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4일 목요일

낙랑은 과연 누구의 역사입니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상당량의 낙랑유물이 소장돼있다.
 1500여 점이라고도 하고, 5000여 점이라고도 한다. 아직 유물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대량의 낙랑유물이 일제시대 때 집중 발굴됐다는 점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박물관에는 3만8000여 장의 유리건판사진이 있다. 이 또한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 등이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찍어놓은 민속·인물·고고학 자료들이다.   




 1938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는 흥미로운 기사를 실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제4회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전회를 열어 모두 101종의 문화재를 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런데 그 지정이유를 보자.  
 “특히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하야 주목을 끄을고 있다.”
 내선일체의 상징물이니 ‘지정문화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지정된 ‘고적’의 상세내역을 보면 알 수 있다.
 창녕 목마산성·화왕산성, 함안 성산성, 김해 분산성·전 수로왕릉·수로왕릉비·삼산리 고분, 고령 지산리, 창녕고분군 등 9곳을 고적으로 지정했다. 그러면서 ‘임나관계 고적이기 때문에 지정한다’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행주산성과 대구 달성, 물금 증산성 등은 이른바 ‘문록경장역(文祿慶長役·임진왜란) 관계 고적’이어서 지정됐다고 했다. 일본의 유적과 유사한 나주 신촌리·대안리·덕산리 고분 등 이른바 ‘반남고분’ 지역도 북규슈 지역과 유사한 유물이 나오기에 ‘고적’으로 지정됐다. 기막힌 일이 아닌가
1931년 평남 대동군 남정리 낙랑고분 발굴현장. 일제는 한국역사의 타율성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 낙랑고분을 집중 조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대화혼을 심어줘야”   그 가운데는 전국 각지의 남녀 신체 측정 사진까지 포함돼 있다. 나치가 골상학까지 연구해서 유태인들을 ‘더러운 피가 흐르는 종족’으로 치부, 멸종을 시도한 것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한 대목이다.
 1918년 조선의 초대총독인 데라우치의 <경성일보> 인터뷰를 보면 일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일본인이 저들(조선인들)에게 대화혼(大和魂)을 심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저들이 우리의 문명시설 덕분에 지능을 개발하고 널리 세계의 형세에 접하게 되는 날에 이르러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 일이다. 이는 조선통치의 최대난관이 된다. 조선연구에 하루라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어 “저들의 민족정신을 어디까지나 철저히 조사해야 하며 조선인의 민족심리와 정신생활까지도 두루 이해하지 않으면 헛수고”라고 강조한다.
 데라우치는 이어 “때문에 저들의 민족정신을 어디까지나 철저히 조사해야 하며 조선인의 민족심리와 정신생활까지도 두루 이해하지 않으면 헛수고”라고 강조한다.

 ■“고구려가 아닌 낙랑”
 과연 일제는 무슨 무슨 일을 벌였던 것일까.
 1909년 평양 대동강변에서 아주 흥미로운 발굴이 시작됐다. 통감부 고건축 촉탁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석암동 고분(전실분)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일보 사장인 시라카와 쇼지(白川正治)로부터 대형고분의 존재 이야기를 들은 세키노가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발굴 결과는 흥미진진했다. 벽돌(塡)로 만든 무덤방에서 2점의 청동거울과 각종 무기, 토기, 그리고 오수전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유물둘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말, 도쿄대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와 이마니시 류(今西龍)팀이 이끄는 도쿄대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다.(석암동 을분)
 이곳에서는 ‘王×’명 칠기부속금구와 청동거울, 금동식기, 귀고리, 팔찌 등이 확인됐다. 이 유물들 역시 하기노가 일본으로 반출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됐다. 
 이 두 번의 발굴을 주도한 세키노와 하기노 등은 “둘 다 고구려 고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1910년) 2월, 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반론을 폈다.
 “이 평양 대동강변의 고분들은 내가 1903년과 1905년, 지안(集安)에서 확인한 고구려 고분들과 이 석암리 고분의 구조는 명백하기 다르다.”
 그는 특히 “벽돌묘(전실묘·塼室墓)가 중국 한나라의 무덤과 흡사하며 출토유물 또한 랴오둥(遼東) 지역의 한나라 무덤과 닮았다는 것”고 주장했다. 도리이는 한걸음 더 나가 “이것은 낙랑고분이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평양 대동강변 석암리 9호분에서 확인된 순금제 허리띠. 가운데 큰 용이 꿈틀거리고 그 주위에 작은 용 6마리가 바짝 붙어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낙랑의 증거를 찾아라!”
 일제는 한반도에서 낙랑의 증거들을 찾기위해 혈안이 된다.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본격적인 고적조사사업을 펼친다. 이 때 일제가 작성한 ‘조사개요’를 보면 그 목표가 분명하다,
 “한치군(漢治郡), 즉 한나라 식민지가 된 한사군(漢四郡) 지역을 주로 조사한다.”
 조사대상 고분은 황해 64기, 평남 186기, 평북 50기 등이었다. 그 해 석암리 9호분에서 순금 허리띠(교具·국보 89호)와 ‘거섭(居攝) 3년명’ 칠반(칠기로 만든 쟁반) 등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섭’은 서한(西漢)의 황제인 유자영의 첫번째 연호(기원후 6~8년)였다.
 ‘낙랑 광풍’이 불어닥쳤다. 그때까지 개성 인근에서 고려자기를 도굴하던 패거리들이 낙랑고분으로 몰려온 것이다. 발굴책임자인 세키노까지 나서 총독부에 “도굴 때문에 못살겠다”며 긴급조치를 요청했을까.
 “도굴 때문에 (1917년에) 이미 50~60곳의 고분이 모두 파괴됐다. ~총독부는 적당한 조사방침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도굴의 열풍은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됐다. 1924~25년을 ‘난굴(亂掘)의 시대’라 일컬어졌다. 평양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1~2원을 주고 낙랑 청동거울 1점이나 토기 항아리 1점쯤 구입하지 못했다면 남한테 멸시를 당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낙랑고분 1386기 가운데 처녀분처럼 보이는 140기를 빼고 나머지 1200여 기는 모두 도굴됐다”는 한탄까지 나왔다.
 “심한 경우 관립학교 선생이 백주에 수 명의 인부를 데리고 가서 고분의 봉분 한복판을 위에서부터 파고들어가 눈부신 부장품을 꺼내기도 했다.”(<야다>의 ‘낙랑과 전설의 평양’에서 )
 미술사학자 이구열씨는 “야다가 거명한 관립학교 선생이 기타무라(北村忠次)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가장 악질적인 기타무라는 일본인 자제들만이 다녔던 평양중학교의 일본인 교사였다. 그는 낙랑고분의 부장품이 바닥 난 1930년대에 이르자 그동안 수집 또는 직접 도굴한 천금(千金)의 장물들을 일본으로 가져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38년 11월26일자 동아일보. 조선총독부가 101종의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하게 표명한 것들’이라고 밝혔다.
■가야가 대접받은 이유
 낙랑만큼이나 대접을 받은 곳이 바로 ‘가야’였다. 왜냐.
 야마토(大和) 정권이 369~562년 사이 백제·가야·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에 식민지 관청인 ‘임나일본부’을 세워 다스린 곳이 바로 가야지방이라 주장했으니….
 세키노와 도리이 등은 창녕·고령·함안·김해·성주·선산 등 임나일본부의 유력후보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다. 일제는 이렇게 발굴한 가야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도쿄대는 1912년 4월, 1912년 4월 반출 가야유물들을 전람회에 출품하면서 이렇게 견강부회했다.
 “상대(上代)의 우리 영토인 임나연방 유적의 일부가 처음으로 상세하게 학계에 소개됐다. 대가야 왕궁지 발견 고와(古瓦) 및 토기 등은 고령 대가야 유적도 및 사진과 함께 귀중하여 학문적 자료가 된다.”
 임나일본부를 확증할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나왔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1915년 일본사 전공자인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의 조사내용을 보자. 그 역시 도쿄대의 명령을 받고 김해지역의 ‘임나일본부의 물증’을 찾으려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김해패총 발굴을 통해 일찍부터 일본과 조선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규정했다. 한·일 합병의 합법성을 고대사에서 찾은 것이다.

 ■“일본부는 막상 조선풍이더라”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서기 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동국동문화(同國同文化)라는 사상이 잇으면 화합이 될 터로다 하는 것이 요점이 되얏더라.”(<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
 구로이타는 이 기사에서 가야고분의 조사목적을 ‘임나일본부의 확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1915년 10월19일 도쿄대 고고학회 10월 월례회에서 ‘특히 김해·함안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산성과 고분의 관계가 내가 주목한 사항이다. 일본부가 어느 곳에 있었는 가를 철저하게 연구하게 됐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부는 최초에 김해·함안에 있었다고 한다.”(<고고학잡지> ‘제6권 제3호’)
 그러나 구로이타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끝내 찾지 못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함안·김해는 모두 일본부 소재지라고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스스로 발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만 것이다. 일제는 영산강 유역의 전남 나주 반남 고분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옹관이 북규슈 지방의 옹관과 유사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모두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즉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하나임을 밝히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낙랑예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수막새. | 국립중앙박물관 .

 ■내선일체의 증거물이 조선의 보물

   ■속국일 수밖에 없는 나라
 “너희는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일 수밖에 없다.”
 일제가 낙랑·기야·영산강 유역 발굴조사에 총력을 기울인 까닭은 분명하다.
 한반도의 북쪽은 기원 전 108년~기원 후 313년까지 한사군의 지배를, 남쪽은 4세기 중후반~6세기 중엽까지 일본(임나일본부와 북규슈)의 지배를 받았음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기원전 108년~기원후 6세기까지 660여 년 동안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세키노의 언급(1941년)을 보자.
 “조선은 중국과 왕래가 쉬워 일찍부터 그들의 문화를 수입하였고~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서 항상 그에 복속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때때로 일본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세키노는 “조선은 국가로서 영토가 협소하고 인민이 적어 일본이나 중국에 대항하여 완전히 독립국을 형성할 실력이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차츰 닳아 없어지기에 이르렀다.”(세키노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
 전형적인 정체성과 타율성의 강조가 아닌가. ‘조선은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낙랑군은 과연 어느 나라 식민지?
 일제가 그토록 규명하려 했던 임나일본부와 낙랑은 어찌된 것인가.
 먼저 임나일본부. 일제는 가야유물을 토대로 가야와 임나일본부의 관계를 고고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하지만 구로이타의 고백에서 보듯이 임나일본본부를 입증할만한 어떤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낙랑은 어떨까. 일제는 낙랑군을 두고 ‘지나(중국)인의 군현이며, 지나의 일부’라거나 ‘한나라 시대의 일대(一大) 콜로니로서 한반도~만주 동변에 건설된 군현’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또 고조선을 한족(漢族)이 세운 ‘최초의 식민지’로 파악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위만조선을 한나라의 ‘식민지’로, 낙랑군을 한나라의 ‘직할지’로 규정하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그 시대에 태어나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기에 정답을 알 수는 없다.
 북한학계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고, 평양에 존재하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이 아니라 고조선의 속국인 낙랑국이라고 보고 있다. 평양의 낙랑국을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서 보이는 최리(崔理)의 낙랑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최리의 낙랑국은 ‘기원후 15년 고구려 왕자 호동이 낙랑국 공주를 유인한 뒤 멸망시켰던’ 바로 그 낙랑국이다. 북한의 주장은 평양의 낙랑국은 중국인의 나라(한나라)가 아닌 토착민의 나라(최리의 낙랑국)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북한은 한사군이 설치했다는 낙랑군도 달리 보고 있다. 즉 고조선은 평양의 왕검성과 함께, 랴오닝성에 부수도 개념의 별도의 왕검성을 세웠다는 것.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침략해서 낙랑군을 세운 곳은 평양의 왕검성이 아니라 랴오닝의 왕검성이라는 것.

 ■낙랑인도 우리 역사
 모든 주장이 견강부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낙랑전문가인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낙랑문화는 중국과 고조선 세력의 영향력이 교차하고 융합해서 이룬 독특한 문화”라는 본다. ‘낙랑인’이라는 독특한 종족집단(ethnic group)을 거론한 것이다. 
 그는 “낙랑고분에서 고조선의 독특한 세형동검문화가 나타나고, 고조선 지배세력의 기반이 낙랑군에서도 유지됐다”고 보았다. 그는 묘제, 즉 무덤형식의 변화에 주목한다. 즉 낙랑군 설치 직후인 기원전 1세기 때 이 지역의 주묘제는 단순한 목곽묘였다는 것. 그런데 기원 전 후부터 1세기를 중심으로 대동강 남안에 새로운 묘제가 등장한다는 것. 즉 하나의 묘광 속에 사각형 형태의 외곽을 조영한 뒤 그 내부에 다시 두 개 이상의 목관을 두는 복잡한 형태의 묘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귀틀묘’라 한다.  
 중요한 것은 중국 중원에서는 이 낙랑고분의 속성을 갖춘 귀틀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단서라는 것이다.
 “낙랑군 설치 이후 100년이 지나면서 한나라계 주민은 고조선화하고, 토착세력인 고조선계 주민들이 한화(漢化)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로써 ‘낙랑인’이라는 특별한 종족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천덕꾸러기로 여겼던 이들 ‘낙랑인’도 당연히 우리 역사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을까. 낙랑도 결국 우리 역사라는 얘기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273

낙랑군 호구부 연구 - 동북아역사재단

낙랑에 관한 동북아역사재단의 간행도서

낙랑군 호구부 연구 - 동북아역사재단

www.historyfoundation.or.kr/.../filedownload.asp?...연구59낙랑군호구...
제가 지금부터 밝히는 이 내용들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간행한 도서, 『낙랑군 호구부 연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낙랑군 호구부 연구』중 영남대학교 권오중 명예고수께서 집필하신 항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 한가지 덧붙이자면『낙랑군 호구부 연구』는 북한에서 몇 년전에 발견된 「초원 4년 낙랑군 호구부」를 근거로 편찬된 책입니다.


......(중략)......

 낙랑에 대한 연구 기간이 어느덧 1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군'의 위치 문제에 있어서까지 학자들 간에 일치된 의견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지난 1세기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상황과 인식이 결부돼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1909년은 일제의 식민지 작업이 완료 단계에 이르렀던 시기다. 이 시점에 고대 중국 행정기구인 낙랑군 유적이 조선 땅에서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은 '중국의 일부'이거나 '식민지'로 설명되었으며, 이러한 논리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기본적 통념으로 자리함으로써 식민사학의 주요한 논거로 자리하였다.

 1945년 해방은 낙랑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낙랑에 관한 부정적 인식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

 하나는 낙랑에 관한 연구를 기피하는 현상이다. 4백년이 넘는 낙랑군에 관한 연구는 낙랑과 결부된 한(漢) 문화의 수용이나 고대국가의 출현이라는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사 분야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낙랑에 관한 연구는 아직 낙후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중략)......
 
 다른 하나는 낙랑에 관한 편향된 인식으로 말미암은 부작용으로, 이는 낙랑의 위치에 관한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낙랑의 소재지를 현재의 중국 요령지방으로 설정하는 '낙랑요령설'을 들 수 있다. 이 주장은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에 맞선 대응논리의 성격을 갖기는 하지만,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에서 '응소'는 '낙랑요령설'과 유사한 주장을 펴기도 하였으므로 '낙랑요령설'을 순전히 식민사학에 대응하기 위한 반대 논리로만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용강, 박천, 봉산, 은율 등 북한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낙랑시대의 유적이다. 낙랑시대를 증명하는 낙랑한묘(樂浪漢墓)가 평양지역에만 5000여 기나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낙랑평양설'은 그만큼 유력한 정설로서의 지위를 갖는다고 하겠다. 반면 '요령설'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지역에 산재한 낙랑 유물이 내포한 지역적 의미에 관해 합리적 해석을 제시하지 못하므로 설득력이 약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책머리에 

낙랑군 연구의 현황과 과제Ⅰ권오중 
Ⅰ. 낙랑 연구 '100년'의 역사 
Ⅱ. 낙랑군의 주민 문제 
Ⅲ. 낙랑군의 체제 문제 
Ⅳ. 앞으로의 연구 과제 

진한대 호구부와 그 운영Ⅰ윤재석 
Ⅰ. 머리말 
Ⅱ. 리야진간과 진대의 호적제도 
Ⅲ. 진한대의 호구 집계와 호구부 
Ⅳ. 맺음말 

진한시기 호구문서와 변경 지배 - 기재 양식을 중심으로Ⅰ김경호 
Ⅰ. 머리말 
Ⅱ. 호구문서의 형제와 내용 
Ⅲ. 호구문서 양식의 통일화 
Ⅳ. 호적 편입과 변경 지배 
Ⅴ. 맺음말 

낙랑군 초기의 군현 지배와 호구 파악Ⅰ윤용구 
Ⅰ. 머리말 
Ⅱ. 군현성의 축조 
Ⅲ. 한화의 진전과 지역차 
Ⅳ. 문서행정과 호구 파악 
Ⅴ. 맺음말 

낙랑의 군현 재편과 예(濊)Ⅰ이성제 
Ⅰ. 머리말 
Ⅱ. 기원전 45년 낙랑군 호구 현황과 지역 간 우열의 경향 
Ⅲ. '대낙랑군'으로의 재편과 지역별 분할 통치 
Ⅳ. 영동 7현의 열세화와 부도위제 
Ⅴ. 맺음말 

한사군의 역사지리적 변천과 '낙랑군 초원 4년 현별 호구부'Ⅰ윤선태 
Ⅰ. 머리말 
Ⅱ. '낙랑군 초원 4년 현별 호구부'의 현별 기재 순서 
Ⅲ. 임둔ㆍ진번군의 치폐와 예 
Ⅳ. 현도ㆍ낙랑군의 퇴축과 고구려 
Ⅴ. 맺음말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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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전 낙랑군 인구 4만5천세대 28만명

등록 : 2007.04.12 18:53수정 : 2007.04.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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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낙랑군의 인구, 호구 현황을 기록한 평양 출토 목간의 내용은 국내 학계에 민감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평양 부근의 낙랑 무덤 발굴현장을 찍은 사진이다.

윤용구씨, 평양 발굴 목간내용 첫 공개
한반도서 가장 오래된 인구조사 자료
“중국인-조선인 따로 집계 민족의식 뚜렷”


때는 한나라 원제가 중국 땅을 다스리던 초원 4년(기원전 45년).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문명 중심’이던 낙랑군의 관리들은 일종의 인구 센서스(호구 조사)사업을 벌였다. 군내 중국·조선 백성들의 호구 현황을 파악해 통계 수치를 나무쪽(목간)에 적어 넣는 작업이었다. 조사결과 군내 25개현의 인구는 28만명, 호수는 4만5천여세대로 나왔다. 각 현별 인구는 수백명에 불과한 마을부터 만명 이상의 대촌락까지 들쭉날쭉이었다. 조선인, 중국인 수는 따로 집계했다. 당시에도 뚜렷한 민족간 의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2000여년전의 이 통계 문서는 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인구 센서스 자료가 된다. 2005년 북한 평양 대동강 기슭 낙랑구역의 옛 유적에서 나온 나무쪽 문서(목간)를 판독한 결과 밝혀진 내용이다.
12일 낙랑사 연구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실장은 오는 14일 열리는 한국 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충남대)를 앞두고 이 목간 내용을 남한 학계에 처음 공개했다. 목간 내용은 지난해 입수한 북한 역사학자의 낙랑군 관련 논문에 포함된 것으로, 전체 내용과 수량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연대가 확실하고 출토 경위도 명확해 당대 낙랑군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다.
낙랑기와
윤 실장은 “이 공문서 목간은 당시 ‘괴부’로 불리우던 통계 공문서의 일종”이라며 “출토지와 연대가 확실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인구 통계 자료”라고 밝혔다. 그는 기원후 2년 나온 중국 한서지리지가 낙랑군의 전체 인구만을 기록한 데 비해 이 공문서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별 세부적인 인구 분포도 기록해 고조선 말기상황까지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윤 실장이 주목한 것은 47년 뒤 중국 사서에 기록된 낙랑군 공식 인구와의 비교 검토 결과다. 그는 “47년 뒤 나온 기원후 2년 중국 한서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낙랑군 인구는 40여만명으로 호구수는 6만호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기간 사이 인구 증감을 계산해보면 연평균 증가율은 0.95%정도로 자연증가율보다 조금 높은 수치가 나온다”고 했다. 그는 “이로써 당시 한군현 사회가 낙랑군에서도 비교적 평탄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현별 인구 통계가 중국인과 토착민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과, 통계 기록을 토대로 25개 현을 어떤 경위로 만들었는지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윤 실장은 “고대 중국 행정구역에는 1만호를 기준으로 대현 소현을 나누는 등의 기본적 구분이 있었는데, 이 기록에는 같은 현 단위인데도 인구수의 편차가 매우 큰 점으로 미뤄 인위적 위계를 두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난다”고 해석했다. 여러 추정이 가능하나 어쨌든 자연군집적인 부락 단위로 행정구역을 편제한 것으로 보인다는 추정이다. 이는 낙랑군이 전대의 고조선 사회 구조를 해체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통치자들이 조선인 토착민들의 정서를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이 목간 문서는 북한 학자의 논문에 소개된 내용만 확인되었을 뿐 목간의 모양이나 글자 모양, 전체 내용, 수량 등이 온전히 파악된 것은 아니다. 한편 북한이 90년대 발굴된 목간 중에서는 대나무쪽에 쓴 죽간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그 실제 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발굴 내용에 대한 보고서 발간은 물론 발굴 결과 내용을 그동안 공식적으로 공개한 바 없다. 현재 남북한 및 중국 학계에서는 낙랑군 위치를 놓고 대동강 유역권을 주장하는 기존 통설과 중국 요서지방 주재설을 주장하는 학설(북한)이 엇갈리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02599.html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무덤 벽화.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라는 인물의 묵서명이 실려 있다. 이 묵서명이 없었으면 한사군 유물로 둔갑했을 것이다.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양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조선고적도보>를 간행하면서 낙랑·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전에는 누구나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했었다. 일제뿐만 아니라 북한도 이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남한 주류 사학계는 일제의 발굴 결과는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도 북한의 발굴 결과는 무조건 부인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북한 리진순 ‘평양일대 락랑무덤 연구’, “낙랑군 설치 200년전에 벌써 존재”
주류사학계, 북한 연구 무조건 부인, 시멘트 쓴 의혹 일제 발굴 비석은 맹신

북한학자 안병찬은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에서 ‘평양시 락랑구역 안에서만도 2600여기에 달하는 무덤과 수백 평방미터의 건축지가 발굴되었으며 1만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찾아냈다’면서 “이것은 일제가 ‘락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하기 위해 조선 강점 기간에 도굴한 무덤수보다 무려 26배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남한의 한 사학자가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이란 논문에서 “(북한에서) 근래 연구서 형태의 몇몇 자료가 나왔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문자 유물의 보고는 더욱 부실하여 설명한 내용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고 쓴 것처럼 무조건 부정하고 있다. 북한 정치체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해당 유적을 직접 발굴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대해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단정 짓는 것은 학문적 소통의 거부 선언에 다름 아니다. 남한 학자들이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안 믿겠다’고 부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정설로 떠받들고 있는 ‘한사군 한반도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 학계에서 한사군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목곽묘(木槨墓)를 ‘나무곽무덤’이라고 부르는데 850여기나 발굴했다. 북한의 리진순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한사군이 설치된 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목곽묘는 한사군 유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 중국 랴오닝성 금서시에서 1997년 발견된 임둔태수장 봉니. 중국 요서 지역이 한사군 지역임을 알게 해주는 유력한 물증이지만 주류 사학계는 외면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재 평남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를 살펴보자.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점제현은 낙랑군의 25개 속현 중의 하나이므로 주류 사학계는 이 신사비를 용강군이 낙랑군 지역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보고 있다. 그런데 비가 발견된 지역은 현재 온천군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휴양지이고 비가 서 있던 곳도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였다. 이런 곳에 2천년 동안 서 있던 비를 아무도 못 보았으나 이마니시 류가 단번에 발견했다는 자체가 의문이다. 조선총독부 고분 조사위원이었던 후지타 료사쿠(1892~1960)는 <조선고고학연구>(1948)에서 이마니시 류는 용강군 해운면의 어을동 고분에서 단 한 개의 와당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면장으로부터 ‘비문을 읽을 수 있으면 그 아래의 황금을 얻을 수 있다는 고비(古碑)’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증언을 한 면장은 누락시키고 동네 아이와 찍은 사진을 발표했다. 북한의 <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는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기초에는 시멘트를 썼다”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화학 성분도 근처의 마영 화강석·온천 오석산 화강석·룡강 화강석과는 다르다고 분석했다. 은(Ag)은 주위 3개 지역의 화강석보다 2~4배, 납(Pb)은 3배, 아연(Zn), 텅스텐(W), 니켈(Ni), 인(P)은 각각 2배가 많은 반면 바륨(Ba)은 주위 화강석의 6분의 1 이하로서 다른 지역(요동)에서 가져온 비석이란 분석이다.

삼국사기 “낙랑군 등 포로 2만명”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이란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는데, 북한의 박진욱은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하여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신의 손’을 거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 점제현 신사비. 평남 용강군(현 온천군)에서 이마니시 류가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 북한에서는 다른 지역의 암석 재질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해석할 때 중국계 포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 대왕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 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호구 수가 기록된 낙랑 목간도 이런 경로로 획득한 문서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α’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 기록상으로만 최소 ‘2만 명+α’의 포로들이 잡혀왔다. 이런 포로들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가장 먼 평안남도나 황해도에 집단 거주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많은 망명객도 있었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년(197년) 조는 “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 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중국계 유적, 포로들 것일 가능성 커

1997년 중국 랴오닝성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옛 성터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조작 시비가 일지 않는 유일한 봉니다. 길림대 고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백산학보 61집>(2002)에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를 발표했다. 봉니 출토지는 물론 근처의 대니(大泥) 유적과 패묘(貝墓) 유적의 출토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논문이다. 그는 전국시대(서기전 475~221)에는 금서시 유적에서 고조선 계통의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다가 전한 중기부터 후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특징은 약해지고 중국 특징의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뒤의 시기는 한사군 설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주류 사학계로부터 외면당했다. 임둔군은 함경남도쪽에 있어야지 랴오닝성 금서시에 있어서는 정설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구석기 시대 유적·유물을 조작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조작이라는, 조선사편수회의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해석을 정설로 떠받드는 대한민국 주류 사학계는 과연 조선사편수회와 단절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발숙신, 발조선은 원문의 방점을 오독(誤讀)한 재야의 착각

발숙신, 발조선은 원문의 방점을 오독(誤讀)한 재야의 착각 
http://mausk.tistory.com/27

발숙신, 발조선이란 말이 재야에서 그럴싸한 논리로 통용되고 있는 모양인데 본햏의 생각으로는 사서의 기록을 면밀하게 탐구하지 않은 재야의 망상적 부산물이며 일종의 지들 편할대로식의 창작품이라 생각되오.

발숙신이란 용어가 등장하는 사서의 기록은 『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라 하오. 이른바 '北山戎發息愼'이라는 표현이 있으니 신채호가 이를 發息愼=發朝鮮으로 본 것을 림승국, 문정창이 이어받아 발전시킨 뒤로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환빠들의 교리처럼 여겨져 왔던 것이오.

息愼이 肅愼으로 통용되고 있으니 이 기사의 息愼을 肅愼으로 보아야 함은 이론(異論)이 없소이다. 그러나 發肅愼(발숙신)이 맞는지 발(發), 숙신(肅愼)이 맞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 않겠소?

혹, 發肅愼(발숙신)이면 어떻고 발(發), 숙신(肅愼)이면 어떠하냐고 따지는 햏들이 있을 수 있겠소만, 햏들이 알아야할 중요한 것은 이 방점 하나에 고조선의 강역이 결판난다는 것이니,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소. 발숙신을 하나로 보고 이를 발조선과 연관하여 칭한다면 고조선의 강역은 전국시대 제(齊)와 접경한 즉, 하북성하고도 북경근처까지 올라가게 되오.

반면에 發(발), 조선(朝鮮)으로 보고 조선 사이에 發國(발국)을 끼워놓은 후 관자의 경중갑편의 기사대로 제나라 국경에서 8천리라는 산식을 띄워보면 고조선은 중국본토에서 조낸 멀어지게 되는 셈이오. 대륙빠들이 이 귀절에 목숨을 매다는 이유가 달리 있겠소이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의외로 발조선(發朝鮮)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관자(管子)』의 규도편(揆度篇)」을 보면 분명해지외다. 즉, '發朝鮮之文皮'라는 문장에 대한 史家들의 주석과 그 근거 문헌을 종합해 보건대, 발조선이 한 국가나 지역을 연칭하여 부른 것이 아니라 각각 발과 조선으로 독립한 별개의 국가임을 알 수가 있겠소.

해당 문장에 대한 주석의 원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소.

元材案「發, 朝鮮」又見《輕重甲篇》. 發, 國名.《逸周書.王會解》「燕人發」. 一名北發.《史記.五帝本紀》:「北發山戎息愼」.《漢書.武帝紀》:「海外肅慎北發渠搜氐羌徠服.」晉灼曰:「《王恢傳》『北發月氏可得而臣』.似國名也」此以發與朝鮮連言, 則北發當在朝鮮附近. 何如璋釋《輕重甲篇》所謂「即北發, 國近朝鮮」,是也. 文皮, 虎豹之皮.《輕重甲篇》云:「發, 朝鮮不朝,請文皮服而以爲幣乎?」


元材案에서 發은 國名임을 밝히고 그 근거를 逸周書(일주서)의 王會(왕회)를 해석하면서 發(발)은 연나라 사람들을 發이라 하고, 일명 北發(북발)이라 하였다고 함을 들었소. 또한 晉灼이 이르기를 漢書의 왕회전을 들어 北發의 월씨들을 취하여 신하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國名이라 하오. 또한 發(발)과 조선(朝鮮)을 연언(連言)함은, 즉, 북발(北發)이 조선(朝鮮)의 인근에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여 發, 朝鮮의 뜻을 풀이하고 있소.

何如璋이 경중갑편을 해석하기를 소위 즉, 북발이라 함은 조선의 인근 국명이다.라고 풀고 문피(文皮)는 표범(虎豹)의 皮다라고 하였으니 더이상 發國(발국)의 존재가 별도로 있음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지경이오. 따라서 發(발)과 조선은 별개의 國名이라 사료되며 이를 합쳐 발조선이라 함은 근거가 없는 발언이외다.

혹자는 發朝鮮의 발을 "밝"에서 연원했다고들 하나 음운학적으로도 의심스럽거니와 그러한 점이 조선과 연칭되어야 하는 근거라고도 볼 수가 없소.

논외이지만 예전에 신채호가 "진번조선"을 진조선, 번조선으로 풀이한 것 역시 그러한 까닭에 학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오. 이말이 맞다면 사기(史記)의 화식열전(和殖列傳)에는 엄연히 "조선진번"은 무엇으로 해명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겠소이다.
(≪史記≫<貨殖列傳> 燕條 :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자칭 재야 사학자들이라는 분들이 방점 오독 사례는 그외에도 참 많이 산견되는 바요.역갤을 한참 시끄럽게 했던 《제계사기》도 결국 대덕(戴德)의 대대례기 63편《제계》와 사마천의 《사기》를 각각 칭하는 것임으로 제계, 사기임이 밝혀져 개쪽을 당한 적이 있었소.

뿐만아니라, 설문해자의 夷에 대한 해자 중 "惟東夷從大大人也"라는 문장을 惟東夷從大, 大人也. 로 해석해놓고 동이는 위대한 민족~ 이라 스스로 자찬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벌어졌다하오.

위 문장은 惟東夷從大, 人也.  로서 大는 곧 人이다.로 새겨야 하며 
大자가 人을 형상화 했음을 나타낸 것이지 위대한 사람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문장이오.

환단고기가 위서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책속의 용어들 (4)

역.사.일.반 2007/03/18 01:43
1. "문화"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문화(文化)가 culture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2. "국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국가(國家)가 nation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3. 그 외에도 인류(人類), 전세계(全世界), 세계만방(世界萬邦)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책이 저술되었다고 주장하는 중세시대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용어들이다.

4. 도기론(道器論), 남녀평권론(男女平權論), 부권론(父權論) 등은 구한말에서나 등장한 용어다.

5. 기독교에서나 보이는 삼위일체론의 짝퉁 이론 삼신일체론이 등장한다. ㅋㅋㅋㅋ..

6. 환단고기의 성삼품설은 천주실의의 저자 마테오리치가 주장한 것을 정약용이 받아들인 것이다.

7. 자기나라를 일컬으면서 本朝, 我國이라 하지 않고 고려라고 칭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8.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잠청배(潛淸輩)라는 용어는 갑신정변 이후에나 등장하는 말이다.
결론 : 환단고기는 20세기 작품이다.

<박광용 교수님의 "『규원사화』와『환단고기』의 성격에 관한 재검토"에서 발췌인용>
http://mausk.tistory.com/26

낙랑군은 어디인가

http://mausk.tistory.com/25
역.사.일.반 2007/03/13 00:14
 
앞에서 우리는 낙랑유물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위선과 위증사례를 역으로 살펴보았다.
그들의 논리라는게 크게 3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 제작지가 불명한 것은 다 한국 것이라 우긴다.
둘째, 시기적으로 불명한 것은 다 왕망, 후한시대 이후의 것으로 내려잡는다.
셋째, 제작지와 제작시기가 분명하게 표기된 유물인 경우 수입품이나 위조품으로 둔갑시킨다.

다양한 유물조사나 문헌연구를 통해 귀납적으로 낙랑이 한반도와 관련없음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결론부터 미리 "한반도 낙랑설은 개솔이"라고 내려놓고 연역적으로 논리를 꿰어맞추다
보니 논리적으로 엉성하고 빈약할 수밖에 없겠다.

소스들이 주로 북한측에서 나오고 우리쪽 재야학자들에 의해 살을 붙인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기초적인 사실관계는 물론이고 사서의 기록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엉터리 주장들이 많았다.
북한 학자들은 한민족 대동강 기원설과 평양중심설을 주장하면서 기존의 입장을 바꿔
위만조선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과 대동강 유역이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멸망한 위만조선의 수도에 점령군사령부(낙랑군)가 들어서야 한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멸망한 수도에서 2000여리 떨어진 변경에다가 낙랑군을 설치할 이유가 없다.

북한놈들도 스스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고조선의 부수도라는 개념을 끼워넣은 모양인데
부수도가 점령당했다고 멸망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을까?
그러다 보니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이 세웠다는 평양 최리의 낙랑국도 이해가 어렵다.
멸망한 국가의 수도에 유민들이 세로운 왕조를 세웠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반란군이지 유민 나부랭이 집단이 아니다.

이를 여기서 다시 재론하지는 않겠지만, 일제가 B.C. 1세기 ~ A.D.4세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편년대의 유물을 집단적, 체계적으로 단시간 안에 조작할 수 있다고 보는 가설 자체가
태생적으로 비논리성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역사의 시대를 고증하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는 유물이다. 그 두번째가 문헌상의 기록이다.
이 두가지가 일치하면 그 고증은 객관적인 지지를 받는게 당연하다.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이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킨다.
앞에서 우리는 낙랑유물에 대한 조작, 위조시비가 근거없음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사서의
기록을 검토하여 통해 낙랑의 위치를 비정해보자 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

① 지명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는 것이다.
   (동일한 지명이 여러군데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
② 낙랑군 등 한 4군은 중국의 정세에 따라 위치와 강역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을 단순히 편면적으로 고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③ 환단고기나 단기고사와 같은 위서의 가능성이 높은 사서는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④ 같은 사서의 기사끼리 모순되는 경우는 인용을 보류한다.
⑤ 다른 사서의 기사끼리 모순되는 경우는 먼저 편찬된 사서의 기사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⑥ 논의의 범위를 한정하기 위해 대륙백제설, 대륙삼한설, 북경고구려설 등은 개솔이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역.사.일.반 2007/03/13 00:14
무뇌 뇌티즌들이 종종 퍼다나르는 김종서 박사의 한사군 비정연구 기사가 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2270046


수학적으로 고증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는데 숫자만 들어간다고 다 수학이 아니다.
왜 그러겠는가? 거리 측정만큼은 발로 직접 걸어가 봐야 안다. 책상에 앉아서 펜대나 굴려가지고
설렁설렁 맞춰보기엔 여러가지 변수가 많이 발생한다.

김종서는 1리는 당대(唐代) 이후 0.393km로 고정된 것으로 보고 구당서의 기록에 등장하는 낙양 및
장안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거리를 비교해 한대(漢代)의 1리가 현재 거리의 75% 미만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당시의 거리 개념을 현대의 단위로 환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김종서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굴곡지수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漢代의 A에서 B구간으로 가는 코스가
唐代에서도 똑같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두 지역을 비교하였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漢代 1里 개념은 唐代의 75% ~ 78%라는 것이다. 唐代 이후의 里에 대한 개념은 현대의
0.393km와 대동소이하므로 구당서의 기록을 가져와서 km로 변환한듯 보인다.

다시 말하면 漢代의 里(75%) = 唐代의 里 = 현대의 里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고대 중국의 도량형 제도 변천사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唐代 이후에도 里에 대한
개념은 계속해서 변했고 현대 중국에서 쓰는 里는 0.50km로서 唐代의 0.56km보다 작고 한국의
0.39km 보다 훨씬 크다. 아마도 김종서는 중국의 里와 한국의 里를 같은 것으로 혼동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 때의 낙양과 溫州(온주)까지 의 거리가 현대 중국 국도보다 더 짧은 이유에
대해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국형 도량형인 0.393을 대입해 굴곡지수를 계산했으니 당연한
착오이다.)

따라서 후한서의 5000리라는 개념은 현대의 개념으로 얼마라고 단순대입할 것이 아니라
비교대상인 측정 구간을 다른 역사서에서는 몇 리로 계산하였는지 살피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가장 좋은 사례가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안에서 평양성까지의 거리이다. 신
당서에서는 막연히 경사(京師, 즉 장안)에서 5000리가 넘는다고 하고 있으나 구당서에서는
장안에서 동쪽으로 5100리라고 하였다.

<新唐書/列傳/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高麗>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
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
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고구려는,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땅은 동쪽으로 해를 넘어서 신라에 이르고,남쪽 역시 해를 넘
어 백제에 다다른다. 서북쪽은 요수를 넘어 영주와 접하고,북쪽에는 말갈이 있다.임금은 평양성
에 사는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때 낙랑군이었다. 거리는 경사(당나라 장안성)로 부터 5
천리가 넘는다.
 산을 따라 굽고 둘러서 외성이 되고, 남쪽 끝은 패수가 있으며, 왕은 그 왼쪽에 궁
을 쌓았다. 또 국내성, 한성이 있는 별도라고 불렀다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京師>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
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
다. 경사(즉,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
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
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이 양당서의 기록을 보면 논란이 있는 "평양은 한나라 낙랑군의 옛땅이다." 라는 부분은 논외로
치고 순수하게 거리만 보자면 지금의 장안(長安, Xian)에서 한반도의 평양까지는 5100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후한서 군국지(上)에 낙랑군은 낙양 동북쪽으로 5000리라는 구절을
보자. 양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평양까지의 거리와 후한서의 낙랑군까지의 거리는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수학적 고증이고 나발이고가 뭔 필요가 있는가. 양당서는 기준점을
지금의 장안(長安, Xian)에서 잡았고 후한서에서는 기준점을 지금으로 낙양(洛陽, Luoyang)에서
잡았다.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장안과 낙양까지의 거리는 950리다. 낙양 + 평양 = 5000리라고 하였으므
로 장안 + 낙양 + 평양 = 5950리다. 즉, 양당서는 장안에서 평양까지 5100리라고 하였고
후한서 군국지는 5950리라고 한 것이다. 이 거리는 한대(漢代)와 당대(唐代)의 도량형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보다 한참 한반도 밑으로 내려와 전라도 어디쯤 되어야 한다.
이러한 오차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종서의 주장처럼 적어도 요서지역 근방의 버뮤다
삼각지 세계는 분명히 아니다.



김종서의 주장에 따르면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난하유역에다 낙랑군을 비정하였으므로 그 양반의
산식에 따르면 평양은 대체 어디가 되어야 한다는 얘긴가? 적어도 뻬이징? ㅋㅋㅋㅋ

아니나 다를까, 김종서는 고구려 후기에 해당되는 6~7세기때 평양성이 중국 하북성 근방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신라는 대륙까지 진출해서 삼국통일을 했다는 것이다. ㅋㅋㅋㅋ
김종서의 주장은 사기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진(秦)의 통일하기 전, 전국 7웅의 하나였던 연(燕)
이 한참 끝발을 날리고 있을 때, 진개는 연의 동북방에 있던 동호(東湖)를 쳐서 1천리, 그냥 오른쪽에
있던 조선 땅 2천리를 경략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 참조)

당시 연의 수도는 계(薊)라는 곳으로 한서 지리지에 계(薊)는 남쪽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와 통하며,
발석지간에 있다고 했으니(薊,南通齊﹑趙,勃﹑碣之間一都會也) 안사고(安師古)의 주석에 따르
면 발석은 발해와 갈석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갈석산과 발해의 사이는 이미 연나라의 수도였
다는 얘기고 단순히 여기를 기점으로 삼아도 진개가 취한 동쪽 2000리를 더하면 낙랑은 끽해야 요
동반도에서 압록강 사이가 된다.

윤내현의 주장처럼 도저히 난하가 만번한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김종서처럼 그 옆에다가 낙랑군
을 그려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김종서의 주장처럼 낙랑군을 거기다 그려놓았을 때 요동군
은 북경근처까지 내려온다.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등 연나라 영토는 들어갈 자리도 없어지게
되고 연나라의 수도는 저쪽 내몽고쪽까지 올라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