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1일 일요일

백이론

백이(伯夷)를 둘러싼 모험 (1)
http://moving-vision.tistory.com/294#.VAMuHsV_vO8

문리스 (남산 강학원)


 1. 문제적 인물 백이(伯夷) 

『사기』 총 130편중 <열전(列傳)>은 모두 70편이다. <본기(本紀)> 12편, <세가(世家)> 30편과 비교해 볼 때 최소한 양적인 면에서 『사기』 <열전>은 방대하다. 그런가 하면 <열전>은 제왕들의 역사인 <본기>나 제후급의 역사인 <세가>와 달리 다양한 삶의 계층들을 망라하고 있다. 예컨대 <열전>은 계급적으로 귀족이 아니면서도 충분히 영웅적이었던 인물들로부터 성별이나 직업, 혹은 지역 등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기록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백이(伯夷)는 바로 이러한 <열전>의 첫 번째를 차지한 인물이다. 당연하게도 <백이열전>의 중요성은 이제까지 숱한 학자 및 문인들에 의해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언급되어 왔다. 왜? 기념비적인 대작 『사기』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전> 파트 전체를 좌우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첫 번째 편이었으므로.




그런데 막상 <백이열전>을 직접 읽어 보면 몇 가지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단 <백이열전>은 의외로 내용이 소략하다. 기본적으로 분량이 매우 짧아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개입하기 어렵다. 요컨대 <백이열전> 전체 분량은 대략 1,000자 정도이다. 이 정도면 70편 전체 ‘열전’들 중에서도 결코 많은 분량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 중에서도 순수하게 백이 이야기를 전하는 대목은 대략 210여자에 불과하다. 
말이 나온 김에 백이 스토리 전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달아나 버렸고,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고죽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둘째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西伯昌/주문왕)이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의 아들 무왕은 선왕으 시호를 문왕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 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무왕 곁에 있던 신하들이 무기로 그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태공(강태공)이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이에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우‧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이들은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백이와 숙제, 정말 닮았다...!

백이라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해 아버지의 뜻을 좇아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나라를 떠난다. 문왕의 소문을 듣고 주나라를 찾아갔지만 이미 문왕은 죽은 후였고, 그의 아들 무왕이 막 군사를 일으킨 상황. 백이는 무왕의 거사를 막아서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하지만 백이는 뜻을 굽히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끝내 굶어죽는다. 대체 이 이야기의 매력은 무엇인가? 
   한편 백이는 <열전>에 실린 수많은 인물들중 유일하게 주(周)나라 시대의 인물이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동양적 질서의 원형을 완성시키는 문왕‧무왕‧주공 삼부자가 정치 질서의 이상형으로서의 주(周)나라를 대표하는 데 반해, 백이는 정치 질서 바깥에서 개인적 삶의 어떤 가치를 표상하는 모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백이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조선 후기의 김득신은 사마천의 <백이열전>을 무려 1억만번 이상 반복해서 읽을 정도였다. 백이에 관해 언급한 인물들을 대강만 훑어봐도 공자‧사마천 등으로부터 소철‧한유‧박지원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가장 최근세로는 20세기 루쉰의 소설에까지 이르고 있다. 대체 왜, 백이는 수천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문제적 인물이 되는 것일까?



루쉰이 쓴 고사신편.
고사에 대한 리라이팅(삐딱하게 보기?) 인 셈인데, 
여기에도 백이숙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무지 재밌다~


 2. 원(怨) : 어떤 원망인가 

논란은 공자(孔子)에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백이가 원망(怨)이 있었겠냐는 자공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인(仁)을 구하려다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었겠는가?”(『논어』, <술이>). 
   그런데 사마천의 <백이열전>은 공자의 이 대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물음을 시작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는 작게는 ‘백이’에 관한 사마천의 질문이면서, 크게는 열전 70편을 아우르는 사마천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찬찬히 되짚어봐야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과거의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했고, 또 ‘그들은 인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으로 본다. 그들의 ‘채미가(采薇歌)’를 보면, 공자의 말과는 다른 데가 있다.



백이숙제의 원망하는 마음, 
이를 두고 공자와 사마천은 다르게 생각한다


앞서 전체를 인용한 백이의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에 이어진다. 논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공자는 백이에게서 아무 원망이 없었다고 하지만, 사마천이 보기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사마천은 백이의 시 ‘채미가’를 들고 있다. 백이에게는 어떤 비통한 심경이 있었다는 것. 공자 말씀처럼 그것이 비록 원망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우‧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과연 ‘채미가’는 백이의 비통한 심경이 보인다. 그런데 채미가에 비통한 심경이 보이는 것이 공자가 말한 원망이 없었다는 말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이왕에 공자의 맥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어』 <술이>편에 실린 공자와 자공간의 백이 관련 대화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염유는 공자 문하에서 자로와 더불어 정치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제자였고, 자공은 바로 이 위나라 출신으로 재력이 풍부하고 언어 부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자의 일급 제자였다. 

염유가 말했다. “선생님(공자)께서는 위나라 군주를 위해 일하실까요?”
자공이 말했다. “오키! 내가 물어보지요.” 
자공이 들어가 선생님께 물었다. “백이‧숙제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대답하셨다 “옛날의 현인들이다.”
(다시) 물었다. “원망이 있었을까요?”
대답하셨다. “인을 추구하다가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었겠느냐.”
(자공이) 물러나와 (염유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아마 일하지 않으실 거요.”



공자와 자공,
백이에 대한 문답은 공자의 비전과 사상을 표현하는 문답이었다.

때는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망명중이던 공자와 제자들이 위(衛)나라에 머물던 무렵이다. 당시 위나라는 군주 위령공(衛靈公)이 죽고 그의 손자인 출공 첩(輒)이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본래 위령공에게는 아들인 태자 괴외(蒯畏)가 있었다. 그런데 위령공이 살아 있을 때 괴외는 왕위 계승 문제로 문제를 일으켜 축출되었으며, 이로 인해 여러 해 국외 망명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인 위령공이 죽자 괴외는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며 위나라로 돌아오고자 했다. 하지만 괴외의 아들이자 위령공의 손자인 출공 첩은 이미 할아버지로부터 정식 왕권를 이어받은 공식 왕이었다. 이런 이유로 출공 첩은 아버지인 괴외의 귀국을 거부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을 놓고 다투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공자의 제자 염유는 이런 위나라에서 스승 공자가 과연 위나라를 도와 정치를 하실 것인지 안 하실 것인지 자공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이에 자공은 공자에게 백이 이야기를 들어 에둘러 자신의 궁금증을 물어보았던 것. 왜 백이인가? 백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위를 포기하고 나라를 떠났으며, 급기야 외국에서 비참하게 굶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생님, 그런 백이는 원망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공자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백이에게는 원망이 없었다, 고 말했다. 이유인즉 백이는 다만 자신의 인을 실천하고자 했고, 또 자신의 인을 실현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면 사마천과 공자의 말이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이 말한 것처럼 ‘채미가’에는 분명 백이의 비통한 심경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채미가’의 비통함, 아니 백 번 양보해서 ‘채미가’에서 백이의 원망을 발견한다 해도, 엄밀히 말해 그것은 공자가 말한 백이의 원망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채미가’에서 말한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 이는 은나라 주(紂)왕의 폭정을 무력 쿠데타로 뒤집은 주무왕이기 때문이다. 



불효과 불충 사이의 딜레마,
이를 대하는 공자와 사마천의 태도.
아직은 좀 더 퍼즐조각이 필요하다

『논어』 속 백이와 <백이열전> 속 백이는 처음부터 초점이 달랐다. 하지만 사마천은 공자의 ‘원망(怨) 없음’을 백이에 관한 일반적 논의로 삼아 주무왕과의 대결에서 벌어진 백이의 비극적 운명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것은 과연 사마천의 실수였을까,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일까. 하지만 실수였든 아니든, 사마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백이에 관한 이야기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여러 주제로 재해석되는 난문(難問)의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불효와 군주에 대한 불인(/불충)’을 배경에 둔 성공한 쿠데타의 신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하지만 아직 이 문제를 이해하기 전에 백이를 둘러싼 이해의 파노라마를 조금 더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계속) 

- 백이를 둘러싼 모험(2)

문리스 (남산 강학원)

3. 독(獨) : 한유의 백이송(伯夷頌)

선비가 빼어난 뜻을 지니고 홀로(獨) 뛰어난 행동을 하는 것은 오직 외로움에 맞출 따름이다. 사람들의 비평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라면, 모두 위대하고 뛰어난 선비로서 독실히 올바른 도를 믿으면서 그 자신의 지혜가 밝은 사람인 것이다.

온 집안이 그를 비난하더라도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온 나라와 온 고을이 그를 비난한데도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라면 아마도 온 천하에 한 사람 정도 있을 뿐이다. 더욱이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하더라도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라면 백년이나 천년에 한 사람 정도 나올 따름일 것이다.

백이 같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끝에 이르기까지 또는 만고에 걸쳐서 아무 것도 돌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해와 달도 그보다 밝다고 할 수 없고, 태산도 그보다 높다고 할 수 없으며, 천지도 그보다 넓다고 할 수 없다.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일어날 때에, 미자(微子)는 현명한 사람이라 제기(祭器)들을 안고 나라를 떠났고,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성인이라서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을 이끌고 천하의 제후들과 함께 가서 은나라르 공격하였는데, 그들을 비난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를 못하였다.

저 백이와 숙제만이 홀로(獨) 옳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은나라가 멸망하자 온 천하가 주나라를 떠받들었지만 그들 두 사람만이 홀로(獨) 주나라의 녹속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굶어죽게 되는 일까지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로써 말할 것 같으면 어찌 추구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도를 독실히 믿었고 그들 자신의 지혜가 밝았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지금 세상의 이른바 선비라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 하나가 그를 칭찬하기만 해도 곧 스스로 여유있다고 여기고, 보통 사람 하나가 그를 비판한다 해도 곧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다. 백이와 숙제만이 성인들을 비난하며 그 처럼 자신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성인이라 바로 만세의 표준이 되는 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백이 같은 사람은 빼어난 뜻을 지니고 홀로(獨) 뛰어난 행동을 하여, 하늘과 땅의 끝에 이르기까지 또는 만고에 걸쳐서 아무 것도 돌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라고 한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백이‧숙제가 없었다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집안을 망치는 자식들이 후세에 연이어 나왔을 것이다.(김학주 번역/ 문리스 살짝 손봄)


4. 부득이(不得已) - 박지원의 백이론(伯夷論) 
4-1. 백이론伯夷論(상)

<사기>에, 무왕이 주를 치러 나서자 백이가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고,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백이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논한다.






백이가 무왕에게 충고한 사실은 경서(<서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제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맹자>)인데 사마천이 취하여 역사적인 사실로 만들었으니 이는 믿을 것이 못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책을 믿을진댄 논의할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백이는 이른바 천하의 대로(大老)요 현인이므로 서백이 일찍이 예의를 갖추어 그를 봉양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백이를 무기로 치려고 했던 것이다. 아, 선왕이 예의를 갖추어 봉양했던 신하이자 천하의 이른바 대로요 현인인데도, 측근의 신하들이  곧장 그 앞에서 무기로 치려고 했더니, 무왕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맹자>)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저 때 태공이 아니었던들 백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에 이윤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그를 떠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같이 여겼으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여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한 무왕의 뜻이기도 하다.

무왕은 아마도 천하를 향해. “은나라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했다”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왕은 또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나라가 노성한 사람의 말을 저버렸다” 하였다, 그러나 주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불의를 충고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왕은 또 한 번 더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나라가 죄 없는 이를 죽였다” 하였다. 그러나 주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온전히 죽음을 맞지 못했으니, 주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은 죄 없는 이를 죽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릇 이 세 가지는 무왕이 남을 정벌한 명분이었는데도, 어째서 이렇듯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단 말인가?

무왕은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고, 비간의 무덤에는 봉분을 해주었으며, 상용의 마을을 지나갈 때엔 수레에서 경의를 표했으면서도(<서경>), 유독 백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 살았을 때는 예의를 갖추어 봉양하기를 문왕과 같이 하고, 그가 떠날 적에는 신하로 대하지 않기를 기자와 같이 하고, 의롭게 여겨 표창하기를 상용과 같이 하고, 그가 죽었을 적에는 봉분하기를 비간과 같이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탕과 백이와 무왕은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천하와 후세를 위해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탕임금이 걸을 내쳤는데도 천하 사람들이 흡족해하며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는 자가 없자, 탕임금은 진실로 이미 염려하기를,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를 구실로 삼을까 걱정이다” 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마침내 그 뒤를 따라 그와 같은 일을 행했으니, 천하 사람들이 또 흡족해하며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후세를 위하여 염려됨이 진실로 클 것이다. 그러므로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리를 밝게 드러냈을 따름이니, 천하와 후세를 염려한 점은 똑같았다.


아, 예의를 갖추어 봉양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표창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신하로 대하지 않은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봉분을 만들어 준들 백이를 후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4-2. 백이론(하)

공자가 옛날의 인자(仁者)를 칭송했으니, 기자, 미간, 비간이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인(仁)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맹자가 옛날의 성인(聖人)을 칭송했으니, 이윤, 유하혜, 백이가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성(聖)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 태공은 옛날의 이른바 대로요 현인이었으니, 그 행실은 백이와 똑같고 도는 이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의 인을 칭송하며 세 분의 인자와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며, 맹자도 그의 성을 칭송하며 세 분의 성인과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 내가 은나라를 살펴보건대, 그 나라에는 다섯 분의 인자가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다섯 분의 인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백이와 태공을 합해서 하는 말이다. 저 다섯 분의 인자들은 소행은 역시 각자 달랐지만, 모두 절실하고 간곡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기다려야만 인이 되고, 서로 기다리지 않을 경우 불인(不仁)이 되는 처지였다.






미자는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도 없는데 충고하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은나라의 종사를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나라를 떠났으니, 미자는 비간이 왕에게 충고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비간은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서 충고하지 않느니 차라리 낱낱이 충고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충고하고 죽었으니, 비간은 기자가 도를 전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기자는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를 전하랴’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었으니, 기자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천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 기자는 태공이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태공은 속으로 자신을 은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少師/비간)는 죽었고, 왕자(王子/미자)는 떠났고, 태사(太師/기자)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은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고서 마침내 주를 쳤으니, 태공 역시 서로 기다릴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후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니, 태공은 백이가 의리를 밝혀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백이는 속으로 자신을 은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는 죽었고, 왕자는 떠났고, 태사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그 의리를 밝혀 놓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고서, 마침내 주나라를 받들지 않았다. 무릇 이 다섯 분의 군자가 어찌 좋아서 그렇게 했겠는가? 모두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서로 기다려서 인이 된다 할 것 같으면, 태공이 없었을 경우 기자가 목야(牧野)의 대사(大事)를 치렀어야 하고, 백이가 아니었다면 태공이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어야 한단 말인가?”

대답한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리를 기다릴 따름이니, 신포서와 오자서가 서로에게 고지(告知)한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소사(비간)가 없었다면, 왕자(미자)가 반드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었는데도 떠났다면, 왕자(미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왕자(미자)가 떠나지 않았는데도 소사(비간)가 홀로 죽었다면, 왕자(미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소사(비간)가 이미 죽고 왕자(미자)가 이미 떠났는데도 태사(기자)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태사(기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태공이 천하 백성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백이가 후세 사람을 염려하지 않았다면 백이와 태공은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자가 주나라로 달아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비간이 충고하다가 죽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기자가 도를 전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태공이 주를 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백이가 주나라를 받들지 않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백이 및 태공의 도를 은나라 세 분의 인과 합친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공자의 뜻이기도 하다. 공자가 태공을 칭송하지 않은 것은 아마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이의 경우에는 자주 그 덕을 칭송하고,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감히 백이를 세 분의 인자와 연계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 무왕에게 누가 될까 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에 다섯 분의 인자가 합해야 온전한 인이 된다면, 어찌 수고스럽지 않은가?”

대답한다.

“그런 말이 아니다. 그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로써도 인이 되기로 말하자면, 편협하거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어찌 백이가 청렴해서 성인이 되고 유하혜가 화합을 잘해서 성인이 된 사실을 가릴 수 있겠는가?” (신호열․김명호 번역/ 문리스 살짝 손봄) 


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이성(李姓)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7)

이성(李姓)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7)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이성(李姓)은 농서(隴西)가 근본으로 치음성(徵音姓 치음은 오음(五音)중에 화음(火音)에 해당함)에 속하는데, 《자서(字書)》에 "오얏나무[李]는 열매가 많이 열리는 나무이다." 하였고 자음(字音)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차별이 있다. 즉 중국음은 '레' 우리나라 음은 '리' 속음(俗音)은 '니'이다. 전욱(顓頊)의 증손(曾孫)인 고요(咎繇) 곧 고요(皐陶)이다.《정자통(正字通)》에 "陶의 자음(字音)은 도(挑)이니, 오지그릇을 말한다." 하였다. 또 고도(皐陶)는 북통[鼓匡]으로도 보인다. 즉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 "운인(韠人)이 북통을 만든다." 하였는데 운(韠)자는 본래 도()자이다. 또《정자통(正字通)》에 "陶의 자음(字音)은 요(遙)이다." 하였다. 고요는 순(舜)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다른 데는 고요(咎繇)로 되어 있다. 가 요 임금때 이관(理官 옥송(獄訟)을 맡은 관원)이 되었으므로, 그 자손이 관직(官職)을 따서 이(理)로써 씨(氏)를 삼았고, 은(殷) 나라 말기에 그 후손 이이정(理利貞)이 난리를 피하여 이후(伊侯)의 옛집터로 가서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살다가 이(李)로써 성(姓)을 바꾸었다. 그 뒤 11대손은 곧 노군(老君 노자(老子))인데 노군의 자손 중에 일파(一派)는 조군(趙郡)에 살았고 일파는 농서(隴西)에 살면서 광(廣 한(漢) 나라 때 전장군(前將軍))을 낳았고 광의 후손은 연(淵 당 고조(唐高祖))을 낳았다."
하였는데, 당 현종(唐玄綜) 천보(天寶) 2년(743)에 고요(皐陶)를 덕명황제(德明皇帝)로, 노자(老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로 추존(追尊)하였다.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시집 주(詩集注)에,
"천보 원년에 황제가 친히 신묘(新廟)에 임(臨)하여 현원황제에게 제향(祭享)하고 나서,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문자(文子 노자의 제자)를 통현지인(通玄眞人)으로, 열자(列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으로, 경상자(庚桑子 주대(周代) 사람으로 이름은 초(楚))를 통허진인(洞虛眞人)으로 추존 배향(追尊配享)하게 했다."
하였고, 또,
"처음에 태청궁(太淸宮)이 준공된자, 공인(工人)을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내어 백석(白石)을 채취, 현원황제의 상(像)을 만들어 남향(南向)으로 모시고, 현종과 숙종(肅宗 현종의 아들)의 상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시립(侍立)하게 했다."
하였다.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에,
"씨족(氏族)에 관한 글에서, 씨족은 진(秦)ㆍ한(漢)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다 믿을 수 없다. 즉《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 상(宗室世系上)에 이씨(李氏)에 대해 서술하기를 '주왕(紂王) 시대에 이징(理徵)의 자는 덕령(德靈)으로 익예중오백(翼隸中吳伯)이 되었다.' 본시 이연수(李延壽)의《북사 서전(北史序傳)》에 있는 말. 고 하였으나,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에는 이같은 명자(名字)도 관작(官爵)도 없었다."
하였고, 또 왕세정(王世貞)의《완위여편(宛委餘編)》에 보면,
"이씨는 본시 영성(嬴姓)에서 나왔다. 전욱(顓頊)의 후손 백예(柏翳 백익(柏益))는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자)의《시보(詩譜)》에, 고요(皐陶)의 아들로 되어 있는데, 그는 우(禹) 임금을 도와서 물과 토지[水土]를 잘 다스린 공로로 영성(嬴姓)을 받았고, 그의 19세손 비자(非子)는 나라의 말[馬]을 잘 기른 공로로 주 효왕(周孝王) 갑자년에 진(秦)으로부터 수봉(受封), 부용국(附庸國) 따로 독립되지 못한 나라)이 되어 진영(秦嬴)으로 불렸다.《사기(史記)》진본기(秦本紀)에는 '전욱의 후손 여수(女脩 여자임)가 대업(大業)을 낳았고, 대업이 대비(大費)를 낳았으니, 이가 곧 백익(伯益)이다. 그 뒤 백익의 10세손 비렴(蜚廉)이 악래(惡來)를 낳았는데, 이들 부자(父子)가 뛰어난 재주와 힘으로 주왕(紂王)을 섬겼고 악래의 5세손은 비자(非子)이다.' 했다."
하였다. 진강(陳剛)이 말하기를,
"노자(老子)는 주(周) 나라 말기에 출생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영보현(靈寶縣) 지방이 그의 출생지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광(廣)으로 시골의 가난한 백성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자집에 고용살이하면서 나이 70이 넘도록 아내가 없었고, 그 어머니 역시 시골의 어리석은 여자로 나이 40이 넘도록 남편이 없다가 어느 날 이들은 우연히 산중에서 만나 야합(野合)한바, 천지(天地)의 영기(靈氣)을 받아 그를 밴 지 80개월이나 되어도 출산하지 않았다. 이에 주인이 상서롭지 않게 여기고 집에서 내쫓으므로 하는 수 없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밑을 헤매다가 미발(眉髮)이 하얀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녀는 광(廣)의 성(姓)이 무엇임을 알지 못하므로 오얏나무를 가리켜 그의 성을 삼고, 그의 귀[耳]가 크다 하여 이름을 이(耳)라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하얀 것을 보고 노자라 불렀다.
그는 장성하여 주 천자(周天子)의 장서각(藏書閣)을 맡아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례(古禮)와 고사(古事)를 많이 알았으므로 공자가 그에게 예제(禮制)와 관명(官名)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고, 그 뒤 연로(年老)하여서는 주(周) 나라의 왕실(王室)이 장차 어려워질 것을 보고 청우(靑牛)을 몰아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다가 관(關)을 지키는 윤희(尹喜)를 만나 그 스승이 되어《도덕경(道德經)》5천 자를 짓고는, 마침내 진천(秦川) 주질현(盩厔縣)에서 사망하였는데, 여기에 그의 무덤이 있다."
하였다.
이상은 중국 이씨의 득성(得姓)하게 된 사적인데, 그 설(說)들이 여러 가지여서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군망(郡望)에 대하여는, 조군(趙郡)ㆍ택저(澤底)ㆍ농서(隴西)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철령(鐵嶺)의 이성(李姓) 이성량(李成樑)의 조상은 본시 조선(朝鮮) 이산(理山) 사람인데, 영(英)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갔었다. 과 고려(高麗)의 이성 이정기(李正己)의 본명은 회옥(懷玉)이다.《신당서(新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이회옥이 평로절도사(平虜節度使)로 보인다. 외에도 몇 개의 군망(郡望)이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씨의 관향(貫鄕)이 거의 1백 개나 되어서, 그 근본을 상고하기 어렵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초기에 6부(部)의 성(姓)이 주어졌는데, 성을 받은 조상들, 즉 6부의 우두머리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각기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위에 모여 회의하다가……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옹립하였다.……양산촌 장(楊山村長) 이(李)씨는 하늘에서 표암봉(瓢巖峯)으로, 고허촌 장(高墟村長) 정(鄭)씨는 형산(兄山)으로, 대수촌 장(大樹村長) 손(孫)씨는 이산(伊山)으로, 진지촌 장(珍支村長) 일본(一本)에는, 우진촌(于珍村)으로 되어 있다. 최(崔)씨는 화산(花山)으로 가리촌 장(加利村長) 배(裵)씨는 명활산(明活山)으로, 고야촌 장(高耶村長) 설(薛)씨는 금강산(金剛山)으로 내려왔다."
하였고, 또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 임진에 6부(部)의 명칭을 설정하고 성(姓)을 주었다. 즉 양산촌을 양부(梁部) 일본(一本)에는 급량부(及梁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이성(李姓)을,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성을, 대수촌을 점량부(漸粱部) 일본에는 모량부(牟粱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손성을, 우진촌(于珍村) 일본에는 진지촌(珍支村)으로 되어 있다. 을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성을, 가리촌을 한기부(漢祇部) 일본에는 한기부(漢岐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배성을, 명활촌 일본에는 고야촌(高耶村)으로 되어 있다. 을 습비부(習比部) 일본에는 습화부(習化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설성을 주었다."
하였다.
다시 상고해 보면, 일본(日本)의 이장행(李長行)은 본시 신라 사람으로 차아 위황(嵯峨僞皇 위황은 소위 '천황(天皇)'을 폄(貶)해서 지칭한 말)시대에 왜국(倭國)에 들어가 거위[鵝]와 양[羊]을 기증하였었고,《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이문진(李文眞)은 고려 영양왕(嬰陽王) 때의 박사(博士)로, 고사(古史)를 간추려서《신집(新集》5권을 만들었고,《발해고(渤海攷)》에 보면, 이광록(李匡祿)은 흥료현(興遼縣) 사람으로 영주 자사(郢州刺史)였는데, 고려 현종(顯宗) 21년(1030) 9월 병진에 발해국(渤海國) 대연림(大延琳)이 이광록을 고려로 급파시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거란(契丹)이 뒤를 이어 천우장(千牛將) 나한노(羅漢奴)를 고려로 보내어 보고하기를, 대연림이 거란 군사에게 포위되었다가 투항(投降)했다 하므로, 이광록이 본국의 멸망을 듣고 드디어 고려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
이상 세 이씨는 그 관향(貫鄕)을 알 수 없다. 이들의 자손이 과연 유전되어 온다면 그 관향은 지금 어떻게 되는지, 한 가지 궁금한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허다한 이성(李姓)들은 혹 기자(箕子)를 따라왔거나 위만(衛滿)을 따라왔거나, 사군(四郡) 시대에 흘러들어왔거나, 혹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공벌(攻伐)할 때 따라들어왔다가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닌지. 아니면 혹 농서(隴西)의 유파(流波)나, 6부(部)의 사성(賜姓)이 아닌지. 고가 대족(古家大族)을 제외한 평민으로서 이성(李姓)을 가진 자는 참으로 그 선계(先系)를 상고하기 어렵다. 이성도 이와 같은 실정이니, 다른 성은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고(王考 죽은 조부(祖父)로 이덕무(李德懋)를 말함)의《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소개된 이성의 씨망(氏望)이 60여 가지나 되는데, 다른 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내가 보건대,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족망(族望)이 수십여 관향(貫鄕)이나 되는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다 경주에서 나왔다. 김성(金姓) 또한 한 근원에서 이처럼 분파(分派)되었으니, 본시 하나의 성(姓)으로 많은 관향(貫鄕)이 분파된 성들은 그 원류(源流)를 구별하기 어렵다. 더욱이 사대부(士大夫)나 잠영 세족(簪纓世族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겨레붙이)에게는 보첩(譜牒)이 갖춰져 있지만, 서민들의 성관(姓貫) 분파에 대하여는 신빙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어떻게 그 근원을 소급해서 알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경우는 그만 논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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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利貞)은 실존 했던 인물이며, 은(殷)나라 후기 주왕(紂王) 때 상나라 제후국에서 벼슬을 계승하였던 리(利)씨 가문의 후손 이징(利徵)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주왕이 달기의 간교에 빠져 폭정을 하자, 정치를 바로 잡을 것을 강하게 직간(直諫) 하다가 낙향하였다. 그의 부인 설화부인(契和夫人)은 아들 이정(利貞)을 데리고 진(陳)나라(諸侯國)로 이주하여 대부(大夫)가 되었다고 전한다. 상나라 무렵에는 李 라는 성이 없었는데, 이정과 그의 후손들이 리 (李) 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이정(利貞)의 고대 선조는 전욱 고양씨라고 전한다. 그 계보를 보면 소호, 고요, 백익으로 이어 지고, 백익의 자손들이 영, 허, 육, 리 땅을 봉지로 받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전욱 또한 백익의 후예이다.

고조선 3한은 세계적 대국이였다

고조선 3한은 세계적 대국이였다
단군왕검은 여호와 하느님의 외 증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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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역 칼럼니스트 
 
태호복희, 여호와는 인류의 부모이시다 

현생 인류는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의 한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세계 만국의 모든 종족은 형제국이 된다. 또한 그의 자손들이 종교 도시국가를 건설하여 천계(天界)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여호와 옥황상제(玉皇上帝)를 하느님으로 받들어 숭배했습니다.

태호복희와 여호와 삼신(三神) 옥황상제께서 무극이 태극(진리의 정법)을 창제하시어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었으며 유,불,선 3종교가 파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태호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의 부부는 인류의 부모이며. 인류 문명의 시조이며, 종교의 조종(祖宗)입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1.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은 여호와 상제의 아들이다.
인류의 성산(聖山) 엄택곡부(奄宅曲阜:중국 하남성)는 [인류의 부모(시조)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처음 진단국(조선)을 개국한 땅이다. 그 때 복희황제와 여호와 옥황상제께서 신옥(神屋)에서 거처 하실 때의 춘절(春節)에는 온갖 새들이 찾아와 지저 기고, 온갖 꽃들이 향기가 피어났다. 인류의 부모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곡부(曲阜)에 내려오시어 계실 때는 각 가정마다 만복이 충만하여 영화롭고 부귀를 누리며 살았다.

배달국 제 8세 안부련 환웅(염제신농)이 원년 입술(BC3239)년에 황제 제위에 올랐다. 73년 갑술(BC 3167년)에 소전(少典:복희) 황제의 명을 받아 강수(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하였다. 태호복희황제의 아들 염제신농씨가 곧 제 8세 환웅 안부련 이시다. 염제신농은 복희가 도읍한 陳(진: 曲阜(곡부)에서 140년 동안 재위하고 붕어하셨다. 陳(진)은 지금의 開府(개부:태원)이고 陳州(진주)이다.

2. 황제헌원은 유웅국 왕이다.


▲   황제헌원
[태호복희와 여호와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의 출생은 어느 날 하루 저녁에 하늘 복판에 북두칠성을 에워싼 금빛을 보고 황제헌원을 임신하여 24개월 만에 有熊(유웅: 하남성 신정)의 남쪽 헌원(하남성)에서 낳았기 때문에 軒袁(헌원)이라 이름 지었다.
補史記 三皇本紀(보사기 삼황본기)에서 少典國(소전국) 임금(복희)이 돌아가자 염제신농이 계승하고 그가 돌아가자 동생 公孫(공손:황제헌원)이 제후가 되었다. 헌원은 북쪽의 熊(웅)에서 지금의 開封(개봉) 新鄭(신정:하남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有熊國(유웅국)으로 고쳤다.
유웅국의 임금 헌원은 자기의 부인 附寶(부보)를 데리고 남쪽의 衡山(형산)에 있는 그의 형 염제신농의 능에 항상 참배하고 幡冢(번총)에 있는 그의 아버지 태호복희 능에도 부보와 같이 참배하였다.복희와 여호와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BC 2692-2592년)은 白民國(백민국)에서 출생하였다. 백민국 사람들은 몸빛이 희고 부모가 돌아가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다. 헌원은 姬水(희수) 강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다시 성을 고쳐 姬(희)씨라 하였다.


황제헌원은 훗날 그의 아버지 복희씨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선인(發貴里仙人)의 후손인 자부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 삼황내문경(황제내경)이란 책을 받았다. 황제내경은 소문(素問) 81편과 영추(靈樞)가 162편이다.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한 의학 서적이며 전국(戰國 :기원전 475-221년)에서 진한(秦漢 : 기원전221-기원후 220년)사이 시대에 와서 수정 보완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司馬貞(사마정)이 쓴 사마천 사기의 3황 본기 부록에서 태호복희의 성은 風(풍)씨이고 수인씨의 뒤를 이어 天皇(천황)에 올라 111년을 재임하고 다음 복희의 여동생 여호와가 木德王(목덕왕)으로 제위에 올랐다. “태호복희와 여호와“가 동방의 陳國(진단국)을 맏아들 염제신농이 계승하고 마지막 염제유망이 멸망한 임술년 다음해 계해(BC 2962년)에 黃帝有熊氏(황제유웅씨)는 土德王(토덕왕)으로 제위에 올라 涿鹿(탁록)에 도읍지로 정하고 熊國(웅국)이라 칭하고 100년을 재임하고 나이 111살에 돌아가셨는데 橋山(교산)에 장례했다.

3. 황제헌원은 부인이 4사람 있었다.
황제는 부인이 4사람이고 아들이 25명이 있었다. 황제는 재위 120년 후에 첫째 부인 부보(附寶)를 아내로 맞이하여 맏아들 玄囂(현효)를 낳고 둘째 부인 여절(女節)을 아내로 맞아 昌意(창의:소호)를 낳았다. 소호씨의 어머니 嫘祖(누조: 황제헌원의 부인)는 큰 별이 무지개처럼 華渚(화저)의 물가에 내려와 몸에 감응하여 소호를 낳았다. 소호의 이름은 質(질), 또는 摯(지)이며 성은 己(기), 또는 紀(기)다.

소호는 할아버지 태호복희의 법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소호라 한다. 소호는 金德(금덕)의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색은 백이고 서쪽을 관장하며 금천씨라 하였다. 소호는 窮桑(궁상)에서 帝位(제위)에 올라 뒤에 동쪽의 曲阜(곡부)로 도읍을 옮겼다. 후세의 사가들은 태호복희가 도읍한 陳(진)을 “복희의 터”라 하고 소호가 도읍한 곡부는 ”소호의 터“라 하였다. 창의(소호)는 촉산씨의 딸 女樞(여추)를 아내로 맞아 顓頊(전욱)을 낳았다.

황제헌원의 아들 少昊金天(소호금천 BC 2598-2514)씨는 계묘년에 진단국 왕위에 올라 83년 통치하고 100살에 돌아가자 雲陽(운양)에 장례했다. 창의(소호)의 아들 전욱고양은 정묘년에 왕위에 올라 78년 간 재임하고 91살에 돌아가셨는데 澲陽(업양)에 장례 하였다. 전욱고양(BC 2513-2436)의 할아버지가 황제헌원이며, 禹(우)임금의 조부가 된다.

황제의 맏아들 현효(소호)의 아들이 帝嚳高辛(제곡고신:BC 2435-2365)이고 고신왕이 바로 제곡이다. 그의 이름을 준(峻) 또는 高辛(고신)이라 하고 사람들은 고신왕이라 불렀다. 고신왕 제준은 大荒(대황)의 동쪽 들판에 中容國(중용국), 司幽國(사유국), 白民國(백민국), 黑齒國(흑치국)이 있고, 대황의 남쪽 들판에 三身國(삼신국), 季釐國(계리국)과 대황의 서쪽 들판의 西周國(서주국)은 다 제준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고신왕은 을유년에 왕위에 올라 70년을 통치하고 105살에 돌아가셨다. 頓丘(돈구)에 장례 하였다.

4. 고신왕은 4사람의 부인이 있었다.
고신왕의 첫째 부인은 유태씨의 딸로서 이름은 姜源(강원)이다. 강원은 后稷(후직)을 낳고 후직이 온갖 곡식을 파종하였고 후직의 손자 叔均(숙균)은 처음으로 소를 부려 농사를 지었다. 제준은 三身(삼신)을 낳고 삼신은 義均(의균)을 낳았다. 의균은 쟁기, 꽹이, 가래 등의 온갖 농기구를 처음 만들었다. 후직은 周(주)나라 시조가 되었다. 둘째 부인은 有娥(유아)씨의 딸로서 簡狄(간적)이며 卨(薛:설)을 낳았다. 설은 殷(은:商(상)나라 시조가 되었다.

   (1) ,중국의 시조 요임금은 고신왕의 아들이다.

고신왕의 넷째 부인은 娵訾(추자)씨의 딸로서 아들 常儀(상의) 摯(지)가 왕위에 올라 9년을 재임하고 백성들로부터 쫓겨나고, 셋째 부인은 陳鋒(진봉)씨의 딸이며 이름은 慶都(경도)이다. 이 경도 부인이 낳은 아들이 防勳(勛:방훈)이며 곧 堯(요)임금이 갑진(2358년)에 왕위에 올라 BC 2258년까지 100년 동안 재임했다. 唐堯帝(당요제)는 대 조선국 유호씨(고수)의 아들 우순(虞舜)임금이 병신년(BC 2285)부터 28년 동안 요임금의 나라를 섭정하고 병술년(BC 2255)부터 계유년(BC 2208)까지 50년 동안 재위하고 110살에 죽었다.

   (2). 중국 순임금은 대 조선국 사람이다.
우순(虞舜)임금은 高叟(고수:유호씨(有戶氏))의 아들이다. 고수는 高矢禮(고시례)의 친형이다. 고시례는 진단국(배달국:조선국) 환웅천왕의 신하로서 主穀(주곡)을 담당하는 農士(농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유호씨(고수,瞽者(고자)의 아들 순이 檀朝(단조:진단국: 단군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고 이웃나라 唐堯朝(당요조)에서 벼슬을 하므로 父子(부자)간에 서로 의견이 달라 화목하지 못하자 작은 아들 象(상)을 사랑하고 순을 죽이고자 하였다.

즉 순은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고 唐堯(당요)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자 요임금은 舜(순)을 신임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요임금은 순에게 국사를 맡기고, 두 딸로 유혹하게 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은 일찍이 조선의 환부(신부,추기경)로 있었으나, 요의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부터,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순임금이 왕위에 오른지 61년째 蒼梧(창오)의 들판에 도망치다가 우 임금의 신하에게 시해를 당해 죽었다.

  (3) .고조선 3한의 단군왕검과 중국의 요임금

[부도지와 환단고기, 서경(書經)]의 기록은 서로 상통하고 있으며 그 당시의 상황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측의 사서(史書)를 살펴보면 요임금과 우임금의 역사를 중국 측의 관점에서 기술돼 있습니다.

배달국 제 18세 거불단 환웅씨의 아들 임검(壬儉)씨가 천부도(天符都)를 건설할 땅을 선택하고자 동북 쪽 자방(磁方)에 왔을 때에 도요(陶堯:요임금)가 천산(天山) 남쪽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려서 당도(唐都)를 세우고 5중앙의 제왕이라 자칭하며, 조선의 부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피고 지는 명협(蓂莢)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며 명협으로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지하고 부도(符都)의 역을 버렸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두 번째의 큰 이변이었다.

조선국의 임검씨가 매우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아들 유호씨(有戶氏:고수) 부자(父子)로 하여금 유순 환부(鰥夫:신부)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요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하고, 공순히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순의 아버지 유호씨는 키가 열 자이고,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 보다 나이를 100여 살 더 먹었으며, 임검씨를 도와 도리를 행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유순은 일찍이 조선국의 천부도 법을 집행하는 환부(신부)로서 혼인할 수 없었으나, 요의 두 딸을 밀취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며, 당(唐)을 섭정하였던 것이다.

당시 순의 아버지 유호(有戶)씨가 순의 사도 우(禹)에게 타일러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天符都(천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모욕하고, 위협하며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순의 아버지)를 수차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유순은 왕위에 오른지 61년째 蒼梧(창오)의 들판에 도망치다가 마침내 모산(茅山:강소성 구곡산) 진지(陣地)에서 우 임금의 신하에게 시해 당해 죽었다. 순의 시체는 창오의 들판 구이산(九疑山) 남쪽에 묻었다. 순의 아내 아황과 여영도 원한이 사무쳐 상수(湘水) 강물에 빠져 죽고 작은 아들 商均(상균)은 고국에 돌아와 司徒(사도)의 관직을 맡았다.

  (4).중국측 서경(書經)은 우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순(虞舜)은 남들과 달리 한쪽 눈에 눈동자가 두개이므로 그의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중화(우순)의 부친은 고수(유호)이고, 순의 부친 고수(유호씨)는 맹인이었다. 순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매우 오만 불손하였다. 고수(유호씨)는 후처가 낳은 아들을 편애하여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순은 이를 피해서 도망 다녔고, 순이 잘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면 곧 벌을 받았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와 계모에게 순종하며 잘 모셨고, 동생에게도 잘 대했으며,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순임금은 우를 천거 받고, 우는 전국 산천을 개간하여,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하였으며, 아홉 개의 강 물길을 통하고, 전국을 9주로 확정하였다. 순은 스물 살 때 효자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서른 살에는 요임금에게 등용되고 쉰 살에 국사를 대행하였다. 유순은 나이 쉰여덟 살 때 요임금이 붕어하자, 예순한 살에 요임금의 뒤를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제위를 받은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그를 강남의 구의산에 장사 지냈다. 이곳이 바로 영릉이라 한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 죽고, 순은 창오(蒼梧:광서성 창오현)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는 순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죽이려는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 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하겠다고 말하고, 상(商)나라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순의 아버지)에게 항거하며, 자칭 하왕(夏王)이라 칭하였다.

  [중국측 서경(書經) 요전(堯典)]
고신왕의 막내아들 요 임금은 대홍수가 일어나 山岳(산악)의 4면을 강물이 에워싸고 하늘에 닿을 듯하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신하 중에서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의 근심을 덮어줄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를 맡기겠소,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治水(치수)에 능한 사람은 오직 崇伯(숭백) 鯤(곤)이 있을 뿐입니다.

곤이 9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길은 잡히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요임금에게 이르기를 부인도 없이 홀아비로 민간에 살고 있는데 이름이 虞舜(우순:유순)이라 합니다. 나도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요, 신하들이 말하기를 “장님의 자식으로 아비는 완고하고 어미는 간악하며, 그의 아우 象(상)은 교만함에도 부모에게 효도하여 가정은 화목하게 잘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중략)

또한 四岳(4악) 및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미천한 신분의 한 홀아비가 시골에 살고 있는데 우순(虞舜)이라고 합니다.그 사람의 덕이 있어 제위에 있음직한 사람입니다.고 아뢰었다. 요임금은 즉시 허락하고, 나도 일찍이 들은 일이 있는데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려주오,

4악(四岳)이 대답하기를 우순은 瞽者(고자:유호씨)의 아들로서 그 아비는 어리석어 심덕이 바르지 못하고, 그의 계모는 사납고 완악하였다. 계모 소생은 이름이 상(象)이라 하는데 오만하고 불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순은 자신을 여러 차례 죽이고자 한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인륜에 어긋나지 않고 그의 부모에 효도하고, 그의 아우 세 사람도 우의 지극한 효성에 감화되었으니 성덕을 겸비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를 내치(內治)로 시험해 보고 그에게 내 두 딸을 아내로 삼아 시험해 본 후에 결정 하겠소 하고 즉시 혼구(婚具)를 갖추어 娥皇(아황)과 女英(여영)의 두 딸을 嬀汭(규예:산서성 영제현)로 내려 보내 虞氏(우씨)에게 시집가게 하고 공경히 잘 섬기라고 일러 주었다. (중략)

 [서경(書經) 순전(舜典)]
요임금의 이름은 방훈(放勳)이며, 생각이 깊고 총명하며, 공손, 겸허하고 검소하고, 사양(辭讓)하는 마음을 갖고 상하 격의 없이 남에게 베푸는 성품이었다. 요임금은 처음부터 순에게 여러 가지 벼슬로 시험해 보았다. 처음 사도(司徒)의 관직을 맡기자 父子有親(부자유친), 君臣有義(군신유의),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잔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의 오륜(五倫)을 가르쳐 도리를 어기는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다음 순이 총재(冢宰)의 직위를 맡자 예락(禮樂)과 형정(刑政)의 법도를 바로 잡았다. 또 순에게 사악의 관직을 겸하자 4방에서 찾아오는 제후들을 내빈의 예의로 맞이하니, 모든 제후들이 다 기뻐하고 화순하며 어긋남이 없었다. 또 당시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므로 요임금은 순으로 하여금 큰 산과 깊은 숲 속에 들어가 마침 사나운 맹수와 비바람을 만났으나 순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의 도량이 남보다 크게 뛰어난 인물이었다. 우의 공적이 3년이 되었을때 요는 마땅히 나를 대신해서 임금의 자리에 올라야 하오 라고 말하자 순은 아직 덕이 부족하니 나보다 덕이 높은 사람에게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월 상일에 문조(文祖:요임금)는 순에게 섭정(攝政)의 명을 내린 뒤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났다. 순임금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고 칠정(七政)으로 나라를 다스렸다.(중략) 공공(共工)을 幽州(유주)로 귀양 보내고, 驩兜(환두)를 崇山(숭산)으로 내치고 三苗(3묘)를 삼위(三危)에 내몰아 가두고, 곤(鯤)은 羽山(우산)에 가두어 네 사람을 벌하니 천하가 다 복종하였다. 재위 28년째 요임금이 세상을 뜨자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삼년 동안 슬퍼하였고, 온 세상에 음악소리를 그쳐 고요히 지냈다.

정월 초하룻날 순임금은 요임금의 시조사당에 고하였다. 순임금은 백우(伯禹)를 사공(司空)에 기용하자 우가 稷(직), 契(설), 皐陶(고요)가 사양하자 契(설)이 司徒(사도)를 맡고, 皐陶(고요)는 법관, 기(棄)는 농사를 맡았다. 뒤에 치수를 다스린 백우(伯禹)가 사도를 맡고 伯益(백익)을 신하로 삼았다. 순임금은 30세에 요임금에 등용되고, 3년 동안 시험을 거치고, 28년 섭정하고, 50년을 제위하고 죽었다.

  (5). 단군왕검은 황제헌원의 유웅국을 24년 섭정했다.단군왕검은 BC 2357년부터 BC 2333년까지 황제헌원의 유웅국을 24년 섭정하고 9이의 추대로 BC 2333년 제위에 올랐다. BC 2357년 요임금이 당(唐)나라를 세웠으나 태호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의 맏아들 염제신농의 자손들과 둘째 아들 황제헌원이 다스리는 유웅국을 섭정했기 때문에 곧 조선은 천제가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요임금 역시 조선국(진단국)의 여러 제후(諸侯) 중에 한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우리나라의 조상을 자국의 조상으로 둔갑시키고, 중국의 모든 사서를 변조, 날조하므로서 요나라가 마치 대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국1체제의 고조선 3한시대
[단군조선]이 아니라 [3국 1체제의 고조선 3한]입니다.
현행국사의 고조선은 [1.단군조선]⇒[2,기자조선]⇒[3.위만조선]이 있다.라고 3조선으로 구분하고,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 삼한이 등장하고, 고조선과 삼한이 다른 시대로 기술돼 있습니다. 오직 [3국1체제의 고조선 삼한 1국]이 있었을 뿐입니다.

▲   3국1체제의 고조선 3한강역도  © 박병역 칼럼니스트

▲   대한민국의 국조 단군왕검과 중국의 요임금   © 박병역 칼럼니스트

▲   단군왕검은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이다.  © 박병역 칼럼니스트

   (1). 3한 중의 진한왕 단군왕검은 제사장이다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배달국 제 18대 환웅 거불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熊氏)국 왕 황제헌원의 딸이다. 신묘(BC 2370년)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밑에서 태어났다. 단군의 나이 14세의 갑진(BC 2357년)에 웅씨국 왕 황제헌원이 그의 신성함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삼아 유웅국을 대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왕검은 갑진(BC 2357년) 외조부 황제헌원의 비왕으로 유웅국을 섭정하자 고신왕의 막내아들 요(堯)가 같은 해 갑진 BC 2357년 당도(唐都)를 세우고 자칭 왕이라 칭하였다. 임검이 매우 염려하며 유호씨[高叟(고수),瞽者(고자]의 아들 환부(鰥夫) 순(舜)과 권사 등 100여명을 파견하여 요를 깨우치게 하였다. 왕검은 유웅국을 24년 섭정할 때 18대 거불단 단웅이 돌아가시자 9이의 추대로 BC 2333년에 제위에 올라 9이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조선이라 칭하고 진한은 친히 다스렸다.

[진한]왕 단군왕검은 도읍을 아사달(지금의 송화(松花)강에 정했다. 고리국(高離國:서안평:임황:서요:압록), 시라(尸羅),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동북의 부여(夫餘), 예(濊), 맥(貊)은 [진한]의 관경이다. 단군은 황제헌원의 유웅국 비왕(裨王)으로 24년 재위하고, 진한왕으로 93년을 제위하고 BC 2239년 3월 15일 130세로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셨다.

진한은 1세 단군왕검부터 47세 고열가 임금까지 무려 2096년이 된다. 진한의 제후는 12국이 있었다. 3한 중의 진한왕 단군(壇君)은 여호와 삼신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삼한의 제후를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2). 마한왕 웅백다
단군왕검은 웅백다를 마한왕으로 봉하고, 옛 환웅천왕의 신시(紳市:천산)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월지국(月支國:서장자치구)에 정했다, 일명 백아강(白牙岡)이라 한다. 마한은 제 1대 웅백다부터 35대 맹남까지 1385년이다. 진한이 멸망에 이르자 탁이 다시 월지(月支)로 들어가 중마한을 건국하고 54국을 거느리게 된다.

   (3). 변한왕 치두남
단군왕검은 무진(BC 2333년)에 치두남을 [변한]왕으로 명하고 虞(우)의 정치 감독을 겸하게 하였다. 서남쪽 藍國(남국) 땅을 주었는데 奄黎忽(엄려홀:산동성 곡부)에 도읍을 정했다. 치두남은 단군 재위 33년 경자(BC 2301년)에 요중(遼中:요녕성)에 열 두성을 쌓았는데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통도(桶道),거용, 한성(汗城),개평(蓋平),대방(帶方),백제(百濟),장령(長嶺),갈산(碣山),여성(黎城)이다. 변한은 제1세 치두남부터 74대 기준까지 2138년을 계승하고,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이 재건한 후 마한은 제9대 계왕까지 202년과 도합 234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고조선의 단군왕검은 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했습니다.
단군 재위 54년 신유(BC 2280년) 3월에 단군임금은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서 여호와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다. 우리겨레는 아득한 옛날부터 여호와 삼신에게 자손들의 번영과 아들을 점지해 주기를 기원하며 숭배하는 풍속은 널리 퍼져있었다. 조선국의 백성들은 임금님을 따라 집집마다 여호와 삼신할머니를 경배하는 제단(부자단지)을 만들어 두고 새벽마다 “여호와 삼신할머니를 숭배하며 공경하였습니다.

조선국 삼한의 진한왕 제2세 부루 26년 병인(BC 2215년) 石子丈(석자장)이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 시조(태호복희, 여호와)께서 저술하신 天符經(천부경)을 살펴보면 삼신(여호와 상제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라고 돼 있습니다. 만물의 모습은 각양각색의 여러 가지이나 처음은 하나의 신묘한 靈(영:☉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一始無始(일시무시)라 하고 一은 無(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태초의 無始(무시)로부터 數理(수리)가 있어 먼저 一陽(일양)이 처음 생기고 二陰(2음)이 따라 일어나 1양과 2음의 道(도)를 물질의 도라 합니다.

太極(태극) 위의 도를 理氣(이기)라 하며 이것은 물질을 초월하기 때문에 신묘함을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다 道(도)에서 나와 도에 돌아가고 도의 근원은 여호와 삼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고, 사람의 근원 또한 神祖(신조:여호와 삼신)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과 신조(여호와)의 관계는 밀접하여 하느님이 곧 신조(여호와 삼신)입니다. 바라옵건데 임금님께서 신조(여호와 삼신)를 위한 사당을 짓고 神殿(신전)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하고 신앙하게 하여 만고에 기본의 도를 잊지 않도록 하소서 라고 하였다. 임금은 천하에 조서를 내려 “여호와 삼신 사당”을 짓고 三神殿(삼신전)을 세워서 환인, 환웅, 단군의 세 신위를 봉안하여 백성들이 경배하였다. 라고 입증하고 있습니다.

◆ 원구단은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드리는 제단이다우리나라는 여호와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례(祭天儀禮)가 있다. 단군 재위 51년 무오(BC 2283년) 雲師(운사) 倍達臣(배달신)에게 명하여 강화도 정족산(왕험성:하북성에 三郞城(삼랑성)을 쌓고 마리산에 삼신(三神)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을 쌓았다. 이것을 塹城壇(참성단)이라 한다. 54년 신유(BC 2280년) 3월 단군임금은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다.

  ⊙ 중국의 원구단(천단)은 한국의 유물이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여호와 삼신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이다. 중국의 천단(天壇)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난징[南京]에 대사전(大祀殿)을 짓고 천지(天地)를 함께 제사한 데서 비롯하며, 영락제(永樂帝)의 베이징(北京) 천도 후 베이징 남교로 옮기고 1420년 원구단이 완성되었다. 라고 조작된 기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조선 3한시대의 단군왕검 재위 54년 신유(BC 2280년)부터 제천단(祭天壇)에서 여호와 삼신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의 진한왕(辰韓王)을 단군(壇君)이라 칭했기 때문에 고조선 진한의 마지막 고열가 임금까지 무려 47대의 단군(壇君)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한 중 진한의 전통적 제례문화를 계승한 "신라, 고구려,·백제의 3국은 다 같이 국왕이 친히 제천단(祭天壇)에서 삼신(하느님)과 천지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고려, 조선은 영성제(靈星祭), 일월제, 오성제(五星祭) 등이 있다. 고려사의 성종 2년(983) 정월조에는 성종왕이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올리었다.

또《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동방의 청제(靑帝)]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한 원구단을 설치했다. 조선 세조 2년(1456년)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고, 동방의 청제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었다. 의 기록을 참조하여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즉위를 앞두고 1897년 10월에 원구단이 한반도 속에 580여 평의 철도호텔(현재조선호텔) 대지에 지었다.

      동방의 청제(靑帝)는 바로 “태호복희 황제”이시다
원구단(圓丘壇:천단:제천단)에서 숭배한 하느님은 누구이며, 동방의 청제(靑帝)는 누구인가? 동방의 청제(靑帝)가 바로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아니고 누구인가? 7천만 대한국인은 물론 특히 기독도인들은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기 바랍니다. 기년전은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한해(旱害)와 풍년과 나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경천의례(敬天儀禮)"이다.

◆ 일제에 의해 제천의례가 끊어졌다
본래 고조선 삼한시대부터 황제(천자)가 친히 동방 천제 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제사 올리던 중국의 원구단은 고려 우왕 11년(1385)에 명(중국)에 잠시 빼앗겨 버렸다. 그 후 조선 세조 3년(1457년)에 호천상제에게 제사를 주제한 기록으로 보아 빼앗긴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조선왕이 제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청일전쟁(淸日戰爭:1894~95년]에 승리한 일본제국은 대륙 분활 통치정책으로 인하여 광활하던 중국 속의 조선 영토를 잃어버렸다.

한반도 속의 원구단은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고종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고, 1897년 10월 11일 고종이 친히 원구단에서 호천상제에게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1897년 10월 건립된 원구단(圓丘壇)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 환구의 북쪽에 3층 팔각정인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모시었다.

여호와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 오성(五星), 28수(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에 배치하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제위(祭位)를 모시었다.

1911년 2월에 원구단의 땅과 건물은 총독부 소관이 되었고, 1914년 원구단이 헐리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지금은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위치했던 팔각정 형태의 황궁우만 남아 있다. 원구단은 1911년 2월부터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고부터 일제는 1913년 원구단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580여평의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을 지었다. 이후 원구단에서 제왕이 친히 “여호와 황(호)천상제님”에게 지내는 제사는 끊어지고 말았다.

   ▲   황(호)천상제(昊天上帝)의 위패와 여호와 하느님의 소상  © 박병역 칼럼니스트

황궁우(黃穹宇)는 원형으로 된 단층 궁전으로서 <여호와 호천상제(昊天上帝)의 위패>를 모셔두는 곳이다. 환구단 동남쪽에 유리 기와로 만들어진 난로는 과거에 燔紫爐(번자로)라고 칭했으며 “여호와 삼신 하느님”에게 제사 지낼 때 짐승을 익히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황궁우는 옥황상제에게 제사 지내는 전날에 제주가 신전 안에서 향을 피우고 신주들을 기년전에서 옮겨 온 후 예식을 치르고 끝난 후에 다시 신주를 제자리에 둔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 대한민족의 고유한 종교적 유물이 신라시대 후기에 불교가 흥성하고부터 불교사찰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나 여호와 옥황상제의 사당(祠堂)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아득히 먼 오랜 옛적부터 우리 대한민족은 자식을 점지해 주시고 무병장수와 복을 삼신(三神)에게 기원하며 신앙했습니다. 즉 천주교(기독교) 등에서 하느님으로 숭배하고 있는 “여호와 하느님과 도교의 옥황상제와 태고적부터 대한민족이 숭배한 [삼신, 칠성님]과 불교인 들이 숭배하는 치성광여래와 이슬람교의 알라(하느님)는 각각 다른 신이 아니고 다 똑 같은 [여호와 옥황상제]로 밝혀졌습니다.

덕치의 대명사 순(舜)임금

덕치의 대명사 순(舜)임금
http://blog.daum.net/ryudonghak8888/3001443                      2012.07.18 14:49 등록

 
경기도 보다 1.4배 큰 면적에 인구가 500만 명인 윈청시(運城市)는 산시성의 지급시(우리나라 광역시도급)로『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함께 최고의 주인공이자 현재 중국인들이 무신으로 추앙하는 관우의 고향이다. 윈청시 염호구는 황제와 염제가 싸운 ‘판천지전’의 장소라는 설이 전하는 곳으로, 윈청시는 우의 안읍(安邑),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의 도성이 세워져 있었던 곳이다.
춘추시대에는 진(晋)에 속했고 기원전 669년에 진 헌공(재위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1년)은 강(현재의 운성시 장현)에 도성을 정했다. 전국시대에 위나라의 도성이 안읍(샤현 우왕성 부근)에 정해져 있었다. 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하동군이 설치되었고, 이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 사용되었다. 윈청은 중국 제일의 염호가 있어 소금산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한다. 순의 도성인 포판(蒲坂)이 바로 윈청시다.

순(舜)은,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신화 가운데 오제의 마지막 군주이다. 대부분 선대의 요(堯)와 함께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요순’과 같이 함께 묶어 많이 사용한다. 이 말은 주로 뛰어난 군주를 찬양하거나 먼 옛날의 이상적인 군주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을 합쳐 ‘요순우탕(堯舜禹湯)’이라는 표현으로 유학의 도통의 계보에 들어가는 덕치의 대명사가 요순이다. 현재까지 순의 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순은 전욱 고양의 후손으로 성은 우(虞), 이름은 중화(重華)이고 우순(虞舜) 또는 제순유우(帝舜有虞)로도 부른다. 사마천의『史記』에 의하면 우순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즉 황제-창의-전욱-궁선(窮蟬)-경강(敬康)-구망(句望)-교우(橋牛)-고수(瞽叟)-순으로 황제와 연결된다.
순은 황제의 8세손이나 5대조인 궁선부터 순까지는 모두 지위가 낮은 백성이었다. 순의 아버지는 눈 먼 장님이라는 뜻의 고수이다. 고수는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고약했다. 순이 6~7세 되는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고수가 재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상(象)이었다.
고수는 고집 세고 덕이 없었으며, 계모는 남의 험담을 잘하고, 이복동생 상은 교만 방자하여 모두 순을 죽이려고 했다. 즉 지붕위의 화염속과 우물속에서의 구사일생 일화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순은 순종하며 자식된 도리를 잃지 않았고, 동생에게도 자애를 베풀어서 언제나 공손하고 집안일을 착실하게 했다고 한다. 상당히 민화적인 이야기이다.

순은 스무살 때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른 살에는 요에게 등용되었으며, 요의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을 아내로 맞이했다. 또한 요의 아들 아홉명과 같이 살면서 아홉명의 요의 아들들이 온순하고 말이나 행동이 모두 의젓하게 되도록 했다.
순이 쉰 살이 되던 해에는 요를 대신하여 정사를 대행했다. 요가 돌아가자, 순은 요의 아들 단주에게 천하를 양보하고 남쪽으로 갔으나 모든 백성들이 단주를 따르지 않고 순의 공덕을 찬양하니 순은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말한 뒤에 예순한 살에 요를 이어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렇게 임금의 자리를 덕 있는 분에게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 이라고 한다.

제위에 오른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행하며 시찰하다가 과로로 길에서 갑자기 사망했는데, 그곳은 지금의 후난 성(湖南省) 융저우(永州)시 영원현 남쪽인 창오(蒼梧)이다. 부근의 구의산(九疑山)에 안장했다. 구의산은 『사기』오제본기의 ‘순남순수, 붕우창오지야, 장우강남구의, 시위영릉(舜南巡狩,崩于蒼梧之野,葬于江南九疑,是為零陵)’이라는 기사에 있는, 순이 매장되었다는 영릉(零陵)이다.
순의 아들 균은 상(商) 즉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河南省 商丘市) 동남의 우성(虞城)의 제후로 봉해져 상균(商均) 이라 칭한다. 한편 순의 두 왕비는 순이 죽자 비통해 하면서 상강 변의 푸른 참대를 쓰다듬으며 대성통곡 하면서 상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상강 변의 얼룩진 참대를 상비죽(湘妃竹) 혹은 반죽(班竹) 이라 했다. 후대에 두 여인의 묘가 세워 졌는데 황릉묘라 이름 지었다. 그녀들을 상군(湘君) 혹은 상부인(湘夫人) 이라 칭한다.

순임금대에 우(禹), 고요(皐陶), 설(契), 후직(后稷), 백이(伯夷), 기(夔), 용(龍), 수(垂), 익(益), 팽조(彭祖) 등의 인물들과 12주의 군장들이 모두 직책을 분담 받아서 정무를 시행했다. 즉 백우(伯禹)는 물과 땅을 관장하는 관직인 사공(司空)의 직을 맡아서 정무를 총괄했다. 기(棄)는 농업을 관장하는 후직(后稷)을 맡아 백성들에게 곡식 심는 법을 가르쳤다. 상나라의 조상이 된 설(契)은 백성을 교화하는 사도(司徒)를 맡아 백성을 교화 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법관인 고요(皐陶)는 형법을 관장하는 사(士)를 맡아 형법을 제정하고, 정확하게 사건을 판결했다. 우는 고요에게 선위하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고요가 우보다 먼저 죽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우는 고요의 후대를 육에 봉해 제후로 삼았다. 지금의 안휘성 육안시(安徽省 六安市)가 육(六)이다. 지금도 고요의 묘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매년 많은 분들이 참배하고 있다.
수(垂)는 기술공을 담당하는 공공(共工)의 직책을 맡아 기술공을 훈련시켰다. 익(益)이 주호, 웅비를 보좌로 삼고 산과 연못을 관장하는 우관을 맡았다. 백이(伯夷)가 하늘과 땅,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삼례(三禮)를 관장하는 질종(秩宗)을 맡았다. 기(夔)는 음악을 관장하는 전악(典樂)을 맡아 악곡을 창작하고 연주하면서 순을 도와 천하를 평안케 했다. 그래서 기하나면 족하다는 ‘기일족(夔一足)’ 이라는 말이 나왔다. 용(龍)은 의견을 수집하는 관리인 납언(納言)에 임명되어 여론을 수렴했다.

순은 5년에 한 번씩 순행하고, 제후들은 4년에 한 번씩 조회를 하러 왔다. 즉 5년에 한 번씩 자오묘유월인 2, 5, 8, 11월에 동남서북의 산인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에 순행하고 돌아와서 종묘에 고하는 형식의 순행이었다.
전국을 기주(冀州)·연주(兗州)·청주(靑州)·서주(徐州)·형주(荊州)·양주(揚州)·예주(豫州)·양주(梁州)·옹주(雍州)·병주(幷州)·유주(幽州)·영주(營州) 등의 12주로 나누고 강을 준설하였다. 12주의 지방장관들에게 제왕의 덕행을 실행하게 했다. 순은 상을 제후로 삼고 아들 상균이 어리석어 하늘에 우를 추천했다.
순은 그 후 17년이 지나 세상을 떠나고 우가 순의 아들 상균을 대신하여 천하를 차지했다. 이와같이 황제부터 순, 우까지 모두 같은 성에서 나왔으면서도 자신들의 국호를 달리해 밝은 덕을 빛냈다. 황제는 유웅(有熊)이고, 전욱은 고양(高陽)이며, 제곡은 고신(高辛)이고, 요는 도당(陶唐)이고, 순은 유우(有虞)이고, 우는 하후(夏后)라서 씨는 달리하지만 성은 모두 사씨(姒氏)이다. 설은 상(商)이고 성은 자(子)씨였다. 기는 주(周)이고 성은 희씨(姬氏)였다.

순임금은 우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우의 아들 계때에 이르러 세습왕조 체제로 바뀌어 하왕조가 이어진다. 요순 시절의 태평성대는 중국 역사상 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각종 시, 노래, 민요, 상소문 등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한비자』와『죽서기년』에 의하면 요와 순의 선양은 가짜이며 순이 요를 우가 순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자신들이 제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맹자는 순(舜)을 동이족의 한 갈래로 파악하고, 헌원은 주족의 가계로 파악하였다. 오제의 가계가 실제로 연결되고, 왕위을 세습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출처 : 혜명동양학아카데미  |  글쓴이 : 혜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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