하기 프로젝트라 부르자. 철학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자유주의에 대한(즉 고전적인 정치철학이 생산했던, 시민권의 관료적 건설과 근대 국가와 부르주아 프라이버시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과 초월 속에서 자신의 근거를 마련해야만 하는데, 이 근거는 바로 후기 맑스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철학의 일부 계기들과 공유하는 그것이다. ― 「1장_포스트식민성과 역사의 술책」
P.164 : 자본은 철학적-역사적 범주이고, 이는 곧 역사적 차이가 자본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에 구성적이라는 말이다. 자본의 역사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어쨌든 강력한 역사 2들에 의해 구성적이면서도 불균등하게 변경되는 역사 1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의 역사들은 인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정치에서 탈피할 수 없다. 자본은 유럽 계몽 사상의 보편적 주제들 중 일부를 모든 역사 안으로 가져오지만, 숙고해 보면 보편자는 어떤 대리자 또는 특수자가 자임과 지배의 태도로 그것의 위상을 참칭할 때만 그것의 불안정한 윤곽이 겨우 가시화되는 텅 빈 자리 점유자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글로벌 자본으로 인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벗어날 수 없으며 쉬지 않고 계속되는 역사적 차이의 정치인 것 같다. ― 「2장_자본의 두 역사」

 최근작 :<유럽을 지방화하기> … 총 19종 (모두보기)
 소개 :
1948년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콜카타 대학교 프레지던시 칼리지(Presidency College)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콜카타의 인도 경영 연구소(Indian Institute of Management Calcutta)에서 MBA학위를 받은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캔버라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에서 역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발턴 연구(Subaltern Studies)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남아시아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듀크 대학교 출판...
 최근작 :<트리컨티넨탈리즘과 역사>,<대학생이 된 당신을 위하여>,<민족운동과 노동> … 총 20종 (모두보기)
 소개 :성균관 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사 이론지 『트랜스토리아』(Transtoria) 편집인. ‘트리컨티넨탈 총서’(울력 출판사) 기획위원. 지은 책으로는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2003), 『차티스트 운동, 좌절한 혁명에서 실현된 역사로』(2008), 『트리컨티넨탈리즘과 역사』(2012) 등이 있고,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1997), 로버트 J. C. 영의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2005), 라나지트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2008)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작 :<알튀세르 효과> … 총 3종 (모두보기)
 소개 :성균관 대학교 사학과 강사. 옮긴 책으로 자크 랑시에르의 『역사의 이름들』(2011) 등이 있다.

비서구의 근대화에서 ‘미완’이 아닌 ‘고유성’을 읽는다!
유럽 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포스트식민 역사학의 도전!! 


한때는 조국 근대화가 반드시 이룩해야 할 목표였다. 그런 뒤 근대성은 인간의 다양함을 억압하는 획일성의 지배로 여겨지기도 했다. 탈근대 시대를 둘러싼 논쟁들을 지나 이제는 어느새 ‘근대성’에 대한 성찰 자체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근대가 형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살고 생각하고 있다면, 근대성이라는 문제, 특히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의 근대성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삶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주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린비가 출간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의 『유럽을 지방화하기: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Provincializing Europe: Postcolonial Thought and Historical Difference)는 이런 식민지 혹은 제3세계 근대성, 넓게는 비서구의 근대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는 책이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이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도 ‘서발턴 연구 집단’(Subaltern Studies Group)의 주축 역사가 중 한 명으로, 그린비 프리즘 총서 15권으로 출간된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그의 저작이다. 이 책은 ‘기존의 역사 서사에서 들리지 않았던 서발턴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는 서발턴 연구의 문제의식을 이어 가면서, 더 나아가 역사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과학 사고방식이 품고 있는 유럽 중심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주의’(historicism)를 비판하는 근본적인 작업을 시도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단순히 상대주의에 머물지 않고 ‘보편성’을 적극 재사유하려는 이 저작은 칼 맑스와 마르틴 하이데거 사상을 길잡이 삼아 비서구(혹은 제3세계)의 근대성을 새롭게 조망하는 시각을 제시한다. 또한 역사 이론과 경험 연구 양자를 모두 아우르는 이 책은 이러한 이론적?방법론적 고찰에 기반을 두고 인도 근대사의 편린들을 탐구한다. 단순히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차크라바르티의 이론적 역사학의 실천이야말로 이 책이 지닌 묘미 중 하나이다.
2000년에 출간된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사회과학 담론 및 근대성의 본성 자체를 탈구축함으로써 역사학, 포스트식민주의, 맑스주의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한국어판은 이런 반응들에 대한 차크라바르티의 응답을 담은 「2007년판 서문」을 수록하고 있다), 그 파급력은 현재까지도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손에 쥐어진 이 문제작을 통해 한국에서도 근대성을 새롭게 사유하려는 반향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봄 직하다.

역사주의를 넘어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인도의 맑스주의 노동사 전통 안에서 자신의 학문적 이력을 시작한 역사가이다. 그 결실로 출간된 책이 1989년의 『노동 계급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기: 벵골 1890~1940』(Rethinking Working-Class History: Bengal 1890~1940)이고, 그 후 인도에서 호주로, 그다음에는 미국으로 이주하는 삶의 궤적의 변화와 더불어 그의 사유도 ‘포스트식민주의’의 자장 안에서 펼쳐졌다. 그 시기 동안 그는 맑스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의 접합을 고민했고 2000년 출간한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차크라바르티의 이론적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한 계기가 된 저작이다. 이후 그는 근대성 문제를 사유하는 작업을 이어 갔고, 2002년에는 그 사유를 집약한 『근대성의 거처들: 서발턴 연구의 연파 안에서의 에세이들』(Habitations of Modernity: Essays in the Wake of Subaltern Studies)을 펴내기도 했다.
차크라바르티에게 인도 같은 제3세계 국가의 정치적 근대성 경험과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핵심 대상은 ‘역사주의’이다. 역사주의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동질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한다는 관념이며, 근대 유럽의 진보적 역사관을 대표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역사주의는 식민지에서는 유럽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담론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역사주의에 따르면 유럽이 역사적으로 ‘먼저’ 근대화를 이룩했으므로, ‘아직’ 근대적이지 ‘않은’ 미개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식민 지배와 관련한 유럽 역사주의를 드러내기 위해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표어를 제시한다. 유럽의 식민 지배자와 식민지의 피지배자 모두 이 관념을 받아들였고,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역사학에서도, 피식민국 자신의 역사학에서도 식민지의 역사는 늘 ‘미완’과 ‘결여’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제3세계의 근대성을 ‘미완’과 ‘결여’의 형상으로 보는 관점이 지금도 그곳들의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속에 들러붙어 있고, 이것이 제3세계 근대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차크라바르티가 자신의 과업의 핵심을 ‘역사주의 비판’이라 지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유럽의 사유와 더불어 유럽을 해체하기

세계사적으로 유럽은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확립과 더불어 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역사상 유럽이 인구나 땅덩어리 면에서 ‘다수’였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근대 이후 ‘다수’, ‘보편’, ‘진리’의 자리를 점한 것은 늘 유럽이었다. 물론 기존 식민지들이 독립하고 세계의 많은 나라가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이룬 지금, 어찌 보면 유럽은 이미 세계의 ‘한’ 지방에 불과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 생겨난 관념들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은 여전하며,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유럽이 보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중심의 사고관이 유럽과 비유럽 모두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고 해서 차크라바르티가 근대 유럽이 낳은 사상들을 전적으로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 유럽에는 유럽의 지식이 있고 다른 곳에는 그 나름의 지식이 있다는 상대주의로 문제를 회피하는 것도 그의 목적이 아니다. 수많은 반식민 운동이 입증하듯 유럽에 대항하는 투쟁들은 많은 경우 유럽 계몽주의의 언어(시민권, 자유, 평등 등)를 이용해 자신의 저항을 정당화했다. 차크라바르티는 이처럼 유럽이 낳은 보편주의 사상이 세계를 더욱 정의롭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런 보편주의 사상이 비유럽 지역에 전파되었을 때 기존에 존재하던 문화와 어떻게 접합되었는지를, 역사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피하면서, 파악하는 데 있다.

자본에 포섭되지 않는 과거를 발굴하기

차크라바르티가 의존하는 이론적 자원은 칼 맑스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이다. ‘자본’의 구조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자본 자체를 이해하고 비판한 맑스의 사상 역시 보편성을 갖는다. 하지만 자본이 자신을 강제하는 방식은 사회?문화?역사에 따라 달라지는데, 자본의 보편성이 각각의 사회에서 겪는 굴절을 파악하는 데는 맑스 식의 자본 분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차크라바르티는 맑스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사유를 더 전개하지 않았으며, 이론적?분석적 관계와 더불어 체험적?전분석적 관계도 중시한 하이데거의 사상으로 이를 보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관계가 자본에 포섭되어 있다. 과거는 자본의 전사(前史)를 이루는데, 이때 이 과거들은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과정과 결부되어 이해되고 평가된다(자본주의 이행 문제나 제3세계의 자본주의 성립 등이 이와 관련된 문제다). 이런 의미의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역사를 차크라바르티는 ‘역사 1’(history 1)이라 부른다. 자본주의 자체를 이해하고 지양하는 모든 사상과 운동은 이런 역사 1에 연루되기 마련이므로 역사 1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 1만 이해하는 것은 부적합한데, 왜냐하면 각각의 사회마다 ‘자본의 전사를 이루지만 자본에 포섭되지 않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이를 ‘역사 2들’(history 2s)이라 부르는데, 복수인 역사 2들이 중요한 것은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인 역사 1이 언제나 각 사회에서 역사 2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수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마다 서로 다른 세계-내-존재 방식들이 있으며,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식민지 혹은 제3세계 근대성을 설명하려는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이다.

“나에게 유럽을 지방화하기란, 우리가 하나를 혹은 하나의 전체를 결코 구성하지 않는, 인간 귀속의 그 불가피하게 편린적인 역사들을 성찰할 때, 유럽의 정치적 근대성의 범주들에 관한 계보학들을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이접적인(conjoined and disjunctive) 것들로 창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났기를 바라지만,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결코 유럽 사상을 회피하려는 기획일 수 없다. 왜냐하면 유럽 제국주의의 끝에서 보니 유럽 사상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반(反)식민적인 감사의 마음으로만 유럽 사상의 지방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500쪽)

우리의 근대성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하여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두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로 ‘역사주의 비판’이라는 취지 아래 차크라바르티의 이론적/방법론적 성찰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이런 방법론적 원칙에 기반해 실제 역사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2부에서 그는 19~20세기 인도 벵골의 상층 카스트 일부에게 시민 주체, 분석 범주로서의 상상태, 시민 사회, 가부장적 형제애, 공/사 구별, 세속적 이성, 봉급 노동 등의 주제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검토한다. 이 주제들 자체는 정치적 근대성을 탐구하는 데서 보편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상층 카스트들이 이 보편적 주제들을 얼마나 잘 구현했는지가 아니라 “유럽의 사유로부터 우리가 배운 범주들과 전략들이 비유럽적 근대성의 이 특수한 사례를 재현함에 있어서 얼마나 필요불가결하면서 동시에 부적합한 것인지를”(76쪽) 세밀한 경험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논증하는 것이다.
그는 심층적인 역사적 사례들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 계급인 벵골 중간 계급 남성의 역사 자료를 이용한다. ‘서발턴’ 연구자인 그가 ‘중간 계급’의 역사를 서술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한 방법론적 선택이었다고 차크라바르티는 설명한다. 그는 2부에서 단순히 벵골 중간 계급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생겨난 보편적인 관념들이 벵골에 옮겨 왔을 때 이 계급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번역’(translation)되었는지를(역사주의적 시간관에 따른 ‘이행’transition이 아니라) 연구함으로써 이 중간 계급 역사의 ‘특이성’(singularity)을 서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언어와 문화 등의 세부 사항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차크라바르티가 자신의 출신 계급을 연구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며, 다른 계급이나 성에 대해서는 그의 방법론에 자극받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맑스와 하이데거를 접목하는 것, 그 어떤 보편적인 사상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단선적인 역사주의에서 탈피해야 사회와 역사를 실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모두는 사실 이미 여러 다른 철학자들이 정교하게 세공해 놓은 바 있는 주제이다. 그렇기에 전문 철학자가 아닌 역사가인 차크라바르티의 시도가 다소 거칠고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발턴 연구라는, 더 넓게는 역사학이라는 지평에서 그 시도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그런 정교한 철학들에 생생함과 현실성을 부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단순히 외부에서 생산된 이론을 역사 연구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연구 와중에 스스로 이론을 생산하는 이론적 역사를 실천하는 이 책은 역으로 맑스주의나 포스트식민주의 등의 이론적 문맥에 개입해 그 이론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 유의미한 기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근대라는 시대에 속해 있는지 여부는 논란거리지만, 근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차크라바르티의 연구 대상은 인도 벵골의 중간 계급이라는 아주 작은 집단이며 그들의 경험은 분명 한국에 있는 우리 다수의 경험과 매우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시간과 근대성을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은 우리의 근대성(한국의 근대성 역시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미완’과 ‘결여’의 형상으로 이해되고 있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며, 또 그의 귀중한 시도를 그렇게 우리의 현실에 맞게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차크라바르티의 이 책이 낳을 수 있는 최고의 반향일 것이다. 

2014년 10월 3일 금요일

‘2017년 행정장관 선거’ 놓고 둘로 갈라진 홍콩 : 18.7%→2.96%.

2017년 행정장관 선거 싸고 확산되는 홍콩의 反중국 시위

베이징서 ‘무늬만 직선제’ 밀어 붙이자 일각선 “독립” 주장
‘2017년 행정장관 선거’ 놓고 둘로 갈라진 홍콩
 

홍콩에서 2017년 실시될 행정장관 선거를 둘러싼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과 시민들은 “행정장관 선거를 통해 중국이 홍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27일 경찰들이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고 있다. [로이터=뉴스1] 
 
18.7%→2.96%.
1996년과 2013년 홍콩과 중국의 명목 GDP(국내총생산) 비율이다. 1997년 영국으로부터 주권을 돌려받을 당시 홍콩은 중국에게 절실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홍콩은 중국에 자본과 노하우를 전수하던 ‘갑’에서 중국으로부터 비즈니스 기회를 얻기 원하는 ‘을’로 바뀌었다. 지난달 3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는 홍콩 반환 20년 만에 시행되는 오는 2017년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직접선거에서 반중(反中) 인사를 배제시키기로 결정했다. 홍콩 대학생들은 이 안이 고도의 자치권 보장을 명시한 홍콩기본법에 위배된다며 지난주 대규모 동맹 휴업을 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 22일 홍콩 중문대학 본부 앞 ‘백만대도(百萬大道)’ 광장에는 홍콩 대학 학생회 연합체인 홍콩전상학생연회(香港專上學生聯會·HKFS) 소속 24개 대학 1만3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식민주의 반대(抗殖), 예비 선별 반대, 홍콩 자주노선 지지”를 외치며 닷새 동안 휴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베이징 정부가 홍콩 행정장관 후보로 친중국 인사를 내세워 자치권을 침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전인대는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친 학생들은 이튿날 흰색 상의를 입고 노란 끈으로 손을 묶은 채 정부청사가 위치한 타마르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동맹 휴업을 이어갔다. 교수들은 휴업 참가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공원에서 무료 시민강의를 열었다. 홍콩 정부는 친중 단체의 집회 사전 신청과 규정을 내세워 시위대가 3일 이상 공원을 사용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이에 학생 4000여 명은 25일 밤 렁춘잉(梁振英) 행정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관저로 몰려가 노숙 시위를 이어갔다. 금요일인 26일에는 중·고등학생 단체인 학민사조(學民思潮) 소속 학생 3000여 명이 정부청사 인근에 모여 일일 휴업에 동참했다.

 시위대는 26일 밤 홍콩 정부청사사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은 최루액 스프레이를 뿌리며 시위 진압에 나서 50여 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29명이 부상했다. 체포된 학생 중에는 학민사조를 이끄는 학생운동가 웡지풍(黃之鋒·18)군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회보 “미국이 관리한 인물이 휴업 선동”
홍콩 범민주파도 학생 휴업을 지지하고 나섰다. 타이유팅(戴耀廷) 홍콩대 법학과 부교수는 23일 페이스북에 “남들이 국가의 생일(중국 건국일 10월 1일)을 경축할 때 우리는 홍콩의 민주주의를 쟁취할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는 글을 올렸다. 타이 교수는 2011년 미국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착안해 지난해 홍콩의 금융 중심지인 센트럴을 장악하자며 결성된 ‘센트럴을 점령하라’ 조직의 공동 설립자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 시위 주도자들의 국외 탈출을 도왔던 추이우밍(朱耀明) 목사 역시 10월 1일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센트럴 차터로드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겠다며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학생 시위대도 국경절 센트럴 점령 시위에 동참을 예고하면서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반격도 만만찮다. 지난 8월 17일 ‘보통선거 보호·센트럴 점령 반대 대연맹’ 소속 19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가두시위가 그 시작이었다. 반(反)중국파의 시위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학생 휴업에 대해서는 미국 개입설을 흘리고 있다. 친중국계 신문 문회보는 25일 3년 전 학민사조를 결성한 웡지풍이 주홍콩 미영사관의 돈을 받아 가족과 함께 마카오로 호화 여행을 다녀왔다고 폭로했다. 신문은 “미국이 향후 ‘색깔혁명’(공산주의 붕괴 후 동구와 중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 쟁취 혁명)을 주도할 정치 스타로 키우기 위해 관리한 인물이 휴업을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홍콩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중문대가 이달 중순 광둥어를 사용하는 주민 1006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센트럴을 점령하라’를 매우 지지한다는 의견이 14.2%인 반면, 매우 반대한다는 33.8%를 차지했다.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신임도는 중간 정도의 결과가 나왔다. ‘완전히 지지하지 않는다’를 0점, ‘완전히 지지한다’를 10점으로 한 질문에 대한 답은 평균 4.05였다. 반중여론이 중간을 조금 넘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홍콩 시민들의 정치성향은 범민주파(39.5%), 중간파(24.1%), 무당파(21.5%), 친중파(9.1%) 순이었다. ‘전인대의 결정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은 53.7%, ‘찬성’ 답변은 29.3%가 나왔다.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는 답변도 21.2%를 차지했다.

반환 17주년 행사 땐 옛 홍콩국기 등장
민주화가 독립 요구로 번지는 데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영국 스코틀랜드가 독립투표 실시를 결정하자 홍콩대 학생회지 ‘학원(學苑)’ 9월호는 ‘홍콩민주독립’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지난 7월 1일 홍콩 반환 17주년을 기념한 민주화 시위에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 국기였던 용사기(龍獅旗)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까지 등장했다. 추리번(邱立本) 홍콩 아주주간 총편집장은 “과거 대만이 겪었던 홍역을 홍콩이 앓고 있다”며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공산당 반대가 중국 반대로 이어지는 ‘탈중국화’ 소용돌이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대만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본의 점령이 대만의 현대화를 가져왔고, 국민당에 의한 광복이 대만인에게 불행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던 ‘괴현상’이 홍콩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홍콩 독립 주장은 시민들의 반발과 중국 정부의 강경 대응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반응도 있다.

 중국은 대(對)홍콩 정책을 주도 면밀하게 준비해왔다. 영국이 일방적으로 임명한 총독이 지배하던 식민지 시절 홍콩 시민들은 자유로웠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홍콩인들은 “정치는 나의 소관이 아니다”는 타성에 젖어 자유만을 만끽했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사건이 이를 바꿨다. 중국 정부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영국은 보수당 의장을 역임한 보수파 크리스토퍼 패튼을 마지막 홍콩 총독에 임명했다. 95년 9월 실시된 입법회의 선거에서 ‘민주파’가 압승하자 중국은 선전(深圳)에서 따로 입법회을 구성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에 익숙한 공산정권이 정치적으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모두 수용하겠다는 중국의 정책)’를 갑작스레 받아들이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시진핑, “홍콩에 대한 중국 정책 불변”
그동안 홍콩은 선거위원회에서의 간접선거로 세 명의 행정장관(임기 5년)을 선출했다. 중국은 이를 개혁하기 위해 차근차근 2017년 첫 직선제 방안을 마련했다. 2012년에는 홍콩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친중국적 정체성 강화를 내세운 국민교육 과정을 도입하려했다. 지난 6월 10일에는 ‘일국양제 백서’를 발표해 “애국인사가 주체가 되는 ‘항인치항(港人治港·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을 견지한다”고 못박았다. ‘일국(하나의 중국)’이 ‘양제(두 개의 체제)’의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했다. 중앙정부는 외교권·국방권만 갖지만 홍콩의 입법기구에서 제정된 법이라 할지라도 전인대가 동의하지 않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홍콩기본법에 명시돼 있음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1200명의 추천위원회가 민주적 절차로 2~3명의 행정장관 후보를 선출하며 각 후보는 추천위원회 과반수의 찬성을 거쳐야 한다는 8월 말 전인대의 결정은 예정된 다음 수순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추천위원회가 실질적으로 민주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사의 행정장관 임명을 막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중국의 이 같은 조치의 배경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21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65주년 기념식에서 “민주주의는 장식품이 아니다. 밖에서 가져다 진열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이 풀어야 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선거 투표권이 아니라 일상의 참정권으로 정의해야 한다”며 “전체 사회가 원하는 최대공약수를 찾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22일에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둥젠화(董建華) 초대 행정장관과 리카싱(李嘉誠) 청쿵(長江)그룹 회장 등 중국 공상계 지도자 40명을 만나 “홍콩에 대한 중앙정부의 기본 방침과 정책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콩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시 주석은 이날 “행정장관의 인선 방안에서 중앙의 신임과 중국을 사랑하고 홍콩을 사랑하는 인사를 뽑는 것이 핵심”이라며 “보통선거는 균형과 참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전인대 선거안은 후보자 수가 당선자보다 많은 상태에서 치르는 중국식 차액선거의 변형이다. 문흥호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장은 “후보자와 당선자 수를 동수로 하는 등액선거가 일반적이었던 중국에서 차액선거가 도입된 것은 민주화를 의미하지만, 폭넓게 자유를 누리던 홍콩인들은 정치 퇴보로 여기고 있다”며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전인대 안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느긋하다. 중국의 협상 특기인 ‘시간은 내 편’ 전략을 구사 중이다. 데이비드 램턴 미국 존스홉킨스대 중국연구소장은 올해 초 펴낸 저서 『지도자를 따라서』에서 ‘일국양제’를 중국식 협상술이라고 풀이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상대와 협상할 때 기본 원칙, 정책, 목적, 제안 등을 내놓는다. 대만·홍콩 문제에 있어 ‘하나의 중국’은 원칙이다. 원칙을 건드리면 협상은 파탄난다. 평화 통일은 목적이다. 이에 따르면 ‘일국양제’는 원칙도 정책도 아니다. 단지 제안에 불과하다. 협상이 가능한 대상이라는 의미다. 이 때문에 홍콩 범민주파가 독립을 언급하며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건드릴 경우 중국은 강경책도 불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사회 불안정으로 홍콩 경제 추락 우려
변수 중 하나는 경제다. 정세가 불안해지면 아시아의 금융 허브 중 하나인 홍콩 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진다. 이럴 경우 홍콩과 중국 모두가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 안정을 어떻게 조화롭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향후 홍콩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고 분석한다. 현재 중국과 홍콩의 경제협력 강화방안도 적극 시행되고 있다. 특히 다음 달 13일부터는 상하이와 홍콩거래소 사이의 교차 매매를 허용하는 ‘후강퉁(滬港通)’이 시행된다. 위안화 세계화의 전진기지로 홍콩을 활용하겠다는 전략의 확대 조치다. 광저우(廣州)·홍콩·마카오를 묶는 주장(珠江)삼각주 일체화 전략도 진행 중이다. 시진핑 이후 총서기직을 노리는 후춘화(胡春華) 광둥(廣東)성 당서기가 주도하고 있다. 그의 전략은 이를 성공시켜 포스트 시진핑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추리번 총편집장은 “홍콩 민주화 세력은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개혁파와 힘을 모아 중국의 민주화에 자극을 줘야 한다. ‘일국양제’를 ‘일국양제(一國良制·좋은 체제로 다스려지는 한 나라)’로 바꿔 14억 중국인 모두가 동일한 민주·자유·법치라는 긍정적 에너지를 가진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홍콩의 권위지인 명보는 최근 사설에서 “홍콩은 사회적 컨센서스를 모아 경제를 재건해 홍콩의 가치를 높여야만 다음 단계에서 민주화 진전을 일궈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굴기(崛起)하는 중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인접국으로 생존하려면 자신의 협상 실력을 높이는 길뿐이란 얘기다.

신경진 기자 xiaokang@joongang.co.kr

천안문 사태 25주년, 당신이 본 적 없는 25장의 사진들

천안문 사태 25주년, 당신이 본 적 없는 25장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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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 춤추는 아이. 아래 사진들은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 사태의 광경들이다.
25년 전인 1989년, 중국 베이징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는 몇 주에 걸쳐 계속됐지만, 중국 당국은 1989년 6월 4일 베이징 도심에서 잔인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백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된다.
아래 사진들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민을 향해 마구잡이로 발포하고 장갑차로 학생들을 깔아뭉개기 직전, 천안문 광장에서 베이징 시민들이 보낸 겨우 며칠 간의 행복한 시위 현장이다. 마치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연상케 하는 놀라운 사진들이다.
아래 사진들이 찍힌 직후, 천안문은 곧 피로 물들었다.
  • 1
    모택동 초대 주석의 초상화에는 페인트가 칠해졌다.
  • 2
    학생들은 광장에 '민주주의 여신상'을 만들었다.
  • 3
    그리고 이 동상은 그들의 투쟁을 상징했다.
  • 4
    1989년 6월 1일,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웃는 얼굴로 춤을 췄다.
  • 5
    학생들은 관제신문을 불태웠다.
  • 6
    베이징의 군인들은 시위에 우호적이었다.
    이후, 무력탄압에 동원된 해방군 부대는 '베이징에 지인이 없고, 베이징 시민에게 무차별 발포하는데 큰 저항감이 없다'는 이유로, 신장 자치구 등에서 차출된 군인들이 중심이었다. 마치 1980년 광주처럼.
  • 7
    광장에서 승리의 V사인을 그리는 사람들
  • 8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정부를 거부했다.
  • 9
    그건 마치 우드스톡 페스티벌처럼 다소 낭만적이기도 했다.
  • 10
    학생 지도자 왕단(王丹)이 거리에서 호소하고 있다.
  • 11
    단식투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 12
    그들에게 중국 정부는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 13
    언론이 곧 시위에 합류했다. 승리의 일보 직전이었다.
  • 14
    천안문 광장의 시위에는 여유와 유머가 남아 있었다.
  • 15
    사람들은 곧 다가올 승리를 축하하기 시작했다.
  • 16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 시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 17
    교육 실습생들도 손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 18
    광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 19
    개혁을 부르짖는 깃발들이 나부꼈다.
  • 20
    그러나, 평화로운 승리는 점점 불확실해졌다.
  • 21
    인민해방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 22
    부상자들은 리어카로 실려나갔다.
  • 23
    사망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 24
    시민들은 전차의 진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항했다.
  • 25
    그러나, 결국 시위는 끝이 났다.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 세계(kosmo)와 시민(polites)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에 대한 정의 어원적으로  르네상스 후기에 희랍어의 세계(kosmo)와 시민(polites)이 결합된 "세계시민"이라는 뜻의 cosmopolite(1595), cosmopolitan(1645)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는 같은 시기에 세계정신(esprit cosmopolite)에서와 같이 형용사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광범위한 형용사적 용법인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19세기 중반에야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코스모폴리탄의 일차적 의미는 지역적인 것을 넘어 국제적, 세계적인 사람과 준거를 가르키고 있다. 특히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용어의 역사는 그것이 민족/국민국가의 형성이나 민족주의 운동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것임을 말해주면서, 코스모폴리탄이 넘고자하는 경계가 영토적, 문화적, 언어적 경계였으며, 민족적인 것에 있지 않았음을 염두해둘 필요가 있다.

12,000년전 고대문명 - 터키 ‘괴베클리 테페’의 비밀

터키 ‘괴베클리 테페’의 비밀

2013.05.16 18:14 입력               http://sscn.kr/news/view.html?section=2&category=10&no=4128
▲1만 1600년 전 터키 남부 지방에 세워진 신전인 괴베클리 테페의 돌기둥들. 가장 큰 것이 높이 5.5m에 달한다. 전면에 있는 돌기둥에는 인물 형상이 새겨져 있다.(사진=내셔널 지오그래픽)

[시사중국] 1994년 가을,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터키 동남부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우르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약 14km 떨어진 긴 산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둥그런 지형이었다. 슈미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방대한 부싯돌부스러기를 발견했다. 수천 년 전에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사람이 모여 공동 작업을 한 장소임을 직감했다. 그는 곧 독일 고고학연구소와 우르파 박물관과 합작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건축 구조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괴베클리 테페의 ‘테페(tepe)’는 곧 테페이(teppay)라고 발음하는데 터키어로 ‘배꼽 언덕’이라는 뜻이다.

수십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겹겹이 둥근 원을 이루고 있으며, 인류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기존의 가옥구조 보다 더욱 크고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돌기둥들은 1만 1600년 전에 세워졌으며 기자 대 피라미드보다 7000년이나 앞섰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전(神殿)의 형태도 있다.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건축물이 세워진 시기에 세계 어디에도 이와 비교할만한 규모의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의 돌기둥이 다른 하나의 돌기둥을 받치는 형태는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톤헨지보다 약 2배는 오래됐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돌기둥엔 가젤과 뱀, 여우, 전갈, 멧돼지 등 동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괴베클리 테페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은 듯하다.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7000년이나 앞선 이 신전은 지금까지 전체 면적의 10분의 1도 발굴되지 않았다.

발굴 초기 슈미트 팀은 지면에서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돌을 발견했다. 계속해서 또 다른 돌들을 발견했는데 나중에는 여러 개의 직립된 돌기둥으로 형성된 원환(圓環)을 발굴해냈다. 몇 년 사이에 슈미트 팀은 두 번째의 돌기둥 원환을 발견했고 잇따라 세 번째, 뒤에는 더욱 많은 원환이 발견됐다. 그렇게 해서 2003년 탐사 결과, 발굴단은 적어도 20개의 원환이 복잡하게 겹쳐서 흙속에 묻혔다고 발표했다.

돌기둥은 매우 방대했다.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이고 무게는 16톤에 달했다. 돌기둥 표면엔 각종 동물 형상이 부조됐고 모양은 서로 다른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각이 거친 것을 비롯해 비잔틴 예술품처럼 정밀하고 상징적 의미가 풍부한 것도 있었다. 슈미트는 또 산자락의 여러 곳에서 고대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신석기시대의 칼, 도끼, 투척 무기 등 창고였다. 이 돌은 인근지역의 골짜기에서 운반해온 것이었다. 슈미트는 “이곳의 1, 2평방미터 범위 내에 널려있는 돌들은 많은 고고학자들이 기타지역 유적에서 발견한 것보다 더 많았다”고 말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해보면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은 몇 십 년에 한 번씩 돌을 묻고 새로운 돌기둥으로 대체하다가 이후 모든 원환이 부싯돌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또 부근에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반 유적지는 이렇게 발굴됐다가는 메워지고 다시 보수되는 식으로 몇 백 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5톤이나 나가는 석회암 기둥에 맹수 조각상이 돌출되어 있다. 이 석회암 기둥은 장인들이 인근 채석장에서 수레나 소ㆍ말 등 사육 짐승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운반해 온 것이다.

특이한 점은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의 신전을 보수하고 건축하는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환은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에서도 가장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모양이 갈수록 초라해졌고 대수롭잖게 설치된 듯했다. 게다가 기원전 8200년 경, 이 공정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졌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철저히 쇠락해졌고 더는 부흥하지 않았다.

발굴 과정에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돌기둥을 조각하고 건축하려면 필연코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했을 텐데 유적지 부근에는 수원(水源)조차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계곡의 물도 그곳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많은 인력이 또 거주해야 할 곳이 있어야 함에도 어떠한 벽이나 난로 혹은 주택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다. 다수의 인력이 반드시 취사를 했을 텐데 주변엔 경작을 한 흔적도 없었다.

슈미트는 그곳에서 어떠한 취사도구나 밥을 끓이던 잿더미나 여타 흔적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다만 유적지 부근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영양과 야생소의 뼈로 판단할 때 작업 인력은 먼 곳에서 야생동물을 조달해 식사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복잡한 활동은 반드시 책임 있는 조직과 감독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사회 계층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지배세력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치품이 부장된 흔적도 없고 계급을 나타내는 식사도구의 차이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T자 모양의 돌기둥에 세련되게 양각해 놓은 독수리, 전갈 따위의 동물 형상은 숙련된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도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괴베클리 테페에 참배했던 최초의 사람들은 문자나 금속과 도자기 등이 없는 사회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괴베클리 테페가 세워진 시기 대다수 인류는 아직 소집단으로 유목생활하고 있었고 식물을 채집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기 위해서 신전을 구축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수레바퀴나 짐을 나르는 가축도 없이 16톤이나 되는 돌을 수백 미터의 먼 거리에서 자르고 날라서 이곳에 세워 놓을 수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이를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쟁 또한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기존 과학계를 뒤집는 인류 이전 과거의 유물로서 가장 중요한 곳임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고고학자들은 신석기혁명이 발생된 시간과 지점, 대체적인 과정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발견이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기존의 역사 시기 분류와 관련한 학설을 뒤집어야만 하는 인류사적 고민에 직면해 있다.


허민 sscn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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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ototour.tistory.com/1815

고고학자들 멘붕중... 12,000년전 고대문명.





터키에서 발견된 12,000년전 유적지.


그 시대는 농경생활 초기 또는 수렵기인데 ...
반듯하게 잘려진 돌기둥
세세하게 묘사한 동물상
양각의 조각이 가능했던 기술
원형의 건축물구조 및 집단주거의 흔적,
오벨리스크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키 높이를 뛰어넘는 놈이의 석축기둥? 지지대? 오벨리스크? 같은 것들까지.

그런데 더욱 멘붕을 일으키게 하는 건... 상세한 별자리까지 묘사!!!


역사학자 및 고고학자들 제대로 멘붕!!!

공룡털 사건 이후 정말 많이 터져서 역사학자들 머리 아프게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