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4일 목요일

도(度)가 넘친 낙랑유산 부정하기

도(度)가 넘친 낙랑유산 부정하기

http://mausk.tistory.com/24
역.사.일.반 2007/03/12 23:22
최근 낙랑유물과 관련하여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학술적인 자료나 근거들은 드물고
약속이나 한듯 거의 대부분이 낙랑유물을 일제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낸 거짓, 내지는 가짜라는 얘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소스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김없이 북한 리순진이 쓴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하여"에서 요약 발췌한 것들인데
주로 환빠, 대륙빠 누리꾼들이 퍼나르는 것 같다.

 
심각한 것은 아무 생각없이 집과 학교를 오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역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무리한 민족 미화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이른바, 주체사관의 일종인 우리 민족제일주의라는 북한 놈들의 놀음에
놀아나기 딱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낙랑유물에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고 나온 것은
1990년 초반 단군릉 발견(?)사건 이후라고 보여진다.
리순진을 비롯하여 고대사학, 고고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소위 고조선력사개관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고조선은 노예국가이며 단군은 실존하지도 않는 허구의 신화라 폄하했던 사람들이
93년 김일성 교시 한마디에 기존 시각을 180도 바꿔서 단군 예찬론자로 변모한다.
윗대가리들이 정해준 포맷에 맞춰 이론을 다시 뽀샵질하는 사람들은
더이상 학자라 부를 수도 없으리만치 사꾸라 냄새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윤내현같은 별종이 스타대우 받는 이 대한민국은 행복한 국가이다.
과거 북한에서 고조선 요동중심설이 지배적인 학설일때
학자적 지론에 의해 평양중심설을 주장하다 실각당한 사람 여럿 있었다.
단지 학설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자를 아오지로 보낼 수 있는 북한에서
낙랑 유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란 애시당초 어렵다고 봐야한다.


북한은 최근 단군릉 발굴을 비롯 고조선 역사 재편을 시도하면서
그동안 산발적으로 논의되었던 낙랑유물을 본격적으로 "조작"과 "날조"로 규정하는데
한민족 대동강기원설 내지는 평양중심설을 주장하는데 써먹고 있다.
(더 나아가 리순진 같은 이는 황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나일강과
더불어 대동강은 세계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ㅋㅋㅋㅋ..)
이런 주체사관은 90년대 북한에 불어닥친 경제적 위기, 외교적 고립책을 타개하고
체제의 우월성 및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인터넷 환빠, 대륙빠들이 줄차게 퍼나르고 있는 리순진의 글들이
이와같이 얼마나 이념적 색칠로 뒤범벅 된 글들인지 생각이나 해 보았겠는가.


해방이후 낙랑일대의 고분발굴은 60~70년대에 북한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1993년 단군릉 발견 사건이 발발한 직후
갑자기 낙랑 주변에서 무려 2600기가 "정리"되고(註:발굴이 아니다.)
15,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서는 발간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습되었다고 하는 15,000점의 유물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였겠는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쓸만한 유물들은 이미 일제시대때 다 파가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60~70년대 일본 학자들이 와서 다 파갔다.
그때 일본 애들이 같이 본 게 있고 또 그것이 高久健二 같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어느정도 규명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칠 수가 없다.


리순진의 낙랑유물 보고서는 어떤 학문적 성과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낙랑 유물 부정하기에서 출발한 구닥다리 레고블럭이거나
정인보, 신채호 류의 재탕, 삼탕일 뿐이다.

 
그의 픽션이 주장하는 바는 핵심이 대단히 명료하다.
그래서 환빠, 대륙빠 친구들이 무뇌적인 열광을 하는지도 모른다.
① 한사군의 낙랑은 요동에 있지 한반도에 없다.
② 평양 등지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고조선 유민이 세운 소위 낙랑국의 것이다.

 
이런 미친 개뼉다구 같은 소리는 처음부터 논리가 성립이 안되는 바,
그들의 고조선 평양중심설에 의하면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라면서
멸망한 유민이 버젓이 멸망한 국가의 수도에 또다른 국가를 세웠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말이되냐?


멸망한 국가의 유민이라는게 베트남 보트 피플처럼
거의 죽을동 말동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후 이웃국가나 중립지역을 오가며
동가식 서가숙하는게 통상 역사적 사례라고 했을때
북한 놈들의 주장은 최소한의 논리성마저 포기한 뽀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들 스스로도 이게 좀 말이 안되지 싶으니까 
한나라는 고조선 위만왕조를 무너뜨리기는 하였으나
한반도까지는 진출하지 못하고 겨우 요동지방만 차지했다고 하며
漢四郡의 낙랑도 그래서 요동에 있는 것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수도인 평양이 멀쩡히 남아 있는데 부수도의 멸망만 가지고
고조선 국가의 멸망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여지껏 못하고 있다.

 
이에, 북한의 리순진이 펼치고 있는 낙랑유물 부정하기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모순점을 사료와 문헌고찰 등을 통해
비판해 보기로 하고, 나아가 환빠 및 대륙빠 뇌티즌들의
무뇌적인 지랄을 신속히 잠재우고자 한다.


역.사.일.반 2007/03/12 23:25

낙랑 유물 중 종류도 많고 편년대도 다양하지만 한사군 설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몇몇 유물에 대해서는 당연히 가짜 시비가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지금 말하고자 하는 봉니인데..
봉니의 경우 한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의 속현명이 그대로 찍혀나오므로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는 까닭에
환빠들의 집중 공격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연도 구구절절하시다.

봉니에 관한 시비 중 대부분은 리순진의 주장이다.
윤내현 設도 보이기는 하나 리순진의 주장을 다시 확대 재생산 한 것에 불과하다.

시비 1.  봉니의 수가 그렇게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실이 없다.

       - 이런 시비는 출토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간단히 무력화 시킬 수 있기에
         바이러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짱깨들의 뉴스 사이트를 검색한 결과
         리순진이 구라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 1994년 중국 시안 섬서성 북쪽 相家巷村에서 秦나라 시대의 봉니(封泥)가 600여개 이상이 
         발견된 것을 비롯하여 역시 인근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한양릉(註: 漢陽陵, 전한 景帝의 무덤)
         에서는 2001년도에 600여개, 2003년도에 300여개가 발굴되는 등 도합 900여개의 전한시대의
         봉니가 대거 수집되었음. (신화통신사 2004년 1월 24일자 기사 참조)

       - 필자의 중국어 실력이 짧아서 그렇지 제대로 조사하면 어디 이것만 나올까..
         아마 1920년에서 40년대까지 일본놈들이 중국 시안지역에서 도굴해 간 봉니가
         2000개가 넘는다고 하던데,  중국 고고사학에 정통한 리순진이 이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는데도 순진한 남한 학자들과 청년들을 데리구 의도적으로 사기친 게 아닌가 싶다.

시비 2. 관인의 관직명에 대한 시비

       ① 낙랑대윤장이 나올 수 없다는 시비

        - 왕망은 태수를 대윤으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낙랑도 낙선이라 고쳤으므로
          낙선대윤장이 되어야지 낙랑대윤장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혹 개념이 잡힌 일부 환빠에 한해서 친절히 한서 지리지의 원문을 인용하기도 한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

        - 그런데 역시 같은 책 왕망전을 보면 왕망이 관직명과 지명을 동시에 바꾼 게 아니고
          시건국 원년(9)에 관직명을 바꾼 후 그 후로부터 5년이나 뒤인 천봉 원년(14)에
          전국의 지명을 바꿨다는 기사가 있다. 즉, 이 5년 동안은 낙랑이라는 이름이
          낙선(樂鮮)으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였으므로 낙랑대윤장이라는 관인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 즉, 한서 왕망전에 왕망이 정권을 잡은 직후 오위장 왕기 등을 파견하여          
           왕후 이하 관직명을 고친 사람들과 흉노, 서역, 오랑캐의 나라들까지 돌아다니며
           新왕조의 인새와 인수를 새로 내려주고, 구) 한나라의 새(璽)와 인수를 회수하였다.
           여기에는 현토, 낙랑, 고구려, 부여가 포함되어 있는바,
           새 관직명인 대윤을 부여하여 인수를 내려줄 당시 낙랑은 낙선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始建國元年) 秋,遣五威將王奇等十二人班《符命》四十二篇於天下。..(중략)..五威將奉《符命》,
        繼印綬,王侯以下及吏官名更者,外及匈奴、西域,徼外蠻夷,皆即授新室印綬,因收故漢印綬
        賜吏爵人二級,民爵人一級,女子百戶羊、酒、蠻夷幣、帛各有差。...(중략)...莽策命曰:
       「普天之下,迄於四表,靡所不至。」其東出者,至玄菟、樂浪、高句驪、夫餘..(하략)

 
       ② 낙랑군 속현의 봉니만 보이고 인근지역의 다른 군이나 상부인 유주자사에게 받은 봉니도
           있어야 하는데 한 점도 안보인다.

          - 리순진이 몰라서 하는 소리임. 유주자사 봉니도 있고 현토태수 봉니도 2개나 있다.

 
       ③ 한나라 무제때 도장의 크기가 1.5cm로 규정했는데 봉니에 찍힌 도장 크기는 2~2.2cm이므로
           봉니를 진품으로 보기 힘들다.

          - 한서의 徐璆傳에 의하면 인장의 크기는 1寸四方으로 한변의 길이가 최대 3cm까지
            잡을 수 있다고 되어 있음. 도장의 크기가 다르다고 무조건 위조품으로 보는 건 무리.
            봉니의 연대를 측정해보면 일제시대때 만든 것인지 2000년전에 만든 것인지
            판단이 금방 설텐데 30cm 줄자들고 뭐하는 닭짓이삼?

       ④ 해방 전에 일제 골동상들과 봉니 위조자들이 많은 봉니를 위조해서 팔았다고 한다.

         - 현재 200여개의 봉니 중 일본 정부가 개인에게서 매입한 것은 별도로 국립박물관이
            조사를 하여 진품임을 확인하였음. 천제황신인봉니(天帝黃神印封泥)같은 경우
            가짜로 판명나 위조한 사람들을 처벌했다는 기사도 있음.

         - 지금도 세종로 중앙박물관에 가면 수십개의 봉니가 전시되어 있으니 어디 조사해 보든가.


역.사.일.반 2007/03/13 00:09
 효문묘(孝文廟)란 효문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뜻한다.
여기서 묘(廟)는 사당이지 무덤을 뜻하는 묘(墓)가 아님을 주의하자.
별 거 아닌 것 같아보여도 매우 중요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동종(銅鍾)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소리 내는 종(鐘)이 아니라
술을 따르는 일종의 제기(祭器)로서 "술병 종"(鍾)이다.
따라서 효문묘 동종이라 함은 효문제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쓸 때
사용했던 제기(祭器)쯤으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그러면 이 동종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어떠한 고고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볼 차례다.

이 동종이 평양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부근 어딘가에 중국 황실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다는 얘기고
그 사당의 이름은 동종의 외곽에 표시된 대로 효문묘라는 얘기가 된다.

황제가 직접 친제(親祭)하지 않고 각 군국의 제후왕이나 태수가 종묘권을 행사해
황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을 우리는 역사서에 보듯 군국묘라 했을 때
군국묘에서 군국(郡國)의 의미는 전한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통치제도를 상징한다.
(간혹 군국(君國)이라 쓰는 상식이하의 똘추들이 나타나는데 상종을 말도록 하자.)


즉, 한반도에 효문묘가 있었다면 이 효문묘는 군국묘의 성질을 가지는 까닭에
중국의 한반도 지배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환빠 쉑히들의 주장은
주로 북한 리순진의 노가리를 듣고와 멋도 모르고 리바이블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이론적 소스는 상당히 빈약하다.


효문묘 동종에는 영광3년(B.C.41년)이라는 제작기년명이 분명하게 표시되어있으므로
봉니와는 달리 가짜 시비를 걸고 넘어갈 수 없기에,
이 쉑히들은 이렇다할 근거도 없이 이 효문묘 동종을 수집품 내지는
유입경로를 알 수 없는 골동품쯤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시비 1. 북한의 리순진은 효문제가 행차한 일이 있는 군국(郡國)에만 효문묘를 세웠다는
"漢書" 위현전의 기사를 들어 효문묘와 평양 관련성을 부정한다.
시기적으로 한사군 설치(B.C. 108)보다 훨씬 이전의 황제인 문제(文帝)가
평양 부근에 행차한 일이란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 이는 리순진이 중국 고대의 종묘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라고 보여진다.
효문묘라고 하니까 그 사당에 효문제 위패만 있었을 것이라 단정해 버린 성급함은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케하는 대목이다.


앞에서 필자가 묘는 사당 묘(廟)이지 무덤 묘(墓)가 아니라고 강조한 이유도 바로 여기서 연유된다.

전한시대의 황실 종묘제도는 7묘제라 해서 동일한 사당안에 7개의 묘가 따로 존재했으며
각각의 묘는 대문, 마당(廷), 당(堂), 침(寢)으로 구성된 독립된 공간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에 대해 노가리를 다 읊을 수는 없거니와 그때 당시의 사당은
여러 개의 묘가 각각 담장 하나를 경계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만을 알아두자.
(첨언하면 이것을 동당동실제라고 한다.)


따라서 효문묘는 같은 사당 안에서 다른 후대의 황제묘와 함께 모셔진 7묘 중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므로 단순히 효문제가 재위했던 시기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될 것이다.

- 군국묘는 선임 황제가 행차했던 곳에만 세웠다는 漢書 韋賢傳(한서 위현전)의 기사도
다른 기사와 비교할 때 모순이 있다. 같은 책 漢書의 五行志(上)의 기사를 보면
한무제 건원 6년 여름에 요동군에 있는 고조묘(즉, 한고조 유방의 사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武帝建元六年六月丁酉,遼東高廟災 )
요동군은 한나라 초대 황제인 고조 유방이 한번도 행차한 사실이 없는 지역임을 고려할 때
위현전의 기사만을 근거로 군국묘의 설치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비 2. 종묘에서 쓰이는 귀한 물건이 어째서 초라한 나무곽 무덤에서 나왔나?

- 이 역시 리순진이 석암리 9호 고분에서 출토된 또 다른 동종과 착각한 것이다.
나무곽 무덤에서 나왔다고 하는 그 동종은 효문묘 동종과 완전히 다른 동종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크기 및 손잡이 문양도 다르고 받침의 유실여부도 다르다.
효문묘 동종은 나무곽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평양 선교리 철도 공사장에서
중국인 인부가 출토시킨 것을 공사 감독이었던 하시모토라는 사람이 취득한 것이다.

............


   <평양 선교리에서 발견된 효문묘 동종>     <리순진, 윤내현이 착각하고 있는 석암리 9호 동종>


- 리순진의 견해를 그대로 차용한 윤내현도 같은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한 원제 영광 3년(기원전 41년)에 제조된 효문묘(태종묘) 동종으로 이해하나,
영광 4년 겨울 10월에 또한 조서가 내려 "조종의 사당이 군국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라"라
하였으므로, 효문묘 동종이 제조된지 2년만에 군국의 사당들이 철거된 것이다.

이미 그러한데, 효문묘 동종이 9호묘로부터 발견되었으며, 같은 고묘에서 발견된
동종 중에는 전한 이후에 제조된 것이 있으므로, 이 고묘의 건조 연대는 후한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효문묘 동종은 전한 때 제조된 것이나,
후한대의 묘에 묻힌 것에 불과할 따름이며, 그 원본은 평양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전국에서 군국의 사당이 폐지된 이후에 유전되어 오늘날의 평양지구 9호묘의 주인의
수중에 들어간 뒤, 나중에 수장품이 되어 묘 안에 묻힌 것이라고 본다."


윤내현의 글을 읽어보면 ① 효문묘 동종이 석암리 9호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착각한 점은
리순진과 같고 ② "군국의 사당을 파하라"는 漢書의 기사를 "철거하라"로 오해하였다는 점은
중국사 전문 선생의 견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한심한 분석이다.


군국의 사당을 파(罷)한다는 뜻은 종묘로서의 기능을 중단하고 제사를 중지한다의 뜻이지
사당을 완전히 부숴버린다는 얘기가 아니다.
윤내현이 참고했다는 한서의 위현전 43권을 보면 소령후(高祖의 母) 등 침원(寢園)을 파(罷)하고
제사를 중지하였으며(因罷昭靈后..皆不奉祠), 다만 吏卒을 두어 침원을 지키게 하였다(裁置吏卒守焉)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내현은 한서 위현전의 기사에서 지가 필요한 부분만 칼질해서 갖다 썼던 것 같다.

또한 우리의 숙종실록 제30권 26년에도 나오는데 "漢의 위현성도 군국의 사당들을
수리하지 말기를 청하자 원제가 그 주청을 허가하였으니..."라고 되어있다.
(韋玄成又請勿修諸廟之在郡國者, 元帝可其奏)
부숴버릴 사당이라면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있겠소? 안그러오?


동종은 오로지 황실의 종묘제사권을 부여받은 자만이 소지 할 수 있는 특수한 용품으로서
일반 잡놈들간의 매매와 유통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윤내현의 주장처럼 시중에서 이 넘 저 넘의 손 때를 타다가
우연히 한반도에 들어와 묻혔을 것이라는 무식한 소리는 이제 그만 닥치라고 해두자.

환빠들이 효문묘 동종에 미친 작두춤을 추게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이른바 민족풍의 인민가요가 들려주는 철지난 국수주의.
고대사 만능이 불러일으키는 집단적 향수가 페로몬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사료를 배배 꼬아 무슨 청국장 찌개에 까나리 액젓 2큰술을 추가로 믹스해 놓은듯한
지들만의 독특한 해석은 정말이지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한다.
이런 파란만장한 짝퉁이론의 가장 큰 취약점은
사서와 물증을 뒤트는데 초점을 맞추다보니 결국 지들이 했던 말끼리도
엉키고 섥혀 앞뒤가 안맞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족이라는 이름을 팔아 매문행위를 일삼는 자들의 본질이 아닐까?


역.사.일.반 2007/03/13 00:11

다른 낙랑유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낙랑 무덤과 관련된 인터넷 소스는
북한 리순진의 주장을 그대로 카피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고구려 적석총 무덤이 분명한데 단군릉이라 박박 우겨대는 이 어용학자의 주장을
뭐 어떤 비판이나 분석도 없이 일반 네티즌 허접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전공학자들까지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이는 이른바 "주체사관"이라는 것이 껍데기만 바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비이성적 반병신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리순진은 평양일대 낙랑무덤 연구라는 별도의 저술을 가지고 있는 바
내용의 질로 따지자면 우리나라 학부생들이 열심히 쓴 학기말 리포트 수준은 된다.
오히려 호암 미술관 연구원인 신용민의 "한대 목곽묘 연구"가
연구범위와 방법론에 있어 더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리순진의 요지는 한마디로 평양 일대에서 발견되는 낙랑 무덤양식들이
중국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한민족 대동강 기원설에 입각한 낙랑유산 부정하기에
그 의도가 있었으니 출발부터 학문적인 성과는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잘못된 확신의 논리는 거꾸로 낙랑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무덤들이
중국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거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리순진의 주장이 사이다에 밥말아 먹은 한낱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밝혀낼 수가 있게 된다.

리순진 연구의 가장 치명적 약점은 비교대상을 잘못 선정하고 분석했다는 데 있다.
모든 오류는 여기서 비롯된다고 보면 된다.

리순진은 낙랑지역의 무덤양식과 특징을 중국의 것과 비교하면서
낙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장안, 낙양등 관중지방의 무덤들과 비교했다.
중국의 경우 오랜 봉건시대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무덤의 발전양식이 지역마다
다를 뿐만아니라 내부 구조 및 특징에 있어서도 지방색이 강하다.

특히 장강(長江) 유역의 강소성과 산동성에서 발견되는 나무곽 무덤 양식은
중국 황하및 내륙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되는데 그 내부구조와 특징뿐만 아니라
무덤 양식의 발전과 유행시기에 있어 평양 낙랑지역의 무덤들과 거의 유사하거나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동성은 다들 알다시피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한의 武帝(무제)가
한반도의 봉래산이 바라보인다 믿었던 태산(太山)에서 봉선의식을 행했던 곳임과 동시에
또한 한의 장군 누선이 왕검성을 침략할 때 배를 띄웠던 곳이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제북왕(濟北王) 흥거(興居)의 반란때 낙랑으로 줄행랑쳤던
왕중(王仲)도 산동성 사람이었으니 낙랑 지역에서 발견되는 상당수의 왕씨(王氏)들은
이 사건과 매우 연관이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산동은 지리적으로 낙랑과 가장 가까운 지역임과 동시에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지역이다.

무엇보다 낙랑지역의 목곽묘에서 출토되는 칠기의 경우 그 제작지명을 분석해보면
장강(長江) 유역의 사천성에 위치한 촉군(蜀郡)과 광한군(廣漢郡)의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낙랑지역 무덤들의 특징과 양식발전을 중국의 것과 비교고찰하고자 한다면
리순진처럼 관중지역의 무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산동성이나 강소성 등지의 무덤들과
비교하는 것이 더 객관적이며 합리적이라 보여진다.

  리순진의 대표적인 헛소리가 나무곽 무덤은 한사군 설치 이전인 전한 중기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무덤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평양의 나무곽 무덤은 한사군 설치 이전의
  것들이며 한반도의 독자적인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귀족과 상류층들이 몰려살았던 수도 장안과 낙양 일대 등
중심지 얘기일 뿐이고, 산동성, 강소성 등 長江(장강) 유역, 일부 화북지역과 같은
변두리 지역에서는 후한말인 기원후 1세기까지 여전히 나무곽무덤이 지속적으로
유행한 사실을 간과한 구라에 불과하다.

  리순진의 두번째 헛소리는 중국의 고대무덤들이 나무곽 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 가기 전
  "공심전 무덤"이라는 단계를 거친데 반해, 낙랑은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더 진보적(?)인 "귀틀무덤"의 단계를 거친 후 벽돌무덤으로 갔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


판자때기 몇 개 더 대 놓고 진보적(?)인 무덤 어쩌고 하는 것이 우습거니와
리순진의 주장은 역시 관중지방과 일부 관북지역에 국한된 주장일 뿐
장강(長江) 하류지역인 남경(南京), 상해(上海), 양주(揚州), 강릉(江陵), 해주(海州),
임절(臨浙) 등지에서 발견된 고분군을 보면 나무곽 무덤과 귀틀무덤이 수두룩한 반면에
공심전 무덤은 보이지도 아니하다.

정오동 1호묘나 채협총, 석암리 고분들은 강소성의 의정현(儀征縣) 연대산(烟袋山) 일대의
한묘(漢墓) 고분군을 거의 카피해 놓은 듯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번째 헛소리를 보자.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는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무덤길(墓道)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중국의 나무곽 무덤에서 규모가 큰 것은 모두 무덤길이 있다는 것이다.


낙랑지역의 무덤이라 해서 무조건 묘도(墓道)가 없고 중국 무덤이라서 무조건 묘도(墓道)가
있다고 보는 것은 둘 다 틀린 얘기다. 중국의 장강(長江) 유역에서 발견되는 강소성 지방의
나무곽 무덤들은 규모에 관계없이 묘도(墓道)가 없다.

또 반면에 북한에는 정오동 10호, 11호, 석암리 일부 고분군, 남정리 116호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묘도(墓道)가 발견되는 무덤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리순진은 평양에서 대체 뭘 보고 온 것인가?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까발기는게 좌익 아저씨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던가?

네번째 헛소리를 보자.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 중 합장무덤인 경우에는 례외없이 무덤무지 밑에 2개의 나무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여있다. 그러나 중국의 나무곽무덤에는 그런 형식의 무덤이 없다.
  물론 전국시기의 나무곽 무덤 가운데는 2개의 나무곽이 있는 것이 일부 있기는 하나
  1개는 주검이 있는 주곽으로서 크고 나머지 하나는 유물만 들어있는 부곽으로서
  크기는 매우 작은데 놓여있는 위치도 나란하지 않다."


그런데 중국에는 정말 그런 무덤이 없는가? 평양에만 있고?
설명만 들어서는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으므로 그림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 그림들은 중국의 고고학보와 고서에 나온 이미지를 캡쳐한 것이다.
이외에도 많지만 짜증나고 귀찮아서 4개만 옮겨본다.

  

 <그림 1. > 上海市 儀征縣 烟袋山 漢墓                  <그림 2. > 揚州市 養殖場 漢墓1호, 3호
   

      <그림 3. > 蓮雲港市 海州 漢墓                            <그림 4. > 儀征縣 胥浦 101호 漢墓

위 무덤들은 리순진이 얘기한 단장 + 단장 이혈합장묘의 사례에 해당되는데
蓮雲港市 海州 漢墓의 경우 남녀의 주곽이 각각 있고 그 옆에 리순진이 얘기한
유물을 담는 부곽이 각각 있다.

즉, 주곽+부곽 셋트 두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구조로서 중국의 합장묘는
주곽 + 부곽만 존재한다고 본 리순진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 학계가 지랄 옆차기 하는데
일조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째 리순진은 평양 낙랑 유적지에 기원전 2~3세기부터 존재한 토광묘(움무덤)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이유를 들어 나무곽 무덤이 이 토광묘를 주체적으로 계승. 발전한
  양식이며 중국의 것과는 완전히 별개임을 강조한다.


토광묘(움무덤)이라는 것은 주검을 보호하기 위해 목재나 석재의 관을 만들지 않고
시신을 바로 파묻은 무덤을 말한다.
만약 나무를 사용했거나 어떤 재료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토광묘가 아니다.

북한측이 토광묘라고 주장하는 태성리의 상당수 무덤은 내부에 목재 구조물의 흔적이
확인되어 순수한 토광묘라 볼 수 없으며, 한대의 칠기와 동경들이 함께 출토됨에 따라
단순히 한국식 세형동검이 부장되었다 해서 그 무덤을 기원전 2~3세기 것으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동혈 합장묘인 4호, 7호, 12호, 13호는 목곽묘에 포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한반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조선의 토광묘는 단장묘의 형태를 띄어야
시기상으로 맞으며 토광묘에는 합장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낙랑군 연구" 비판

오영찬 "낙랑군 연구" 비판

totosoro.egloos.com/3458779
식민빠들이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마치 금과옥조처럼 인용하는 책이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인지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며칠 읽어보았는데 역시나 낙랑군이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것이라는 잘못된 대전제를 미리부터 깔고 거기에 맞춰서 그 전제를 합리화하고자 관련 유물과 사료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평양 지역의 고고학 발굴을 직접 담당하는 북한 역사학계는 해방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무려 3,000여 기를 발굴 조사하여 이 무덤들이 소위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당 지역에서는 이른바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에 나무곽 무덤이 등장하여 약간의 과도적 형태를 거치면서 3세기 전반까지 귀틀 무덤, 벽돌 무덤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어느 순간 외래 세력에 점령되어 갑자기 이질적인 무덤 양식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도 전형적인 고조선식 유물인 세형 동검(좁은 놋단검) 등이 압도적으로 계속 출토되고 있다.
그 외 무덤의 구조 형식 등도 한나라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이 시기 평양 지역의 무덤의 성격은 한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유적, 유물의 연구를 통해 명백히 밝히고 있다.(자세한 것은 중심 출판사 간, 북한 사회 과학원의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를 참조하시거나 다음의 포스트들을 참조)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2(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1(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북한자료) 무덤의 구조형식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클릭)

이 결론은 너무도 명백하여 오영찬도 해당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목곽묘는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있었고 세형 동검 문화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해당 책 p82, 243)
`귀틀묘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중원의 한대 분묘와 분명히 차이를 보인다, 중원 어느 지역에서도 낙랑 고분과 같은 속성을 갖춘 귀틀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시기에도 세형 동검 문화는 그대로 존속한다.(해당 책 p142, 143, 145)
`중원의 전실묘의 특징인 터널형 천장이 평양 일대에서는 그나마 불확실한 사례 한 개를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는다.(해당 책 p194)
`중원에서 2만 기 이상의 한대 고분이 발굴 조사됨에 따라 낙랑 문화가 한대 문화의 전형이라는 이해의 틀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해당 책 p24)

이렇게 무덤 형식 변천, 구조 형식도 소위 중원 지역과 전혀 다르고 나오는 유물도 대부분이 세형 동검 등의 고조선식 유물이라면 당연히 그 시기 평양 일대 무덤, 유물들은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것인데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고자 이런 이유를 목곽묘 시기에는 한나라 지배는 받지만 그 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세력(이것을 "재지 세력"이라고 표현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귀틀묘 시기에는 아예 지배층인 한족과 피지배층인 위만 조선 유민들이 종족적 융합을 해서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아주 기발한 논리를 펼친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나라의 영향력이 완전히 미치지도 못했는데 소위 본국에서 동떨어져서 적진 깊숙히 있는 평양 지역에서 소수의 짱개 세력이 우리 민족의 각종 열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대다수 우리 민족을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재지 세력을 만들고 심지어는 종족 융합까지 해가면서 하여간 400 여년 간이나 낙랑군을 유지시켰다는 논리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도대체가 말이나 되는가?

그 외에도 오영찬은 낙랑군 평양설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리한 논리의 유물, 사료 해석을 많이 하고 있다.
너무 글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히 몇 가지만 소개하면

평양 지역 토성들을 평지에 있고 장방형이란 이유로 낙랑 군치, 현치 토성들로 일방적으로 비정하면서도, 해당 책에서도 토성 내부에서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어 일찌감치 낙랑 토성과는 별개로 다른 세력이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있고, 스스로도 토성 내부의 내부 구조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검출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한대 문헌 자료를 토대로 낙랑 토성을 일방적으로 낙랑 군치인 것인 양 내부 구조 등을 설명하고 있다.(해당 책 p96, 98, 106)

또한 사료를 보면 번연히 만주 지역의 낙랑군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는 왕조의 기사나(해당 포스트 참조(클릭)), 왕중이 발해를 건너 요서 지역의 낙랑군으로 달아난 기사를 가지고 마치 평양에 일찌감치 짱개 세력이 존재했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공손씨 세력이 황해도까지 세력을 펼쳐서 대방군을 설치했고 그래서 그 지역에는 무덤 변천 양식이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 지역이 우리 민족 열국들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므로 여러 세력이 끊임없이 교차하여 어느 세력의 특정적인 문화 양식이 정착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요서 지역과, 요동 일부가 주 근거지이던 공손씨 세력이 고구려를 통과해서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백제의 영역까지 다다르면서 황해도까지 점령했다는 것이 도대체가 말이 되는가?
이는 한마디로 얼토당토않은 소리이다.
이 문제는 해당 포스트의 주된 핵심 논제도 아니고 자세히 논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기회가 나면 따로 포스트를 올려서 설명하겠다.

하여간 결론적으로 이 책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낙랑군이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것이라는 잘못된 대전제를 미리부터 깔고 거기에 맞춰서 그 전제를 합리화하고자 관련 유물과 사료들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그럴듯하여 그 주장에 동조하거나 내심 그럴 것이라 생각해 버리는 사고가 전파될까봐 심히 우려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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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by 마광팔
2010/10/03 12:42
totosoro.egloos.com/3458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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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1
(북한자료)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2


(요약)

결론 부분중 일부를 보면

300여기의 추가 발굴을 종합한 결과

"평양일대의 무덤 양식은 중국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형태를 띄고 있으며
고조선 후예들이 남긴 것이다" 라는 주장을 엿볼 수 있다



(원문중 일부)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의 특성은
이 고장의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이
중국의 한 나라 락랑군 설치와 직접 관련되였거나 그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련면히 살아온 고대 조선사람들이 남긴 무덤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변천 뿐 아니라 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제4장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에 관한 문제,
다시 말하여 평양일대에 락랑무덤을 남긴 정치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사람들에게 혁명의 수도 평양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에 대한 옳은 인식을 주며
우리 민족사의 유구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지난 시기 평양일대의 락랑문제가 봉건사가들과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해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게 외곡되여 왔고
그 후과로 하여 오늘까지도 국제적으로 첨예한 론쟁을 벌리면서
올바른 해명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봉건사가들속에서 평양일대를 한 나라 락랑군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
 
5세기 중엽~6세기 초 북위의 력도원은
자기의 저서 “수경주”에서
북위에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평양성(오늘의 평양성)이
한 나라의 락랑군이였다고 주장하였으며

11세기 중엽에
구양수 등이 평찬한 “신당서”에서도
“평양성은 한 나라의 락랑군이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중국 봉건사가들 속에서 “정설”로 인정되여 왔었다.


그 후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더욱 보충되여 매우 심각하고 첨예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일제의 조선 강점시기 조선 고고학을 독점하였던 일제어용사가들은
평양일대에서 락랑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거기에서 드러난 자료를 가지고
마치도 한 나라의 락랑군이 평양에 있은 듯이 꾸며놓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해 놓았다.


그들은 평양일대의 소위 “락랑무덤”은
그 구조와 형식변천이 중국의 한 대무덤의 것과 꼭 같고
거기에서 나온 유물도 중국 한 대무덤의 유물과 꼭 같으며
그 대부분은 중국에서 만든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가장 기초적인 근거로, 대전제로 삼고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을 더욱 외곡 보강해 놓았다.
 

지난 시기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기정사실인 듯이 꾸며진
“한 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오늘 일본 당국자들에 의하여 일본 력사교과서들에 그대로 옮겨지고 있다.
 

이처럼 평양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이
대국주의 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오래동안 이지러지고 외곡되여 왔으나
력사적 사실은 과학적인 자료로 하여 정확히 밝혀지기 마련이다.




제1절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는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가지 류형의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은 나무곽무덤이다.

이 나무곽무덤은
앞서 존재한 이 고장의 좁은 놋단검관계 유적들인
움무덤과 돌곽무덤을 바탕으로 하여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여
기원전 1세기 말까지 계속 존재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 이르러
보다 발전된 귀틀무덤에로 계승발전되였다.

나무곽무덤의 계승 발전으로 이루어진 귀틀무덤은
1세기 전기간 평양일대에서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다가
1세기 말 ~2세기 초에 귀틀벽돌무덤과 벽돌귀틀무덤과 같은 과도적인 무덤형식을 거쳐서
전형적인 벽돌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으며


벽돌무덤은
3세기 전반기까지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다가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에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나무곽무덤으로부터 벽돌무덤까지의 련면한 계승 발전은
무덤의 구조형식과 유물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한편
중국의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정을 보면
그것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과 뚜렷이 구별된다.


중국의 한 나라 시기에도 나무곽무덤을 쓰긴 하였으나
그것은 전국시대의 나무곽무덤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서 그 변천과정은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다.


전한시기에 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지방에서는
전한 전기(기원전 206년~기원전 135년)에 나무곽무덤은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였거나
새로 나타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다가
전한 중기(기원전 134년~기원전 49년)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나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였으며
전한 후기(기원전 48년~기원후 24년)에는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되었다.

※ 공심전 무덤은
땅을 곧추 파내려 가다가 옆으로 수평되게 굴을 파고
거기에 구멍이 뚫려있는 큰 벽돌로 무덤곽을 만들고 그 안에 주검을 안치한 무덤이다.


그리고
후한시기 나라의 수도였던 락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 나무곽무덤은
이미 전한 전기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공심전 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되어 있었으며
공심전 무덤은 전한 중기 말인 선제시기(기원전 73년~기원전 49년)를 전후하여
벽돌무덤과 교체되기 시작하였다.


전한시기에 나무곽무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은 곳은 장사지방이다.
이 지방의 나무곽무덤은 무제 집권시기를 전후로 하여
전한 전기와 전한 후기의 것으로 나누어보는데

전한 전기에는 나무곽무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다가
전한 후기에는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나고
그것이 나무곽무덤과 병존하다가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는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전한전기에 나라의 중심지역에서는 나무곽무덤이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였거나 새로 나타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였으며

전한 중기에는
나무곽무덤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그 대신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났다.

특히 락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는
전한 전기에 이미 나무곽무덤은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여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장사지방과 같은 남방의 변방지역에서만 나무곽무덤이 계속 존속되였을 뿐인데
그것도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으며
그 대신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평양일대에서는 나무곽무덤은
한 나라의 출현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여
기원전 1세기 말까지 계속 존재하였으며
그것은 중국의 한대 무덤처럼 공심전 무덤을 거쳐서 벽돌무덤에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귀틀무덤을 거쳐서 벽돌무덤에로 넘어갔다.


다시 말하여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였던 나무곽무덤은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 귀틀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고
귀틀무덤은 귀틀벽돌무덤과 벽돌귀틀무덤 단계를 거쳐서
2세기 초에 벽돌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다.


그리고
평양일대에서는 전한시기에 중국의 중심지역에 성행하였던
공심전 무덤과 같은 무덤은 지금까지 단 한 기도 드러난 례가 없다.
 

이처럼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과정은
중국 경내의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정과 뚜렷이 다른 로정을 거치였다.



만약 일제어용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원전 108년에 한 나라의 락랑군이 평양일대에 설치되여 수백년동안 존재하였다면
그처럼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이
중국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 뚜렷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의 특성은
이 고장의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이
중국의 한 나라 락랑군 설치와 직접 관련되였거나 그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련면히 살아온 고대 조선사람들이 남긴 무덤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변천 뿐 아니라 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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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료) 무덤의 구조형식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사관 ‘심환지, 정조 독살 의혹 어의 비호했다’ 기록

사관 ‘심환지, 정조 독살 의혹 어의 비호했다’ 기록
날짜2009-07-20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건릉이다. 서쪽에 부친 사도세자(장조)와 혜경궁 홍씨의 융릉이 있다. 개혁군주 정조의 급서는 조선을 정상국가로 만들려던 마지막 임금의 죽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이 적지 않다. 여기에는 일정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치구조이다. 이 구조에 주목한 것은 청의 강희제였다. 그는 효종에 이어 서른넷의 현종이 사망하자 “임금의 수명이 길지 못하다”, “신하의 제재를 받아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숙종 12년(1686) 윤4월에는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서 우리 조정(청)의 보호가 없다면 몇 번이나 왕위를 도둑질 당할지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편지 나눌 정도로 친해 독살 안했다?
박정희 암살한 건 측근 김재규 부장
심환지, 죽은 정조 정책·인물들 말살
정말로 친했다면 왜 그렇게 했겠나
국왕 독살설은 국왕의 인위적 제거로 생길 수 있는 권력 공백을 자당의 이익으로 전환시킬 힘을 가진 거대 정당의 존재가 기본조건이다. 그래서 국왕이 거대 여당인 서인·노론과 갈등하다가 급서하고 이들 정당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필자의 <조선왕 독살사건>은 조선 왕조의 이런 권력구조를 추적한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일부 세력에는 조선 후기의 노론 권력구조가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다. 그 한 예가 2009년 5월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면서 발생한 소동이다. 

어찰을 공개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정조와 심환지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정조는 독살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정당하다는 노론 벽파의 당론(임오의리)이 유지되는 한 양자의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본질적 구조는 무시하고 편지라는 현상만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들은 이런 견지에서 ‘정조 독살설은 시골에서나 떠돌던 야담’이라거나 정조 사망 한 달 전의 ‘오회연교’가 노론 벽파를 중용하려는 뜻이었다거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독살설이 나오지 않는 것이 독살설 허구의 증거라는 희한한 주장까지 나왔다. 어찰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마땅한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결정적 사료라는 단일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간 한국사에서 정조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정조는 ‘영·정조 시대’라는 틀에 묶여 영조의 부속 임금인 것처럼 도매금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근래 정조의 진면목이 집중 조명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조는 영조의 부속 임금이 아니라 영조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한 군주로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정조 개혁정치의 발목을 잡고 정조를 독살한 것이 노론이란 사고가 형성되었다. 그러자 정조 어찰을 노론 벽파를 옹호하는 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먼저 둘이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으므로 독살했을 리 없다는 주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인물이 중정부장 김재규라는 사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정조가 재위 24년(1800) 6월 15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와병 사실을 전한 것이 유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정조실록>은 하루 전인 6월 14일 정조의 진찰 기록을 전하고 있어서 이미 공개된 병세임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정조의 병인 ‘뱃속의 화기(火氣)’는 3년 전인 정조 21년(1797) 1월 사헌부 집의 이명연이 ‘근래 성상께서 가슴 사이에 치밀어 오르는 기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오랜 지병이었다. 이것이 유서라면 정조는 훨씬 전에 저세상으로 갔어야 했다. 정조 독살설이 시골에서만 떠돌던 야담이란 주장은 어떤가? 정조가 급서하자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조정의 최고 엘리트인 삼사(三司)였다. 정조 사망과 동시에 정순왕후와 심환지의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대사간 유한녕은 순조 즉위년 7월 13일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비호하던 어의 심인을 흉적(凶賊)으로 지칭하며 공격했다. 

어의 심인 비호에 대한 비난이 들끓자 정순왕후는 7월 20일 “인심의 분노는 막기 어려워서 물정이 점점 격렬하여지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전교를 내리고 8월 10일 사형시켰다. 문제는 국문 요청을 거부하고 사형시킴으로써 그 진상까지 파묻혔다는 점이다.


» ‘정조 환어행렬도’(부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의 현륭원으로 천장하고 자주 행차하여 효도를 과시하고 노론의 견제로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어의는 심환지 지휘받던 친족
심인의 사형을 기록한 <순조실록>의 사관은 “대신 심환지는 심인의 소원한 친족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호하려고 했다”면서 어의를 지휘하는 내의원 제조 심환지가 심인의 배후라는 사실을 밝혔다. 서울은 조용했다는 주장은 머릿속 환상일 뿐이다. 정조와 심환지가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으니 독살했을 리 없다는 가설이 성립하려면 노론 벽파와 심환지는 정조 사후에도 정조의 정치노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야 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심환지는 정조의 24년 치세를 깡그리 부인했다. 정조를 땅에 묻고 돌아온 다음날인 11월 18일부터 노론 벽파의 공격이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는데 심환지의 ‘졸기’는 “경신년(순조 즉위년)·신유년(순조 1년) 사이에 목을 베고 능지처참하고 귀양 보내는 여러 큰 형정(刑政)을 심환지가 결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순조실록> 2년 10월 18일)고 전하고 있다. 

이때 사형당한 이가환·이승훈·권철신·정약종 등과 유배 간 정약용 형제 등은 대부분 정조가 아끼던 인재들이었다. 이로써 노론 일당독재가 재연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엄금되었다. 노론 벽파에서 시파로 정권이 넘어가는 순조 6년(1806)의 병인경화(丙寅更化) 때 정조 독살설이 벽파 공격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그나마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그럴듯한 학문적 근거였다. 그러나 이는 기초 사료인 실록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태만한 주장에 불과하다. 순조 6년(1806) 3월 사간원 정언 박영재는 노론 벽파 김달순의 소굴이 심환지라면서, “역적 심인을 추천하여 (어의로) 진출시킨 것이 (심환지의) 첫 번째 죄”라고 공격했다. 정조 독살의 배후가 심환지라는 공개적 폭로에 다름 아니다. 

박영재는 또 ‘심환지가 장용영을 혁파하고 혈당(血黨)들을 지휘하여 선왕의 유언을 고쳤다’고 공격했다. 정조가 재위 17년(1793) 하나의 군영으로 독립시킨 장용영을 심환지는 순조 2년(1802) 없애버렸다. 정조 같은 국왕이 부활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순조는 박영재도 귀양 보내지만 김달순은 사형시키고 이미 죽은 심환지도 관작을 추탈하고 자식들은 유배 보냈다.
노론 일당독재 재연…사상 통제
순조 6년(1806) 4월 1일 삼사는 “(심환지가) 선조(정조)의 망극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선왕께서 선향(仙鄕: 저승)으로 멀리 떠나가시던 당일로 선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선왕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심환지가 정조의 모든 정책을 뒤집은 주역이란 사실은 조선 후기사 인식의 기본상식이다. 오회연교가 노론 벽파를 중용하려는 뜻이었다는 주장을 보자. 정조는 오회연교에서 “모년의 의리를 범한 것”을 질책하는데 모년은 노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인 해이다. 정조는 이 연교에서 을미년(영조 51) 노론 벽파에서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것과 병신년(정조 즉위년)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것, 그리고 정유년(정조 1) 자신을 암살하려고 자객을 보낸 사실을 비판했다. 정조는 그러면서도 반성하면 노론 벽파를 내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오회연교가 노론 벽파를 중용하려는 뜻이라는 주장은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가 민주화를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과 마찬가지다. 오회연교는 거꾸로 남인 중용의 뜻이었다. 정약용의 행장인 <사암선생연보>는 정조가 6월 12일 밤 정약용에게 규장각 아전을 보내 “그믐께면 조정에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오회연교가 남인 등용의 뜻이라는 증거이다. 규장각 아전은 정조의 “안색과 어조가 모두 평안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정조가 그달 말 세상을 떠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조가 6월 28일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시상(時相: 심환지)이 역의(逆醫) 심인을 천거하여 독약을 올리게 시켰다”라는 ‘고금도 장씨녀에 대한 기사’를 남겼다. 

<한중록>에 독살설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보자.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목적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조 즉위 초 몰락한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쓰는 책에 선왕 독살설을 기재해 초점을 흐릴 만큼 혜경궁 홍씨의 정치 감각이 무디지 않았다. 또한 조선에는 반좌율(反坐律)이 있었다. 남을 공격한 내용이 무고로 밝혀지면 그 죄를 대신 받는 것이다. 상대를 사형죄로 공격했다가 무고로 밝혀지면 자신이 사형당해야 했다. 선왕 독살은 삼족이 멸함을 당할 중죄로서 물증 없이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심환지의 졸기는 “수렴청정 초기에 영의정에 특배되어 나라의 정권을 전적으로 위임받았으나 본바탕이 아둔하고 재능이 없어 아무 공적이 없고 오직 같은 당은 등용하고 다른 당은 공격하는 것(黨同伐異)을 일로 삼았다”(<순조실록> 2년 10월 18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심환지가 21세기에 느닷없이 정조의 막역한 지우로 등장할 줄은 심환지도 몰랐을 것이다. 정조 어찰을 둘러싼 소동은 조선 후기의 잘못된 권력구조의 일부가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병든 현주소를 말해준다. 정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정조 어찰은 심환지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는 정조의 죽음에 더 깊숙이 관련되었다는 증거로 삼아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 사회는 200년 전 노론의 당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휘둘려야 하는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2014년 9월 2일 화요일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25- ‘태양과 새’, 신라의 문화원형이 되다 / 만세는 상고시대 ‘솟대’에서 유래


‘태양과 새’, 신라의 문화원형이 되다 … 만세는 상고시대 ‘솟대’에서 유래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25. Y形器와 鳥翼形 冠飾 그리고 萬歲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9161
2014년 07월 03일 (목) 10:17:35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ydk629@kmu.ac.kr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ydk629@kmu.ac.kr 
중국의 신석기시대 유물 가운데 ‘Y形器’라고 이름 붙인 중요한 두 가지 유물이 있다. 홍산문화 ‘Y形玉器’[그림1-(2),(3)]와 대문구문화 ‘Y形獐牙器’[그림2-(1)]가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Y형기’들의 재질은 서로 다르지만, 형태면에선 새의 날개를 닮은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Y형기’의 용도에 대해선 巫師의 法具 혹은 씨족부락 수령의 권위적 상징물과 같은 儀器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의 공통된 견해지만, 이에 대한 상징과 해석은 없다.

신석기시대 ‘Y형기’ 속에 저장된 정보엔 고대사회의 대단한 秘儀가 있다. 그 형태의 상징성 또한 비상한 관심을 끈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국의 고고학계는 Y형기의 상징에 대한 그 어떤 해석도 아직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상징성을 읽어내지 못하므로 단지 物像의 형태만을 좇아 ‘Y형기’라고 이름붙이고 있는 그 자체가 이 유물의 상징을 전혀 해명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대문구문화 ‘장아Y형기’는 새 숭배사상이 반영된 神竿 대문구문화 ‘장아Y형기’[그림1-(1)]는 推察하건데, 이 유물은 고대 동이족들이 그들의 원시신앙인 새 숭배사상을 반영한 族長의 神竿으로 보인다. 즉 날개를 쫙 펴고 비상하는 새의 모습을 형상한 것이 원초적인 ‘Y형기’의 조형이다. 도상학적으로 보면 神鳥인 솔개를 상징한 것인데, 크기가 10.5cm에 불과하므로 손에 쥐기엔 아주 적당한 크기다. 신간 끝에 장식하기에는 딱 알맞다. 크기가 작으므로 신간의 끄트머리에 장식해 지휘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권위를 표지한 것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즉 한국 고대 솟대의 原始 古形이라고 할 것이다.
  

대문구문화 Y형기 [그림1-(1)]의 중국 명칭은 ‘獐牙Y形器’, ‘獐牙器’, ‘獐牙鉤形器’ 등 다양하다. 장아형이란 뿔처럼 생긴 Y형의 재질이 노루 어금니이므로 생긴 이름이다. 뿔처럼 보이지만 장아가 상징하는 것은 뿔이 아니라 새의 날개다. 그 이유는 가운데가 볼록 튀어 나온 머리와 주름진 목덜미가 새의 형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문구문화의 특징인 새 숭배사상을 원시성이 가미된 고도의 상징적 기법으로 디자인한 神竿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 유물의 본질에 대한 바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장아형Y형기’는 산동 태안 대문구지구, 강소성 비현 대돈자 등 유지에서 고르게 발현되고 있는 유물이다(『간명중국문물사전』, 1991년, 중국역사박물관, 19쪽). 이 유물은 발굴 결과 대다수 死者의 손가락뼈 부근이나 허리부근에서 발견됐다(『20세기 중국 고고 대발현』, 2000년, 四川大學出版社, 75쪽)
유물의 발굴 위치는 지도자가 신간을 손에 쥔 채 묻힌 무덤으로 추정할 근거가 된다. 그런데 고대 동이족들의 사상과 문화를 나타내는 이런 중요한 유물들이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하고 그 상징성조차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고대 동이문화에 대한 연구가 漢文化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만큼 부진하다는 반증이다.

홍산문화 ‘Y형옥기’의 상징 해석과 칸(干) 홍산문화 Y형옥기[그림1-(2),(3)]는 뛰어난 그 精美性 때문에 홍산옥기 가운데 으뜸[紅山玉器之冠]으로 치는 중요유물이다. ‘獸面紋玉Y形器’, ‘Y形獸面紋玉器’,’ ‘옥玉獸面紋Y形器’, ‘獸面弦紋Y形玉器’ 등으로 불러 아직 그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이 옥기엔 Y형, 짐승 얼굴[獸面]이란 두 가지 설명이 늘 붙어 있다. 위로 솟아 Y형처럼 보이는 부분을 짐승의 두 귀[雙耳]로 파악하며, 두 눈과 입과 목덜미로 표현된 모양을 神獸로 보는 것이 홍산문화 Y형 옥기에 대한 기존 해석법이다.
  

그러나 홍산문화 Y형옥기의 문양은 짐승 얼굴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고대 이 지역을 담당한 세력들의 원시신앙을 잘못 읽은 결과다. 대문구문화 Y형기와 홍산문화 Y형옥기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하면, 거기엔 상징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이미 숨어 있다. 두 가지 유물을 연계해 설명한 글을 아직 읽어본 적이 없지만, 두 유물의 형상은 ‘동이족의 새 숭배사상이 반영된 神物’임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런 사실을 설명한 문징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유물의 시각적인 형식언어는 이것이 동이족의 새 숭배사상의 신물임을 강력하게 발언하고 있다. 유물에 내장된 정보를 이렇게 읽어내는 것이 해석고고학의 참된 사명이다.

위의 [그림2]에서 (1) 대문구문화 Y형기와 (3) 홍산문화 Y형옥기를 정확하게 관찰해보면, 다음과 같은 요점이 간추려진다.
① 神竿인 의기라는 점 ② 양 날개 가운데가 볼록 솟은 것은 새의 머리를 형상화한 점 ③ 하단부의 못 구멍과 몸피를 약간 깎은 자루[柄]의 모습은 기물을 막대 끝의 홈에 끼우고 못으로 고정시킨 장치라는 점 ④ 홍산문화 Y형옥기는 새의 양쪽 눈, 콧구멍, 입이 선명한 점 ⑤ 두 가지 Y형기 자루의 주름무늬는 [그림2]와 같이 새의 긴 목을 형상화한 점 ⑥ Y형기의 길이가 모두 10~13cm 미만의 비교적 작은 형태인 것은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신간이라는 점 위와 같은 분석은 이 의기들이 神鳥인 솔개가 양 날개를 펼친 모습을 형상한 神竿의 원시적 古形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태양숭배사상과 새 숭배사상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대표적 원시문화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을 반영한 族丈의 신분 표지는 부족의 토템이나 族徽로 흔히 해석하는 바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이런 유형의 잔영으로는, 대전 괴정동 출토 청동기 농경문 솟대[그림2-(1)] 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雙鳥竿頭飾[그림2-(2)]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새를 문화의 아이콘으로 삼은 이런 표지물들이 문자화할 때 干(칸) 자의 기원으로 진화한다. [그림3]에서 볼 수 있는 칸의 갑골문, 금문, 한인, 소전의 서체가 이를 증명한다.

고문자학계의 기존 해석에서 칸(干)은 방패·간섭하다·저촉되다·방해하다·추구하다·마르다·간지 등의 의미가 있지만, 神鳥의 날개를 형상한 신간으로 보는 해석은 없다. 그러나 字學上 古體들의 형상을 보면 ‘Y형기’가 문자화된 것임을 간파할 수 있다. 신간을 든 왕을 칸(干)으로 부르는 습속은 새 숭배사상을 원시신앙으로 하는 부족들의 공통된 문화다. 출토 유물의 신자료에 근거한 이러한 해석은 문자학의 기존 해석을 수정하기를 요구한다.
  

대문구문화의 Y형기와 홍산문화의 Y형기는 재질만 다를 뿐 동이족 새 숭배사상의 신간임을 앞에서 밝혔다. 동이족 수령들의 표지물인 Y형기는 문자로 진화할 때 ‘선우(單于)’의 ‘單’자나 ‘칸(干)’자로 변한다. 즉 ‘單’과 ‘干’은 神鳥의 형상인 상형문자로서 방패와 같은 무기가 아니라, 신간 또는 그 수령을 상징한 문자로 해석하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칸(干)에 대한 이러한 문자학적인 새 해석은 중국 고문자학계에 제시할 만한 새로운 이론이다. 東胡, 鮮卑, 匈奴 등 북방유목민족은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를 칸(干)이라 부른다. 칸은 흉노어로서 곧 왕을 가리킨다. 神鳥인 솔개로 장식된 신간을 든 으뜸 지도자를 일컫는 것이다. 신라의 角干, 太角干의 칸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칸은 비상하는 새의 날개를 형상화한 문자로서 유구한 동방 새 숭배족들의 표지물이었던 것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조익형 관식의 기원과 상징에 대한 해석을 설득력 있게 전개한 글을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신라의 관식에 대한 威儀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그 시대 최고의 상징, 최고의 사유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우리들의 부끄러움에 다름 아니다.

신라 관식의 시원은 고대 동방 夷族의 원시사상인 태양숭배사상과 새 숭배사상에 연원한다. 특히 조익형 관식은 홍산문화와 대문구문화의 ‘Y형기’에 바로 그 祖形이 있다. 곧 원시사상 가운데 새 숭배사상의 시원적 형태가 관식으로 나타난 동이문화의 상징적 부호다. 신라 관식에서 태양숭배사상은 불꽃무늬로 관식화 됐고, 새 숭배사상은 조익형 관식으로 나타난다. 새를 ‘영혼의 전달자’란 해석에만 머무는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바 문헌실증파의 한계를 드러낸 수준이다. 태양숭배와 새 숭배는 영혼의 절대자유라는 동방민족의 고유한 사상이 빚어낸 위대한 우주적 사유의 산물이다. 이런 사유가 좀 더 구체성을 띄면서 형성된 것이 玄妙之道이며 풍류사상이다. 그리고 그런 사상이 국가적 존재와 근거의 이데아로서 확립된 것이 화랑도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신라 관식의 불꽃무늬는 이른바 出字形 또는 山字形으로 간략하게 디자인된 세움장식을 말한다. 이것은 천손족의 고유사상인 태양숭배에서 배태된 光明理世의 이상을 나타낸 부호와 같은 조형이다. 새 숭배사상을 반영한 조익형 관식은 신조 솔개가 태양의 대행자로서 상서롭고 광영스런 환희의 무한한 누림을 관식으로 나타낸 상징적 표상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불꽃무늬와 조익형 관식은 단순히 왕의 위세를 위한 관식이 아니다. 그것은 신라정신의 이상을 왕의 관식을 통해 표현한 형식언어였던 것이다. 홍산문화와 대문구문화의 ‘Y형기’는 신라시대 조익형 관식의 祖形이다. 특히 대문구문화는 신라 김씨 스스로 대문구를 근거로 태양과 새를 숭배하던 동이족의 수령 少昊 황제의 후예라고 말한 사실을 유념한다면, Y형기와 조익형 관식의 상관성은 비상한 관심을 끈다. 특히 신라문화를 형성한 뿌리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것은 태양과 새를 문화의 모형으로 삼은 신라인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만세는 몸의 언어이자 은유 국가의 경축행사 때마다 우리는 환희의 만세를 삼창한다. 그 만세의 상징성이 무엇이며 그 기원은 어떻게 유래된 것인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만세는 솔개가 비상하는 자세를 환희의 감정으로 표현한 인간의 몸짓이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지닌 몸의 언어다. 만세는 동방의 새 숭배족이 발상한 현실적 사물의 원형에 대한 감각을 은유한 것이다.

만세는 상고시대부터 존재한 솟대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더 멀리 홍산문화와 대문구문화의 ‘Y형기’에서 그 祖形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들이 부르는 만세에 내포된 상징의 역사는 이처럼 유구하다. 천년만세, 독립만세, 자유만세를 외치면 우리는 흉중의 에너르기가 끓어오른다. 태양을 향해 창공을 비상하려는 神鳥 솔개처럼 힘차고 거침없으며 영원할 것을 발원하는 정신이 만세의 본질이며 상징의 세계다.<끝>

2014년 9월 1일 월요일

개인의식의 성장과 중국소설: 四大奇書부터 『紅樓夢』까지


개인의식의 성장과 중국소설: 四大奇書부터 『紅樓夢』까지
분야문학 > 중국문학
정가28,000
적립금1,400원(5%적립)
저자최형섭
초판2014.05.30
발행2014.05.30
언어한국
판형신A5
면수312(쪽)
제책반양장
ISBN978-89-521-1414-3(94820 )
재고상태재고 있음[ 306 ]

개인에 대한 인식 변화를 통해 본 16-18세기 중국 소설
중국 사회에서는 개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했으며, 어떠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개인의식은 더 두드러지게 자각되고 발현되었는가? 이 문제는 특히 동아시아 사회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고 규명하는 데 있어 매우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한 개인이 개별적인 존재로서보다 사회 구성원으로의 역할과 의무가 중시되었고, 중국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집단에서의 역할과 의무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16세기 전후에 발생한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토대의 변화는 ‘개인’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에 대한 이해는 근대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이 전환기의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이자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개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16-18세기 중국 소설을 새롭게 조망하고 분석한다.
 
최형섭



개인의식의 성장과 중국소설: 四大奇書부터 『紅樓夢』까지(서울대출판문화원, 2014.05.30) 외 다수
 
머리말


제1장  서론
1. 왜 ‘개인’의 문제를 제기하는가? 
2. 논의 방법과 전략 

제2장  16–18세기 담론과 글쓰기에 나타난 개인의식 
1.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에 대한 강조: 양명학 
2. 글쓰기 담론에서의 자아 표현과 개성에 대한 중시
1) 성령시파에서 발견되는 개인의식
2) 동심설 등 몇 가지 주장에 나타난 개인의식
3. 개인의식의 성장과 글쓰기에 나타난 변화
1) 소품문: 서신, 일기, 유기를 중심으로
2) 자전적인 글
4. 소결

제3장  16세기 이후 소설 독자와 작가의 성격 변화
1. 출판문화의 보급과 소설 독자층의 성격 변화
1) 작품을 통해 본 독자층의 성격
2) 소설 평점을 통해 본 독자층의 성격
2. 16–18세기 소설 작가의 성격 변화
1) 16–17세기 작가의 성격
2) 18세기 작가의 성격: 『홍루몽』을 중심으로
3. 소결


제4장  소설 작품에 나타난 개인의식
1. 명말 ‘사대기서’에서 발견되는 ‘개인’
1) 공적인 시공간을 살아가는 전형화된 인물: 『삼국연의』와 『수호전』
2) 사적인 시공간을 살아가는 욕망의 개인: 『금병매』
3) 내면을 향한 관심과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는 인물 형상: 『서유기』
2. 18세기 『홍루몽』에서 발견되는 개인의 ‘내면세계’ 
1) 등장인물에 분산되어 투영된 가보옥의 내면적 자아 
2) 가보옥의 내면세계 
3. 소결 

제5장  결론 


참고문헌 
찾아보기 
발 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