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6일 금요일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 야쿱벡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上>
(지해범의 ‘중국 벗기기’)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上> 한때 唐을 호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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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소녀.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수가 놓인 스카프를 둘렀다. 이 해맑은 웃음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당(唐)나라 시인 왕지환(王之渙)은 그의 시‘양주사(凉州詞)’에서 지금의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하는 서역(西域)의 삭막함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黃河遠上白雲間(황하는 멀리 흰 구름사이를 오르고)
一片孤城萬仞山(만길 높은 산에 한조각 외로운 성곽)
羌笛何須怨楊流(강족의 피리는 어찌 절양류곡을 연주하며 원망하는가)
春風不度玉門關(봄바람이 옥문관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을…)
옥문관은 양관(陽關)과 함께 만리장성이 끝나는 변방의 요새이다. 지금의 돈황(敦煌) 서북쪽 98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옥문관을 벗어나면 더욱 황량하고 넓은 사막이 기다린다. 이 시는 당나라 때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이 현지 강족(羌族)의 피리를 불며 외로움과 고난을 견디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시의 ‘春風’은 당의 풍요함을 상징한다. 이 시를 통해 당시 중국 사람들이 옥문관 밖의 지역을 얼마나 삭막한 땅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같은 당대의 시인 왕유(王維)도 ‘원이를 안서 땅으로 보내며(送元二使安西)’란 시에서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벗이 없으리니)’라고 읊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먼 길을 떠나는 벗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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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문관의 유적. 흙과 갈대 등으로 쌓아올린 이요새는 1000년 이상의 풍우를 견뎌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만큼 신강위구르지역은 그 옛날부터 중국인들이 두려움의 눈길로 바라보던 땅이다. 이곳의 중심지인 우루무치 공항에 내리면, 맨 처음 드는 인상은 ‘이곳은 한족의 땅이 아니다’는 것이다. 1996년 여름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도로의 간판, 식당에서 풍기는 음식냄새는 북경이나 남경에서 접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중국 국토의 17%를 차지하는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위구르·카자흐·타지크 등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종족들이다. 이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실크로드의 한 가운데서 동서교역의 중계자 역할을 하면서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일구어왔다. 너무나 이질적인 이 지역을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7월3일자에서 ‘차이나스탄(Chinastan)’이라고 이름붙였다. 중국의 ‘차이나’와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명에 공통적으로 붙는 땅이란 뜻의 ‘스탄’을 합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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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바를 쓴 위구르족어른들>
이 지역 소수민족 중에 인구가 가장 많은 위구르족(965만명)은 외모부터 중국인과 판이하다. 이들은 피부색이 흰 편이며 눈썹이 짙다. 남자들은 수염을 잘 기르며 ‘돕바’라는 사각 모자를 하루종일 쓰고 다닌다. 여자들은 빨강 노랑 파랑 등 원색옷을 즐겨 입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지만,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처럼 부르카로 온몸을 감싸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도시의 젊은 위구르족 여성들은 술을 마시기도 하고 몸에 달라붙는 패션을 즐기기도 한다. 같은 이슬람권이면서도 경직된 종교규범을 따르는 중동과 달리 이들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롭다. 위구르족은 고유의 언어는 물론, 종교와 일상이 결합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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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식 볶음밥과 양고기>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지않는 대신 양고기를 즐겨먹는다. 볶음밥에 구운 양고기를 얹어 먹거나 양꼬치로 만들어 먹는다. 이 양꼬치는 이들의 특색음식으로 자리잡아,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중국 대도시의 골목길에 밤이 오면 돕바를 쓰고 가로로 길쭉한 직사각형 철제 화덕에 숯을 넣고 그 위에 양고기 꼬치를 구우며 이들 특유의 향료를 뿌리는 냄새가 진동한다. 이 양꼬치에 맥주 한잔이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
위구르족들은 식사가 끝나거나 손님이 찾아오면 차에 양우유를 탄 ‘밀크티(女乃 茶)’를 즐겨 마신다. 양우유의 구수함과 차의 씁쓸함이 섞여 독특한 맛을 낸다. 쓴 맛을 줄이기 위해 굵은 각설탕 덩어리를 넣어준다. 사막의 찬바람을 맞은 뒤 뜨거운 양우유차를 마시면 온 몸이 사르르 녹는다.
http://blogs.chosun.com/hbjee/2009/07/16/%ED%99%94%EB%A0%A4%ED%96%88%EB%8D%98-%EC%9C%84%EA%B5%AC%EB%A5%B4%EC%9D%98-%EC%97%AD%EC%82%AC%EB%8A%94-%EA%B0%80%EA%B3%A0-2/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下>
화려했던 위구르의 역사는 가고<下>독립기회를 놓친 위구르족
지해범 조선일보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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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보이는 위구르 톡립전사>
지금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변방에서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위구르족들에게도 화려했던 역사는 있었다. 이 땅은 넓은 사막에 드문드문 오아시스가 있어 오래 전부터 유목민족들이 이동하며 살던 곳이다. 오아시스는 천산(天山)산맥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사막의 땅 속을 흐르다 낮은 지대에서 모래를 비집고 나와 습지대를 형성한 것이다. 천산 자락에는 백두산 천지(天池)와 같은 이름의천지가 있지만,계곡을 막아 만든 호수이다.
이 넓은 지역을 이동하며 살던 위구르족들은 오랫동안 훈족 돌궐족 티벳족의 통치를 번갈아 받았다. 그러던 위구르족이 처음으로 독립국가를 세운 것은 서기 744년이다. 중국에는 당(唐)이 있던 때이다. 몽골 오르콘강 기슭에서 일어난 위구르왕국은 북으로는 바이칼호수에서부터 남으로는 인도, 동으로는 중국 감숙(甘肅)에 이를만큼 그 영역이 광대했다.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보다 넓은 땅이다. 위구르왕국은 국력도 강성하여 당이 거란의 공격을 받았을 때 당을 지원해주고 매년 비단 2만필의 조공을 받았다고 한다. 또 당 황제는 위구르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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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족들의예배모습>
840년 이 거대한 왕국은 3개로 쪼개졌다. 지금의 감숙성을 중심으로 한 ‘감숙위구르 왕국’, 투루판 지역을 근거지로 한 카라코야 왕국(불교국가),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한 카파카니드 왕국(이슬람국가)이 그것이다. 카라코야 왕국과 카파카니드 왕국은 1397년 통합했다. 이 왕국들은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다. 당시 이 왕국은 ‘흉노’ ‘돌궐’ 등으로 불렸다.
1759년 만주족 정권인 청(淸)이 위구르를 침략, 두 왕국을 무너뜨리고 1826년까지 지배했다. 나라를 빼앗긴 위구르족들은 이 시기 무려 42차례나 독립운동을 펼치지만 실패했다. 그러다가 1863년 위구르족의 새로운 지도자 ‘야쿱벡’이 중심이 되어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청군이 위구르군에 패퇴한 것은 북경의 청조가 아편전쟁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세에 시달리느라 변방 수비에 신경쓸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야쿱벡의 독립왕국은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노리던 영국과 러시아, 오토만제국 등에 의해 국가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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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의 지도자 야쿱벡>
그러나 1876년 야쿱벡 군대는 좌종당(左宗棠)이 이끄는 청 군대에 무너졌다. 당시 야쿱벡은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 주변국들은 청나라에 패배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야쿱벡은 협상을 하자는 좌종당의 작전에 말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청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위구르족 입장에서는 독립을 쟁취할절호의 기회를 놓쳐, 천추의 한이 되고 만 것이다. 청은 다시 정복한 이 땅을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로 ‘신강(新疆)’이라고 명명했다. 중국인들 스스로 ‘새로운 영토’라고 이름붙였으니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가 그리 길지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좌종당은 이 때 왕지환(王之渙)의 시 ‘양주사(凉州詞)’ 뒷부분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羌笛無須怨楊流(강족의 피리는 슬픈 절양류곡을 연주하며 원망할 필요 없느니)
春風已度玉門關(봄바람은 이미 옥문관을 넘었도다)
좌종당.jpg<左宗棠>
청의 군대가 옥문관을 넘어 신강이 중국 땅이 되었다는 얘기다.(※‘봄바람이 옥문관을 넘었다’는 마지막 구절은 훗날 청춘남녀가 ‘선’을 넘었음을 상징하는 구절로 애용된다. 가령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다가, 자식이 “春風已度玉門關”이라고 얘기하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 시에 등장하는 강족은 옛날 감숙성 부근에 살던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인구는 겨우 30여만명에 불과하며, 지금은 사천성 서북쪽 민강(岷江)부근에 집거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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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상을 입은 강족 처녀>
청의 지배는 70여년 이어지다가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뒤 변방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4년, 위구르족들은 일리(중국명 伊犁)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동투르키스탄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제대로 국가모습도 갖추지 못한 임시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자는 주석파와 중국과 타협하여 생존을 도모하자는 부주석파로 양분돼 내분을 겪고 있었다. 1949년 중국땅에 국공내전이 끝나고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임시정부 주석은 해외로 망명하고, 부주석 세력은 중국에 투항하고 말았다.
위구르 자치구의 3대 소수 민족 가운데 카자흐족과 타지크족은 중국 영토 바깥에 각기 ‘카자흐스탄’과 ‘타지키스탄’ 등 독립국가를 세웠으나, 위구르족만은 나라없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위구르인들은 13억 중국인 속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7월5일의 폭동은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핍박의 설움’이 터져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이슬람)생활에 대한 중국정부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고, 이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경제권마저 빼앗기자 생존의 위기를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충돌로 많은 한족이 목숨을 잃었고, 경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적지않은 위구르족들도 총에 맞아 숨졌다. 중국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는 197명이지만, 세계위구르회의는 최대 8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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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벌어지는 위구르 내몽골 등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 플래카드에 "중국은 모든 민족정치범을 석방하라"는 글이 쓰여있다.>
주목할 현상은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 순식간에 집결한 시위대가 중국 경찰이 대응할 틈도 주지않고 길거리에서 한족(漢族)을 무차별 공격했다는 점이다. 또 위구르족 독립투쟁 세력의 일부는 아프가니스탄 산악지역에 은거한 알카에다와 연계하여 테러리스트 양성과 무기지원 등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카에다는 이미 중국정부에 대한 ‘보복’을 선언했다. 앞으로 북경 상해 등 대도시에서 알카에다식 자살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앞으로 중국 당국의 ‘비상경계일’이 늘어나게 됐다. 3월14일 티벳사태 발발일(2008년3월14일)과 6월4일 천안문(天安門)사태 기념일(1989년6월4일), 그리고 7월5잃 위구르 사태 발발일(2009년7월5일). 중국 정치가 시험에 드는 날도 많아졌다./조선일보 지해범 전문기자 hbjee@chosun.com

2014년 9월 25일 목요일

20세기 이야기: 1990년대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 흥청대다 맞은 위기_국내 / 인터넷 휴대폰 혁명_국외, 김정형 ,


20세기 이야기: 1990년대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 흥청대다 맞은 위기_국내 / 인터넷 휴대폰 혁명_국외


김정형 지음 | 답다출판 | 2014년 09월 15일 출간

책소개

‘20세기 이야기’는 국내와 국제 문제를 함께 소개해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도록 구성했다. 1990년대는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세계를 무대로 한 우리 젊은이들의 빼어난 활약상이다. 소련·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이른바 북방외교가 마침내 결실을 본 것도,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금강산을 관광하는 등 남북관계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것도 1990년대다. 하지만 6·25전쟁 이래 최대 국난인 IMF 환란을 겪고 5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삼풍백화점 붕괴로 우리의 치부가 전 세계에 까발려진 10년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는 인터넷·휴대폰 혁명이 일어나 사회적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냉전이 종식되고 WTO 시대가 도래해 세계는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았다.

저자소개

저자 : 김정형

저자 김정형은 ‘역사 속의 오늘’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1년(2002.12~2003.11), 주간조선에 2년(2004.9~2006.8) 연재하고 CBS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방송전파(2006.6~2006.7)를 탔다. 책 제목 역시 ‘역사 속의 오늘’(생각의 나무, 전2권, 2005)이다. 월간지 뉴스메이커에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이란 제목의 글을 2010년부터 연재하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광고와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편집국 조사부로 입사해 지금은 독자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목차

《1990년》

한국?소련 수교
국내 인터넷 시대 개막과 전길남 ※TCP/IP
장영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이창호 국수위(位) 등극
동?서독 통일과 헬무트 콜
걸프전과 사담 후세인
파바로티?도밍고의 ‘스리 테너’ 공연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강경대의 죽음과 학생운동권의 분신 투쟁사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김수현과 '사랑이 뭐길래' 최고 시청률 기록 ※이순재
두산전자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
소련 소멸 ※발트 3국 독립과 독립국가연합 창설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박스 :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전쟁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팀 버너스 리 ‘WWW(월드와이드웹)’ 첫 공개
리누스 토발즈 ‘리눅스’ 소스 코드 공개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 NBA 첫 우승 ※윌트 체임벌린과 압둘 자바
쿠르드족 독립 위한 무장봉기 실패

《1992년》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당선
한국?중국 수교
PC통신 천리안?하이텔 서비스 시작 ※이우혁과 퇴마록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 ‘난 알아요’ 발표
한경직 목사 템플턴상 수상
‘로드니 킹 사건’과 LA 흑인 폭동
리우 환경회의 개막
다베이 준코 여성 최초 7대륙 최고봉 등정

《1993년》

금융실명제 전격 단행
이건희 회장 신경영 선언
김정일 세습정권 승계
임권택 감독 영화 ‘서편제’ 개봉
강수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입단 후 첫 주역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 출간
최열과 환경운동연합 창립
유명우 세계 복싱 챔피언 18차 방어 성공 후 은퇴
현정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첫 그랜드슬램 달성 ※남북 단일팀, 덩야핑
서봉수 응창기배 우승
한비야 세계 일주 여행 출발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마스트리흐트 조약 발효와 유럽연합(EU) 출범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취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동평화협정 조인
마크 앤드리슨 웹 브라우저 ‘넷스케이프’ 개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분리 독립

《1994년》

김일성 사망
삼성전자의 애니콜과 갤럭시S
주사파의 커밍아웃과 연세대의 한총련 사태
박경리 장편소설 ‘토지’ 25년 만에 탈고
김민기 연출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초연
장한나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 우승
참여연대 창립
이영희 한국인 최초로 파리에 개인 부티크 오픈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과 WTO 체제 출범 ※도하 개발 어젠다(DDA)
남아공 첫 흑인 참여 총선과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
에릭 홉스봄 4부작 ‘시대’ 시리즈 완간
영?불 해저터널 개통
앤드루 와일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증명
러시아, 체첸 침공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취임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르완다 동족 대학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박스 : 성수대교 붕괴
중앙일보 인터넷신문 창간과 독립형 인터넷신문
케이블TV 개국과 TV홈쇼핑
허영호 7대륙 최고봉 완등과 3극점 도달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한국어판 출판
김광석 소극장 1,000회 공연과 ‘노찾사’
장사익 1집 음반 '하늘 가는 길' 발매
윈도 95 첫 출시
‘토이 스토리’ 개봉과 픽사

《1996년》

디지털 이동통신 CDMA 방식 세계 최초 상용화 ※세계 최초 휴대폰
박찬호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첫 승
2002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유치 ※4강 신화와 거스 히딩크
부산국제영화제 개막과 김동호
이수만과 아이돌 그룹 'HOT' 데뷔 ※양현석과 박진영
로버트 김 미 FBI에 체포
영국의 광우병 파동과 인간광우병(vCJD)
이언 윌머트와 복제양 ‘돌리’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출간
알렉산드르 카렐린 올림픽 레슬링 3연패


《1997년》

한보철강·기아자동차 부도
IMF 환란 ※금 모으기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당선
대법원 ‘성공한 쿠데타’ 유죄 판결
윤호진 연출 뮤지컬 ‘명성황후’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래리 페이지?세르게이 브린, 구글 도메인 등록
조앤 롤링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출간
타이거 우즈 프로 데뷔 후 첫 우승
가리 카스파로프, 컴퓨터와의 체스 대결에서 패배
유엔 기후변화협약 총회 ‘교토의정서’ 채택

《1998년》

정주영의 소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
북한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 발사
박세리 미 LPGA 첫 우승
박근혜 국회의원 첫 당선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취임
스타크래프트 게임과 e스포츠 열풍
온라인게임 '리니지' 출시 ※김정주, 김택진, 송재경
소극적 안락사 유죄 선고한 보라매 병원 사건 ※김 할머니 존엄사 논쟁
잭 키보키언의 안락사 논란
비아그라 시판
미 하원 ‘섹스 스캔들’ 클린턴 대통령 탄핵안 가결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당선


《1999년》

황우석과 복제소 ‘영롱이’ 탄생
김우중의 대우그룹 몰락
O양·B양 비디오 공개 파문
이해진의 네이버 창업과 국내 포털 간 경쟁 ※김범수
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 ※NLL(서해 북방한계선)
‘개그 콘서트’ 방송 시작
강제규 감독 영화 ‘쉬리’ 개봉
심형래 연출 영화 ‘용가리’ 개봉
우리별 3호, 무궁화 3호, 아리랑 1호 발사
Y2K 소동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
SOFA(주한미군지위협정) 2차 개정 ※효순·미선
이봉주 한국 마라톤 최고기록 수립 ※황영조
태권도 시드니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김운용
엄홍길?박영석, 히말라야 14좌 완등 ※한왕용, 김재수, 김창호
안티조선의 공세와 조선일보의 대응
오연호 '오마이뉴스' 창간
게놈 프로젝트 초안 완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당선

책 속으로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1991년)
…재야와 운동권은 검찰 발표를 부정하며 유서 대필 논란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규정했다. 유서를 둘러싼 진위 논쟁은 각종 정황 증거와 방증 자료를 내놓는 양측의 신경전으로 지루하게 전개되었다. 공방이 어느 쪽의 승리로 귀결되든 다른 한쪽은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는 점에서 양측의 공방은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련 소멸 (1991년)
…12월 17일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사실상 수명이 다한 연방 해체를 확정지었다. 12월 21일 독립국가연합이 결성되고 12월 25일 고르바초프마저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소련은 실체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라는 비극적 유산을 남긴 채 74년의 역정을 마감한 것이다. 소련의 소멸은 20세기 내내 국제 질서를 왜곡해온 냉전 체제의 완전 청산을 의미했다. 또한 인간의 창의와 자유를 말살한 통제 체제가 결코 민주정치체제를 능가할 수 없음을 역으로 증명해 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 ‘난 알아요’ 발표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할 무렵의 젊은 세대는 식민지와 전쟁과 독재의 상처를 간직하지 않은 첫 세대로 자기 표현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탈이념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문화적으로 '새것'에 목말라했다. 경제적 풍요 덕에 사고는 자유로웠고 갓 피어난 디지털 문화의 시각적 자극에 익숙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과거 어느 또래 집단보다 많은 용돈과 소비 성향을 가졌으나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이 거대한 10대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수년 만에 문화 시장의 최대 소비자로 등장시켰다.…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외신은 “테러도 아니고 건물이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은 건축공학사의 충격”이라며 “선진국이 200년 동안에 달성한 것을 20년 만에 축약해 달성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일본 언론은 “성수대교를 잊었다”며 망각을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토록 충격적인 성수대교 붕괴를 불과 8개월 전 겪고도 달라진 게 없다는 뼈아픈 비판이었다.…

박찬호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첫 승 (1996년)
…어느덧 박찬호는 단순한 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낯선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한 국내 첫 개척자였고 야구 선수뿐 아니라 많은 청소년의 롤모델이었다. 국내에 생중계된 박찬호의 역투 모습은 그 무렵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 외환위기로 자신감과 활력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우리도 하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영국의 광우병 파동과 인간광우병 (1996년)
…광우병 쇠고기를 먹은 사람이 인간광우병에 걸린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광우병 소를 먹게 해 vCJD가 발병하는지 여부를 의학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실제로 그 같은 시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vCJD 환자는 감염경로가 분명치 않은 상태다. 그런데도 변종 프리온에 오염된 쇠고기가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든 것은 쇠고기를 즐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인간광우병에 걸릴 가능성이 3.5배나 높다는 조사 결과 때문이다.…

IMF 환란 (1997년)
…한국 경제는 격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고통은 컸고 후유증은 심각했다. IMF 구제금융 신청을 전후로, 1997년 당시 30대 그룹의 절반가량이 간판을 내리는 등 부실기업들이 줄줄이 퇴출되었다. 대기업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신화도 일순간에 무너졌다. 30%가 넘는 고금리에 중소기업들은 주저앉았고 영세상인들은 가게문을 닫고 길거리로 내몰렸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1997년)
…정치적으로는 야당, 지역적으로는 호남, 학력으로는 상고 출신의 마이너리티였다. 이 때문에 늘 권력과 기득권층의 견제와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호남 사람들이 보내는 무한의 신뢰와 야당 지지자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얻어 질긴 생명력의 인동초가 될 수 있었다.…

대법원 ‘성공한 쿠데타’ 유죄 판결 (1997년)
…대법원이 “성공한 쿠데타라고 해도 군사 반란 및 내란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결함으로써 12․12 사건은 군사 쿠데타로, 5․18 사건은 내란 목적 살인 행위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는 굴절되고 왜곡된 역사에 대해 분명한 청산 과정 없이 넘어가기만 했던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 하나가 공식적으로 청산되었음을 의미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과 e스포츠 열풍 (1998년)
…스타크래프트 발매 당시 한국에서는 IMF 외환위기 후 저자본 창업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PC방은 그 중 대표적인 아이템이었다. 청소년들은 집의 PC보다 성능이 월등하게 좋은 PC방을 선호했다. 그 덕에 1998 닫기

출판사 서평

‘20세기 이야기’는 20세기 100년을 10년 단위로 끊어 총 10권으로 기획한 20세기 100년사다. 후세에 영향을 미치거나 의미가 있는 각 분야의 사건·사실·인물들을 추려내 원인, 과정, 결과, 의미 등을 군더더기 없이 알기쉽게 기술했다. 분량은 권 마다 600페이지가 넘는다. 이번에 1990년대를 발간함으로써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이어 현대편(1940∼2000년) 전6권을 완간했다.

‘20세기 이야기’는 ‘상식’과 ‘균형’을 두 축으로 삼는다. 빛과 그림자는 늘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입각, 독선과 독단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주의·주장을 균형있게 종합하고 조명했다. 각 시대마다 세계와 대한민국의 변화·발전 과정을 함께 기술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세계와의 격차를 어떻게 좁혀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이 추구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기존의 현대사 책들이 국내 문제만 다뤄 좁은 시야에 갇혀있는 것과 달리 ‘20세기 이야기’는 국내와 국제 문제를 함께 소개해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도록 구성했다. 이런 성격의 책은 국내 처음이다.

1990년대는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세계를 무대로 한 우리 젊은이들의 빼어난 활약상이다. 소련·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이른바 북방외교가 마침내 결실을 본 것도,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금강산을 관광하는 등 남북관계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것도 1990년대다. 하지만 6·25전쟁 이래 최대 국난인 IMF 환란을 겪고 5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삼풍백화점 붕괴로 우리의 치부가 전 세계에 까발려진 10년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는 인터넷·휴대폰 혁명이 일어나 사회적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냉전이 종식되고 WTO 시대가 도래해 세계는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았다.

《출판사 리뷰》

1990년대를 설명하는 특징 중 하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패기와 자신감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주눅부터 들었던 기성 세대와 달리 젊은이들은 세계화를 몸소 체험하며 넘치는 파이팅으로 자기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스포츠에서 활약상이 뛰어났다. 박찬호가 국내 최초로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 진출, 뛰어난 활약상을 펼치고 박세리는 미 LPGA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황영조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한국인으로는 56년만에 월계관을 머리에 썼으며 유명우는 WBA 주니어플라이급 18차 방어에 성공했다.
문화예술적으로는 장영주, 장한나, 강수진의 활약상이 돋보였고 대중문화계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HOT 등 새롭게 등장한 아이돌 그룹이 가요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김정주, 김택진, 이해진, 김범수 등 IT 분야의 386세대들은 세계적인 IT산업 부흥에 편승, 국내 포털 사이트와 게임에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고 부를 쌓았다. 언론 분야에서는 종이에서 벗어나 디지털로 무장한 언론이 대안 매체로 부상했으며 영화사적으로는 ‘서편제’와 ‘쉬리’가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획을 긋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자리매김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정착되고 한반도의 냉전 종식을 위한 북방외교가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중국과 수교하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한반도가 냉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졌다. 남북 간에도 해빙 무드가 찾아와 정주영의 소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이 이뤄지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으로는 분단 이후 처음 만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김영삼·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군사정치라는 구각에서 벗어난 문민정치의 신호탄이었다.
경제적으로는 해방 후 최대 경제 위기가 엄습했다.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부도가 촉발한 IMF 경제위기는 성장 일변도의 한국 경제에 경종을 울렸으며 이 과정에서 대마불사의 상징이던 대우그룹 등 10여개 대기업이 몰락했다. 살아남은 기업들 중 삼성은 휴대폰과 반도체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서고 현대는 자동차에서 세계 자동차업계 빅5로 올라섰다.
세계적으로는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인터넷혁명이 일어났다. WWW(월드와이드웹)과 넷스케이프는 인터넷혁명의 발원지 역할을 하고 윈도95와 구글은 혁명의 전달자이자 수혜자로 세계 IT산업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소련이 소멸하고 동서독이 하나가 된 것은 냉전 종식의 마침표였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 넬슨 만델라 남아공 첫 흑인대통령,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도 1990년대였다.
경제적으로는 전후 50년간 세계경제 질서를 지탱해온 GATT 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다자간 무역기구 WTO 시대가 막을 열었다. 생명계에도 천지개벽하는 변화가 일어나 복제양 ‘돌리’가 탄생하고 비아그라가 개발되었으며 게놈 프로젝트 초안이 완성되는 등 인류는 일찍이 걸어보지 못한 미답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언론 평》

▶군살을 뺐으면서도 심도(深度)를 놓치지 않았고,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면서도 균형을 갖췄다. (조선일보 2013.5.18)
▶20세기를 ‘무한질주의 시대’로 규정하고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발자취를 꼭지별로 정리했다. (연합뉴스 2012.12.14)
▶백과사전과 달리 신문 기사처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서. 페이지별로 정리한 기존의 책과 달리 연도별로 정리한 독특한 색인도 장점이다. (한국일보 2012.12.14)
▶20세기 100년사를 10년 단위로 총 10권의 책에 나눠 서술한 전집. 국내외에서 일어난 과학, 산업, 정치, 경제, 전쟁, 문화, 예술, 스포츠, 학문, 언론 등을 망라했다. (동아일보 2012.12.22)
▶로마 역사의 콜로세움을 세웠다는 평을 받고 있는 ‘로마인 이야기’의 콜로세움에 비견할만하다. (기자협회보 2012.12.26)
▶뜨거웠던 20세기 100년의 연대기적 기록이다. 군살과 군더더기를 빼고 20세기 인물과 각종 사건·사고를 씨줄과 낱줄로 엮었다. (월간조선 2013.1)
▶진보·보수 양쪽의 주장을 균형있게 조명하면서 딱딱한 역사 총론서가 아닌 사람과 세상사는 이야기 위주로 풀어냈다. (미디어오늘 2013.5.29)
▶만시지탄. 진즉에 나왔어야 할 책이 21세기도 10년이나 더 지난 이제야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 과문인지는 몰라도 20세기 전체를 10권 분량으로 조망한 이런 성격의 책은 선진 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뉴스메이커 2013.1)
▶20세기의 세계적인 대격변 속에서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20세기를 책으로 엮었다. (PD저널 2012.12.14)
▶저자는 사회가 건강하려면 보수와 진보라는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두 입장 모두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소중한 두 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일신문 2012.12.14)
▶20세기 100년 동안 국내외에서 일어난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모든 것을 망라한 책. 후세에 영향을 미쳤는지, 선구적 업적인지, 새로운 흐름인지 등을 기준으로 삼았다. (매일경제 2012.12.15)
▶소소하지만 문화적으로 의미있는 일까지 국내·외 모든 분야의 근?현대사를 망라했다. (스포츠경향 2012.12.15)
▶전 세계가 무한질주했던 20세기의 발자취와 한국의 추격을 담았다. (한국경제 2012.12.14)
▶흔히 개발, 독재, 민주화 등 큰 단어로 부르는 시대가 사실은 얼마나 다양하고 의미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집합으로 이뤄졌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일보 2012.12.15)
▶시대별로 핵심적인 내용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술술 익힌다. (노컷뉴스 2012.12.16)
▶원고지로 2만 2000장. 이런 종류의 책은 국내 처음이다. (주간조선 2013.1.6)

단군 기원을 말하다, 백상태

단군 기원을 말하다


백상태 지음 | 주류성 | 2014년 10월 03일 출간

책소개

담암은 원과 명이라는 중국대륙에서의 물리력 교체기, 불교와 성리학이라는 국내에서의 사상적 전환기에 자주의식 제고와 민생안정을 통해 우리삼한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일 뿐 아니라 미래와의 대화이기도 하다’는 전제를 시인하자면 담암의 이러한 인식과 주장은 이 공간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소개

저자 : 백상태

저자 백상태는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중퇴했다. <월간독서>·<소설문학> 등 잡지사 기자, <다리> 편집장을 거쳐 동아그룹 홍보담당 이사·동아건설 상무(문화홍보실장), 경기도청 도정홍보전문위원을 지냈다. 198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하여‘어떤 묘(墓)’, ‘그 여름’, ‘냄새 고(考)’, ‘수입리에서’등의 소설 작품과 <가헌 우상기 평전>, 다수 기업의 사사·단체사를 썼다. 대학시절 긴급조치·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극한상황에 처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동양고전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지한(止漢) 이준녕으로부터 한학과 유학경전을 배웠다.

목차

목차 / 04
서문 / 09

01. 꿈을 꾸다
1. 잉량화 마을 / 19
2. 지화명이 괘(卦) / 22
3. 상경 / 42

02. 담암의 선조와 가계
1. 이름에 얽힌 설화 / 52
2. 시조의 출자와 고려시대의 백씨 본관 / 55
3. 담암의 본관 대흥(大興)이 갖는 의미 / 63
4. 백씨와 울릉도, 그리고 영해 / 72

03. 담암의 가족
1. 아버지 백견(白堅)과 어머니 영해박씨 / 83
2. 부인 평해황씨와 다섯 아들 / 90
3. 담암의 형제들과 처가 형제들, 그리고 그 후예 / 98

04. 담암의 시대
1. 교체의 시대- 원·명 교체기 / 106
2. 변화의 시대-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 112

05. 담암과 그 시대 사람들
1. 그의 스승 ./ 130
2. 그의 동방·동문·선후배 / 148
3. 그의 문하생 / 165

06. 부정삼한(復正三韓)과 담암
1. 날카로운 사론(史論) / 180
2. 간관의 길 / 184
3. 관동 존무사, 사선랑(四仙郞)을 그리다 / 190
4. 부정삼한을 꿈꾼 정치도감 시절 / 193
<정치도감> <정치관> <배원(排元)의 단초> <정치도감 활동의 좌절>

07. 일국경시(一國更始)와 담암
1. 광주목사와 종부령 시절 / 213
2. 10과 중심 천거제와 인사행정의 개혁을 주장하다 / 217
3. 전리판서로 서연관이 되고, 보인당(輔仁堂)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 226
4. 반원(反元)개혁 국면과 <국사> 집필 / 231

08. 자주성 회복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위해
1. 공민왕 중기 개혁 앞에서 / 239
2. 경세제민을 위한 9조목 차자(箚子) / 249
<논 전주> <논 경리> <논 조세> <논 농상> <논 염법>
<논 차대> <논 녹봉> <논 상고> <논 휼형>

09. 단군기원을 최초로 쓴 상소
1. 상소 무렵의 정치적 상황과 척불소(斥佛疏) / 271
2. 척불소의 주지(主旨) / 276
3. 척불소가 끼친 영향 / 302

10. 담암과 나옹(懶翁)
1. 도(道)가 다르지만 나옹의 어록에 서문을 쓰다 / 308
2. <나옹화상 어록> 서문 / 319
3. 또 하나의 <나옹화상 어록> 서문 / 341

11. 효상(爻象)의 불길함과 낙향
1. 낙향 무렵 / 347
2. 윤씨(尹氏)분묘기 / 359
3. 문헌공(文憲公) 이재(?齋)선생 행장 / 369

12. 우왕(禑王)의 사부(師傅)
1. 담암은 신돈의 몰락에 관여했을까? / 376
2. 공민왕의 후사문제에 개입하다 / 395
3. 담암과 우왕 / 403

13. <고려사> 열전과 담암
1. <고려사> 열전 속의 담암 / 424
2. 담암 무자(無子) 설과 후손의 존재 / 432
3. <고려사> 열전의 실수와 오류 / 451

14. 시문(詩文)에 나타난 담암의 사유(思惟)
1. 담암의 시와 산문 / 473
2. 우리 동방(東方)을 강조한 자주의식과 현실개혁 의지 / 481
3. 율정설(栗亭說)과 영호루 금방기(金榜記) / 495
- 인간사에 비유한 사물과 현상

15. 담암을 알게 해주는 시문(詩文)
1. 시문학에 대한 담암의 견해 / 509
2. 척약재설과 동재설, 그리고 만사(輓詞) / 525
3. 글을 통해 본 담암의 취미 / 543

16. 꿈이 깨어지다
1. 공민왕의 죽음 / 548
2. 담암의 죽음 / 559
3. 영해와 선산 설- 담암의 묘소 / 569
담암 연보 / 576
참고자료 / 584

출판사 서평

담암 백문보는 누구인가?

이 책자는 원명(元明) 교체기인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학자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1303~1374)에 관한 글입니다. 담암은 1303년(고려 충렬왕29·계묘) 승평부사를 지낸 아버지 백견(白堅)과 어머니 영해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5세 때부터 당대의 대학자였던 국재 권부(權溥) 문하에서 수학하고, 익재 이제현(李齊賢)을 지공거로 한 충숙왕 7년(1320·경신) 문과에 18세의 나이로 급제했습니다. 이 무렵 이재 백이정(白?正), 역동 우탁(禹倬) 등으로부터 당시의 진보적 사상, 즉 <주역(周易)>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신유학(성리학)을 깊이 있게 전수받았습니다. 급제 후에도 10년 가까이 학업을 더 연마한 그는 1328년(충숙왕 15) 26세의 나이로 춘추관 검열에 보임됨으로써 비로소 환로에 들어섰습니다. 이후 한림(翰林)·정언(正言) 등의 사관(史官)·간관(諫官)으로 근무하면서 고려가 처
한 현실을 인식하게 되고, 또 충숙왕을 호종하여 원나라 수도에 가 1년가량 체류하면서 원이 지배하던 중국대륙의 실상도 아울러 파악했을 것입니다. 1341년(충혜왕 후2) 39세 때 간관의 최고직위인 정3품 우상시(右常侍)로 승진하고 이어서 43세에 관동존무사로 나갔습니다.
이후 담암의 이름이 사서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부정삼한(復正三韓)을 기치로 1347년(충목왕 3)에 설치된 폐정개혁기관 정치도감의 사(使)로서 활동하면서부터인데, 그의 나이 45세 때 일입니다. 그러나 담암을 비롯한 개혁적 인사들이 참여·지원했던 정치도감 활동은 국내 기득권층 및 부원배의 교묘한 방해와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실패하게 됩니다. 담암은 고려에 내재한 제반 모순의 원인이 원나라임을 깨달으면서 반원적 성향을 지니게 되고, 또 한족(漢族)의 도적집단 홍건적의 침입으로 온 국토가 유린되는 경험을 통해 반외세·자주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이어서 일국경시(一國更始)를 목표로 한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을, 대내적으로는 자주성 회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담암의 이런 인식은 단군의 건국사실과 우리 동방의 고유문화를 강조하는 글로 나타났습니다. 유명한 상소문 <척불소(斥佛疏)>에서‘우리나라는 대대로 동방을 지키고 있어 문물과 예악이 오랜 유풍이 있고, 단군으로부터 지금(1363년?공민12)까지 이미 3600년이 지났으니 곧 하나의 대주원이 되는 기회’라고 하면서 정치와 학문의 혁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대체로 ▲단군과 우리 동방을 드러낸 문화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민생안정을 정치의 목표로 보았으며 ▲불교와 같은 미신적 행태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부정부패를 비판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담암이 주장한 현실개혁의 논리가 편조(遍照?신돈)의 개혁정책에 반영된 측면도 있으나 담암과 신돈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이 다른 인물들이었습니다. 불교에 기반을 둔 신돈의 개혁정치가 모순을 드러내고 파행을 겪게 되자 그는 신돈을 숙청하는데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담암은 유학경전인 <주역>에서 변통의 논리를 이끌어내어 세계를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전(變轉)하는 실체로 인식하고, 자신이 처한 세계를 개조해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신유학에 근거한 담암의 선진적 현실개혁론과 강경 배불론(排佛論)이 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 등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조선왕조의 개창을 견인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공민왕의 후계자로 강령부원대군 우(禑)를 세우는 일에 깊이 개입하고 그 사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령을 이유로 제자 이숭인(李崇仁)을 대신 천거한 후 효상(爻象)의 불길함을 들어 낙향 했습니다. 그리고 1374년(공민왕 23·갑인) 공민왕이 시해된 9월로부터 약2개월 후인 그해 12월 작고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비슷한 두 사람의 죽음은 개혁군주 공민왕과 그를 지원했던 담암의 긴밀했던 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유학의 입장을 철저히 견지한 담암의 견해는 현전하는 2편의 사론(史論)과 11편의 상소문, 20여 편의 시·산문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담암은 원과 명이라는 중국대륙에서의 물리력 교체기, 불교와 성리학이라는 국내에서의 사상적 전환기에 자주의식 제고와 민생안정을 통해 우리삼한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일 뿐 아니라 미래와의 대화이기도 하다’는 전제를 시인하자면 담암의 이러한 인식과 주장은 이 공간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담암은 이처럼 자신이 깊이 공부한 <주역>에서 변통의 논리를 이끌어내어 스스로를 포함한 주변세계를 변전의 실체로 인식하고, 그 세계를 개조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며, 나아가 단군과 우리 동방의 전통을 드러낸 문화적 자주성을 누누이 강조해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해온 선진적 현실개혁론과 문화적 자주성 강조는 물론이고, 담암 자신조차도 널리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에 관한 자료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 후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크게 현창되지도 않았고, 후세의 학자들에 의해 깊이 연구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걸어온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말을 상기하자면, 담암에 대한 후세의 무관심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반증일 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걸어온 방향에 대한 믿음과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의 연계가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정도전의 강경배불론에 영향을 준 백문보

고려 공민왕 때 문신이자 학자인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303~1374)는 우리나라에서 단군기원을 최초로 언급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살던 14세기 중반 무렵이 단군으로부터 3천6백년이 지난 대주원의 기회임을 역설하고, 이러한 변혁기에는 정치와 학문의 혁신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그는 대체로 단군과 우리 동방을 드러낸 문화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민생안정을 정치의 목표로 보았으며, 불교와 같은 미신적 행태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부정부패를 비판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또 유학경전인 <주역>에서 변통의 논리를 이끌어내어 세계를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전하는 실체로 인식하고, 자신이 처한 세계를 개조해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신(新)유학에 근거한 담암의 선진적 현실개혁론과 강경배불론이 정도전 · 윤소종 등 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조선왕조의 개창을 견인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공민왕의 후계자로 강령부원대군 왕우를 세우는 일에 깊이 개입하고 그 사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왕조의 내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시해된 9월로부터 약2개월 후인 그해 12월 작고했다. 시기적으로 비슷한 두 사람의 죽음은 개혁군주 공민왕과 그를 지원했던 담암의 긴밀했던 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신유학의 입장을 철저히 견지한 담암의 견해는 현전하는 2편의 사론과 11편의 상소문, 20여 편의 시?산문 등에 나타나 있다.

두 얼굴의 영조- 18세기 탕평군주상의 재검토,김백철

두 얼굴의 영조 18세기 탕평군주상의 재검토 

태학총서 44 | 양장본

김백철 지음 | 태학사 | 2014년 09월 22일 출간

책소개

[두 얼굴의 영조]는 18세기 황혼의 탕평군주 영조의 맨얼굴을 살핀 책이다. 전통시대는 왕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현대는 민주공화정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리적이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한 채,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정치 체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실상과 괴리된 역사 인식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가감 없이 탕평군주상의 변화 과정에 접근하였다.

저자소개

저자 : 김백철

저자 김백철은 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전공 분야는 조선시대 정치사상 및 법사학이다. 서울대학교ㆍ서울여자대학교ㆍ한신대학교ㆍ한국외국어대학교ㆍ국민대학교ㆍ한국전통문화대학교 대학원 강사, 전북대학교 HK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규장각 소장 왕실 자료 해제ㆍ해설집』 3ㆍ4(공저), 『국왕, 의례, 정치』(공저),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 ‘속대전’의 편찬과 백성의 재인식』, 『영조: 민국을 꿈꾼 탕평군주』,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상ㆍ하(공편), 『영조대왕 자료집』 1(공저), 『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 등이 있다.

목차

연구 서설

1장 조선시대 역사상과 공시성共時性 재검토
1. 조선은 ‘근세’ 사회인가?
2. 세계사 속의 조선
3. 조선과 중국의 사회 변동

2장 영조시대 탕평정치의 지향: 국왕, 국가, 백성의 삼중주
1. 18세기 왕정의 과제
2. 영조 전반 탕평정치의 성과
3. 영조 후반 새로운 군주상 모색

1부 전율戰慄의 군주: 탕평군주상의 전환

3장 영조 후반 전제화된 권력의 형성과‘건극建極’
1. 두 개의 논점: 탕평인가, 붕당인가
2. 을해옥사의 진행 경과
3. 『천의소감』 편찬과 정국 수습책
4. 붕당을 넘어

4장 영조 만년 초월적 권위의 추구와 ‘대탕평’
1. 김치인 사건의 발단
2. 역옥 치죄 과정
3. 국왕의 숨은 의도: 소론 대신 신원
4. 해법 모색

2부 요순堯舜의 현신現身: 군민君民 관계 재설정

5장 순문詢問과 위민정치爲民政治
1. 왕정의 의사소통
2. 순문 대상 확대
3. 임문순문臨門詢問
4. ‘위민’의 실상

6장 윤음綸音과 왕정 전통
1. 국가의 공표 수단: 다양한 교서 양식
2. 국왕의 의사 표현: 비망기의 복합적 성격
3. 매체 혼용 현상
4. 윤음 전통의 탄생

3부 탕평군주상 창출과 재평가

7장 존호尊號 가상加上과 정국 변화
1. 영조 전반 대타협의 상징
2. 영조 후반 대처분 합리화
3. 정조가 추진한 추존 사업

8장 묘호廟號 개상改上과 탕평군주상
1. 묘호의 전통
2. ‘영조’ 묘호의 등장
3. 고종대 탕평군주의 부활

9장 탕평학 시론試論
1. 조선시대 탕평의 위치
2. 탕평의 유래와 궤적
3. 탕평정치 연구의 역사

결론

부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발문
원문 출전

책 속으로

이른바 탕평군주로 일컬어지는 숙종(재위 1674?1720),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정조(正祖, 재위 1777-1800) 등은 학문 수양을 통해 성인군주론을 완전히 체득하였고, 군주이자 스승으로 불릴 수 있는 학자 군주〔군사(君師)〕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청과 조선의 제왕들은 유교의 이상적인 국가를 현실 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직접 주도하였다.
결국 군주가 학문을 연마하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급기야 개혁에 성공하여 부강한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 낸 동아시아와 달리,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서구의 절대왕정은 백성의 이반(離叛)을 초래하고 급기야 구체제(ancien r?gime)로 낙인 찍혀 혁명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평화기의 동아시아는 서양에서 흠모해 마지않던 이상향이었다. 유교정치 문화는 서구 사회에서 새롭게 발굴한 또 하나의 이상화된 사회로 인식되었으며, 계몽주의시대에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과 더불어 새로운 근대 국가상을 꿈꾸는 데 활용되었다.(40~41쪽)

영조 치세 전반기에 거둔 성과만 평가한다면 아마 반대 정파에 이토록 관대한 군주는 없었을 것이며, 대경장에서 자신의 정책 지표를 제시하며 이처럼 신료들의 이견을 허물없이 받아들인 경우도 없을 듯하다. 영조는 반평생 인내하고 타협하면서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을 모두 자신의 신하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까지 영조시대에 대한 연구는 주로 황금기에 해당하는 영조 20년대 후반까지가 그 대상이었다.(81쪽)

영조는 즉위한 지 약 30년간 국정 운영에서 살얼음을 걷는 듯이 살았다. 당습일소(黨習一掃)를 내세웠지만 신료들은 어김없이 국왕의 탕평과 요순 입론 뒤에 보란 듯이 당론을 덧붙여 왔다. 영조는 때로는 단식 투쟁을 불사하는 고집으로, 때로는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한 거친 표현도 함부로 하였지만 이내 사과하고 타협하였다. 상당한 인내로 신료들의 양보를 얻어 내어 소기의 성과를 내면서 본인의 정책 과제를 대부분 완결 지었다. 국왕의 정치 명분을 회복하여 국왕 주도의 정국 운영을 현실화하였으며, 문물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국가 체제를 일신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제를 개편하여 국가 재정과 소민의 안정에 힘썼다. 왕위와 관련해서도 영조 25년(1749)에 일찌감치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함으로써 후계 구도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영조는 재위 20년대 후반까지 국제(國制)를 정비하고 균역법을 완성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사회 부문의 개혁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회갑을 맞이하여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를 향유하였다.(128~129쪽)

영조의 정치 명분은 요순정치에 있었다. 이것은 재위 초반 국왕과 신료들이 함께 표방한 공통의 이상정치였다. 그는 요순의 절대 권위를 바탕으로 당대 현실을 유교적 이상사회로 변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요순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그는 백성의 문제에 유달리 집착하였다. 요순같이 백성을 아낀 성군이 되는 길만이 자신의 정치 명분과 왕위의 정통성을 높이는 길로 여긴 듯하다. 영조의 전제화된 권력은 요순정치 입론의 절정에 달한 모습으로 이해되며, ‘민국(民國)’만이 주요한 논제로 부각되었다.(139쪽)

왕정 사회에서 신왕은 노련한 원로대신을 상대로 곧바로 전왕이 누리던 모든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연소한 군왕은 자신과 함께하는 젊은 하급 관료들이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 연륜을 쌓아야 하고, 왕권을 온전히 행사하는 데 수많은 난간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영조는 조선에서 최장수한 군왕이자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이었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정국 지형도 시대별로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은 정치 경륜을 쌓으며 새로운 권위를 창출해 나갔다.(143쪽)

임금은 “백성이 거할 바가 정해지면 천명은 보존되고 백성이 곤궁하면 떠나가니, 이는 오직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이 자신에게 명하여 임금이 되게 한 것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곧 백성을 위한 것이며, 천명의 거취와 민심의 향배는 오로지 이 백성을 구제하고 구제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표현하였다. 더욱이 애민군주가 되지 못하면 역성혁명의 대상인 독부(獨夫)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격한 발언도 불사하였다. 영조는 백성을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임금으로서의 강한 사명감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민국(民國)에 온몸을 바쳐 왔다고 자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애민 의식보다 훨씬 진전된 군주관이자 백성관이었다.(227~228쪽) 닫기

출판사 서평

전율(戰慄)의 군주와 요순(堯舜)의 현신(現身) 사이, 황혼의 탕평군주 영조의 맨얼굴을 마주 보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생활한다. 혹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공민(公民) 종교로 떠받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근대 민주공화정의 틀에 완전히 적응하였다고 믿는 데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 상황은 언제나 전통시대의 관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왕정의 군주를 바라보는 듯한 모순된 시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정치인 대통령과 왕정의 군주상이 교차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현재와 연동되어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전통시대는 왕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현대는 민주공화정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리적이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한 채,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정치 체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실상과 괴리된 역사 인식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가감 없이 탕평군주상의 변화 과정에 접근하였다.

전율(戰慄)의 군주

1부에서는 살얼음을 걷는 심정으로 평화의 시대를 이룩한 영조의 집권 후반기에 새롭게 변모한 탕평정치의 성격을 살핀다. 여기서는 서양 절대군주나 동양 전제군주와는 다른 층위의 개념으로 탕평군주를 조망하기 위해서 ‘전율’로 표현했다.
‘탕평’은 난국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신료들은 언제 충역이 엇갈릴지 모르는 불안한 정국에서 벗어나 실력 본위의 출사를 희망할 수 있었고, 군주 역시 붕당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각 붕당을 뛰어넘는 초월자로 자신의 위상을 설정할 수 있었다.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당론은 불식되었고, 국가의 문물제도 경장 사업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왕은 노론 대 소론의 당론(黨論)을 뛰어넘는, 군주 주도의 탕평이라는 새로운 정치 이념 속에서 정국이 운영되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잠복해 있던 붕당 간의 의리 논쟁이 재현되었고, 영조 31년(1755) 을해옥사로 영조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소론과 노론에서 각각 70여 명이 반성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소론 준론(峻論)에 대한 토역(討逆)이 탕평의 상징인 ‘건극(建極)’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국왕은 ‘전제화된 권력’을 행사하여 난국을 무당(無黨)의 시대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신료들의 반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던 공노비의 대대적인 신공(身貢) 감면도 뜻을 이루었다.
전통적인 노론이나 소론의 당론이 무력화되자, 각 붕당에서 청류淸流를 자임하는 인사와 훈척(勳戚) 출신이 정국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양대 세력은 국왕으로부터 붕당의 출현으로까지 지목받을 정도였다. 영조 48년(1772) 국왕은 인사 문제를 기화로 10년 이상 지근에서 보필한 고굉지신(股肱之臣) 김치인을 처벌하였다. 이것은 소론에 대한 강력한 숙청으로 노론을 억눌렀던 을해옥사, 그리고 왕세자조차 처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신료들을 전율토록 한 임오화변과 맞닿아 있다. 상당히 돌발적인 사건이었는데도 영조는 이것이 ‘대탕평(大蕩平)’의 일환이었다고 강변하면서, ‘초월적 권위’를 행사하여 지난 20여 년간 좌절되었던 소론 대신의 복권도 일거에 달성하고 마침내 오랜 숙원이던 서얼의 청요직 허통도 실현시켰다.

요순(堯舜)의 현신(現身)

2부에서는 새롭게 확보한 군주의 위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백성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핀다.
영조는 왕실의 전통 요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선왕대까지는 대신에게 질의하는 정도에 불과하던 순문(詢問)을 하급 관리부터 시골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대상에게 무차별적으로 질의하는 형태로 바꾸었다. 임금은 거의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주제와 참여 계층을 대상으로 순문을 열었다. 농사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농민을 소견하였을 뿐 아니라, 공인貢人과 시인市人 같은 이들에게도 순문을 행하여 화폐 경제의 변화를 몸소 국정에 반영하였다.
영조는 언론을 장악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신변과 국정 철학을 스스로 밝히고 싶어 하였다. 이를 국정을 직접적으로 장악하는 수단 중 하나로 간주하였다. 강력한 탕평군주를 실현시키는 데 언론 매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재위 중반 윤음(綸音)으로 표현되었다.
국왕은 순문과 윤음을 통해 신민에게 어질고 자상한 요순으로 온전히 각인되었고, 백성은 시혜 대상에서 점차 임금에게 필요한 존재로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군민 관계 재설정은 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작용으로 심화되었다. 18세기 백성관은 점차 ‘애민(愛民)’에서 ‘군민상의(君民相依)’로 변화하였다.

탕평군주상 창출과 재평가

제3부에서는 탕평군주상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였다.
탕평군주의 위상은 당대에 존호(尊號)라는 형식으로 평가가 시도되었으며, 사후에는 묘호(廟號)와 시호(諡號) 제정과 개정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묘호인 ‘영조(英祖)’는 사실 고종 연간 추존 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최근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조선초기의 강력한 왕권을 꿈꾼 18세기 탕평군주를 재발굴하여, 세도정치기에 위축된 왕실의 권위를 반석 위에 세우는 고종대의 정치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고종 초반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영조를 가장 이상적인 조선의 군주로 평가하였다. 영조 연간에 세종을 바라보듯이, 고종대에는 영조를 바라보았다. 영조를 직접 추존한 시기는 고종이 야심차게 시행한 근대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등의 변란을 몇 차례 겪은 뒤였다. 절치부심한 고종은 새로운 개혁의 전형을 발굴하였다. 영조는 그 첫 주자로 이 시기에 재평가되었다. 이것은 향후 대한제국기 정조를 필두로 한 일군의 군왕에 대한 황제 추존의 서막이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화려한 정조시대의 서막을 알리다

결과적으로 황혼을 맞이한 영조는 신료에게 엄격한 전율의 군주로 군림하면서도, 동시에 백성에게 자애로운 요순의 현신으로 재림하였다. 그는 즉위 후 30여 년간 오랜 인내와 타협으로 신민을 심복(心服)시켜서 대경장(大更張)을 실현시켰고, 향후 20여 년간 전제화된 권력과 초월적인 권위까지 거머쥐고 이른바 무당(無黨)의 시대를 열었다.
황혼의 탕평군주는 고양된 자신의 위상을 요순정치를 실현하는 데 쏟아부었다.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에서 국왕이 주창한 요순의 도道는 공公과 사私의 명백한 변별을 전제로 하였다. 이것만이 자신이 황형(皇兄, 경종)으로부터 막중한 왕위를 계승한 의무를 다하는 길로 간주하였다. 이른바 극한의 국가주의자의 면모는 황형의 은혜에 대한 책임감의 발로였다. 태종의 선택이 찬란한 세종시대를 열었듯이, 영조의 결정도 화려한 정조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영조의 두 얼굴은 새로운 조선의 탄생

18세기 탕평군주는 사족, 서얼, 중인, 농민, 공인(貢人), 시인(市人), 천인 등을 모두 국가에서 배려해야 할 ‘광의(廣義)의 백성’으로 재설정하고, 왕정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여 사회 변동기를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이 같은 정치의식은 급기야 ‘민국(民國)’ 개념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당시 대경장의 명분은 민국이었으며, 국왕 자신은 한평생 민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 왔다고 술회하였다. 다음 세대를 살아간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영조를 전설적인 성군으로 바라보았고, 이러한 신화는 약 1백여 년 뒤 고종시대에도 전해져 개혁군주의 전형으로 재평가받았다.
따라서 탕평군주에 대해 단지 권력을 전제하여 붕당을 일시적으로 억눌렀을 뿐 근본적인 개혁에는 실패했다는 평가는 사실과 다르다. 왕정 체제에서는 국왕이 권력을 장악해야 정국 운영이 반석 위에 설 수 있으며, 이것을 토대로 일관된 경장의 추진도 가능하였다. 이때 개혁한 국가의 경제 체계는 조선을 향후 1백 년간 존속시키는 힘이 되었다. 영조가 보여 준 두 가지의 얼굴은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조선의 탄생을 의미하였다.

책속으로 추가

영조 17년(1741) 『어제대훈』을 반포하자 왕은 정치적 명분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영조는 점차 어제서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여 자신의 정견을 대내외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영조 20년대 초반 정국은 국가적인 경장 사업에 몰두하였다. 영조 20년대 중반에는 대리청정이 실시되었으며, 후반에는 균역법이 완성되었다. 영조 30년대 접어들면서 회갑을 맞이한 국왕은 더는 숙원 사업이 없다고 자임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군주의 위상을 제고하는 존호 가상 운동까지 성사되었다. 왕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군주상을 향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259쪽)

친정 후 고종은 영조뿐만 아니라 정조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영조의 묘호를 추존하였고 숙종의 존호도 가상하였으므로 정조에 대한 것은 다른 차원의 단계별 추숭 사업이었다. 그래서 숙종에게는 존호를, 영조에게는 묘호, 존호, 시호를, 정조에게는 묘호와 제호를 올리는 방법으로 추숭 사업을 진행하였다. 탕평군주에 대한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한없는 존경과 흠모의 표현은 단지 직계 후손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에게 영조는 왕정 개혁의 모범이었다. 고종에게도 영조와 정조는 전통적인 개혁과 서구식 근대화의 절충점이었다. 무너진 왕권을 바로세우고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왕정을 근대 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한 고종이 이 시기 유독 영조에 주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342~343쪽)

경장 사업을 비교하면 완전히 새로운 논점을 개혁의 범주에 편입한 숙종대의 정책은 여전히 과소평가되어 있다. 더불어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한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자 한 영조의 대경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조는 대단히 세련되고 정교하게 국정을 운영하였지만, 새롭거나 과단성 있는 개혁은 거의 시도하지 않았다. 정조 연간에는 숙종과 영조의 성과를 바탕으로 왕정 경장의 토대가 대부분 만들어져 있었으므로 정조의 급무는 체제의 안정화였다. 탕평군주인 세 왕의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어느 한쪽을 과대평가하면서 다른 쪽을 과소평가하는 방식은 18세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이 역시 이분법적 사고관에 기초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탕평군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왕대의 변화를 유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 왕대의 정국 변화조차 시기별 역동성을 고려해야 하며,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사상 등 다면적 요소도 함께 살펴보아야 비로소 18세기 당대 역사에 부합하는 탕평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371~372쪽)

암울한 현대사에서 자행된 초헌법적인 통치 방식을 왕정의 군주에 비견하여 미화하거나 비판하는 것도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평가 방식일 뿐이다. 전통시대는 왕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현대는 민주공화정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리적이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한 채,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정치 체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실상과 괴리된 역사 인식에 불과하다.(377쪽)

영조는 확장된 국왕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치 노선의 분열을 촉진하는 붕당의 활동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족의 언론 자유도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국왕 자신의 정견은 수시로 신민에게 윤음을 내리고 언해(諺解)하여 전국에 반포하였으며, 순문을 열어 직접 백성의 여론을 청취하고자 하였다. 기존에 사족이 누리던 자율적인 공론 활동을 일반 백성의 영역으로 바꾸어 버렸다. 양반 사족 내에서 군주를 지지하는 관인(官人) 그룹은 탕평당을 형성하여 경장을 주도하였으나, 나머지 사족은 확장된 백성의 범주에 편입되었다.(385쪽)

유럽 문명의 역사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프랑스혁명까지, 프랑수아 기조

유럽 문명의 역사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프랑스혁명까지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571

프랑수아 기조 지음 | 임승휘 옮김 | 아카넷 | 2014년 09월 30일 출간

책소개

[유럽 문명의 역사]는 19세기 프랑스 복고왕정기에 활동한 자유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 프랑수아 기조(1787?1874)의 대표작으로, 1828년 강단으로 복귀한 기조가 파리대학교 인문학부에서 14회에 걸쳐 진행한 근대사(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프랑스혁명까지) 강의를 묶은 강의록이다. 저자는 ‘문명의 이해’를 역사가의 중심 과제로 삼으면서 전통적인 역사이해 방식을 혁신하고, 유럽 문명의 발전과정을 거대한 서사로 재구성한다.

저자소개

저자 : 프랑수아 기조

저자 프랑수아 기조(Francois Guizot, 1787~1874)는 19세기 프랑스 복고왕정기에 활동한 자유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 “은행가들의 체제”, “납세자 정부”로 낙인이 찍힌 7월왕정의 상징적 인물인 기조는 보잘것없는 야심과 무분별한 정치적 안목을 지닌, 그리고 정치를 통해 사리사욕을 챙긴 인물로 남아 있다. 기조는 좌파에게는 부르주아지의 반동과 편협한 보수주의를 구현한 인물이었고, 부르주아지에게는 7월왕정의 몰락에 따른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50여 종이 넘는 기조의 저작은 세상의 기억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로 남게 되었다. 기조는 역사가로서 쥘 미슐레나 에드가르 키네, 오귀스탱 티에리에, 자유주의사상가로서는 뱅자맹 콩스탕과 알렉시 드 토크빌에, 또 정치가로서는 루이 아돌프 티에르에 가려진 채 남겨졌지만, 이러저러한 편견에 묻힌 채 기억에서 사라져도 무방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기조는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50여 종이 넘는 저작을 남긴 생산적인 역사가 중 한 사람이다.
기조는 1812년 25세에 파리대학교 문과대학 근대사 주임교수로 임명된다. 1814년 같은 대학 피에르 폴 루아예 콜라르(프랑스의 정치가·철학자)의 추천으로 복고왕정하 내무부 비서직에 임명되면서 관료이자 정치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20년 과격 왕당파가 득세하자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대학으로 복귀했다가, 1822년 정부에 의해 강좌가 폐지되는 곡절을 겪은 후, 1828년 다시 대학에 복귀하게 된다. 이때 강의를 묶은 책이 바로 『유럽 문명의 역사』다. 1830년부터 내무장관과 교육장관을 지냈으며, 1840년 외무장관에 취임했다. 1847년 총리가 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이 발발하면서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유럽 문명의 역사』 외 저작으로는 『프랑스사 소고』(1823), 『영국혁명사』(1826?1827), 『프랑스 문명사』(1830), 『대의정부 기원의 역사』(1851), 『회고록』(1858?1867, 전 8권) 등이 있다.

역자 : 임승휘

역자 임승휘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4대학 Paris-Sorbonne에서 석사학위, 같은 대학에서 〈17세기 초반 프랑스의 “진정한 가톨릭교도들(Bons catholiques)”의 정치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근대 프랑스의 정치사와 사상사, 근대국가체제의 형성 과정 연구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논문으로는 〈두 국가이성의 대립〉, 〈Mathieu de Morgues, Bon Francais ou Bon catholique?〉, 〈구체제 프랑스의 노블레스: 검과 혈통, 금권 그리고 관복〉, 〈16?18세기 유럽 국가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등 다수가 있다. 저서로는 『절대왕정의 탄생』(2004), 『식인양의 탄생: 유라시아 대륙 변두리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2009) 등이 있다.

목차

편집자의 말
영어판 서문
제6판 서문(1855)

첫 번째 강의
두 번째 강의
세 번째 강의
네 번째 강의
다섯 번째 강의
여섯 번째 강의
일곱 번째 강의
여덟 번째 강의
아홉 번째 강의
열 번째 강의
열한 번째 강의
열두 번째 강의
열세 번째 강의
열네 번째 강의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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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어떤 이는 문명을 예찬했고, 어떤 이는 문명에 유감을 표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문명이 보편적인 사실인지 아닌지, 인류에게 숙명과도 같은 보편적 문명이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여러 민족이 수세기에 걸쳐 간직한 무언가가 전승된 것인지, 마치 은행예금처럼 상속되고 불어나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전승되는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나는 진정 인류에게 보편적인 숙명이 존재하고, 문명이라는 보물이 상속되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문명에 관한 보편적인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33쪽)

“계획한 대로 이제 강의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나는 문명에 대한 정의를 시도했고 문명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문명이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인간 사회의 발전과 인간 자체의 발전이 그것이지요. 이 두 요소는 각기 정치적 사회적 발전과 인간의 내면적 도덕적 발전을 의미합니다.” (508쪽) 닫기

출판사 서평

문명의 역사는 모든 역사를 재료로 하는 종합본, ‘문명의 역사화’와 이해하기 쉬운 역사해석 추구
19세기 프랑스 복고왕정기에 활동한 자유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 프랑수아 기조의 대표작으로, 1828년 강단으로 복귀한 기조가 파리대학교 인문학부에서 14회에 걸쳐 진행한 근대사(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프랑스혁명까지) 강의를 묶은 강의록.

기조는 ‘문명의 이해’를 역사가의 중심 과제로 삼으면서 전통적인 역사이해 방식을 혁신하고, 유럽 문명의 발전과정을 거대한 서사로 재구성한다. 유럽은 18세기까지 보편사의 한 부분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19세기 들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문명사를 갖게 되는데, 이는 분명 기조와 그의 『유럽 문명의 역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한국어판에는 원서에 없는 사진 90여 컷과 각주 200여 개를 추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출판사 서평
문명의 역사는 모든 역사를 재료로 하는 종합본, ‘문명의 역사화’와 이해하기 쉬운 역사해석 추구
“문명의 역사는 모든 역사 가운데 실로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가장 거대한 역사가 될 것입니다.”


『유럽 문명의 역사』는 19세기 프랑스 복고왕정기에 활동한 자유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 프랑수아 기조(1787?1874)의 대표작으로, 1828년 강단으로 복귀한 기조가 파리대학교 인문학부에서 14회에 걸쳐 진행한 근대사(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프랑스혁명까지) 강의를 묶은 강의록이다.

프랑수아 기조는 책에서 ‘문명의 이해’를 역사가의 중심 과제로 삼으면서 전통적인 역사이해 방식을 혁신하고, 유럽 문명의 발전과정을 거대한 서사로 재구성한다. 유럽은 18세기까지 보편사의 한 부분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19세기 들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문명사를 갖게 되는데, 이는 분명 기조와 그의 『유럽 문명의 역사』 덕분이라 하겠다.

25세(1812)에 파리대학교 문과대학 근대사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814년부터는 관료이자 정치가의 길을 걷던 기조가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 이후 강단으로 복귀한 1828년부터 1830년까지 파리대학은 프랑스 젊은 자유주의자들의 집합소였다. 청중들은 교수 기조의 강의를 듣는 것만큼이나 자유주의자 기조에게 박수를 보내기 위해 몰려들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기조의 문명관은 그의 자유주의 정치이념에서 비롯한다. 『유럽 문명의 역사』는 이처럼 기조의 사상체계, 나아가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체계를 이루는 역사인식을 조명해주는 저서라 하겠다.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날, 역사의 격변기에 태동한 기조의 자유주의적 사유방식은 우리에게 유용하며 교훈적인 실험대가 되어줄 것이다. 곧 기조의 『유럽 문명의 역사』는 지나간 세기의 지적 유희 또는 과거의 명저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고민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사상의 ‘문제적’ 토대를 제공하는 전범으로서 유익하고 청량감 넘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또한 역사인식이 어떻게 정치적 사유의 토대가 되는지 보여주는 기조의 텍스트는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역사연구의 자세와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다. 이번 한국어판에는 원서에 없는 사진 90여 컷과 각주 200여 개를 추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기조의 저작 중 첫 한국어판 … “경이로움 그 자체”이자 “19세기에 쓰인 10대 역사서 중 하나”
기조가 알렉시 드 토크빌, 카를 마르크스,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 끼친 이러저러한 영향


당시 기조의 강의를 직접 듣기도 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은 이 책 『유럽 문명의 역사』에 “경이로움 그 자체”라는 찬사를 보냈으며, 프랑스의 지식인이자 역사학자,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이며, 프랑스 민주주의 연구의 대가로 잘 알려진 피에르 로장발롱(1948?)은 이 책을 ‘19세기에 쓰인 10대 역사서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토크빌은 기조에게서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의 연속성 개념을 빌려온다. 프랑스 자유주의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역사가이자 정치학자 에드가르 키네(1803?1875) 역시 크리스트교와 종교개혁에 대한 기조의 해석에 큰 영향을 받았다.

로장발롱에 따르면, 『유럽 문명의 역사』가 미친 영향은 초기 마르크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1843년과 1845년 사이에 기조의 『프랑스 문명사』(1830)와 『유럽 문명의 역사』를 읽었고, 그 안에서 계급투쟁의 개념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론은 계급투쟁의 결말에서 기조의 것과는 전혀 다르고 개념의 용도 또한 정반대의 목표를 지향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가 기조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 자체를 차용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엥겔스가 계급투쟁 개념의 발명자로 마르크스가 아니라 기조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주장에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다. [로장발롱은 기조와 마르크스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는 기조를 ‘부르주아지의 그람시’라 평가하기도 한다.]

조금 다른 영향도 있다. 유럽 문명의 비교 우위에 보이는 기조의 태도는 프랑스 문명과 유럽 문명의 우수성에 대한 노골적 예찬으로 귀결된다. 종종 이러한 종류의 문명적 우월감 논리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일본 근대화의 스승이자 국부처럼 떠받들어지며 소위 ‘탈아론’을 제창하고 아시아 침략을 부르짖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기조의 문명 개념에 크게 영향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1875)은 사회와 개인에 대한 기조의 개념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부분적으로 『유럽 문명의 역사』를 거의 그대로 베껴 쓰다시피 했다.

14개 강의는 곧 14폭짜리 웅장한 역사화 … ‘변화’와 ‘진보’의 묘사로 유럽 문명 전체를 그려내
문명의 이해를 역사가의 중심 과제로 삼은 기조 … 역사 이해 방식에 혁명을 가져오다


기조는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야만인들이 침입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프랑스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문명을 총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봉건귀족, 교회, 왕정, 도시, 자유와 권위 등 근대사회 구성요소들의 기원, 초기 모습,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이뤄진 발전의 양상, 핵심 원리에 나타난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기조는 ‘변화’와 ‘진보’의 국면을 통해 문명 전체를 보여주는 커다란 벽화를 완성해낸다.

역사가로서 기조의 강의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구체적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원사료를 찾고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역사가 제1의 사명으로 제시했다. 기조는 강의에서 원사료를 직접 소개하고 다양한 증거들을 비교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프랑스에서 역사학은 기조에 이르러 과학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기조에게 구체적 사료 조사와 분석이 역사의 최종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역사에 대한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이해를 목표로 삼았다.

문명이란 사회적 발전과 인간의 도덕적·내면적 발전의 원리이자 종합이라고 이해한 기조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사실들을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문명이 “정부와 인민”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실체로 수렴되는 과정이었다는 놀라우리만치 간단명료하게 설명이 가능한 것은 바로 문명에 대한 기조의 이런 확신에서 비롯한다.

『유럽 문명의 역사』의 구성 …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프랑스혁명까지 유럽 문명의 총체적 묘사
일관되고 유기적이며 논리정연한 강의 … 문명 전체를 온전히 보여주는 보편적인 문명사 개론


프랑수아 기조는 1,500년에 걸친 유럽 문명의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한다. 유럽 문명의 기원에 해당하는 첫 번째 시기는 로마 제국의 몰락과 야만족의 이동이 일어난 4세기경부터 12세기까지다. 기조는 5세기 로마 제국의 상황, 유럽에 등장한 야만족들의 특징, 크리스트교의 등장과 발전, 봉건제의 성립과 특징, 중세 크리스트교 교회와 중세 도시의 형성과 발전, 십자군에 이르기까지 유럽 중세사의 주요 등장인물과 사건들로 청중들을 안내하면서, 그 안에서 근대 유럽 문명을 형성할 문명의 맹아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이 기간에 유럽 사회에는 봉건귀족, 교회, 도시, 국왕이라는 4개 주요 구성요소가 공존하고 경쟁할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한다. 기조는 이를 통해 다양한 문명 요소의 공존과 경쟁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복잡성이야말로 유럽 문명이 지닌 특수성이며, 이는 문명 초기 단계부터 확인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시기는 유럽이 하나의 국민과 하나의 국가로 통합을 준비한 13?16세기다. 기조는 이 시기를, “변화를 거부하면서 여러 사회 구성요소를 조화시키고, 다양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국민적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들”로 점철된 “낡은 유럽과 근대 유럽의 경계”를 가르는 이행기로 규정한다. 그는 이 시기에 이르러 정치권력이 세속화하고 봉건시대의 지역적 당파성이 정치권력에 의해 통합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기조는 먼저 이 통합과정에 가장 크게 한몫한 유럽의 왕정을 살피면서 왜 왕정이 근대 유럽의 정치적 상징이 되었는지, 교회와 봉건귀족,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적 조직화의 시도들은 왜 실패했는지를 차례로 들여다보고, 이어 15세기에 이르러 어떻게 국민적 통합과 정치권력의 중앙집중화, 항구적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근대에 해당하는 세 번째 시기, 문명의 다양한 요소들은 ‘정부’와 ‘인민’이라는 두 거대한 힘의 등장으로 통합된다. 이 시기에는 강력한 왕정의 등장으로 다양한 권력이 하나로 집중되고,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인간 정신이 갖는 자유의 폭이 확대된다. 강력한 왕정체제를 통한 중앙집권적 국가의 형성과 종교개혁이 불러온 인간의 정신적 해방은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 같은 결실은 새로운 위기를 야기한다. 자유로운 탐구 정신의 원리와 권력의 중앙집권화라는 두 원리는 그 속성상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조는 17세기 영국혁명과 다음 세기 프랑스혁명이 바로 그러한 모순에서 비롯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기조는 두 혁명이 낳은 역사적 결과를 토대로, 절대권력과 현실성을 결여한 사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또 거기에서 분명한 교훈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유럽의 발흥 -비교경제사 연구, 양동휴

유럽의 발흥 비교경제사 연구


양동휴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09월 15일 출간

책소개


유럽 발흥과 대분기에 관한 책들은 국내에서는 단편적인 내용만 소개되어 있을 뿐, 대부분 해외저작물들의 번역서이다. 거시사(macrohistory)와 동서양 비교경제사는 비교적 최신 분야이고, 이런 면에서 이 책은 국내에서 거의 최초의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소개

저자 : 양동휴

저자 양동휴(梁東烋)는 서울대학교(학사), 메릴랜드대학교(석사), 하버드대학교(경제학 박사)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정경대학(LSE), 베를린자유대학교, 캔자스대학교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미국 경제사 탐구』(1994), Antebellum Agriculture and Other Essays(2003), 『20세기 경제사』(2006), 『양동휴의 경제사 산책』(2007), 『대공황 시대』(2009), 『세계화의 역사적 조망』(2012), 역서로 『대공황 전후 세계경제』(2008), 『대공황: 1929-1933년』(2010) 등이 있다.

목차

감사의 말

머리말

제1장 불평등한 세계
근대적 경제성장 | 생산성과 임금 | 새로운 척도 | 인과의 오류?

제2장 유라시아 세계체계
총, 균, 쇠 | 작물화와 가축화 | 전파축 | 중세의 상품 교역 | 서유럽의 팽창 | 13세기 세계체계

제3장 환경, 국가 시스템, 국가 간 경쟁
환경과 시장 | 국가 시스템 | 국가 간 경쟁 | 제국의 한계 | 성장 저해요인 | 제국의 이점

제4장 제도, 재산권과 시장
재산권의 중요성 | 제도학파 경제학 | 자본시장의 발달 | 제도와 정치질서 | 조직과 국가 | 계량분석

제5장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비교과학사
기술진보와 산업혁명 | 과학혁명 | 계몽주의 | 과학문화와 교육 | 측량술의 발달 | Why Not?

제6장 폭력, 군사력, 해상팽창, 재정국가
16세기 세계체계 | 해상팽창 | 군사혁명 | 엘리트와 시민 | 재정국가 | 중국의 제국형태와 폭력에 대한 취약성

제7장 약탈설, 유럽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
유럽중심주의 | 프랑크의 세계 무역론 | 오리엔탈리즘 | 더 긍정적 시각

제8장 문화와 종교
문화 | 인도 | 중국 | 이슬람 세계 | 서유럽 | 다른 접근들

제9장 신다위니즘?
맬서스 체제 | 부자다산론 | 비판 | 지지

제10장 중국 경제사의 새로운 모색
교과서적 논의 | 홉슨의 동양선구론 | 포머란츠의 생태론 | 프로토 공업화 | 인구체계 | 3원적 구조 | 19세기 |
일본 경제사 | 에도 시대

제11장 화폐와 금융
기존 가설 | 은의 이동 | 일본의 귀금속 생산과 수출 | 조선의 화폐경제 | 중국의 은 수입과 화폐제도 | 동아시아 은화공동체? | 세계적 시각

제12장 성장이론 분석
통합성장모형

맺음말

부록 | 주 | 비교연보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Abstract

책 속으로

데소토가 그렇게 강조한 재산권체제 구축은 노벨상을 수상한 제도학파 경제사학자 노스(Douglass C. North)가 오래전부터 주목해 온 분야다. 더욱 크게는 어떤 제도가 거래비용과 전환비용을 줄여서 경제적 성과를 높이는가, 즉 특화와 노동분업의 증대를 통해 높은 경제성장을 가져오는가를 검토한다. 여기서 제도란 규칙, 신념, 규범과 조직의 상호 연관된 시스템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시장과 정치체제의 운행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다양한 제도 하에 경제적, 정치적 거래행위가 결정되며 거꾸로 시장과 정체가 제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소규모 촌락 교역은 비공식적으로 제약을 받는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 내에 존재하는데 이는 국지적 교역을 촉진한다. 이 상황에서 거래비용은 낮다.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런 상황은 폭력의 위협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 대해 갖는 함의 때문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힘이 된다. 시장 규모가 커지면 지역적 교역의 거래비용은 급격히 증가한다. 사회적으로 긴밀했던 네트워크가 다른 네트워크 즉, 개인끼리의 거래 빈도가 점점 줄어드는 네트워크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측정과 집행을 위해 더욱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 세계에 전형적인 중앙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통합된 정치구조 형태나 공식적 규칙이 없는 상황에서는 통상 종교적 계율이 개인에게 행위기준을 부과한다. 이 계율이 거래비용을 낮추는 효과는 그 계율이 개인 거래자를 구속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99-100쪽)

경제와 1인당 소득을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요인은 기술진보와 자본형성, 다른 말로는 효율과 투자율이다. 이 효율과 투자율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다. 여기에 정책, 정치, 문화가 관련되고 개인주의, 제도 등의 요인도 작용한다. 문화는 인간의 행위, 즉 ‘제약 조건 내에서의 극대화’ 문제에서 ‘제약’에 해당한다. 이 제약 자체를 인간이 바꾸기도 한다. 사회적 균형은 토지, 노동, 자본의 상대적 부존, 기술수준, 선호 등의 상호작용을 거쳐 도달한다. 이들은 차례로 기후, 언어, 문화적, 법적 제도에 근거를 둔다. 이러한 균형이 다시 특정한 경제, 문화,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요소부존, 문화, 정치가 인류의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문화는 경제적 성과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랄(Deepak Lal)의 순서에 따라 이를 살펴보자. 문화는 “공동체를 특징짓는 행동양식”이고, “인간의 상호작용을 비공식적으로 제한하는 게임법칙”이다. 인간의 지성이 환경을 바꾸고 새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 그 방법을 사회관습으로 고정시키는 방식이 문화다. 이에 따라 사회적 ‘균형’ 상태에 이르면 새로운 것을 학습하지 않고 행동이 일상화된다. 환경의 다양한 측면과 관련된 신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먹고사는 법에 관한 ‘물질적 신념’이다. 이는 물질문화의 형태를 결정짓는다. 다른 하나는 인생관, 즉 그 목적, 의미,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세계와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사회적 결과를 설명하는 여러 균형 가운데 시장균형이 가장 빨리 이루어진다. 물질적 대상에 대한 신념의 균형이 그 다음이다. 이것이 시장과정이 작동하는 조직과 영역을 결정한다. 우주론과 관련된 문화적 균형형성은 이보다 더 늦다. 가장 느린 것이 인간 개인의 생물학적 성향과 이기심들이 서로 작동, 충돌하면서 도달하는 균형이다. 사회화 과정의 중심에는 수치심(shame)과 죄의식(guilt)이라는 ‘도덕적’ 감정이 있다. 이는 생물학과 문화에서 나온다. 사회적 반응은 물질문화(경제), 정체(polity), 우주론(cosmology) 형성의 순서로 이루어지며 이 세 가지는 상호 의존한다. (196-197쪽)

중국의 인구체계연구는 리종칭(李中淸 James Z. Lee)과 왕펑(王豊 Feng Wang)의 획기적 저작으로 그간의 오해가 바로 잡아졌다. 이후 새로운 중국 인구사 연구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다. 바로 잡은 것의 대표적 예는 다음과 같다. 사망률을 높인 요인이 기근이 아니고 영아살해였다. 여아의 사망이 높았다. 출산율은 조혼임에도 결혼출산율이 낮아서 그렇게 높지 않았다. 오히려 입양이 많았다. 남자는 조혼이 아니고 독신율이 높았다. 인구변천은 서양보다 연속적이고 계획적이며 집단행동의 결과였다. 또한 중국이 기근과 빈곤으로 고난을 겪었고 이것은 조혼, 다산에 의한 과잉인구의 결과였다는 주장은 잘못된 추정이었다. 인구 압력 때문에 노동절약적 기술진보도 없고 적극적 규제가 특히 18세기 말-19세기에 인구를 조정했다는 설명도 사실과 맞지 않다.
뎅 강(Gang Deng, Kent G. Deng)은 근대 이전 중국 사회경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중국사회를 농업우위, 자유농민, 농업을 중시하는 정부의 ‘3원적 구조(trinary structure 닫기

출판사 서평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위가 왜 발생했는지
서양 경제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살펴본 개설서


중세에는 분명히 아시아보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뒤졌던 유럽이
어떻게 19세기부터 아시아를 따라잡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가.

서유럽의 발흥과 ‘대분기’를 다각도로 살펴본다.
15-18세기 서유럽과 중국,
때로는 영국과 양쯔 강 델타를 비교하며,
환경, 국가 시스템, 제도, 시장, 과학, 군사력,
문화와 종교, 가족제도, 화폐금융 등을 검토한다.

● 문헌연구를 기반으로 종합적인 분석, 새로운 해석을 모색

유럽 발흥과 대분기에 관한 책들은 국내에서는 단편적인 내용만 소개되어 있을 뿐, 대부분 해외저작물들의 번역서이다. 거시사(macrohistory)와 동서양 비교경제사는 비교적 최신 분야이고, 이런 면에서 이 책은 국내에서 거의 최초의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과 중국을 중심으로 비교해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인용문헌 목록은 27쪽에 달할 만큼 방대한 자료를 심도 있게 고찰하고 각각의 저자가 제시하는 주장을 체계적이고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부록을 통해 경제성장의 이론적 모형과 실증분석 방법에 대한 기술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이 분야의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동서양의 경제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로마인 이야기>의 문제점

등록 : 2014.09.2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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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6666.html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콜린 매컬로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소설 <가시나무새>의 저자로서만 알려져 있다. 그가 17년에 걸쳐 집필한 7부 연작 로마사 시리즈는 국내에서 <로마의 일인자>를 시작으로 신속히 번역되었으나 2부에서 출간이 중단되었다. 방대한 사료 수집을 바탕으로 한 연구의 깊이에 치밀한 문학적 구성력이 더해진 이 대하소설에 전문가들은 경탄했으나 우리 독자층은 외면한 것이다.
그 사정의 이면에 <로마인 이야기>의 성공이 있다. 유명세를 탄 저자에의 편중이 심한 독서 대중 공략에 나선 대형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시오노 나나미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동안 매컬로의 소설은 방치되다가 잊혀졌다. <로마인 이야기>에는 성공지상주의, 제국주의, 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요인들의 사례가 무수하다. 로마사의 장점을 개방성과 다원주의라고 말하면서 그 원조인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싶을 정도로 폄하한다든가, 로마사에서도 민중의 투쟁과 민주주의적 절차에 대한 기술이 잘못되어 있는 것들도 단순한 실수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를 통해 군사 대국, 경제 대국의 길을 추구해온 일본의 선택을 옹호하고 정당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로마 제국이라는 전제정의 출발이 국민의 자유의 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인식은 이 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책이 우리나라 정·재계 관리층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인기 가도를 달린 것도 통치자 중심의 시각 때문이었는데, 이를 두고 역사학계에서 일찌감치 표명한 우려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근자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망언이 이슈화되면서 그에 대한 분노도 뒤늦게나마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독서 대중도 책임을 갖고 각성해야 한다. 일본의 극우파나 한국의 뉴라이트 같은 독버섯은 그릇된 역사관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회에서 돋아나 자라기 때문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